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성사를 받으면 병이 낫나요?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병이 낫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만약 병원에서 의사가 완치 판정을 내릴 때 기준으로 삼는 것처럼 증상의 개선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 삶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여기, 똑같이 암에 걸린 두 사람이 있습니다. 메리라는 이름의 한 여성은 결혼하고 매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중, 어느 날 유방암에 걸렸습니다. 절제술을 받아야만 했고, 육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어려움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암 치료 과정에서 이 자매를 특히 힘들게 했던 것은 남편의 태도였습니다. 사사건건 수술비가 많이 든다며 불평을 하고 불필요한 치료를 받는 것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서서히 남편의 삶에서 자신이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에게 암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자매의 삶은 무너졌습니다. 암의 발병과 치료 이후에 남은 것은 파탄 난 가족 관계와 지리한 이혼 소송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프란세스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청소년기부터 가출하고 집 밖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던 와중 본인과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돕는 시청의 자원봉사 일에 참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예기치 않게 암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프란세스는 오히려 그날부터 자기 삶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자신을 잊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도 병실에 찾아와 회복을 기원하며 벽 가득히 응원의 쪽지를 붙이고 갔고, 이 과정을 통해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오랫동안 거리를 뒀던 가족과도 화해할 수 있었고, 매우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헬스케어영성] 치료와 치유〉, 박준양 신부, 2020년 8월 18일 자 팜뉴스 참조)
위의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육체적인 병의 치료만이 우리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큰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육적인 차원의 고통을 넘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이는 나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해야 하며, 때로는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 나를 병중에 버려둔 것만 같은 번민으로 몸부림쳐야 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병자성사의 근본적인 은총은 중병이나 노쇠 상태의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데에 필요한 위로와 평화와 용기의 은총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20항)
그렇다고 해서, 육적인 치료는 병원이 맡고, 영적인 치료는 병자성사가 맡는다는 식의 구분은 옳지 않습니다. 의술 또한 하느님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영과 육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도움은 병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육체도 치유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20항)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이라는 문구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도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길 하느님께 청했으나, “너는 이미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라는 응답을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병자성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육체의 치료에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병자성사를 통해 위로를 얻고,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일치하여 동참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 서울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