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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7월 28일부터 1주일 사이에 유럽의 5대 강국이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3년을 넘긴 1917년에 전체적인 전황은 연합국에게 몹시 불리했다. 1916년 1월에 영국군과 영연방군이 투르크의 갈리폴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했으며 같은 달에 세르비아의 전 국토가 동맹군에게 점령당했다. 1916년 8월 27일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루마니아는 1916년 12월 6일 수도 부쿠레슈티가 함락된데 이어 전 국토가 점령당했다.
시산혈하의 참호전이 계속된 서부전선에서는 1917년 4월에 감행된 연합군의 대공세가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연합군의 주력인 프랑스군은 집단항명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탈리아도 1917년 8월에 대공세를 감행했으나 10월에 이손초 전투와 카포레토 전투에서 궤멸적인 참패를 당했다.
개전 초기부터 독일군에게 연패하고 후퇴를 거듭한 러시아에서는 1917년 3월 15일에 혁명이 일어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병사들의 대규모 탈영으로 러시아 군대는 붕괴되고 있었다. 1917년 4월 6일에 참전한 미국은 그때부터 육군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중이었다. 대서양에서는 독일의 잠수함이 맹렬한 기세로 영국의 상선들을 격침시켜 연합국의 군수물자 보급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독일의 승리가 멀지 않은 듯이 보였다.
전황이 극도로 불리하던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는 세계 제일의 부자인 유태인 금융재벌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Lionel Walter Rothschild)에게 다음과 같은 문서를 수교했다.
Foreign Office,
November 2nd, 1917.
Dear Lord Rothschild,
I have much pleasure in conveying to you, on behalf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e following declaration of sympathy with Jewish Zionist aspirations which has been submitted to, and approved by, the Cabinet.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I should be grateful if you would bring this declaration to the knowledge of the Zionist Federation.
Yours sincerely,
Arthur James Balfour
로스차일드 경에게
본인은 유태인 시오니스트의 염원이 담긴 다음과 같은 선언이 내각에 제출되어 승인 받은 사실을 국왕 폐하의 정부를 대리해서 귀하에게 전달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며,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에 현존하고 있는 비유태인 공동체의 시민적 권리와 종교적 권리 및 다른 모든 국가에서 유태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가 전혀 침해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귀하께서 이 선언을 시오니스트 동맹에 전달하길 바랍니다.
아서 제임스 밸푸어 (서명)
아서 제임스 밸푸어
이 문서는 11월 9일 미국 신문에 보도되었다. 밸푸어 선언은 유태국가 건설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랍인의 반발을 의식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에 수립되는 것은 유태인의 국가(Nation)가 아니라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하면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태인 즉 아랍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 다른 모든 국가에서 유태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가 전혀 침해되지 않을 것 >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유태인에게 보내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시오니즘(Zionism)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이다. 1897년 7월 28일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세계시오니스트 회의를 계기로 그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많은 유태인들이 시오니즘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했다. 만약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건설되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들은 이스라엘 국민으로 간주되어 기존의 국적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를 영국 정부가 막아주겠다는 뜻이 밸푸어 선언의 마지막 대목에 담겨있다.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가 건설되어도 다른 모든 국가에서 유태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가 전혀 침해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목은 영국 정부가 그렇게 해주겠다는 뜻이다. 밸푸어 선언은 숱한 우여곡절 끝에 30년 후 실현되어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이스라엘로 귀환하지 않고 타국에 잔류한 많은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에 충성하면서도 잔류국의 국적을 유지하였다.
영국이 밸푸어 선언의 대가로 유태인들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제대로 설명하는 역사책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터무니 없는 거짓말들이 아직도 버젓이 횡행하고 있다. 하나는 미국의 유태인들을 부추겨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유태인 금융재벌들로부터 전쟁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영국이 나라 없는 유태인의 처지를 동정하여 나라를 만들어 주려 했다고도 한다.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도 알 수 있는 이런 거짓말들이 수 없이 반복되어 진실은 더욱 깊이 은폐되었다. 진실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밸푸어 선언이 나오기 7개월 전인 1917년 4월 6일에 참전했고 6월 26일 첫번째 사단이 프랑스에 상륙했다. 제이 피 모건(J. P. Morgan)과 록펠러(Rockefeller)를 비롯한 미국의 유태인 재벌들은 개전 초기부터 미국 정부의 승인 아래 영국과 프랑스에 막대한 대출금을 제공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그 자금으로 미국에서 대량의 군수물자를 구입했다. 돈벌이에 눈이 먼 유태인들은 대출금이 두 나라의 상환 능력을 초과한 뒤에도 대출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독일이 승리하면 유태인 금융재벌들은 천문학적인 대출금을 날리고 파산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 때문에 유태인 재벌들이 영불의 승리를 위해 윌슨 대통령을 움직여 미국을 참전시킨 것이다. 이런 내막은 전쟁이 끝난지 15년 후 미국 상원의 특별 조사로 밝혀졌다.
통찰력이 있는 역사가라면 밸푸어 선언 속에 감춰진 영국 정부의 책략을 간파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밸푸어 선언은 독일에 거주하는 유태인의 봉기를 선동하는 메시지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기밀로 취급되어야 할 중대한 외교정책이 곧바로 신문에 공개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적국 내부의 반란을 획책했음은 밸푸어 선언에 앞서 실행된 맥마흔(McMahon) 선언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1914년 11월 1일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고 11월 5일에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여 투르크는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이던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은 투르크 제국의 메카(Mecca) 지역 태수였던 아랍인 족장 후세인 빈 알리에게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 차례나 서신을 보내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을 촉구하면서 영국이 아랍민족의 독립을 지원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영국의 선동에 넘어간 후세인은 1916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책략을 독일에 적용한다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킬 세력으로 유태인이 있다. 2천 년 동안 박해 받아온 유태인들은 태생적으로 지배 체제에 반항적인 혁명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서양 역사에서 많은 반란과 혁명의 배후에는 유태인이 있었다. 밸푸어 선언 닷새 뒤 1917년 11월 7일에 일어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도 주도 세력의 대다수가 유태인이었다. 밸푸어 선언이 신문에 공개됨으로써 영국이 유태국가 건설을 약속한 사실을 알게 된 독일의 유태인들은 영국의 승리를 원하게 될 것이다. 독일에서도 금융계를 장악하고 있는 유태인들은 독일 정부의 전비 조달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며 은밀히 반란을 준비할 것이다. 이것이 밸푸어 선언의 노림수로 보인다.
1918년 7월 동맹군 지배 지역
1918년 11월 7일,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연합국이 휴전회담을 시작했다. 하필 볼셰비키 혁명 1주년 기념일인 이 날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서 유태인 공산주의자 쿠르트 아이스너 (Kurt Eisner)가 군중봉기를 선동하여 혁명을 일으켜 국왕 루트비히 3세를 추방했다. 11월 8일 아이스너는 바이에른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하고 수상에 취임하여 빌헬름 2세의 퇴위를 요구했다.
이 여파로 11월 9일 베를린에서 유태인이 대다수인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주도한 총파업이 일어나자 막시밀리안 폰 바덴 수상은 공화국을 선포하여 빌헬름 2세를 퇴위시키고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인 유태인 에베르트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다음날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 제국과 바이에른 왕국(붉은 색)
사회민주당 정권은 수상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비롯하여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 내무장관 휴고 프로이스, 재무장관 에드바르트 베른슈타인 등 핵심 각료들이 유태인이었다. 11월 11일 독일 정부는 항복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에베르트는 1919년 2월 11일 의회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 밖에도 많은 유태인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패전 후 독일에서는 유태인이 독일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었고 마침내 열렬한 반유태주의자 히틀러가 집권하였다. 독일의 갑작스러운 항복이 군사적 패배 때문이 아니라 혁명 때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주류역사는 독일군의 패전으로 인해 11월 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서술하면서 "등 뒤의 비수"를 날조된 유언비어라고 강변해 왔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 탓에 패전 후 독일에서 반유태주의가 들불처럼 퍼져나간 배경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오로지 광적인 인종주의자 히틀러의 선동 탓으로 돌리면서 히틀러의 최면술에 독일 국민이 집단마취되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내세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역시 히틀러 한 사람의 침략적이고 파괴적인 광기 탓으로 돌려왔다. 이런 식의 설명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적 선전이다.
1918년 11월의 독일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유태인이고 영국의 밸푸어선언과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이 독일 유태인의 봉기를 촉발시켰다. 밸푸어선언을 알게 된 독일의 유태인들은 유태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영국이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밸푸어선언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볼셰비키혁명의 주도세력은 유태인이었고 이에 자극 받은 독일의 유태인들은 독일에서의 유태인 혁명에 나선 것이다.
E. H. Carr의 말을 빌리면 역사학은 "왜(why)" 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이다. 그 해답은 사실들 사이의 인과관계에 기초해야 한다. 독일사에서 1918년의 11월 혁명과 패전, 그로 인해 일어난 유태인 배척운동과 히틀러의 집권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는 유태인의 반란을 선동한 밸푸어 선언에서 출발한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점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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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자료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