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안코나 지방의 코리날도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루이지 고레티와 어머니 아순타 카를리니 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신앙심이 무척 깊었으나 워낙에 가난하여 그녀가 6세가 되었을 때, 농장을 포기하고 이사를 하여 다른 사람의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며 생활하게 되는데, 조금이라도 자신의 땅을 갖기 위해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농장 주인은 그가 하던 일을 맡을 다른 사람을 구했는데, 새로 온 사람은 ‘조반니 세레넬리’로 그에게는 17살 된 ‘알레산드로 세레넬리’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10살 되던 해 병약한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여읜 후 어머니와 언니, 남동생들이 들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는 집 안 청소와 요리 바느질 그리고 아직 갓난아기였던 여동생을 돌보며 지내게 되는데, 그녀와 가족들에게는 이런 나날이 고단하고 힘든 삶이었지만, 집에서는 항상 웃음이 끊이질 않았는데, 가족들은 서로에 대한 우애가 깊었으며, 또한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상냥하고 예의 바르며 총명했던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마리에타(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바다의 별 Maris Stella’의 축약형)로 불렸으나 시골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는 얻지 못했습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편이었던 그녀는 첫영성체를 할 나이가 되었으나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알려주는 기도문을 암송하며 어머니 친구의 도움을 받아 교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녀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본 교회의 신부도 자주 그녀를 찾아 교리를 가르쳐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1902년 5월 29일 그녀는 감격스러운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미사 중에 본당 신부의 강론을 들으면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순수한 영혼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며 성모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늘 기도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그해 7월 5일 오후, 그녀는 평소처럼 집안일을 하며 막내동생을 재워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농장에서 일하며 이웃해 살던 조반니 세레넬리 가족과 그녀의 어머니도 모두 일을 나간 뒤였습니다. 그때 일하러 가던 중 핑계를 대고 돌아온 18살의 알레산드로는 셔츠를 기워 달라며 마리아에게 다가오더니 베란다에 앉아 바느질하던 그녀를 강제로 끌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칼로 위협하며 그녀를 덮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큰소리로 “안 돼! 알레산드로. 이건 하느님께 대죄를 짓는 거야!”라고 소리치며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알레산드로는 처음에는 그녀의 목을 조르다가 “너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라며 그녀가 소리치자 이성을 잃은 알레산드로는 결국 사정없이 칼을 휘두르고 말았습니다. 크게 상처를 입은 그녀는 문 쪽을 향해 달아나려 했지만, 문을 나서기도 전에 또다시 그의 칼에 찔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갓난아기였던 여동생 테레사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소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나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자, 알레산드로의 아버지와 그녀의 어머니가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집으로 달려와 보니 그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레산드로의 아버지와 그녀의 어머니는 서둘러 그녀를 업고 가까운 마을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그녀의 상태는 너무나 위중해서 의사가 손을 쓰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녀의 몸에는 14군데나 깊은 상처가 있었고 출혈이 심해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에 마취도 하지 못한 채 수술에 들어갔으나 의사들도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수술이 진행되는 도중 그녀는 잠깐 의식을 되찾았는데,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무의미한 치료는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마리아야, 하늘나라에 가서 나를 생각해다오.”라고 말하자 그녀는 의사를 쳐다보며 “글쎄요, 누가 먼저 하늘나라에 갈지 어떻게 알겠어요?” 의사가 “바로 너란다, 마리아야.”하고 말하자 그녀는 “그렇다면 전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생각하겠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소식을 듣고 노자성체를 주기 위해 달려온 신부는 그녀에게 성체를 영해 주면서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처럼, 너를 이토록 참혹하게 만든 알레산드로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겠느냐?”라고 묻자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할 겁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그를 용서해 주실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정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그녀는 1902년 7월 6일 오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그녀의 덕행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순교자다운 죽음은 그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전 지역으로 널리 알려지며 그녀의 시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게 됩니다. 한편 알레산드로는 로마의 법정에서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종신형 대신 30년 노동형을 받아 복역하게 되었는데, 지역 지구장인 ‘조반니 브란디니 몬시뇰’이 그가 수용된 교도소를 방문하기 전까지 3년 동안 전혀 뉘우침 없이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한 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녀가 백합꽃을 모아서 자신에게 가져다주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꿈을 꾸게 되자 다음날 교도소를 방문한 몬시뇰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그제야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면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역을 마치고 석방된 후 알레산드로는 이미 노쇠한 그녀의 어머니 ‘아순타’를 찾아가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하게 되는데, 어머니는 딸이 이미 그를 용서했으니 자신 역시 용서한다며 그를 껴안아 주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두 사람은 함께 미사에 참례하여 나란히 성체를 모셨는데,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알레산드로는 매일 그녀에게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였으며, 그녀를 ‘나의 꼬마 성녀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알레산드로는 그 후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재속 회원이 되어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접대원과 정원사로 봉사하며 살았습니다.
1947년 4월 27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마리아 고레티의 시복식에서 알레산드로는 시복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 되기도 했는데, 교황 ‘비오 12세’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거의 혼절하며 “교황 성하께서 다가오시는 것을 보자 저는 기도했습니다. 성모님,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성하께서는 당신의 손을 제 이마에 얹고는 ‘축복받은 어머니, 행복한 어머니, 복녀의 어머니!’하고 부르셨습니다.”라고 말하며 교황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50년 6월 24일 교황 비오 12세는 마리아 고레티를 시성하면서 그녀를 일컬어 “20세기의 성녀 아녜스”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남은 네 명의 자녀들과 함께 시성식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는 알레산드로 세넬리도 참석하여 주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의 유해는 로마 남쪽 네투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고레티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데, 일각에서는 그녀의 유해가 부패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어서, 성당의 제대 밑에 있는 동상 안에 그녀의 시신이 보관되어 있으며, 살아생전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이 동상을 본 몇몇 사람들은 이것이 성녀의 육신이라고 착각하여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합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모든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히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성도덕이 문란해지는 현대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