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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부, 종교연합은 가톨릭이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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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교회의 에큐메니칼
<가톨릭이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다>
‘가톨릭’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ός)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그 의미는 “치우침 없이 공평하다”는 뜻의 ‘공번(共繙)되다’ 또는 ‘보편(普遍)되다’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이미 2세기 초부터 사용된 흔적은 있으나 언제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1054년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이후 동방교회는 스스로를 ‘정교회’(Orthodox)라고 불렀고 서방교회는 ‘가톨릭교회’(Catholic)라고 자처하였다. 주후 100년을 전후로 시작된 로마 제국의 치열한 기독교 박해가 200년 이상 계속 되다가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내린 밀란 칙령에 의해 교회가 자유를 얻은 이후, 기독교의 힘은 국가가 무시할 수 없는 큰 세력으로 급속히 팽창되었다.
그러다가 380년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뒷받침하는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거대한 로마제국 안에 교회의 세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문제는 곧 국가의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폴, 로마 등 5대 총대교구로 나뉘어서 각자 권한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전체 회의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정치적 문제와 제국 내의 교구간의 분쟁들이 발생하면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황제가 공의회(公議會)를 소집하였다. 종교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가 혼합되어 제국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공의회를 소집하게 되는 것이었다.
<최초의 공의회 – 니케아 총회>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정통성과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의 연합(에큐메니칼)을 위한 당위성과 그에 따른 이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가톨릭은 예루살렘 교회를 어머니 교회로 하여, 하나의 교회가 되자는 운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나중에는 로마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였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현재 터키 이즈니크)에서 열렸다. 니케아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교리 논쟁이 확대되면서 콘스탄틴 황제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인 알렉산더가 교리상의 문제로 아리우스 장로를 정죄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교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교회 자체적으로 해결이 쉽지 않게 되자 황제가 교회 회의 개최를 선언하고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에큐메니칼 역사에서 이 회의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회의를 통해서 제국 안에 있는 교회와 교리들을 통일성 있게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곧 교회가 정하는 정통 신조를 따르면 정당한 교회이고, 정통 신조를 부인하면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정해지고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과 이단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결과적으로 가톨릭이 정하는 교리를 따르지 않으면 이단이 된다는 결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이 단일교회요 세계교회라는 절대적 위치 때문에 생겨난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한 절대적 위치를 고수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가톨릭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가 나타나면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단 배척운동과 마녀사냥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동방정교회, 개신교회 등과의 일치와 화해 운동을 펼치기까지 계속되었다.
2.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톨릭 역사를 통해서 21회의 공의회가 열렸다. 그 중에서 바티칸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회의를 바티칸공의회라고 한다. 그런데 1차 바티칸 공의회는 유럽과 미국의 주교들만 참석을 하였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2차 바티칸공회의는 세계적인 규모로 열렸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이 개신교와 타종교에 대하여 포용성과 개방성을 표명하는 획기적인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역사에 있어서 2차 바티칸회의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2차 바티칸공의회를 심도 있게 살펴보는 것은 본 주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교회의 공의회란 무엇인가?>
‘공의회’라고 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교리, 규율, 전례와 생활에 대하여 토의하고 결의하기 위하여 모인 전 세계 주교들의 집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교들의 집회라도 교황이 소집하고 인준해야만 공의회라 부르게 된다.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결의문을 인준할 경우, 공의회의 결의문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조건 없이 따라야만 한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구시대의 형식에 집착하던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현대적 교회로 옮겼을 뿐 아니라, 이제껏 가졌던 교회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회의는 1962년 10월 11일에 소집되어 1965년 12월 8일에 끝났는데, 실제 토론 기간은 9월 중순부터 12월 초순에 걸쳐 매년 3개월씩 진행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특징>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이전의 회의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들이 나타났다.
(1) 최초의 세계적인 공의회 – 그 때까지 있었던 21번의 의회가 있었는데 2차 바티칸공의회는, 전 세계를 포함하는 첫 번째 공의회였다. 19번째 공의회인 트렌트공의회(1545-1563)까지는, 유럽에만 가톨릭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주교들만 참여하였고,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는 유럽과 미국의 주교들만 참여했다.
그러나 제2차에는 유럽, 북미, 중남미, 아프리카, 대양주 그리고 아시아의 주교 등 전 세계의 주교들이 참여했다. 가톨릭교회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규모의 에큐메니칼 회의였던 것이다. 개회일에는 2,540명의 주교가 참여했으며, 준비에 참여한 위원과 고문들의 수도 900여 명에 달하였다.
(2) 처음으로 교회 외적인 문제에 큰 관심을 두었던 공의회 – 이 공의회는 다른 공의회와는 달리 교회 내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외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교회 생활의 혁신을 논의하였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분열과 일치에 대하여 고뇌하고 일치를 추구했다. 그리고 세속사회의 정신적, 물질적 고뇌와 관계 개선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것은 그러한 세속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하느님과 교회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3) 정치적 분쟁에서 자유로웠던 공의회 – 이전의 공의회는 종교 정치적인 세력이 개입되어 가톨릭을 옹호하고 견지하는 분위기였다. 특별히 트렌트공의회에서는 종교개혁에 관련된 찬반 의견에 있어서 정치 세력이 압력을 가했던 회의였다. 1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반대하는 유럽 정치의 영향으로 회의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회와 교회의 조화롭고 상호 이해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이 공의회에는 비가톨릭 성직자와 전문가들이 많이 참여하였는데, 러시아 정교회, 콥트교회, 시리아, 에디오피아,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퀘이커, 감리교회 등 많은 비가톨릭교회의 대표들이 참관자로서 참여하여 회의체에서 분배되는 모든 자료들을 받고, 총회 토의에도 참여했다. 이들의 숫자가 1962년의 제1회기에는 50여 명이었으나, 1965년의 4회기에는 100여 명이나 되었다.
<가톨릭의 변신>
교황 요한 23세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 강연에서 그 목표를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현대화)라고 표현하였다. 가톨릭교회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대에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쇄신하여 시대적 상황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가톨릭을 지배했던 세계관은, ‘역사와 시대는 변해도 교회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교회는 불변하는 것이고 인간이 교회에 의하여 변해야 한다는 관점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확신하는 교리, 예식, 규율,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변화’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종교통합이라는 그들의 거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변신이 불가피했고, 그 변화가 시작된 시점이 바로 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회의에서 16개의 문헌이 작성되었는데, 내용은 전반적으로 여러 분야의 개혁 목표가 포함되어 있었다. 개혁 없이는 현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새로운 가치들을 제시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와 타종교를 포용하고 흡수하기 위하여 현대적 교회의 새로운 가치들을 다양한 표현으로 제시하였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갈라진 교회나 타종교와 대화하여 화해, 일치, 협력을 추구한다.
②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지지한다.
③ 지역 문화를 존중하고 교회의 모든 면에 토착화를 도입한다.
뿐만 아니라 이전 공의회들과는 달리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대항적, 전투적 언어’보다 ‘화해적이고 협력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정죄하는 언사’보다 ‘설명적 언사’를 사용하였고, 비난하는 언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공의회 문헌 중 처음으로 6개의 사과하는 고백의 언사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들이다.
① “공산주의 발생에 그리스도인의 부분적 책임이 있다.” (사목 19항).
② “교회가 갈릴레오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다.” (사목 36항).
③ “16세기 교회 분열의 책임은 양측에 있다.” (일치 3항).
④ “분열 이후에 일치 노력의 등한은 잘못이다.” (일치 7항).
⑤ “교회가 과거에 종교자유를 침해한 것은 반복음적이다.” (종교자유 12항).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있었던 가톨릭의 이러한 파격적인 변신의 의미가 무엇일까? 전 세계의 기독교와 기타 모든 종교들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한 발 양보한 것으로 보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3. 가톨릭교회가 에큐메니칼 깃발을 들고 행진하다
가톨릭과의 사이의 높은 장벽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교회는 동방 정교회이고 그 다음은 개신교회이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과도 큰 장벽들이 가로 놓여 있다. 특별히 유대교와는 오래 묵은 감정의 골이 깊기 때문에 이 문제도 종교연합의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가톨릭이 이러한 장벽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해결해 나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동방 정교회와의 갈등 해소가 시작되었다>
동방 정교회라는 것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발전되었던 비잔틴 문화 중심의 가톨릭교회가 서쪽 로마 지역에 속해 있던 로마 문화 중심의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만들어진 가톨릭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은 AD 1세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중세기 내내 갈등을 겪으면서 지나오다가 1054년에 마침내 나누어진 것이다. 이 분열의 배경에는 교리적인 차원을 넘어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 그리고 정치적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이 세계 종교를 통합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는 동방 정교회와 화해하고 연합하는 것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두 교회 사이의 침묵과 긴장을 깨고 2003년 그리스를 방문하여 중세 시대에 있었던 정교회에 대한 가톨릭의 십자군의 약탈을 사죄하여 정교회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그러나 두 교회 사이에는 풀어야 할 많은 난제들이 산적해 있어서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최근, 2016년 2월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 동방정교회 수장 키릴 총대주교가 극적으로 만나 화해를 약속하였다. 교황은 그 만남 직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교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통합의 길을 걸어 나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키릴 총대주교도 이에 화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야기를 나눈 뒤 우리 두 교회가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양 교회가 일단 방향을 설정하는 데는 일치를 본 것이다. 이제 시기와 방법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개신교와의 연합도 이루어지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분리되어 나간 개신교회를 사실상 오랜 세월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울 만큼 큰 변화를 가져왔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의문 중, “갈라진 교회들에 대한 견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
“단일하고도 유일한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초기부터 분열이 생겼던 것이며 … 후세기에 와서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단체들이 가톨릭교회와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지게 되었으며 때로는 양쪽 사람들에게 탓이 있었다. 이런 단체들 속에서 지금 태어나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을 분열의 죄과로 몰아세울 수는 없으므로, 가톨릭교회는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바이다.”
가톨릭교회는 오직 하나의 교회인 자신들의 교회로부터 개신교가 갈라져 나갔다고 말하면서, “갈라져 나간 형제들”이란 표현을 거듭 사용하고 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개신교회를 종교개혁자들이 일으킨 새로운 신앙으로서의 변혁이 아니라, 약간의 차이점을 해소하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관계로 보기 때문인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화합과 연합을 줄기차게 진행시키고 있는 여러 개신교의 단체들 가운데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WCC이다. 가톨릭이 아직은 WCC의 정식 회원은 아니지만, ‘신앙과 직제위원회’에는 정식 회원으로 참여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5월 2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 교단들이 서울시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의 활성과 증진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가칭, 한국신앙직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창립총회에는 예수교 장로회 통합, 기독교 대한 감리회, 한국기독교 장로회, 한국 구세군, 대한 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 기독교 한국루터회, 한국교회연합회 등 유수한 단체들이 참여하여 막강한 세력으로 천주교와 함께 직제를 통일성 있게 개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타종교를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발표한 매우 의미심장한 선언은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이다. 전세계의 종교를 하나의 통일된 개체로 만들기 위한 매우 집요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이 내용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타종교에 대한 선언이며, 바티칸 제2차 공의회의 결정판이기도 하다.
이 선언의 서론부에 묘사된 “마음속의 종교”는 하나 됨의 의미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인류가 날로 더욱 긴밀히 결합되고 여러 민족들 사이의 유대가 더욱 강화되어 가는 현대에 있어서, 교회는 비 그리스도교적 타종교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바이다.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사이의 일치와 사랑을 도모해야 할 사명감을 느끼며 교회는 여기서 특히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 즉 모든 사람을 공동 목적으로 이끌어 주는 것들을 포함한다. 사실, 여러 민족들은 단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전 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니(사도 17,26 참조), 모든 민족들은 단 하나의 기원을 가졌고 또한 단 하나의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와 선하심의 증거와 구원의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것이고(사도 14,17; 로마 2,6-7; 1디모 2,4 참조),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천상 성도(聖都)에서 다시 모이게 될 것이며 거기서 여러 민족들이 하느님의 빛 속에 거닐 것이기 때문이다(묵시 21,23 이하 참조).”
타종교에 대한 이러한 입장 변화에 따라 ‘힌두교, 불교, 기타 종교’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발표도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오랜 반목으로 일관해 왔던 ‘회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교회는 또한 회교도들도 존경하고 있다. 생명의 실존자, 자비롭고 전능한 천지의 창조주, 사람들과 이야기 하시는 유일신을 그들도 흠숭하며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은 그들 신의 비밀한 결정에도 순종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역사 과정에 있어서 가톨릭 신자들과 회교도들 사이에 불목과 원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교회 회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바이니, 과거를 잊어버리고 서로 이해해 주기를 진실로 힘쓰며 모든 이에게 사회 정의와 윤리적 선과 나아가서는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옹호해 주고 촉진시켜 주기를 바란다.”
<유대교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시도>
유대교는 메시야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막연한 이유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증오해 왔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무슬림에게 빼앗긴 성지 탈환을 위해 1096년에 시작한 십자군 전쟁 시에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다.
때로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이에 대항하는 유대인들은 개인적 죽음을 감수하거나 집단 자살까지 감행하였다. 결과적으로 가톨릭과 유대교는 오랜 세월 동안 갈등과 반목의 관계로 일관해 왔다. 그래서 가톨릭이 세계종교를 통합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유대교와 화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 가톨릭이 먼저 파격적인 양보와 함께 화해의 손길을 보냈다. 이 공의회에서 사용된 유대교를 향한 표현이나 고백의 내용을 살펴보면 매우 파격적이다.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유대교를 포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기독교회의 믿음과 부르심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세(救世) 계획대로 이미 선조들과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다.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경상의 귀결인 듯이 유대인들을 하느님한테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유대인들과의 공동 유산을 상기하며 정신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이요 복음적인 사랑에서 유대인들에게 대한 온갖 미움과 박해와 데모 같은 것을 언제 누가 감행하였든지 간에 차별 없이 통탄하는 바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보면, 가톨릭이 유대교와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또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톨릭이 이렇게 갑자기 유대교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어 유화적인 제스추어를 쓰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곧 종래에는 종교들의 이러한 구분 없이 전체를 가톨화시키는 것이 에큐메니칼의 목표이고, 더 나아가 세계를 통치하려는 것이 가톨릭의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평화와 화합이라는 명분 좋은 에큐메니칼은 전 세계를 하나의 질서를 통합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세계단일정부 수립으로 흘러가는 과정이다.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에큐메니칼의 기초를 만들고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교황이 있다면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이다.
4. 에큐메니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누구인가?>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64대 교황이다. 그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하드리아노 6세 이래 455년 만의 비(非)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이 되었다.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폴란드) 출신의 교황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20세기 교황들 가운데 최연소로 즉위하여 27년간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가톨릭교회 내에서 세 번째로 오래 봉직한 교황이었다.
특이할만한 일은 그의 재위기간 동안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가톨릭이 크게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치세 전반에 걸쳐 해외 방문을 가장 많이 한 교황으로, 전임자들보다 100개 이상의 나라를 더 방문하였다. 세계 역사상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세계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20세기 말 변혁의 시대에 동유럽에서 벌어진 반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였고, 세계 평화와 반전(反戰)을 호소하였다. 생명윤리 등의 분야에서는 가톨릭이 지닌 전통적인 도덕관을 제시하는 등 종교의 범위를 넘어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종교 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시종일관 온건한 태도로 일관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주교 시절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여 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인 “인간 존엄성”과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인 “기쁨과 희망”에 대한 결의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리는 등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에는 대주교로, 1967년에는 추기경에 오르게 되었고,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임종 직전 그는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울지 말고 우리 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라는 말을 하였고 그 말은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친화적인 모습은 오래되고 강고(强古)한 이미지의 가톨릭교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미국의 전직, 현직 대통령들을 포함한 세계의 유수한 정치가 200 여명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놀라운 정치 외교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현대사에 있어서 요한 바오로 2세만큼 세계인의 대중적 지지와 인기를 가졌던 교황은 없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톨릭의 과거에 대하여 회개하다>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에큐메니칼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과 노력에서 출발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던 경험자로서 그는 공의회의 결의내용들을 재확인하면서 타종교와의 화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펼쳤다.
2000년,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 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해 과거 교회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저지른 각종 잘못을 최초로 공식 인정했다. 그는 강론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회개를 받아들여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다. 죄 목록을 일곱 가지 목록으로 만들어 구체적인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① 일반적인 죄 ② 진리에 대한 봉사를 이유로 저지른 죄 ③ 다른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죄 ④ 유대인에 대한 죄 ⑤ 사랑과 평화와 문화 존중의 명목으로 저지른 죄 ⑥ 여성과 소수민족의 존엄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죄 ⑦ 인권과 관련된 죄 등 가톨릭교회의 지나간 과오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다.
가톨릭은 언제나 그들이 정통이며 오류가 없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회개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회개는 가톨릭의 변신을 예고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에 대하여 세계와 기독교, 그리고 유대교는 반색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에큐메니칼을 위한 집요하고 진지한 노력>
진취적이면서도 유연한 그의 면모들은 교회 일치 운동 곧, 기독교의 다양한 신앙전통을 존중하고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거침없이 이루어내는 그의 행보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그의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 중에서 에큐메니칼과 관련된 업적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1982년 영국을 방문하여 엘리자베스 2세와 캔터베리 대주교를 만나 가톨릭교회와 영국 성공의회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를 발전시키기로 합의하였다.
(2) 동서 교회의 분열(1054년) 이후 처음으로 동방 정교회 국가인 루마니아와 그리스 등을 방문하여 정교회 성직자들과 같이 기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교회와 분열된 사건에 대해서도 책임을 반성하였다.
(3) 1986년 로마에 있는 유대교 회당을 방문해 유대인은 그리스도인의 형제라고 불렀다.
(4) 1999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교와 의화(義化) 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구원론에 대해 500년간에 걸쳐 이어온 교리 논쟁을 끝냈다.
(5) 1999년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을 만나 11세기 이후 처음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의 정상이 문명의 화해를 다짐했다.
(6) 2001년 시리아를 방문하여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스크에 들어갔다.
그 이후로 동방정교회, 유대교, 이슬람교 등과의 대화와 연합을 위한 터전을 확고하게 쌓으면서 세계의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는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종교계에서 얻는 지지와 지도력만으로는 에큐메니칼을 완성하기란 쉽지 않다. 정치력이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은 매우 신비한 집단이다. 지구상의 하나의 거대한 교회로도 존재하지만 ‘바티칸’이라는 아주 작은 국가로서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집단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정치 무대에서도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국제 문제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군사력 경쟁이나 경제 제재 등 위협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공산독재체제를 종식하는 데 공헌하였다고 평가받는다. 1982년 교황은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교황청 도서관에서 비밀리에 만나서 ‘거룩한 동맹’(Holy Alliance)을 체결하였다.
함께 협력하여 공산주의를 무너뜨리자는 약속이었다. 2년 후인 1984년 레이건은 미국 헌법의 정신을 무시하고 바티칸과 대사를 교환하고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므로 가톨릭의 나라와 개신교의 나라 사이에 정상적인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후 교황은 폴란드의 자유노조 활동을 주도하던 레흐 바웬사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폴란드 국민 70여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라고 직접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황의 활동과 역할을 힘입어 교황의 모국(母國)인 폴란드로부터 시작하여 철의 장막으로 상징되었던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에 교황이 당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접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매우 짧은 기간 안에 냉전 시대가 종식되고 지구상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찾아가 종전을 설득했고, 1999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에도 특사를 파견하여 “폭력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라며 평화를 호소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에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분쟁 종식을 위한 단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현재 가톨릭의 종교적 정치적 위상은 요한 바오로 2세가 만들어 놓은 터전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화해와 중재의 달인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지구상의 어떤 지도자들 보다 많은 나라들을 방문(117개국)하였는데, 그 모든 방문의 목적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화해”였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례가 없을 만큼, 그가 방문한 곳에는 시종일관 수많은 인파가 집결하였고, 그의 모든 여행 경비는 바티칸이 아니라 교황이 방문한 나라에서 전액을 지급하였다.
교황은 이전에 그 어떤 교황도 다녀간 적이 없는 곳인 멕시코, 아일랜드, 대한민국, 푸에르토리코, 일본 등등 수많은 나라를 방문하였다. 그는 가톨릭과 미묘한 갈등을 가지고 있던 영국, 쿠바, 이집트 등 여러 나라들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2001년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있는 우마이야 모스크를 방문함으로써 이슬람교 모스크를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그가 미국과 수교관계를 맺고 미국을 방문한 것은 장차 가톨릭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있어 미국의 협력을 얻는 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기도 하다. 1995년, 제10차 세계청년대회 기간에 필리핀 마닐라의 루네타 공원에서 집전한 그의 미사에는 600만명 내외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이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수가 모인 것이었다.
2000년, 교황으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였다. 2001년, 카자흐스탄과 아르메니아를 방문하여, 수많은 이슬람교도 청중과 함께 그곳 나라들에서 열린 기독교 전래 1,700주년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2002년에는 교황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이탈리아 의회에서 연설하였다. 이것은, 바티칸과 이탈리아의 해묵은 갈등을 치유한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한 사람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역사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보여준 리더십은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춰진 가톨릭교회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혁혁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으로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종교지도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체로 각인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가톨릭의 부상(浮上)은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부터의 내용에 주목하시라!(계속)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