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에 기록된 위세가(魏世家) 30-3

사마천/司馬遷 (BC145 ~ BC86)
(사진출처 : 다음백과)
위환자의 손자가 위문후(魏文侯) 사(斯)이다. 위문후(魏文侯) 원년 기원전 424년은 섬진(陝秦)의 영공(靈公) 원년이다. 위문후와 한무자(韓武子), 조환자(趙桓子), 주위열왕(周威烈王)은 동시대 사람이다.
문후(文侯) 6년 기원전 419년 소량(少梁)에 성을 쌓았다. 13년 기원전 412년 태자 격(擊)을 시켜 번(繁)과 방(龐) 두 땅을 공격하여 그 곳의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살게 했다. 16년 섬진을 공격하여 임진(臨晉)과 원리(元里)를 빼앗아 그곳에 성을 쌓았다.
문후 17년 기원전 408년 중산국을 공격하여 멸했다. 이어 태자 격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조창당(趙倉唐)으로 하여금 보좌하도록 했다.
태자 격이 문후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 전자방(田子方)을 조가(朝歌)에서 만났다. 태자가 수레를 옆으로 비키게 하여 길을 양보하게 하고 자신은 수레에서 내려서 인사를 드렸다. 전자방이 예를 갖추지 않고 수레를 탄 채로 답례도 하지 않으며 지나쳤다. 태자가 전자방이 탄 수레의 뒤를 쫓아가 말했다.
“ 부귀한 자가 교만해야 하는가? 아니면 빈천한 자가 교만해야 하는가?”
전자방이 대답했다.
“ 빈천한 자가 교만한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무릇 제후가 교만하게 되면 나라를 잃고, 대부가 교만하게 되면 그 종족을 잃는다. 그러나 빈천한 자는 모시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의 뜻에 맞지 않고, 또한 자기의 말이 쓰이지 않게 되면 초나라나월나라 등 다른 나라로 신발을 거꾸로 신고 가버리면 그만인데 어찌 부귀한 자와 빈천한 자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자 격이 마음이 상해 물러갔다. 위나라가 군사를 내어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다가 정나라에 이르러 다시 돌아갔다. 낙음(雒陰)과 합양(合陽)에 성을 쌓았다.
문후 22년 기원전 403년 위(魏), 조(趙), 한(韓) 나라의 수장이 제후(諸侯)의 반열에 섰다.
문후 24년 기원전 401년 진나라가 공격해 와서 양호(陽狐)에 이르렀다.
문후 25년 기원전 400년 태자 격이 아들 앵(罃)을 낳았다.
문후가 자하(子夏)에게 경전(經典)과 기예(技藝)를 배우고, 단간목(段干木)은 손님에 대한 예를 취했다. 그가 단간목이 사는 고향을 지날 때는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식례(軾禮)를 올리며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섬진(陝秦)이 오래 전부터 위나라를 공격하여 잃어버린 서하의 땅을 찾으려고 했으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위나라 군주가 현자들을 특별히 존중하여, 위나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위군(魏君)의 어짐과 후덕함을 칭송하며 상하가 모두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위나라를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문후가 이로 인해서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문후는 서문표(西門豹)를 업군(鄴君)의 태수(太守)에 임명하여 하내에 치세가 이루어졌다.
위문후가 이극(李克)에게 물었다.
“ 선생께서는 예전에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시기를 ‘ 집안이 곤궁하게 되면 좋은 부인을 생각하게 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비어 있는 재상의 자리에 위성(魏成)과 적황(翟璜) 두 사람 중 누구를 임명하는 편이 좋겠습니까?”
이극이 대답했다.
“ 신은 듣기에 ‘신분이 천한 자는 존귀한 사람들이 꾀하는 계획을 대신할 수 없고, 사이가 소원한 사람은 친근한 사람들이 꾀하는 계획을 대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의 직분은 궁문 밖에 있으니 감히 그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출처 : 세계위씨종친회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