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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장 넓어지는 천하 (3)
또 한 나라가 천하 패권의 싸움에 끼여들기 위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서주(西周)의 수도였던 호경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진(晉)나라의 태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진(晉)나라는 중원의 평원지대와는 달리 높은 산과 깊은 협곡이 많은 황량한 고원의 나라였다. 이 땅은 그다지 풍요롭지 않았다. 땅은 넓었지만 강국은 아니었다. 중원의 중심부인 낙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괵이나 우나라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과의 교류도 매우 불편했다.
낙양에 이르려면 괵이나 우나라 등에게 뇌물을 바쳐 길을 빌리든가, 아니면 북쪽 길을 도는 먼 길을 가야했다. 오랑캐는 아니었으나, 중원국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미흡했다. 엄밀히 말하면 오랑캐로 부터 중원을 기키는 변방국이라고 할 수있었다.
그런데 서주(西周)가 멸망하고 중원의 제후들이 판을 치는 춘추시대가 개막되면서 변방국 진(晉)나라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제환공이 패공으로 군림할 무렵에는 제법 중원을 기웃거릴 정도로 국력이 세졌다. 아직 본격적인 진출은 어림없었지만, 중원의 여러 제후들이 진(晉)나라 소식에 귀 기울일 정도의 영향력을 갖게는 되었던 것이다.
- 중원이 일국으로 관심을 갖다.
천하가 넓어지고 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진(晉)나라는 주왕실의 봉건국 중 하나이다. 주무왕의 아들이자 주성왕의 아우인 숙우(叔虞)에게 봉한 나라가 진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은 숙우를 당숙우(唐叔虞)라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진숙우(晉叔虞)라 하지 않고
당숙우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주성왕이 숙우(叔虞)에게 처음 봉토를 내릴 때는 진(晉) 땅을 내린 것이 아니라 당(唐) 땅을 내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은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 일대라고 추정된다. 이때의 연대가 BC 1050년경.
<사기>에 의하면 당숙우(唐叔虞)가 처음 분봉받을 때의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주무왕이 죽자 주성왕이 뒤를 이었다.
당(唐)나라에서 난이 발생하자 주공은 당나라를 멸망시켰다. 주성왕이 숙우와 함께 놀다가 장난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규(珪)를 만들어 숙우에게 주며 말했다.
"너를 당나라 제후에 봉하노라."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관이 얼마 후 주성왕에게 청했다.
"숙우(叔虞)를 제후에 봉하십시오."
이에 주성왕이 말했다.
"그때 나와 숙우(叔虞)는 놀이를 했을 뿐이다."
사관이 다시 말했다.
"천자는 장난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시면 사관이 곧 그것을 기록하고 예로써 그것을 완성합니다."
그래서 숙우(叔虞)는 당나라 제후에 봉해졌다. 당나라는 황하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 넓이는 1백여 리나 된다. 이리하여 그를 당숙우라 칭하였다.
성은 희(姬)요, 자는 자우(子于)이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를 놓고 오늘날의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통설이다.
당숙우의 아들은 섭(燮)인데, 그의 시호는 진후(晉侯)이다. 앞에 붙어야 할 국호인 당(唐)이 진(晉)으로 변한 것이다. 이로 보아 당숙우(唐叔虞)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은 섭은 수도, 혹은 영토를 진이라고 불리는 땅으로 옮기면서 나라 이름 자체도 진(晉)으로 바꾼 것이 틀림없다. 진의 수도는 익(翼), 지금의 산서성 익성현 일대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진후(晉侯)는 영토를 당에서 진(晉)으로 옮겼을까?
짐작건대, 주성왕이 당숙우에게 당(唐) 지역을 내린 것은 그 일대에 횡행하고 있는 적족(狄族)을 토벌하여 영토를 확장하라는 뜻이었음에 틀림없다. 적족(狄族)이란 북쪽에 사는 비한족계(非漢族系)를 말한다.
그런데 그 무렵은 은왕조에서 주왕조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매우 혼란스러웠고 힘도 한 곳으로 집중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오랑캐의 세력이 강성해졌고, 진후(晉侯)로서는 그들을 제압할 만한 힘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적족(狄族)을 토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당할 판이었다. 어쩌면 백성들 자체가 적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통치하는 데 몹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제후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족(狄族)을 피해 남하하는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唐)지역을 포기하고 훨씬 남쪽인 익(翼)에다가 도성을 마련한 후 국호를 진(晉)이라 바꾼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그 뒤로 진나라는 익(翼)을 중심으로 대물림하였는데, 각 제후들의 재위기간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진나라가 다시 역사 속으로 등장한 것은 당숙우로부터 5대째인 진정후(晉靖侯)부터이다.
이후로는 각 제후의 재위기간이나 활동이 비교적 소상하나, 여기서는 이 이야기를 끌어나갈 중심 인물인 진문공(晉文公)의 직계 선조인 진목후(晉穆侯)시대부터 기술해보도록 하겠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