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Obelisco Flaminio(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
가. 개요
이 탑은 로마의 Flaminio Obelisk, 즉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Obelisco Flaminio)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것이다. 원전 13세기경 파라오 Ramesses II 시대에 세워졌다.후에 로마 황제 Augustus가 이집트에서 로마로 옮겨왔다.높이는 약 24m이며, 받침대와 십자가까지 포함하면 약 36m에 이른다. 현재는 로마의 Piazza del Popolo 중앙에 서 있다. 사진 속 오벨리스크 뒤에 보이는 두 개의 반원형 분수와 오른쪽의 종탑도 포폴로 광장의 특이다. 따라서 이 탑의 이름은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Flaminio Obelisk)다. 로마에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 중 하나다.
나. obelisk(오벨리스크)
1) 개요
오벨리스크(ὀβελίσκος, obelisk)는 고대 이집트 왕조에서 태양 신앙을 상징으로 세웠던 거대 기념비의 일종이다. 대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사각뿔(피라미드꼴)의 형태를 띈다.
이집트 중왕국 시대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후 파라오의 통치 기념제 때에 신전 탑문 앞에 한 쌍이 건립되었다. 건축 의도에 대해서는 다산을 기원하는 구조물이 아닐까 하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학자들은 오벨리스크가 남근을 뜻하는 모양일 것이라 주장한다. 농경 사회에는 성관계가 쾌락 이전에 가정과 나라를 위해 필요한 행위였다. 또한 성행위는 고대 종교나 민간 풍습에서 흔히 풍요를 상징하는 주술로도 사용된다. 여러 종교 혹은 다신교 문화에서 농업의 신이 다산을, 그리고 다산이 왕성한 성생활로 연결되는 경우는 흔하다.( 바알 등)
2) 소재지
아래는 이집트 밖에 반출된 오벨리스크 위치이다.
이탈리아 로마 13개
프랑스 파리 콩코르드 광장 1개
영국 런던 템스 강변 1개(클레오파트라의 바늘)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 1개(클레오파트라의 바늘)
튀르키예 이스탄불 1개
로마에 있던 악숨 오벨리스크 1기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3) 그 외
미국 워싱컨 D.C.에 있는 워싱턴 기념탑
보스턴의 벙커힐 기념탑
라스베가스
러시아의 레카테린부르크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그 지역에서 태양신을 상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특별히 오래도록 기념할 이유를 기리기 위해 obelisk를 세워 놓고 기념하고 있다.
4) 2,000년 전 로마는
고대 로마의 밤문화를 집중 조명한 최신 연구에 관심이 모였다. 역사와 고고학, 인류학 전문가들이 들여다본 예전의 로마는 욕망과 폭력이 뒤엉킨 혼돈의 도가니였다.
스페인 그라나다대학교 연구팀은 24일 조사 보고서를 내고 약 2000년 전 로마는 대리석 신전이 늘어선 웅장하고 기품이 넘치는 도시였지만 일몰 후에는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지대였다고 전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밤은 활기가 넘치면서도 매우 위태로운 양면성을 가졌다. 당시 밤은 낮의 엄격한 신분제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운 시간인 한편 약탈과 엄청난 소음, 심지어 황제 스스로가 폭행에 가담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라나다대 에바 마리아 박사는 “대리석이 깔린 거리와 거대한 수도교 등 로마는 찬란한 햇빛이 가득한 낮의 이미지가 강하다”며 “다만 해가 지면 로마는 전혀 다른 도시의 얼굴을 했다. 엄격한 사회계층이 일시적으로 느슨해지는 밤은 술집이나 공중목욕탕이 성업했고 저택마다 연회가 열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로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 로마는 깊은 어둠이 거리를 뒤덮었다. 신분 격차가 심한 사회의 구조적 결함이 밤을 틈타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났다”며 “폭행과 강도 등 범죄는 물론 오물 투척 등 비위생적인 문제가 심각했다”고 덧붙였다.
로마에 관한 여러 역사서와 유적 발굴 조사서를 분석한 연구팀은 도시를 완벽하게 지배하려는 권력의 한계가 밤에 여실히 드러났다는 입장이다. 좁은 골목의 약탈과 습격은 일상적이었고, 심지어 5대 황제 네로는 평민이나 노예로 변장해 밤의 폭동에 가담했다.
에바 박사는 “네로는 귀가하는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해 상처를 입혔고 저항하는 자를 하수구에 내던지는 잔혹한 행위를 반복했다”며 “경호를 맡은 검투사나 전직 병사가 폭력에 가담해 일반 시민들은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붐비는 술집도 소란의 중심지였다. 대 플리니우스는 저서에 과음한 이들이 매일 밤 싸웠고 무질서한 행동을 조장했다고 적었다”며 “로마 밤거리를 걷는 것은 말 그대로 모험이었다. 서민들이 살던 공동주택 인술라(insulae)는 하수도가 없어 주민들은 창문을 통해 소변이 담긴 병을 던졌다”고 언급했다.
연구팀은 로마의 밤거리는 수많은 마차가 이동하며 소음도 대단했다고 추측했다. 율리우스법은 로마 거리의 정체를 막기 위해 낮 동안 화물을 실은 마차의 통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 규제로 모든 물류가 야간에 집중됐다.
에바 박사는 “짐을 잔뜩 실은 마차의 바퀴가 돌바닥을 때리는 소음은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깊은 잠을 깨울 정도였다는 대목이 역사서에 기록됐다”며 “보안을 위해 조직된 야간 경비대가 있었지만 현대와 같은 전문 조직이 아니다 보니 수많은 혼란을 막기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로마의 밤이 원래 엉망인 것은 아니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군중 관리를 위해 준군사조직을 창설했다. 대형 화재를 계기로 소방대가 소집됐고 야간 순찰과 경범죄 단속, 범인 확보 같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규모가 7000명까지 불어났다.
다만 5대 황제 네로에 이르러서는 밤의 치안은 와르르 무너졌다. 정치가나 부유한 상인은 검투사를 고용해 스스로를 보호했지만 힘없는 시민들에게 로마의 밤 외출은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무모한 행위였다고 연구팀은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