아르튀르 랭보 (1854~1891) 견자의 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16세 때 처음 시를 발표하여 4년 만에 중단했다. 그리고 3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17세 때 폴 베를렌에게 8편의 시를 보냈고, 그중 ‘모음들(votelles)’ 등 이 발표됨으로써 일약 프랑스 시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때 발표된 ‘모음들’을 통해 행보는 불어의 모음에디 색깔을 부여해 ‘소리의 시각적 이미지’를 창안해냈고, 그의 독창적인 시세계의 출발점을 알렸다. 랭보의 ‘모음들’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A 까만색, E 백색, I 빨강색, U 초록색, O 파랑색 : 모음들이여,
내 언젠가 너희들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리.
A, 코를 찌르는 악취 주변에서 윙윙거리는
빛나는 파리떼의 가는 털에 덮인 시커먼 콜셋,
어두운 검은 만 E, 아지랑이와 천막의 눈부신 백색,
자랑스럽구나 빙하의 창, 백발의 왕, 산형화의 떨림,
I, 주홍빛 옷감, 내뿜는 피, 참회의 황홀함
혹은 분노를 머금은 아름다운 입술의 미소,
U, 파도, 청록색 바다의 신성한 전율,
가축들로 뒤덮인 목장의 평온함, 넓고 학구적인 이마에
신기한 힘이 새겨놓은 주름살의 평화,
O, 이상하게도 가슴을 후비는 듯한 숭고한 나팔 소리
온 세상과 천군 천사가 지나간 뒤의 정적
-오오, 오메가, 그녀 눈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광채! -랭보, 「모음들」
이 시를 쓰고 난 뒤, 랭보는 그의 시 「착란2-언어의 연금술」을 통해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발명했다. 검은 A, 하얀 E, 붉은 I, 파란 O, 초록의 U. 나는 각 자음의 형태와 운동을 조절했고, 본능적인 리듬으로 나는, 언젠가는 온갖 감각에 이를 수 있는 시어(詩語)를 발명하리라 자부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다섯 개의 모음에 감각은 물론 시공간의 의미까지 부여해 ‘감각의 착란’과 가 ‘의미의 마술’ 그리고 ‘언어의 연금술’을 꾀했던 것이다. 모음 하나하나에 풍부한 상징성을 부여함ㅁ으로써 시 해석의 열쇠를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셈이다. 이 작품은 가히 혁명적인 작품이었고, 훗날 전위적인 실험시의 본보기가 되었다. 랭보는 당시 편단의 반응에 힘입어 곧이어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취한 배(Le Bateauivre)」(1871)를 발표했다.
이 시는 전통적인 작시법을 따르고 있지만 언어 구사의 기교가 놀랍고, 상징과 은유의 선택이 파격적이어서 당대 최고의 문제작이 되었다. 그는 「지옥에서 보낸 한철(une saisun en enfer)」(1873)과 「일뤼미나시옹(illuminations)」(1886), 불과 두 권의 시집을 남겼지만 작품의 독창성은 상징주의는 물론 초현실주의를 거쳐 오늘날 시에 이르기까지 ‘불멸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랭보의 ‘창작시론’은 이른바 ‘견자(見者)의 편지’로 불리는 두 통의 편지에 집약되어 있다. 1871년 발송한 이 편지들을 통해 랭보는 ‘견자(voyant)-(예언가, 보는 사람, 19 세기 프랑스의 시인 랭보가 열일곱 살 때 쓴 편지 두 통에서 밝힌 자신의 시론.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거대하고 체계적인 비틀기를 통하여 견자”가 된다는 것으로, 절대적인 반항을 통해 미지의 시적 현현에 이르고자 하는 시적 이상의 표명으로 해석되어 왔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그의 나이는 17세 였다. 한번 편지글을 살펴보자
저는 지금 최대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시인이고 싶고, 또 견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전혀 이해하실 수 없을 것이고, 제가 설명해드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통이 극심합니다. ‘나’는 하나의 타자입니다. 나무가 자신을 바이올린으로 여기더라도 어쩔 수 없고 또 자기가 모르는 것에 궤변을 늘어놓는 분별없는 자들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처럼 랭보는 “이(견자가 되려는 노력)는 모든 감각들의 착란을 통하여 미지에 도달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때의 ‘미지’는 보들레르나 말라르메가 추구하던 공통의 목적지로서, 정신과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 정신을 단련시키고 스스로에게 의도적인 형벌을 가해야 한다. 그러니까 ‘불량소년(voyou)’이 됨으로써 정신의 해방감을 도모해야 하고, 불량소년은 기존의 역사나 종교, 윤리 등 인간의 정신과 감각을 속박하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존 질서와 인간 정신의 퇴적층으로부터 벗어나는 내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랭보가 이와 같은 생각을 굳히게 된 이유는 기존의 문학적 전통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그것은 ‘견자의 두 번째 편지’라고 불리는 편지글에 나타나 있다. 랭보는 이 편지글을 통해 지난 2천 년 동안의 시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조화로운 삶을 노래한” 고대 시에서부터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를 “운을 붙인 산문”이라고 통박하면서, 그것은 “우둔한 세대들의 장난이며, 무기력함”이라는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 이 편지글을 통해 “구리쇠가 잠 깨어 나팔이 된다 하여도 구리쇠의 잘못은 아닙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여기서 ‘구리쇠’가 지난 2천 년 동안의 시문학이라면, ‘나팔’은 랭보 자신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그는 “나는 새 사상의 개화를 목도합니다.”라고 천명하면서, 견자를 향한 의지를 다짐한다. ‘견자의 편지’는 이렇게 계속된다.
나는 감히 견자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 자신 속에 모든 독소를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려는 것입니다. -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랭보는 이 편지에서도 “감각의 착란”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착란이란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라고 말한다. 결국 시인은 그러한 착란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어야 하며,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시인은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고, ‘견자로서의 시인’이 첫 발걸음을 내딛는 공간이 된다. 그렇다면 견자란 어떤 존재인가?
일반적으로 ‘견자’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 ‘투시자’ ‘깨달은 자’ ‘초자연적 본질의 세계를 파악한 자’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를 의미하는데, 랭보의 ‘견자’는 이를 뛰어넘는다. 즉 감각을 착란시키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이 예언자이자 시인임을 알아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타자’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시적인 추진력은 정신의 자기 훼손, 고의적인 추화(醜化)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의 구분이 지워져버린 몰아(沒我)의 상태가 온다. 따라서 랭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심, 회의, 질문)에 맞서는 코기토를 제안한다.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가 아닌, ‘나는 생각되어진다’이다.
랭보는 ‘미지의 것에로의 도달’을 시의 최종 목표로 삼았다. ‘미지의 세계’란 “내용 없는 긴장의 극”이자 “공허한 비밀”이란 것이다. 그야말로 ‘불가해의 영역’이자 “불가시적인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들을 수 있는 곳이다. 랭보는 ‘무의식의 꿈’을 자기 정신의 총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가 아닌, ‘나는 생각되었노라’는 명제를 던지게 된 것이다. ‘무의식의 혼돈’은 ‘얼굴에 온통 사마귀를 심어서 가꾸는’ 것처럼 영혼을 기괴하게 만들어 ‘감각의 착란’을 도모한다. 이럴 때의 시는 ‘혼돈의 지표’이다. 랭보는 그의 시 「취한 배」를 통해 ‘감각의 착란’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지표’를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나는, 별들이 우러나와, 젖빛으로 빛나고,
초록 창공을 집어삼키는, 바다의 시에
몸을 담갔다. 거기, 창백하고 넋을 잃는 부유물,
사념에 잠긴 익사자 하나가 이따금 떠내려가고,
거기, 대낮의 광채 아래 착란과
느린 리듬, 갑자기 그 푸름을 물들이며,
알코올보다 더 강하고 우리의 리라보다 더 광활한,
사람의 쓰디쓴 적갈색들이 발효한다!
나는 안다, 번개로 갈라지는 하늘을, 회오리 물기둥과
되밀려오는 파도와 해류를. 나는 안다, 저녁을,
비둘기 떼처럼 솟구치는 새벽을, 그리고
나는 때때로 보았다, 인간이 본다고 믿었던 것을!
나는 보았다, 신비로운 공포로 얼룩진, 낮은 태양이,
까마득한 고대의 연극배우들을 닮은,
보랏빛 기다란 응고물들을 비추는 것을,
파도가 그들 빗창살의 떨림을 멀리 굴리고 있는 것을!
나는 꿈꾸었다, 바다의 눈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입맞춤,
눈부시게 눈 내리는 초록의 밤을,
전대미문의 정기(精氣)의 순환을,
노래하는 인광(燐光)들의 노란 그리고 푸른 깨어남을! -랭보, 「취한 배」
이 시의 화자는 배의 닻줄이 풀리고 선원도 없이 강을 따라 내려와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모티프가 겹쳐 있다. 그 하나는 여행, 다시 말해 세상으로부터의 탈주이고, 다른 하나는 화자의 내적 경험을 열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이 ‘착란’처럼 뒤섞인다. 그러니까 시인의 시적 주체인 자유와 도취, 영광과 환멸 등이 “넋을 잃는 부유물”이 되어 “느린 리듬”으로 흘러가는 상태다. 외부의 풍경과 내면적 자아가 “번개로 갈라지는 하늘”이 되고, “회오리 물기둥”으로 뒤엉켜 마침내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는 “전대미문의 정기” “노래하는 인광”으로 변하고 만다. 시인은 이와 같은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의 것’을 직관할 수 있지만, 거기에 도달할 순 없다. 초월할 길 없는 ‘공허한 초월’인 셈이다. 보들레르를 ‘현대시의 기원’으로 본다면, 랭보는 ‘현대시의 혁명’이었다. 혁명적 이단아답게 “국립도서관을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소리쳤고 랭보만큼 불가능을 향한 정신의 투쟁을 감행한 시인이 또 어디에 있을까? 랭보에게 이를 묻는다면, 랭보는 아마도 “시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