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은 곽안련선교사의 조사로 출발하였다
3월에 여운형 생가에 세워진 기념관에 들렸다. 그의 히스토리에 그의 출사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입문과 클라크선교사의 조사로서의 사역과 평양신학교 유학, 남경유학과 상해 한인교회 전도사로서의 활동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기념관이 세워진 생가 터 자리가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며 땅과 집을 기증하여 세운 묘곡교회 터인 것조차도 밝혀 놓지 않았다.
크리스천으로서 청년 여운형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완전히 무시하는 기념관의 역사 기록이 마뜩치 않았지만 어디에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지 몰라서 해설자 분에게만 몇 마디하고 왔다.
흔히들 여운형을 중도파 사회주의자로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상해에서 임정의 산파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상해한인교회 전도사였다는 사실조차도 무시한다. 그가 곽안련 선교사의 조사로 승동교회를 섬길 때부터 그의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였어도 또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가입하고 국제 공산당 모임에 참여하였어도 이는 기독교에 터한 사회복음의 관점일 뿐 그는 해방 이후에 있었던 한국의 이념논쟁에서 의미하는 그런 공산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공생과 토지개혁을 원하였으며 하나 된 민족과 나라를 지향하였다.
아래는 ⎾승동교회 110년사⏌ 161~162쪽에 나오는 여운형선생님 관련 부분을 그대로 발췌한 글이다.
승동교회는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있었으므로 목사가 독립운동에 앞장을 선 감리교의 상동교회 같지는 않았으나, 승동교회에도 우국지사들이 많이 있었다. 백정 출신들의 교인들은 신분의 평등을 추구하였으므로 말하자면 개화운동에 앞장을 선 사람들이었으며, 이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 양반이아 식자층의 교인들 역사 개화사상을 실천한 이들이었다.
“우리의 종교에서는 낮은 신분에서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것과 죄인들이 천국으로 올려지는 것이 하나이다.” 고 외쳤던 박성춘은 나라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권리와 의무도 동등한 것임을 인식하였다.
사실 구한말의 의병운동에도 그러했지만 1910년 망국 후에는 천민과 상민들인 민중이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촉매제 역할을 한 사람이 여운형조사였다. 여운형은 1886년 4월 22일에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출생하여 15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여운형은 1907년 이웃 동네인 상심리에 살던 차상진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차상진은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 여운형은 이 때 가정적으로 외로운 처지에 있었다. 1903년 8월에 아내를, 10월에는 조부를, 이듬해 9월에는 모친을 여의었다. 슬픔 가운데 있는 그에게 기독교는 위로를 줄 뿐 만 아니라 구국의 꿈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보였다.
1908년 동생 여운홍이 경신학교에 입학하자 여운형은 동생의 학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1908년 가을 월 20원의 사례를 받기로 하고 승동교회의 조사로 들어왔다. 여운형은 곽안련목사를 도와 승동교회를 섬겼다. 곽 목사는 선교사 특유의 우월감은 강했으나 인정이 많고 뒤끝이 깨끗한 사람이었다. 가끔 충돌하기도 했지만 여운형을 아껴주었다.
여운형이 승동교회 조사로 있는 동안 이동녕, 노백린 등이 승동교회에 출석했다. 이들은 박성춘 장로와 신채호와 함께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꿈꾸는 이들이었으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교회의 분위기를 민족주우ㅐ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이러한 애국애족적 분위기는 홍문섯골교회 시대에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강계 부사를 지낸 한필상,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 육군참령 출신의 지주완, 고종의 재종형제가 되는 이재형, 대원군의 외손자 조남복 등과 홍운표, 유창겸, 서병철, 김시제, 안기선, 박준우, 조종만, 민준호, 현채 등 당시의 쟁쟁한 양반들이 승동교회와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한 가지 특힐 일은 훗날 승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오건영이 독립운동을 하려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려다 가려다가 안동교회의 박승봉 장로에게 붙잡혀 집사로 섬기다가 여운형, 이여한, 이재형 등과 함께 평양신학교에 가게 되었던 일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남의 놀라운 섭리로 승동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봉사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1906년 부친의 사망 후, 고향에 묘골 묘곡교회와 학교 설립을 위해 자기의 집을 여씨 문중으로 하여금 교회에 바치도록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에 그의 고향집에 기독사립 광동학교가 세워졌다. 그 후 그는 승동교회 조사가 되었으며 1908년에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서울 창신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기호흥학회 등 애국계몽단체에서 활동하며 한편으로 황성기독청년회, 상동청년학원 등의 사람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으며 신민회에서도 활동을 하였다. 1910년 강릉의 초당의숙 교사로 초빙되어 일하다가 1911년 학교가 일제의 강제 폐교로 문을 닫자 승동교회로 돌아와서 조사로서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운동에 관심이 많아 황성기독청년회 (YMCA) 운동부장으로 활동하였고 그 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으며 1912년에는 YMCA 야구단을 이끌고 동경에 원정경기를 다녀왔고 가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4년 여름에 중국 유학을 위해 평양신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는 곽안련 선교사의 서간도 방문여행에 동반하여 서간도의 독립운동 실태를 파악하였고 그 해 12월에 친구인 조동호와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5년 금릉대학교 영문과에 입학, 1917년 봄에 대학교를 중퇴하고 상해로 나와서 상해 한인교회 전도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1929년 7월 상해공동조계구역 안에 있는 야구 경기장에서 관람도중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곧 바로 일본 경찰에 신병이 인도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될 때까지 그는 무려 13년 동안 그는 상해에 거주하며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다.
서울 승동교회 조사로 활동하며 애국애족의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상해에서 한인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며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의 깃발을 들고 거센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해방 후, 그는 1947년 7월 19일 12차례나 되는 테러 위협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혜화동 로타리에서 그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하여 저격을 당하였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었던 그의 삶에 대하여 우파는 공산주의자, 좌파는 기회주의자로 비난하며 왜곡 폄하하였다. 그의 정치적인 행보를 비판하며 어떤 이들은 그를 친일파, 어떤 이들은 민족의 대지도자라고 불렀다.
이념과 이해타산의 자리에서 다양하게 평가를 받고 있는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독립운동의 당파성, 권력투쟁을 뛰어 넘은 권력욕에 눈이 멀지 않은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는 실로 한국 독립운동계에서 사리사욕 없이 십자가를 진 진정한 독립운동가이다.
2021.5.19.새벽에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