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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즈 왕국의 나세르 알딘 샤는 오스만 제국의 개혁정책인 탄지마트 활동을 지켜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진다.
결국 영국계 유대인 로이터 남작(훗날 로이터 통신을 설립함)에게 철도와 광산 등 여러 산업에 대한 개발권을 넘겨주고 4만파운드의 거액을 빌리기로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러시아의 항의와 페르시아 국민들의 저항에 부닥치자 이 협의는 취소한다.
영국과 러시아에서도 차관을 들여오나 결국 경제파탄으로 끝난다. 농촌 인구의 약 10%가 굶어죽는 대참사를 겪을 정도로 몰락하자 연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
정치 생명에 위협을 느낀 샤는 1906년 헌법과 의회 설립을 허용하여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인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영국과 러시아의 심각한 간섭이 여전하고 페르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의식이 높아져 간다.
'레자 샤의 근대화 시도'
영국은 트라팔가 해전(1805년, 스페인의 트라팔가 항구에 주둔하던 프랑스 해군에게 승리한 전투)에서 승리 후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오랫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한다.
그러나 독일 2제국의 빌헬름 2세가 빠른 속도로 해군력을 증강시키자, 영국은 1906년 전함의 신기원을 여는 HMS 드레드노트호를 완성한다. 속도와 화력 그리고 방어력에서 기존의 전함을 압도하는 거대한 전함이다. 덩치가 커지는 새 전함들의 동력을 기존의 석탄에서 열효율이 높고 부피가 작은 석유로 바꾸기 시작한다.
이때문에 1908년 우여곡절 끝에 대규모 유전 시추가 가능해진 페르시아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페르시아 정부는 중립을 선언하나 러시아, 독일,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모두 페르시아로 진격한다. 영국도 유전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다.
러시아는 혁명의 여파로 철수하고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만제국이 물러가자 영국이 독점적으로 지배한다.
이렇게 외세의 등쌀에 몸살을 앓는 페르시아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근과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치안이 마비된 길거리는 무장 약탈이 빈번해지면서 경제 파탄에 빠진다.
영국은 군사와 재정의 권한을 넘겨받고 경제와 국방을 책임지겠다는 보호령을 제안한다. 이 소식을 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많은 페르시아 국민들이 반대하며 나선다. 강제적인 보호령까지 고려하던 영국 정부는 그럴 경우 소련군이 핑게삼아 들어올 수 있다는 현지 주둔 영국군 사령관의 의견에 따라 오히려 군대를 철수한다.
영국군의 추천으로 페르시아 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레자 칸은 페르시아의 군주 아흐마드 샤의 허락 하에 반란군을 진압한다. 국가 질서를 정비한 레자 칸은 1923년 총리에 임명된다.
이웃나라 투르키에의 무스타파 케말의 근대화 개혁을 모델 삼아 페르시아를 세속적인 공화국으로 변모시키던 중 왕정 체제를 선호하는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레자 칸은 1925년 샤에 즉위한다.
카자르 왕조가 끝나고 팔라비 왕조의 시작이다.
'레자 샤의 근대화 개혁'
영국의 기대와 달리 페르시아의 민족주의를 앞세운 레자 샤는 강력한 통치력으로 국가 근대화 사업을 추진한다. 외세 간섭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고 이슬람의 종교적 지배를 축소시킨다.
산업을 일으키고 교통망을 정비하고 교육기관을 확대한다. 외세와 맞서기 위해 국방력 강화에도 많은 예산을 투입한다. 징병제를 추진하고 현대식 군장비를 새로이 도입한다. 한때 이란의 국방비가 정부 지출의 약 40%를 차지할 정도다.
투르키에의 무스타파 케말과 우호를 나누지만 두 국가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독립전쟁을 통하여 자력으로 독립한 투르키에는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를 가지나, 시작부터 영국의 도움을 받는 이란의 팔레비왕조는 그러하지 못하다.
비록 영국군은 철수하였으나 영국 회사와 맺은 석유 개발권은 이란에게 여전히 불리한 조건이다.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가 독점적으로 유전 개발하고 이란 정부는 수익의 16%-20%를 가져간다. 이란의 경제가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부강한 자주국가를 기대하던 이란 국민들은 레자 샤의 뚜렷한 성과 없는 개혁 정책들을 서서히 외면한다. 이슬람 종교지도자들도 세속주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특히 시아파 지도자들은 칼리파의 권한을 뺏어간 세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왕권에 적대적이다. 장사가 안되는 상인들도 반대하고 독재정치를 싫어하는 지식인들도 반대하고 오로지 군부만이 샤를 지지하는 상황이 된다. 반정부 시위가 끊일 날이 없다.
'영국과 소련, 레자 샤를 몰아내다'
영국의 내정 간섭에 항상 불만을 가졌던 레자 샤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나치독일 정부와 손을 잡는다. 곧이어 2차세계대전이 벌어진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영국은 다급해진다. 만약 이란에 독일군이 본격적으로 주둔하게 되면 소련군을 지원해야 하는 영국의 보급 루트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자 영국군과 소련군은 이란을 공격한다. 이란 국민과 이슬람 성직자들은 영국군에게는 거의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레자 샤의 폐위를 환영한다.
1941년 아들인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Mohammad Reza Pahlavi, 1919-1980)가 승계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외국군대들이 철수해도 여전히 문제투성이이다. 이란 석유의 수익 대부분을 가져가는 외세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지고 이란 민족주의는 드세진다.
'모사데그의 좌절'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모사데그 총리는 1951년 법안을 통과시켜 석유회사를 국유화시킨다. 영국으로부터 석유회사를 뺏어낸 모사데그 총리의 대중적 인기는 점점 올라간다.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통째로 빼앗긴 영국이 가그냥 있을 리가 없다. 국제 원유 시장에서 이란 석유의 거래를 금지시킨다. 이란은 석유를 팔 수가 없다. 게다가 영국인 석유 기술자들이 철수하자 정유공장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 국가 경제는 더 어려워진다.
눈엣가시인 모사데그 총리를 못마땅해하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란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그 총리를 실각시킨다.
이란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반감은 최고조로 올라간다. 이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유발시키는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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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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