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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탄생 100주년 기념 원고(경북아동문학회 2025년)
1.경북아동문학회 창립자, 이오덕 생애와 업적
이 주 영
이오덕은 1925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 57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월성 이씨 규하와 어머니 정작선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셋이 있으니 4남매 중 막내다. 집 뒤로는 사과밭이 있고, 사과밭을 지나면 뒷산이 이어진다. 앞으로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냇가에는 백양나무(포플러)가 줄을 맞춰 하늘 높이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 이규하는 아들이 태어난 해인 1925년 끝 자인 ‘5’와 태어난 마을 이름의 첫 자인 ‘덕’자를 따서 ‘오덕(五德)’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규하는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중농이었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지식인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날마다 책을 읽었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오덕은 어릴 때 아버지가 방안에서 책을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고 회상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시고, 그 뒤에 새어머니가 와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바로 위 누나들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이오덕은 아주 어릴 때부터 화목교회 주일학교에 다녔고, 그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와 ‘동화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얼마나 즐겁게 들었는지 평생 기억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일본말로 의식노래나 군가만 불러야 했는데, 화목교회 주일학교에서는 ‘고향의 봄’, ‘반달’, ‘집 보는 아이의 노래’를 비롯해 농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활을 그대로 표현한 노래를 많이 배웠다고 한다. 당시 이오덕이 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웠다는 노래는 방정환이 1920년대 어린이문화운동을 펼치면서 보급했던 노래들이다. 따라서 이런 노래와 동화 구연은 교회 가운데서도 특별히 독립운동 의식이 있는 교회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오덕은 1933년 4월 1일 현서면 소재지에 있는 공립 화목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3월 8일 졸업한다. 아홉 살에 입학하여 열네 살 되던 해에 졸업한 것이다. 이오덕은 초등학교 시절 공부는 잘했으나 마음이 여리고 소심해서 동무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노래 부르기와 그림 그리기를 잘했고, 들과 산으로 돌아다니며 놀았고, 집 농사를 돕는다고 보리를 베다가 낫으로 손가락을 심하게 다치기도 했고, 집 앞을 흐르는 개울에 통발을 만들어놓아 고기잡이를 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일은 냇가 포플러 숲에서 놀면서 염소 두 마리를 키운 일이다. 그가 쓴 글 가운데 포플러와 염소에 대한 글이 유난히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열네 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오덕은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1941년 4월 8일 공립 영덕농업실수학교(實授學校)에 입학해서 공부한다. 농업 실수학교는 실습 수업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교실에 앉아 책으로 공부하는 시간보다는 논밭에서 일하는 공부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는 1943년 3월 25일 졸업하고, 군청에 취직한다. 학교 성적이 우수해서 바로 특채되었다고 한다. 농사를 배우러 갔다가 성적 우수자라고 바로 군청에 특채가 된 것이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오덕은 군청 직원이 되어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농민 지도를 한다고 했지만, 그 주된 업무는 공출 독려였다고 한다. 그 일이 너무나 싫어서 출장을 나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갯마루에 앉아 있다가 갈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근처 산기슭에 앉아서 교실에서 풍금에 맞춰 부르는 아이들 노래를 들으면서 너무 행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군청을 그만두고 화목으로 돌아와 집에서 통신 교재를 신청해서 시험공부를 시작하였다. 1944년 2월 11일 교원 시험에 합격하였고, 1944년 4월 7일 같은 청송군 부동면 부동초등학교로 첫 부임을 한다.
이오덕은 막상 교단에 서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고 회상한다. 제2차 대전 막바지라 우리말도 못 쓰게 하고, 군대식 교육이 심했다. 화목교회 주일학교나 화목초등학교 다니던 때와 분위기도 많이 달랐던 것이다. 일제의 살벌한 군대식 교육이 체질에 맞지 않아 거부감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다른 참된 교육을 조금이라도 실천할 만한 교육관과 교육 이론을 갖추지 못했고, 거기에다 용기까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그 당시 약 일 년 오 개월 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우리 겨레의 아이들을 일본제국의 황국신민 아이들로 훈련시키는 일에 협력했던 초임 교사 시절을 그는 평생 죄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해방된 나라에서는 그런 죄를 다시 짓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사회와 교육 현실이 교사로서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이오덕은 1945년 12월 30일 부동초등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온다.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화목초등학교에서 1947년 7월 30일까지 교무로 근무한다. 이 무렵까지는 화목교회를 다녔고,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고 한다. 바로 이 무렵에 권정생도 일본에서 돌아와 어머니를 따라 화목장터 외갓집에 와서 산다. 화목교회 근처인데, 사탕을 준다고 해서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권정생은 당시 화목장터에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동화에 담기도 했다. 권정생 동화 「강아지똥」이 1969년 <기독교 교육>이라는 잡지에 당선되어 실렸고, 이를 읽은 이오덕이 편지를 보내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이오덕과 권정생은 평생 문학 동무가 되었고, 한국 아동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이오덕은 집안 사정으로 1947년 7월 31일 이웃 수락초등학교 옮겼는데, 스스로 이를 ‘유배’라고 했다. 수락초는 보현산 골짜기 외진 곳에 있는 학교였는데, 책만 한 짐 지고 가서 자취를 하였다. 수락초등학교에서 스스로 유배 같은 생활을 하다가 1948년 여름 방학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6월 30일 갑자기 학교를 떠나 부산으로 갔다.
이오덕은 1948년 7월 15일자로 부산 남부민초등학교에 복직해서 근무하다가 1951년 8월 31일 부산 동신초등학교로 옮겼다. 답사를 해보니 남부민초는 국제시장 뒤쪽 언덕 위 피난민 마을이었고, 동신학교는 자갈치 시장 근처였다. 《일하는 아이들》에 실린 <우리 어머니>(동신초 4 김순남) 시가 동신초 교사 때 지도한 글이다. 남부민 초에서 퇴근하고 오는 길에 국제시장을 지나게 되는데, 이때 《신동시의 이론과 지도공작실천》(1934년, 일본 글쓰기 교사들의 실천기록)을 사서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남부민초 어린이들 시는 없는 것으로 보아 남부민초에서부터 글쓰기 교육에 관심을 가졌지만 동신초에서부터 열심히 지도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오덕은 부산 시절에 부산으로 피난 와 있던 아동문학가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또 동시ㆍ동요 창작과 문학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당시 부산사범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윤이상한테 일 년 정도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이오덕은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동요를 10여 곡 작곡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지막 죽음 직전까지 피아노를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입원했던 녹색병원 병실에까지 전자피아노를 갖다 놓고 손수 칠 정도로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이오덕은 1952년 3월 31일 부산 동신초등학교에 사표를 내고, 군북중학교 국어 교사로 부임한다. 군북중학교에서 국어와 작문을 가르쳤고, 작문 시간마다 써낸 학생들 작품을 책상에 수북이 쌓아놓고 읽으면서 평가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군북중학교 교장이었던 이태길은 그의 교육에 대한 열성이 대단했고, 국어 지도력이 아주 우수했다고 증언했다. 약한 몸에 무리할 정도라고 했다.
이오덕은 이렇게 일 년 농사지은 글을 모아서 《학생문집》을 만들었다. 당시 제자 변숙경 씨는 이오덕이 학비를 보태주셔서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하고, 자기가 알기로도 학급 학생들 중에서 여러 명이 학비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오덕은 작문 교육을 농사짓기와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학생문집》 후기에 보면, 학생들이 쓴 작품을 두고 일 년 동안 수확이 참으로 가난하다고 한탄했다. 황무지라고 했다. 황무지에 첫 괭이를 찍어 넣은 셈이라면서 땅이 굳어 괭이가 들어가지 않고 가시덤불이 엉켜있고,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장애물이 꽉 차 있다고 했다. 당시 낸 학급문집을 읽어보니 그 마음이 짐작이 갔다.
그는 이 무렵 작품 창작 활동도 열심히 했다. 1954년 결성한 한국아동문학회에 참여했고, 1955년 3월호에 이원수가 편집하던 《소년 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보내서 등단했고, 이후 동시를 꾸준히 발표하였다. 이오덕이 160년대에 낸 동시집은 모두 이원수 지도와 도움을 받아서 출판하였다.
이오덕은 1957년 5월 1일 군북중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1957년 5월 30일 돌연 군북중학교 교감을 사표 내고 떠난다. 교감을 억지로 맡게 되면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칠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큰 까닭이다. 교감이 하는 일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수업료를 비롯한 돈을 걷는 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군북중학교 교감 사표를 내고 경상북도 상주로 돌아온 이오덕은 1957년 6월 20일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초등학교로 복직한다. 공검초에서 글쓰기 교육울 열심히 했고, 문집도 발간했다. 이런 활동을 인정받아서 1959년 상주군 교육청 상주교육연구소를 처음 만들 때 연구사로 갔는데, 일 년쯤 하고 지병인 신장병이 심해져서 질병 휴가를 낸다. 상주교육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연구했던 것을 보완해서 수년 뒤에 낸 첫 책이 《글짓기 교육-이론과 실제》다.
투병 생활로 건강이 좋아져서 1961년 10월 10일 상주 청리초등학교로 복직하고, 한 반 아이들을 2학년부터 4학년까지 연속해서 담임하게 된다. 글쓰기 교육 연구를 위해서 특별 요청을 해서 배려를 받았던 것이다. 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연구ㆍ실천한 경험이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이론을 세우는 바탕이 된다.
1964년 상주군 이안서부초등학교 교감으로 발령받는다. 그러나 이 년 만에 다시 교감 사직서를 낸다. 교감을 포기한 것은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당시 학교 건물을 증축하던 학교장이 건축업자한테서 뇌물을 받아오라는 따위의 부조리한 지시를 여러 차례 강요하면서 갈등이 커졌기 때문이다. 교육청에 강등 신청을 했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교장이 마음대로 학교 감나무를 옮겨 심거나 베고, 학교 돈을 부정 횡령하는 등을 이야기하면서 계속 요청하자 겨우 강등 신청을 허락했다.
교육청은 교감에서 교사로 강등 신청을 해주는 대신 그 당시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도시 학교로 발령을 내주는 예우를 굳이 했다. 교육청에서는 자칫 일이 커질 수 있는 사안이라서 교육 관료들 사고방식대로 이오덕을 달래려고 이런 예우를 했던 것 같다. 이오덕은 이것까지는 거절할 수 없어 1967년 3월 1일 경주시 경주초등학교 교사로 간다. 그러나 이오덕은 도시 학교의 반교육 행태가 난무하는 도시 학교 풍토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교육청에 간곡히 부탁해서 일 년만인 1968년 3월 1일 안동군 임동면 대곡분교로 옮긴다. 아주 산골 학교를 찾아서 옮긴 것이다. 경주에서 근무할 때 촌지를 주고받는 게 가장 싫었다고 했다.
1968년 3월 1일자로 경북 안동군 동부초 대곡분교장으로 부부교사로 간다. 1967년 12월 15일 이원수가 경주에 들르는데, 이때 김포군 고촌초등학교 교사 이인자 선생이 따라왔다. 이인자 선생은 교육잡지에 실렸던 이오덕 글을 계기로 알게 되었는데, 이오덕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 나섰다고 한다. 그래서 2월에 결혼을 하고 같이 산골 분교를 신청해서 간 것이다. 대곡분교는 1, 2, 3학년까지 가르치고 4학년이 되면 본교로 다녔다. 이오덕이 2, 3학년을 복식학급으로 편성해서 가르쳤다고 한다. 이 시기에 아이들 삶을 가꾸는 교육을 가장 활발하게 하면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쓰는 바탕을 마련한다.
이 시기에 신춘문예에 당선한다.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꿩’,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필 ‘포플러’가 당선된 것이다. 그리고 1971년 2월 이원수가 중심이 되어 새로 결성한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 참여한다. 그 뒤 한국아동문학회와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사이에 일어난 어린이 문학 논쟁에서 한국아동문학가협회를 대표하다시피 나서게 된다. 중심 활동이 동시와 동화 창작에서 어린이 문학 비평으로 바뀌게 되는 시기였다.
1971년 3월 1일 대구시 비산초등학교로 왔으나 황폐한 도시 학교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다시 산골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다. 교육청에서 교감으로 승진하면 옮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럼 교감 발령을 내달라고 교육청에 요청한다. 교감 자격증이 있어서 본인만 희망하면 발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 뒤인 4월 1일 문경군 산북면 김룡사 밑에 있는 김룡초등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는다. 이오덕은 김룡초등학교 교가를 지었다.
1973년 3월 1일자로 경북 봉화군 삼동초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간다. 중안선 기차 녹둔역에서 내려서도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 하는 높은 고갯마루에 있었다 아내는 두 아이를 데리고 대구시로 가고, 이오덕 혼자 자취를 시작하였다.
이오덕은 이 시기에 어린이 시 쓰기 교육 이론을 정립한 《아동시론》(세종문화사, 1973)을 출판하고, 세 번째 동시집 《까만 새》(세종문화사, 1974)를 출판한다. 그리고 1975년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서 편집한 《동시, 그 시론과 문제성》에 ‘모작 동시론’을 실었고, 이현주 이름으로 ‘표절 동시론’을 실었다.
삼동초교장으로 있을 때 중앙정보부에 잡혀 가서 일주일 정도 고초를 겪었다. 신경림이 놀러왔다가 월북작가였던 이용악과 오장환 시집을 빌려갔는데, 서울에 갖고 와서 몇 부 복사를 해서 염무웅 백낙청을 비롯해 몇 사람에게 돌렸다 한다. 그런데 그 복사본을 중정에서 발견하고 추적을 해서 심경림이 잡혔고, 그 원본을 갖고 있던 이오덕도 잡혀간 것이다. 이오덕이 고갯길을 올라오는 형사들을 보고 급히 위험한 책 몇 권은 콩밭에 파묻었지만 나머지 책은 모두 압수당했다고 한다. 그때 아동문학에 관한 중요한 책들을 빼앗긴 것이 무척 아쉽다고 말씀하셨다.
이오덕은 대구 《영남일보》에 ‘모작 동시론’을 연재하고, 계간지 《아동문학평론》과 《창작과비평》 같은 잡지에 어린이 문학에 대한 평론을 계속 발표한다. 그리고 그 평론을 모아 《시정신과 유희정신》(창작과비평사, 1977)을 펴냈다. 이 시기 이오덕은
나는 본디 동시와 동화를 쓰고 있었는데, 시와 동화보다 더 급한 것이 평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먼저 우리 동시의 정체(停滯)를 가져온 유희성을 지적하고, 동화의 전근대적 귀족성과 작가들이 탈피 못한 식민지 근성을 비판하였다. 많은 문인들이 나를 적대시했고 더러는 내가 쓴 글에 반론을 펴기도 했지만, 나는 조금도 굽힘없이 모든 거짓스러움과 불순한 것을 밝히려고 애썼다. 나는 많은 문단인들로부터 비난받았다. 나를 격려해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주로 문단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을 뿐이었지만 나를 비난하는 문인들은 언론을 통해 발표 수단을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유리한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죽는 날까지 이 길을 걸어 갈 것이다.
라고, 문학 창작에서 문학 비평으로 중심 활동을 옮긴 까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가겠다고 다짐하였고, 그 다짐대로 평생을 걸어갔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어린이문학 판을 바꿔주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시기에 또 다른 중요한 책이 네 권 나온다. 교육 문제를 비판한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와 《삶과 믿음의 교실》, 그리고 20여 년 지도했던 농촌 아이들 글모음인 《일하는 아이들》과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다. 이 네 권은 우리 문학계와 교육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오덕은 활발한 저술 활동과 함께 자신이 연구하고 실천해 온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교육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교사 단체를 이끌었다. 경상북도글짓기교육연구회 2대 회장을 맡아 《글짓기 회보》를 펴내다가 제15호부터는 회보 제목을 《글쓰기》로 바꿔서 낸다. 이것은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다. 그동안 사회와 교육 현장에서 굳어진 ‘글짓기’를 ‘글쓰기’로 바꾼다는 것은 그동안의 글짓기 교육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겠다는 선언이고 다짐이기 때문이다.
1983년 8월 20일 경기도 과천시 영보수녀원에서 이오덕이 주장하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 이론과 사상을 따르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초ㆍ중ㆍ고 교사와 대학 교수 한 명을 포함한 47명이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대표이사 이오덕)를 결성한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는 1980년대 참교육 운동의 산실이 되었고, 2010년대 혁신교육 방법론의 모범이 되었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22개 지역 모임으로 활동하면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중 연수를 이어오고 있다. 회보도 43년 동안 계속 내고 있으며, 누리집 회보방에 모두 올려서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이오덕은 1973년 봉화군 삼동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은 이후 안동군 길산ㆍ대성, 성주군 대서초등학교 교장을 하다가 1986년 2월 28일자로 퇴임을 한다. 명예퇴임을 신청했지만 문교부에서 반려당하고 일반 퇴임을 하게 된다. 경북도교육청에서는 명예퇴직으로 문교부에 올렸는데, 문교부에서 안 된다고 해서 의원면직을 한 것이다.
이렇게 정년퇴임을 겨우 4년 남겨놓고 42년 동안 몸담았던 교육 현장을 떠나게 된 까닭은 제5공화국 독재 정권의 경찰과 교육청의 감시 때문이었다. 학교를 감시하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괴롭히니 그는 물론 미운털 박힌 교장 때문에 그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까지 괴롭힘을 피할 수 없었다. 또 서울이나 다른 도시로 사람을 만나러 가거나 강의하거나 책을 사러 가는 일까지 출입을 통제했다. 심지어 가족과 친지들이 마련한 본인 회갑 잔치까지 못 가게 막아서 끝내 참석하지 못했다. 문교부는 학교장으로 퇴임하면 누구한테나 관례로 주는 훈장까지 못 주게 하면서 그를 쫓아낸 것이다.
1984년 1월 10일 매일신문사 회의실에서 경북아동문학회(회장 이오덕)를 창립한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든 것이 아니고 평소 친분이 있던 대구 경북지역 아동문학인들 중에서 뜻이 맞는 분들과 오랜 논의 끝에 만든 것이다. 특히 경북글짓기교육연구회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 중에서 대구 경북지역에 사시던 분들이 적극 참여했다. 경북아동문학회는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하게 활동하면서 해마다 연수회와 합동작품집을 내고 있고, 회원들의 문학 활동이 어느 지역 아동문학회보다도 활발하다.
이오덕은 퇴임하고 대구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과천으로 이사를 간다. 서울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인데, 서울은 너무 복잡하니까 조금 조용한 과천 관악산 아래다 자리를 잡았다. 과천으로 오면서 교육민주화 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다. 교육민주화와 참교육 실현을 위해, 참된 민주ㆍ민족교육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교육이념과 제도ㆍ정책ㆍ방법을 연구하며 실천할 것을 목적으로 1986년 5월 15일 결성한 민주교육실천협의회에 참여해 성내운ㆍ문병란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어서 1987년 8월 22일 결성한 전국초등민주교육협의회(전초협) 자문위원직을 맡았다. 퇴임을 했기 때문에 대표를 맡을 수 없었을 뿐 전초협 결성을 준비하는 모임부터 이끈 실제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전초협은 곧이어 같은 해 9월 27일 결성한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 초등특별위원회로 통합되고,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는 ‘전교조’라 생략해서 일컬음) 결성으로 발전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오덕이 주장해 온 ‘참교육’을 전교조 이념인 ‘민족ㆍ민주ㆍ인간화교육’을 집약하는 말로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이다.
전교조는 대국민 홍보물을 통해 ‘참교육이란 삶을 위한 교육이고, 민족ㆍ민주ㆍ인간화교육은 참교육의 세 가지 측면’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전교조가 지향하는 참교육은 이오덕이 주장하는 참교육을 확장한 개념이다. 곧 이오덕의 참교육 사상이 그 핵심이고 뿌리인 것이다. 전교조는 합법화 되던 해 그 상징으로 이오덕에게 ‘제1회 참교육상’을 드렸다.
이오덕은 퇴임 후 과천으로 와서부터 과천문학회에도 나가면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아동 분과를 맡아서 활동했다. 1989년에 이오덕은 어린이 문학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전국 단위의 어린이문학 단체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989년 10월 29일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회장 이오덕)를 결성한다.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는 박문희 회원이 운영하던 서울 방배동 아람유치원에서 자주 모임을 했는데, 모임 때마다 이오덕이 함께 했다. 2000년 무렵에는 월간 《어린이문학》 정기구독자가 1,500명을 넘을 정도였다. 어린이문학 강좌를 처음에는 아현동 사무실에서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한겨레신문사에서 새로 개설한 연수원으로 옮겨서 작가들을 길러냈다. 한신대학교에서 1학년 교양과정으로 문학 창작 수업을 맡기도 했다. 월간 《어린이문학》은 계간 《어린이문학》으로 지금까지 계속 발행되고 있다.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는 내부 사정으로 활동이 거의 중단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오덕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다시 활발하게 부활할 수 있는 계기를 모색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우리글을 바로 써야 한다는 수필을 가끔 썼는데, 과천으로 오면서 집중해서 쓰기 시작했다. 또 1988년 한겨레 신문을 순한글 가로판으로 내면서 이오덕은 전문위원으로 모셨다. 한겨레 신문을 꼼꼼하게 읽고 고칠 것을 알려주기 시작했고, 나아가 다른 신문과 방송, 교과서와 동화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쓰는 말을 살펴서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는 일본말법, 시효가 지난 한자어, 꼭 쓰지 않아도 될 외래어 문제를 꼼꼼하게 지적하였다. 이런 글을 본 한길사 김언호 사장이 그런 글을 모아서 책으로 내자고 제안했고, 그 첫 책이 《우리글 바로 쓰기》(1989)다.
이 책이 출판되면서 사회 각계각층에 상당한 각성과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힘입어 《우리 문장 쓰기》(1992), 《우리글 바로 쓰기 2》(1992), 《우리글 바로 쓰기 3》(1995)을 잇달아 펴냈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만 분석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썼던 글도 잘못 쓰거나 틀린 곳이 많다면서 고쳐 쓰기 시작하였다. 《참교육으로 가는 길》(1990) 제4부가 바로 1977년 발간했던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제1부를 고쳐 쓴 것이다. 우리말 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자기 글을 고쳐 쓴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이오덕은 과천 사무실에 ‘우리말연구소’ 간판을 붙이고, 우리말살리는모임을 만들어 이끌었다. 이 모임은 1995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와 통합하여 한국글쓰기연구회 안으로 들어왔다가 그 중심 회원들이 1998년 다시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공동대표 김경희ㆍ이대로ㆍ이오덕)을 결성하였다.
1995년 이후 건강이 안 좋으면 가서 쉬다가 좋아지면 다시 과천으로 오기를 몇 차례 하다가 1999년 초 과천에 있던 책을 무너미로 옮기고, 5월 31일 주민등록까지 옮긴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서울에 오지 않고, 무너미 집에서 원고를 쓰면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강 때문에 그 동안 관련했던 다른 단체 일은 거의 모두 그만두었다.
서울에 있던 글쓰기회 사무실을 무너미로 옮겼다. 무너미에 회원 연수원을 짓고 사무실을 옮긴 한국글쓰기연구회 회의와 임원 회의를 무너미에 와서 하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회의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집필 활동은 계속 하였고, 2003년 8월 25일 새벽 운명 직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이주영 : 어린이문화연대 상임대표, 백석대학교에서 ‘이오덕 삶과 교육사상’로 석사, ‘이오덕 어린이 문학론’으로 박사 논문을 썼음. 『이오덕,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 『방정환과 어린이 해방 선언 이야기』 『대한민국 생일은 언제일까요?』 등 저서 다수.
2. 원칙주의자 이오덕 선생님
김영길
1985년 7월 25일~26일, 여름방학을 맞아 1박2일 일정으로 청송군에서 연수회를 가진 적이 있다. 경북글짓기연구회와 겨북아동문학회가 함께 하였다. 글짓기여구회는 경북지역의 글짓기 지도를 하는 교사들 모임이고, 경북아동문학회는 글짓기연구회 회원 가운데서 열성 회원들이 모여 만든 문학단체로 두 모임의 회장을 이오덕 선생님이 맡아서 하고 있었다.
낮에는 청송 진보초등학교에서 글짓기에 대한 연수를 마치고, 저녁에는 겨북아동문학회 회원들이 청송약수터에서 합숙을 하며 합평회를 하였다.
식당 겸 숙소인 연수회 장소에서 열성회원 15명 정도가 모였다. 소주에 막걸리를 겯드려 저녁밥을 먹은 후, 더위를 식힐 겸 식당 마루위에 둘러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놀고 있는데 회장님 명령이 떨어졌다. ‘연수회 준비를 해서 방으로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좀 더 쉬고 하면 좋겠다는 것이 모든 회원들의 생각이었지만, 회장님 지시에 감히 반대의견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 안쪽 가운데에 조그마한 밥상 하나를 편 후 회장님이 바른 자세로 앉으시고 상 위에는 연수 자료가 가득하다. 방이 좁아서 회원들이 어께를 맞대며 회장님을 향해 앉았다.
‘경북아동문학’ 회보 2,3호가 회원들에게 나뉘어졌다.
회보에 실린 작품을 한 회원이 읽고,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을 하고, 희장님이 참여 안한 회원에게 기회를 주고.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으로~.
회의는 열정이 넘쳐나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쉬는 시간도 없었다.
“회장님 시간 다 됐어요!”
!0시까지 하기로 정해 있는데 벌써 시간이 지났다.
“벌써, 시간이 되었다고?”
“다음에 또 하고 오늘은 그만 마쳐요.”
“그래야지요. 약속대로 해야지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거짓으로 꾸미는 ’글짓기‘가 아니라 자기 삶을 솔직히 쓰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오늘 연수를 마치겠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일기 1985년~86년분을 읽은 적이 있다.
‘민중교육’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401인 선언’ ‘안동카토릭농민회’에 관한 일 등으로 교육청과 경찰서로부터 부당한 간섭과 감시, 보안, 사찰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원칙적으로 대응하신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이오덕 선생님! 그는 교육자, 어린이 문학가, 수필가, 언어학자, 교육운동가, 한글운동가, 어린이문학운동가로 활동하며 오직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고, 어린이들의 참교육’ 을 위해 연구와 봉사, 실천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신 위대한 원칙주의자 십니다. 끝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의 큰 스승
박경선 (http://cafe.daum.net/packgungsun)
1. 학급문집으로 참삶을 가꾸게 가르침 주신 스승
삶에서 성공의 85%가 인간관계라고 하는데 나 역시 교단 초년생일 때 내 삶에 멘토가 될 분을 만난 것이 나 자신 뿐 아니라 나를 거쳐간 내 제자들 삶에도 무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 같다. 그러고보면 살아오면서 주위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내 꿈은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대학을 갔고 1975년에 경북의 산골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그때부터 학급 문집을 만들고, 학교 문예부를 맡아 지역 대회에서 내가 가르친 우리 학교 아이들이 상을 휩쓸어왔다. 내 자신,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 선수로 매 대회 때마다 불려 나간 실력으로 소위 말하는 글짓기 교사로 기교와 기법만을 가르쳐 온 터였다.
그러다가 경북 의성에서 열린 글쓰기 연수회에 갔다. 이오덕 선생님이 상주 어느 학교 교장선생님이셨는데 경상북도 글짓기 교육 연구회 회장이었고, 초등학교 5학년인 따님과 함께 연수회에 오신 것 같았다. 그때 이오덕 선생님은 <글쓰기 수업에 대하여> 실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 수업을 보면서, 내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해온 것이 기교만 가르치는 선수를 키워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아와 선생님이 쓴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같은 책과 일본 작가가 쓴 『어린이 시』 라는 책 들을 구해 읽으며 영혼을 키우는 교육에 눈을 떴다. 이오덕 선생님은 1982년 7월 경상북도 글짓기 교육 연구회 회장으로 우리들이 글쓰기 수업을 한 사례를 모아 <글쓰기 교실> 이라는 책자로 묶어서 사례를 발표시켰다.
.영천국민학교 교사였던 나는 <산문 지도의 첫걸음> 이라는 주제로 내 글이, 하필 책 첫 페이지에서부터 넉장 분량의 지도 사례로 실려 있어서 첫 번째 발표자로 나갔다. ‘당신들이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생각은 줄 주 없다.’는 칼 지브란의 말을 인용해 글짓기 교육관을 내세우며 국어 교과서 3-1학기 단원 5. ‘내동생’을 배우고 나서, 학반 아이 김성의의 일기문 중 ‘내동생’ 에 해당하는 글을 예시문으로 읽어주고 받아낸 글을 모아와 발표하며
“산문 지도의 첫걸음은 저항감 없는 글감으로 생활문 쓰기부터에서나 일기 쓰기에서부터 시작하면 무난하리라고 봅니다.”
하면서 내가 일기 쓰기를 지도해온 이야기를 했다. 평일에는 62명 아이들의 일기장을 대충 읽고 ‘열심히 썼네.’‘글이 길어졌구나.’ 하면서 일기장 검사를 했지만 일주일의 끝인 토요일에는 학반 아이들에게 일기 쓰기를 면제시키고 61명의 일기장을 거둬 와서 토요일마다 밤 세워 틀린 글씨, 걱정에 대한 마음 나누기 등을 하면서 일기장에 한 바닥씩 글을 써주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내 발표를 듣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런 거짓말 발표 하지 마시오.’ 하며 화를 내며 대드는 선생이 있었다. ‘뭐, 거짓말이라고?’ 기가 찼다. 너무 어이가 없어 그냥 앉아 있으니 누가 굳이 답변을 하란다. ‘그러면 내가 거짓말한단 말에요?’ 하는 말밖에 못 했다. 실상, 그때 우리 집에는 세살백이 아들이 있었다. 시누이가 와서 아이를 봐주지만 집안일은 남편이 거들어주었고, 저녁을 먹고 나면, 아들이 엄마 품에 기어들어오는 것을 밀쳐 내고 가급적 빨리 아들을 재우고 학반 아이들 일기장에 글 써주느라 밤을 세우면, 남편은 ‘당신은 미친 여자야. 그렇게 안 하믄 선생 못하나.’ 같이 선생을 하면서, 아이들 일기장이나 학급 문집 만들 일거리를 배낭에 넣어 메고 오는 나를 평생 미친 여자로 불렀다. 그러니 글쓰기 회에서 미친 여자가 아닌, 거짓말하는 여자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 백주년을 맞는 올해, 내 나이 73세가 되어 2000년에 3학년을 담임하며 가르쳤던 준원이와 수보가, 13회,14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되어 이번 5월 25일에 우리 시골집에 초대했다. 아이들한테는 ’꿈을 빛낸 상’을 주고 부모님께는 고생하며 잘 키운 ‘훌륭한 부모님상’을 주며 놀았다. 수보 어머니가 따라오면서선물로 3학년 때 일기장을 한 묶음 가져와 보여주었다. 그 일기장을 펼쳐보니 수보 일기가 반이고 군데 군데 내 글이 반 쓰여 있았다.
“선생님, 그때 일기 쓰기 열심히 해서 논리력이 뛰어나 제가 변호사가 된 것 같아요.”
준원이가 하던 공치사를 똑같이 해서, 공치사가 진심인 듯 좋게만 들렸다.
“그러네. 그때도 내가 토, 일요일에는 너희들에게 일기 쓰기를 면제시키고 일기장을 집으로 가져와 밤새워 연애편지 쓰듯 너희들 일기장에 글을 한바닥씩 써주며 마음을 나누었네.”
수보 아버지는 그 일기장을 펼쳐 읽으며 ‘선생님이 공책도 안 사주고 우리 아이 일기장을 반이나 넘게 썼네.’ 해서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학급문집을 한 달에 한번씩 손글씨로 써서 32쪽 문집을 만들어 전국 글쓰기회 선생님들과 나누었다. 그때 <색동> 문집을 받고 보내온 편지 파일철을 보니,이오덕 선생님도 문집을 받고 편지를 자주 보내주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 학급 문집에 실린 글들을 글쓰기회에 소개하고 “산으로 간 고양이” 시집에도 수록해주고 최지원의 동시 '겨울 나무'는 “저요 저요” 같은 잡지사에도 보내고, 영남일보에서 동시 평을 할 때는 우리 학급문집 색동에 실린 작품을 많이 실어주셨다. 82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학급 신문을 내었고 84년 12월에는 영천국민학교 2학년 5반 학급 문집을 따로 내었는데 문집이 두꺼워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구멍에 바느질 실을 꿰어 책을 묶었다.(그때는 호지키스도 없었다)그때 2학년이던 최지은이가 미국 살다가 50살 넘어 한국 와서 찾아오면서 그 문집을 들고와서 바느질 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했다. 어쨌든 85년 8월 24일 경북교육위원회에서 글쓰기 지도 공로로 '표창장' 을 한 장 받았다. 이오덕 선생님이 추천하신 것 같았다. 내가 어떤 지면에 쓴 <미친 여자와 좋은 선생님> 글을 보신듯?
그즈음 반공 웅변대회도 있었는데 내가 가르친 아이들은 이 대회에서도 최고상을 휩쓸어 왔고 전국 대회에도 나가고 나 자신 전국 대회에 일반부 연사로 출전하기도 했다. 한 번은 전국대회에서 내가 상을 타지 못했다고 이오덕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상을 못 탄 것이 다행이라고 하셨다. 아이들 웅변대회부터 되짚어보면 지도 교사가 써 준 원고를 들고 나가 꼭두각시처럼 말하는 훈련에 길들게 하는 교육이란다. 그 말씀 듣고 부터 웅변 지도교사라는 관록을 털어버리려 애썼다. 사회에서도 차차 웅변학원이 사라져갔고 학교에서도 내주장 발표대회 같은 대회가 생겨나곤 한 걸 보면 이오덕 선생님의 가르침이 차차 사회에 참교육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 같다.
2. 동화작가로 이끌어주고 가르침 주신 스승
학급 담임을 하면서 늘 내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 부모가 없는 아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이 등, 우리 반 아이들의 생활은 도깨비 방망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아픔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그런 아픈 마음이 쌓여 앓다가 곪으면 동화를 썼다. 모자란다고 학급에서 소외당하는 아이 이야기도 동화로 써서 읽어주면 아이들이 울면서 들었다. 들으면서 모두 소중한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모우게 해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동화가 우리 학급 아이들과 내가 소통할 수 있는 거울 효과로 서로 마음을 보듬는 처방전이 되었다. 둘레의 사람들을 돌아보면서도 늘 부족한 사람들 편에 서서 글을 썼다. 어린 날 불우이웃돕기 성미를 얻어먹고 자란 가난이 나를 이들 편에 서게 한 것 같다.
내가 쓴 동화가 쌓여지자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따스하게 산 우리들의 이야기를 구성한 동화책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책을 내려고 보니 문단 데뷔부터 해야 했다. 그래서 아동문학 평론지에 동화를 보내어 『동전 두 개』라는 단편동화로 신인상을 받았다. 추천을 받고 나니 이오덕 선생님 생각이 났다. 내가 이때껏 써놓은 글들을 이오덕 교장선생님께 한 번 보여 드리고 싶었다. 소포로 보내보았는데 '글이 좋아요.' 하시며 직접 원고 교정까지 봐주시고 선뜻,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님께 추천해주시고 책머리에 추천사까지 써주셨다. 너무 고마워서 남편이랑 경기도로 올라가 뵈었는데 좁은 아파트에 집안이 온통 책으로 채워져 있어 놀랐다. 빈 공간은 선생님이 겨우 등을 눕힐 정도뿐이었다. 인사차 쇠고기를 한 보자기 사갔는데 채식을 하시고 감자를 주로 드셨다. 그보다 그런 선물을 원래 거절해 오신 성품이셨다. 그래서 사가지고 간 고기는 내 동화책에 표지를 그려준 정승각 화가에게 드리고 왔다. 이렇게 선생님께는 아무 보답도 못 드리고 낸 첫 동화집이 「너는 왜 큰소리로 말하지 않니」이고 어린이도서 연구회 추천도서로 35세 넘게 출판되었다. 그 다음 낸 동화책이 신라문화연구가 윤경렬 선생님을 모델로 한 『신라 할아버지』 역사 동화였다. 그 책을 우편으로 보내드렸을 때 이오덕 선생님은 '이런 고귀한 생각을 가지고 사신 분이 계셨군요.' 감탄하시며 윤경렬 선생님을 직접 만나보러 경주에 까지 내려가셨다고 한다. 이 『신라할아버지』에 대해 SBS 방송국에서 8. 15 광복절 기념일에 이수만 토크 쇼에 나와 이야기 나누자는 제의가 있었는데 나는 조용히 지내고 싶어 거절했다. 그래도, 이오덕 선생님은 이 책의 서평을 한국일보(1995년 7월 28일 “요즘 읽은 책”)에 이렇게 써주셨다.
“이 장편동화는 한 공예가가 우리 것을 찾기 위해 걸어온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곧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왜놈들에게 짓밟힌 우리말이다. 우리는 36년 동안 일본 말, 일본 글로 살았다. 바위에 박아 놓은 쇠말뚝은 뽑으려고 하는데 저마다 머릿속에 박힌 쇠말뚝인 일본말 버릇은 고치려고 안하니, 이래서는 민주고 통일이고 다 헛말이 될 수밖에 없다.(중략) 요즈음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드문 형편에서 우리 겨레의 마음을 심어주는 이런 좋은 동화책이 나온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생략)”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을 이끌었는데 선생님 덕택에 나도 여기 회원이 되어 우리말을 살려 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대구교육대학교 대학원에서 아동문학과 강의를 맡아, 개강 첫 시간에는 반드시 우리말 바로 쓰기 강의부터 하였다. 창작 이전에 우리 말, 우리 글을 바로 써야 한다는 이오덕 교장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은 덕분이다.
3. 늘 새로 낸 책을 무료로 나누어 주시던 스승
선생님은 『우리 말 살려 쓰기』 『우리 글 바로 쓰기』 『우리 문장 쓰기』 같은 책을 많이 내셨는데 그때마다 한국글쓰기교육 연구회가 열리는 날 가져오셔서 회원이 백명이든 이백명이든 일일이 이름을 써서 공으로 나눠주셨다. 미처 못 나눠주신 회원들에게는 ‘박경선 선생님께 92. 3.5. 이오덕 드림’이라고 사인을 한 책을 소포로 보내주기도 하셨다. 우리는 선생님께 늘 공짜로 책을 받아 공부하면서 선생님의 마음을 읽게 되었다. 내게 준 책은 단순히 내게 준 책이 아니라 그 책을 통해 이 땅의 아이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교육애에서 비롯된 나눔으로 여겨졌다. 본래 나도 어릴 때부터 없이 살아서 내가 성공하면 남을 돕고 살고 싶은 게 꿈이었지만 나눔을 실천하는 선생님의 교육 철학을 접하면서 더 더욱 선생님처럼 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껏 26권의 책을 내었고 책을 팔아 번 인세로는 생활비에 보태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산다. 영남 아동문학상금은 소년소녀 가장 돕는 일을 하는 초원봉사회(그때 유성룡 이사장님, 지금 이주영 이사님)께 보냈다. 신부『김대건』전기를 써서 받은 원고료 300만원과 다른 책의 원고료로 받은 900만원과 합쳐 1200만원을 대곡성당 성전 건립 기금으로 하느님께 돌려드렸다.
이제, 이오덕 선생님은 가셨지만 아드님이신 이정우 선생님께도 여전히 공짜 책을 받고 있다. 『어린이를 살리는 문학-이오덕 유고집』-2008. 3. 28 이정우 -
이런 책을 받고 고맙다고 이정우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면
“책을 보내려고 보니 주소랑 전화번호를 몰라 윤태규 선생님한테 물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소리, 억양, 말투가 이오덕 선생님을 그대로 빼닮았다. 책을 내어 그냥 나누어 주시는 인품 역시 이오덕 선생님을 그대로 닮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이오덕 선생님을 모시고 사는 것 같은 착각을 즐기며 산다.
그리고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다 가신 선생님의 정신을 기리며, 정년퇴임 <섬김밥상 행복교육> 교육수필집을 1000권 출간하여 인세에다 내 월급을 보태어 선생님들과 교통 지도하는 학부모님께 선물하였다. 그리고 이주영 박사님이 우리 시골집에 와서 하룻밤 묵으며, 서재에 꽂힌 <교단에서 받은 편지> 철 22개를 보시며 편지를 가려 뽑아 책으로 내자고 하셔서 아이들에게 퇴임 선물로 좋겠다 싶어 주제별로 뽑아서 <마음이 자라는 교실 편지> 책을 엮었다. 대구대진초등학교 4.5.6학년 450명에게 퇴임선물로 나누었다. 무엇보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이 책으로 그간, 이오덕 교장선생님께 빚진 책값을 갚아드리고 싶었다. 늘 새 책을 내시면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 가져오셔서 글쓰기 회 회원들(100~200명)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서 공으로 책을 나누어주시던 교장선생님의 그 마음을 기리며, 선생님이 사랑하신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원들(60명)에게 내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글쓰기 연수회에 참석하는 윤태규 선생님이 2017년에 대신 가져가 나누어 주게 부탁했다. 그 후, 책을 두 권씩 받고도 잘 읽었다고 문자 한마디 보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오덕 선생님께 책을 받고도 한 번도 책에 대한 독후감을 써보내거나 책을 공으로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말 한 번 하지 않은 내 자신이 되돌아 보여졌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오덕 선생님도 가끔 이런 서운한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 (37쪽)
나는 늘 이오덕 선생님과 함께 있다
이호철
나는 이오덕 선생님을 만나기 바로 전부터 주간 학급신문(문집) ‘꽃교실’을 내었다. 1975년, 내가 첫 발령 받아 간 울진 조금 국민학교에는 학급문집을 내며 아이들과 뜻있게 살아가는 최지훈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이 하는 걸 보고 나도 저렇게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그 몇 년 뒤 최지훈 선생님이 다른 직장으로 자리를 옮겨가서 이때다 싶어 이 선생님이 내어오던 학급문집을 내가 그대로 이어서 내게 되었다. 그게 내가 울진 후포 국민학교로 옮겨간 1979년부터 11년간 꾸준히 내어왔던 주간 <꽃교실>이다. 연말에는 주간으로 1년간 낸 것에 차례 넣고 표지를 해서 한 권 문집으로 만들었다.
그때는 문집을 내는 게 쉽지 않았다. 철판에 원지를 놓고 철필로 꾹꾹 눌러 긁어서 글씨를 썼다. 글씨 쓴 원지를 등사판 위에 놓고 롤러에 잉크를 묻혀 한 장 한 장 밀어서 등사해 내었다. 롤러를 밀다 보면 원지가 찢어져서 다시 철필로 긁어야 할 때도 더러 있었다. 주마다 16절 4면~8면을 내었다. 이렇게 학급문집을 내려면 당연히 근무 시간만으로는 다 할 수가 없다. 밤에 집에서도 늦게까지 원지를 긁어대었다. 그러다 눈이 나빠져 안경을 쓸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미련스러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쓰기 지도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글쓰기’가 아니라 ‘글짓기’ 지도를 했다. 글짓기 대회에 상 받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고.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내 글쓰기 지도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낸 문집을 여러 곳에 보내었는데, 이오덕 선생님께도 보내었던 것 같다. 이게 이오덕 선생님과의 첫 인연이다.
선생님이 성주, 대서 국민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다. 그때는 경북 교육청에서 주도한 것이지만 여러 분야의 교육연구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이오덕 선생님은 경북 글짓기 지도 연구회 회장이셨다. 나도 그때 글짓기 지도 연구회에 들어갔다. 어느 해인가? 선생님이 이 연구회에서 나를 발표시켰다. 문집도 꾸준히 내고 글쓰기 지도도 열심히 하니까 좋은 발표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힘들었지만 발표를 하긴 했다. 그 뒤 무슨 말을 썼는지 내용은 생각 안 나지만 선생님께 편지도 썼던가 보다. 선생님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선생님은 워낙 바쁘게 사셔서 그런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도 나와 있듯이 내게 책도 보내주셨다. ⟪삶의 진실에 대하여(크리슈나무르티)⟫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게 참 많았다.
그 뒤 선생님이 지도하고 엮어낸 ⟪일하는 아이들⟫과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란 책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1978년에 나왔는데 어찌 된 건지 나는 뒤늦게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분들은 다 그랬겠지만 나도 이때까지 지도한 아이들의 글과는 얼마나 다른지 더 크게 깨달았다. 글을 지어내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쓰고, 아이들이 하는 말(사투리까지)도 생생하게 살려 그대로 쓰는 것이다. 그 뒤로는 아이들의 글이 확 달라졌다.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다. 선생님은 왜 그때 내가 지도한 아이들의 글을 보고도 아무 말 하시지 않고 발표까지 시켰을까 하는 것이다. 다른 선생님들이 지도한 아이들의 글보다는 그래도 조금 살아 있다고 본 것일까? 아무튼 아직도 궁금하다.
나는 1982년에 시작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1985년. 내가 온정 국민학교에 있을 때, 선생님이 내가 한해에 지도한 아이들의 글을 책으로 내어보자고 하시면서 글을 보내어달라고 했다. 원고지에 모두 옮겨적어 보내었다. 선생님이 하나하나 가려 뽑고 머리말까지 써서 책으로 내주셨다. 그게 1987년에 나온 ⟪큰길로 가겠다(한길사)⟫란 책이다. 다음은 이 책 머리말의 한 부분이다.
<글쓰기 공부, 이 놀라운 성과> 이것은 울진 온정 국민학교 이호철 선생님이 맡으신 3학년 2반 어린이들의 글을 모은 책입니다. 지금까지 전국의 어린이들의 글을 가려 뽑아 모은 책은 더러 나왔었지만 한 학급 어린이들의 글만 가지고 한 권의 책을 만들기는 이것이 처음인 줄 압니다. 그만큼 이런 책을 내기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학급 어린이들의 글쓰는 힘을 모든 사람이 재미있게 읽을 만큼 뻗쳐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호철 선생님은 이 어려운 일을 해 내셨습니다.
이 책에는 3학년 2반 25명 어린이들의 글이 한 사람의 것도 빠짐 없이 들어 있습니다.
---가운데 줄임---
어린이들을 위해 매주 한 번씩 ⟪꽃교실⟫ 문집을 내시는 이호철 선생님, 너무 일을 많이 하셔서 눈까지 나빠지신 이 선생님께, 이 책을 읽게 될 모든 어린이들과 함께 감사를 드리고 건강을 빕니다. 또한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따르는 스물 다섯 어린이들의 눈동자마다에 저 가을 하늘이 스며들어 더욱 착하고 총명해지기를 빕니다.
1986년 10월 이오덕
나는 늘 선생님을 뵈어도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다른 여러 사람과 같이 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는 게 조심스럽고 어려워 더 그런 것 같다. 글쓰기회 모임 할 때 뒤쪽에서 선생님 바로 옆에 앉게 되어도 별말이 없었다.
“선생님, 요즘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늘 그래요. 이선생은 건강 생각해서 일을 조금 줄이세요. 오랫동안 좋은 일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건강 안부나 묻는 정도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낸 책을 사인해 주시곤 했다.
무슨 모임 때인지 생각은 잘 안 나는데 선생님과 나란히 오솔길을 걷다가 산기슭에 핀 철쭉꽃을 보며 이렇게 주고받은 말은 어렴풋이 떠오른다.
“아이고오, 이선생. 꽃이 참 곱지요?”
“예, 선생님. 저걸 ‘연달래’라고 해요.”
“그래요. 선생님도 그걸 아네. 이름이 참 좋지요?”
“예, 선생님. 저게 철쭉이지요?”
“맞아요. 옛날 어른들은 진달래를 ‘참꽃’이라 하고 철쭉을 ‘개꽃’이라고 하잖아요.”
“예, 선생님. 그 이름도 참 잘 지었네요.”
“맞아요.”
나는 선생님의 시 가운데 ‘진달래’를 특히 좋아한다. 내가 어릴 때의 모습이라 더 애틋하게 다가와서 그럴 거다.
이지러진 초가집들이 깔려 있는 골짝이면
나무꾼들의 슬픈 산타령이 울리는 고개면
너는 어디든지 피어 있었다.
진달래야!
그리도 이 땅이 좋더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헐벗은 이 땅이
그리도 좋더냐?
찬바람 불고 먼지 나는 산마다 골짝마다
온통 붉게 꾸며 놓고
이른봄 너는 누구를 기다리느냐?
밤이면 두견이 피울음만 들려 오고
낮이면 흰옷 입은 사람들 무거운 짐 등에 지고
넘어가고 넘어오는 산고개마다
누구를 위해 그렇게 붉게 타느냐?
아무리 기다려도 뿌연 하늘이요,
안개요, 바람 소리뿐인데
그래도 너는 해마다
보릿고개 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갈 때
배가 고파 비탈길을 넘어질 뻔하면서
너를 두 손으로 마구 따먹던 것이 좋았더냐?
진달래야,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차라리 시들어지는
너무나 순진한 어린이 같은 꽃아!
내 마음속 환히 피어 있거라.
영원히 붉게 붉게 피어 있거라.
아,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다. 무너미에서 글쓰기회 모임 할 때다. 대구 3인방(윤태규, 나, 서정오)은 서정오 선생 차로 같이 갔다. 대구에서 나설 때부터 아예 가자미회 안주와 막걸리 몇 병을 싣고.
“어이, 기사 양반 우리는 술 한잔하네. 운전 잘해 잉.”
이러고는 윤태규 선생과 나는 술을 마셨다. 운전기사인 서정오 선생에게는 가끔 안주나 입에 넣어주면서. 그런데 한 번은 문경새재에선가 점심 먹으며 쉬게 되었다. 그때 그만 운전기사도 술을 마셔버렸네. 할 수 없이 거기서 자고 이튿날 무너미로 가게 되었다. 회원들 앞에서 무슨 이야기하려던 이오덕 선생님께 이무기 회원들이 우리가 술 마시다 하루 지각했다고 장난으로 일러바쳤다. 선생님은 싱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뭐, 오랜만에 만나면 그럴 수도 있지요.”
잘못된 일에는 칼날 같은 분인데 뜻밖에 이 말을 들은 이무기 회원들은 선생님이 대구 3인방을 편애한다면서 살짝 샘내기도 했다. 그때 좋았던 그 기분, 그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아마 선생님께 밉상 조금이라도 보인 다른 이무기 회원 같았으면 꾸중깨나 들었을지도 모를 거다.
2001년, 내가 ⟪학대받는 아이들(보리)⟫ 책을 내었을 때 아직도 학대받고 있는 아이들이 그렇게나 많냐면서 무척 안타까워하시던 일도 떠오른다. 늘 아이들 편에 서 있던 선생님이시니 그 마음 오죽했을까.
나는 현직에 있을 때 선생님이 해오신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무엇을 좀 더 잘 실천해볼까 생각했다. 그 가운데 삶을 가꾸는 글쓰기 지도와 그림 그리기 지도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다짐하고 꾸준히 애써왔다. 선생님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도해 온 것이다. 살아 있는 글쓰기 지도를 하자니 살아 있는 학급 운영도 해야지. 그렇게 해서 관련 책도 몇 권 내게 되었다.
어린이문학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한 끝에 어린 시절 이야기를 열심히 써야겠다 생각했다. 선생님은 어린이문학 가운데 ‘겪은 사실 이야기’도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주어야 하고, 이것이 어린이문학 분야 가운데 뜻있는 한 분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잘 쓰든 못 쓰든 지금도 계간 ⟪어린이문학⟫에 어린 시절 이야기를 꾸준히 조금씩 쓰고 있다.
내 방 책꽂이에는 이오덕 선생님의 책만 따로 연도별로 정리해 놓은 자리가 있다. 선생님의 예전 책부터 요즘 책까지 거의 다. 누워서도 바로 손 뻗으면 닿을 자리다. 나도 지금껏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은 해왔지만, 선생님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뜻에 더 가깝게 살아가려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떠나신 지 20년이 넘어도 나는 늘 선생님과 함께 있는 셈이다. 30쪽
이오덕 선생님 백주년 특집
내 동화 쓰기와 이오덕 선생님
윤태규
이오덕 선생님이 태어나신 지가 100년이 되었고, 돌아가신 지도 22년이 지나고 있다. 선생님을 마지막 뵌 것은 돌아가시기 보름 전이다. 경북글짓기연구회 여름 연수회를 영주 소수서원에서 마치고 김상문, 최춘해, 김종상, 김영길, 이호철, 서정오, 윤태규 이렇게 일곱이 선생님이 계시는 충북 무너미로 병문안을 갔다. 몸은 몰라볼 정도로 야위어 있었으나 정신은 또렷하여 오랜 인연이 있는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손에는 무슨 쪽지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옆에는 빈 종이도 있고 볼펜도 있었다. 그 몸으로도 무엇을 적기도 하는 모양이다.
선생님 방을 나오면서 입으로는 “많이 드시고 잘 계십시오.” 라고 인사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만난 덕분에 선생 행복하게 잘 하고 있습니다.’ 하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면서 왔다.
누구라도 살아가면서 운명 같은 만남이 있을 것이다. 내게 이오덕 선생님이 그 운명 같은 만남이고 빛나는 만남이었다. 선생님을 만나면서 영향을 받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게 참 삶을 가꾸는 교육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어 선생 행복하게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동화를 쓰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내 동화 쓰기와 이오덕 선생님 만남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1983년에 봉화 도촌국민학교에서 ‘들국화’라는 학교 문집을 냈다. 150쪽 되는 얄팍한 책이다. 아이들 글이 중심이었지만 교원들 글도 몇 편 실었다. 내가 그 교지를 맡아 편집했는데 생전 처음 동화라는 것을 써서 실었다. ‘하얀 마음’ 이라는 짧은 글인데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아버지와 힘들게 살아가는 순이라는 아이와 옆에서 지켜보는 담임 이야기다. 학교 문집이 어떻게 선생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글을 읽은 선생님이 편지를 보냈다. 내 동화를 보고 습작을 많이 한 것 같다고 했다. 문장도 좋고 교실 이야기라서 아이들에게 잘 읽힐 좋은 글이라고도 했다. 편지 끄트머리에 아주 조심스럽게 ‘양떼’는 우리 아이들이 흔하게 보면서 자라는 게 아니니까 차라리 염소로 고치면 좋겠다고 했다. ‘쳐다본 하늘에는 양떼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 문장을 두고 한 말이다.
‘아하! 아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현실 이야기가 좋은 동화구나! 배경 묘사도 아이들 일상과 가깝게 해야 하는구나!
자신감이 부쩍 솟았다. 글 쓰는 재주는 별로이지만 아이들 교실 이야기는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주말이나 밤에도 아이들과 잘 어울려 노는 선생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고, 아이들과 지낸 교실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자랑처럼 내놓기를 좋아했다.
두 번째로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은 글은 ‘숫자들의 싸움’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육군대장’ 이야기다. 이건 교실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집 벽시계를 보고 쓴 동화다. 0,1,2,3,4,5,6,7,8,9 숫자 열 형제가 차례를 지키며 아주 평화롭게 잘 살았는데 어느 날 벽시계를 사오면서 평화가 깨어진다. 숫자1이 벽시계를 쳐다보다가 다른 숫자들은 모두 한 번씩 나오는데 자기 이름은 1, 10, 11, 12에서 다섯 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고 그걸 빌미삼아 이 집 대왕이 된다. 숫자 2도 2, 12 이렇게 두 번이 나온다고 1대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는다. 숫자가 달랑 한 번씩 밖에 안 나오는 나머지 숫자들은 각각 한 자리라도 앞에 서려고 애를 쓴다. 3은 운동회 때도 3등까지는 상을 준다고 다음 자리에 앉았고, 5는 손가락이 다섯 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7은 행운의 럭키세븐이라는 서양 말을 들고 나왔고, 6은 6대주를 들고 나왔다. 가장 꼴찌는 4다. 죽을 4자라고 해서 고층 빌딩도 4층을 F층이라고 수험표에 4자가 붙으면 재수 없다고 시험을 치러 가지 않기도 한다는 말까지 갖다 붙이면서 가장 꼴찌로 밀어버린다. 그런데 어느 날 군부대 앞에서 4는 드디어 자기가 중요한 숫자라는 것을 발견한다. 별 네 개 달린 장군이 군부대에 들어서니 모두가 굽실굽실 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다.
숫자만을 가지고 이만큼 재미있게 얘기를 쓴 솜씨가 훌륭합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군대, 대장, 군국주의 이런 것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교육을 하는 사람들의 처지에 설 때 아이들에게 전쟁과 군대를 예찬하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높은 별자리를 우러러보도록 하는 것은(아래 줄임)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군대를 야구장으로 옮겨서 육군대장을 4번 타자로 바꾸었다.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고 교육에 대한 바른 식견을 가져야하는구나!’
세 번째로 깨우친 이야기는 ‘군것질과 간식’이라는 동화다. 아이들이 과자를 먹으면 군것질이 되어 야단맞아야 하고, 선생님들이 교무실에 둘러앉아 먹으면 간식이 되어야 하는가? 과자는 주로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이 즐겨 먹는 것이니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간식이지만 어른들이 먹으면 군것질이 되는 게 옳다. 이런 이야기다. 이오덕 선생님은 온갖 첨가물이 들어가는 과자보다는 옥수수, 감자, 고구마, 땅콩 그리고 여러 가지 과실을 좋아하며 자라도록 하는 것이 좋으니 이 과자 문제는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맞다. 주제도 중요하지만 소재 선택에도 철학이 들어가고 교육을 생각해야 하는구나!
그 밖에 몇 더 있기는 하다. 신춘문예 당선 작품인 ‘훈이와 개구리’에서 훈이가 개구리를 발로 뭉개는 것이나 똥구멍에 밀짚빨대를 넣어 바람을 넣는 이야기는 사실이 그러하더라도 아이들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라고 한 것이나, 한겨레 출판에서 나온 ‘이상한 학교’에서 향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가 아니니 고쳐야 한다는 가르침도 줬다. 생태 동화에서는 동식물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기도 했다.
선생님이 내 동화에 눈길을 준 것은 내 동화 대부분이 교실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 쓰는 좋은 작가라고 하더라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건너 들었다. 가끔 주고받는 편지에도 선생님은 그걸 비쳤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살아가는 우리 반 학급운영에도 관심을 많이 보내주었다.
이번에 안동 모임 준비하느라고 수고가 많으시고, 더구나 훌륭한 학급운영 사례를 발표해 주셔서 고마왔습니다. 그날 들었던 모든 회원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 서울과 인근 지역 회원들이 그날 버스로 잘 올라왔습니다. 오면서도 이번 모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얘기 했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윤 선생님이 발표하신 내용을 우리 회보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데, 좀 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다 쓰시지 말고 알맹이 몇 가지만 쓰셔도 됩니다. 길이는 원고지 10장으로 쓰시든지 20장이나 30장으로 하시든지 해 주십시오. 이래서 이런 교육을 권장하고, 또 안동서 예고한 교육실천 기록물을 윤 선생님이 쓰신 글을 본보기로 보여서 모으려고 합니다. 바쁘신 줄 알면서 부탁하여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 일은 윤 선생님이 가장 잘 하실 수 있겠다 싶어 부탁하는 것이니 부디 수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다시 또 연락하겠습니다. 1987. 8. 10. 아침 이오덕
학급운영 이야기를 써 달라는 말씀이다. 나는 가끔 한국글쓰기연구회보에 글을 싣고, 또 연수회에서 발표를 했는데 글쓰기 지도 보다는 주로 아이들과 살아가는 ‘학급운영’ 이야기였다.
선생님 덕택에 교실이야기가 중심이 된 동화책도 몇 권 냈다. 내가 쓴 동화 책 이름은 신나는 교실, 나뭇잎 교실, 이상한 학교와 같이 ‘교실’, ‘학교’가 많이 들어간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라서 그렇다. 동화책을 내는 일도 주로 선생님이 주선을 하여주었다.
가을이 되어 행사 때문에 많이 시달리시겠지요? 윤 선생님의 동화집 원고는 ‘종로서적’에 갖다 주었습니다. 거기서 아동문고를 시작한다고 해서 협조를 하기로 했습니다. 창작동화집 추천한 사람은 이준연, 박상규, 이영호, 윤태규, 이오덕 이렇게 다섯 사람 원고가 가 있습니다. 내 것은 낼 생각도 없고 낼만한 작품도 없다 싶어 생각도 안했는데 종로서적에서 하도 졸라서 찾아보니 옛날에 써 놓고는 시시하다고 발표조차 안했던 것도 나오고 해서 그럭저럭 500매가 되어 갖다 준 것입니다. 아마 종로서적에서는 일을 미덥게 할 것입니다. 염려마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리 늦어도 겨울 전에는 책이 나와야 된다고 단단히 말해 두었습니다. 다섯 사람 것 같이 나올 것입니다. 늘 건강에 유의하셔서 아이들 가꾸는 일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회보 만드느라 저도 바쁩니다. 86. 9. 14 이오덕
내 첫 동화집 ‘아이쿠나 호랑이’를 주선한 이야기다. 선생님은 교실 이야기를 쓰는 내 동화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마 기대를 걸었던 만큼 실망도 컸을 것이다. 원래 글 쓰는 재주가 없기도 하지만 나는 글을 욕심내어 쓰지 않는다. 쓰고 싶을 때, 또 쓸 일이 있을 때 즐겁게 쓴다. 피를 말리는 일, 뼈를 깎는 고통 그런 건 내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다행히 이오덕 선생님 기대에 조금 값을 한 일이 있기는 했다. 1980년 말에서 1990년 초까지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몇 해 동안 올해의 동화작가 12인을 뽑아서 연말에 발표를 했는데 그 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빠지지 않고 내 이름이 올랐다. 1995년도에 뽑힌 사람을 보면 1.방정환, 2.마해송, 3.이주홍, 4.이원수, 5.현덕, 6.권정생, 7.이현주, 8.윤기현, 9.손춘익, 10.윤태규, 11.임길택, 12.이금이 이렇다. 아마도 독서운동을 하는 어린이도서연구회 분들도 이오덕 선생님처럼 윤태규가 동화를 잘 쓰고, 또 잘 쓸 사람으로 착각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때가 내가 겨우 동화책 세 권을 냈을 때다.
지금은 내 앞에 아이들이 없고 교실도 없으니 숙제로 쓰는 동화 몇 편에도 쩔쩔매고 있다. 거기에 힘 실어주고 길 잡아주던 이오덕 선생님까지 안 계시니 더 더욱 그렇다.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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