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윤극영과 '반달'
'푸른 하늘 은하수~' 첫 창작 동요 100살 됐어요
관동대학살과 큰누나 사망 겪었지만
샛별 등대 같은 광복 희망 담았어요
일부 중국인 “중 전통 동요” 우기기도
이 노래의 제목을 한번 맞혀 보세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노래는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고 '쎄쎄쎄' 놀이에도 빠른 박자로 활용되지만 의외로 제목을 맞히기 어려운 노래입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로 알고 있는 사람도 꽤 많아요.
정답은 노래 가사에 나오지 않는 '반달'입니다. 마치 바다 같은 넓은 밤하늘을 떠다니는 배 모양으로 생겼지만 돛대도 삿대(배질할 때 쓰는 긴 막대)도 당최 보이지 않는 반달을 노래한 거지요. 올해는 한국 첫 근대 동요로 인정받는 '반달'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관동대학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청년
1924년 어느 날 경성(지금의 서울), 한 청년이 우울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어요.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봤죠. 아직 낮인데도 하얀 조각달이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었고, 이 때문에 더욱 슬퍼졌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아동문학가이자 동요 작곡가로 이름을 남긴 스물한 살 윤극영(1903~1988)이에요.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요? 부친의 권유로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간 촉망받던 젊은이 윤극영은 도무지 법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우에노 음악학교 등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무장한 일본인이 숱한 조선인을 참혹하게 살해한 관동대학살이 일어났고, 이때 윤극영도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푸라기 위에 누워 있었고 눈을 들어 보니 말 머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마구간에 갇혔던 것이죠.
간신히 살아나 고국으로 돌아온 윤극영은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고 합니다. 관동대학살 소식을 들은 부산 사람들이 구름처럼 항구에 몰려들어, 귀국하는 동포들을 위로한 겁니다. "아이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들이 입에 물려주는 떡 한 조각을 꾹꾹 씹으면서 윤극영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고 합니다.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뒤인 1924년 10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어머니가 흐느끼면서 가슴을 치는 것이었어요. "이를 어쩌면 좋으냐! 네 누나가 그만…." 윤극영이 다섯 살 때 시집간 큰누나가, 일제가 재산을 몰수한 집에서 고생만 하다 젊은 나이에 숨진 것이었어요.
이렇게 나라 잃고 타국에서 핍박당한 아픔에 혈육의 죽음까지 겹쳐 복받치는 설움을 안은 윤극영. 그런데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말없이 뜬 조각달이 눈에 띄었던 겁니다. '큰누님은 저 쪽배를 닮은 반달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가겠구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어떤 가사와 곡조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 바로 동요 '반달'이었어요. 한국 동요의 시작이 1924년 바로 이때입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는 반달'이란 바로 나라를 잃고 정처 없이 헤매야 하는 처지인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로 시작하는 2절을 쓰던 윤극영은 노래 마지막 부분에서 막혀 한참 고민했다고 해요.
그때 떠오른 것이 부산항에서 떡을 먹여 주던 동포들 얼굴이었습니다. '그래. 아무리 슬프고 암울해도 희망은 있어!' 그러고 다음 가사를 써내려 갔습니다.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이후 수많은 동포는 그 노래에 한(恨)과 설움, 그리고 결코 놓을 수 없는 미래의 희망을 꾹꾹 담아 불렀습니다. 희미하게나마 멀리서 등대처럼 빛을 내는 샛별을 찾아 반드시 광복을 이뤄내겠다는 염원이었죠.
설날, 고드름, 따오기… 국민 마음 어루만져
윤극영은 어린이 운동가 방정환이 결성한 색동회 창립 멤버입니다. 조선 가사를 붙인 찬송 가곡이나 일본 동요 말고는 딱히 어린이가 부를 노래가 없던 시절에 본격적으로 동요 창작을 시작한 것이죠. '반달'을 만든 1924년 어린이 합창단 '따리아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통한 어린이 문화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26년 만주에 가서 음악 교사로 일했고, 이후 만주와 경성·일본을 오가며 활동했습니다. 늘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고, 일제 말 그의 행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광복 후엔 중국에서 손수레를 끌다가 남한으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1970년대 다시 결성한 색동회를 중심으로 무궁화 보급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가 평생 지은 수많은 동요는 어린이이거나 한때 어린이였던 모든 국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노래였습니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설날)라며 새해를 맞는 기쁨을 북돋웠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고기잡이)라며 세상에는 슬픈 동요만 있는 것이 아님을 일깨웠습니다. 고드름(유지영 작사), 따오기(한정동 작사), 기찻길 옆, 어린이날 노래, 나란히 나란히(이상 윤석중 작사) 역시 그가 작곡한 주옥 같은 동요입니다.
'반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윤극영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별세했습니다. 서울시는 그가 살았던 강북구 수유동 집을 2013년 매입하고 '서울시 미래 유산'으로 지정해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선 '반달'을 1950년대 조선족 가수가 번역해 불렸는데, 나중엔 '소백선(小白船·하얀 쪽배)'이란 제목으로 음악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일부 중국인은 '중국 전통 동요'라 우긴다고 해요. 자칫 동북 공정, 한복 공정, 김치 공정에 이어 '반달 공정'까지 나올 판입니다. 끝으로 '동심 파괴'가 될 수도 있는 얘기를 덧붙이자면, 실제로 반달과 은하수를 한눈에 볼 수는 없다고 합니다. 달빛 때문에 은하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반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지닌 동요 작곡가 윤극영. ‘반달’을 비롯해 동요 600여 곡을 남겼어요.
-조선일보 2024.01.04.(목). A27면, 신문은 선생님, 유석재 기자 / 기획·구성=장근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