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속의 고사성어 -73
흥청망청(興淸亡請)
[요약] (興: 흥할 흥. 淸: 맑을 청. 亡: 망할 망. 請: 청할 청)
마음껏 즐기는 모양, 또는 돈이나 물건을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쓰는 것을 의미하며, 연산군에게서 유래함.
[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한국(韓國)의 인간상(人間像) 등.
[내용] 조선 제10대 연산군(燕山君.1476~1506)은 어머니 윤씨(尹氏)가 품행이 사악하다 하여 성종(成宗. 재위1460~1494)에 의해 폐비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계모이자 중종(中宗)의 어머니인 자순대비(慈順大妃)에 의해 길러졌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생모의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되자 충격을 받고 자포자기한 나머지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연산은 채홍사(採紅使. 창기(娼妓) 중에서 아름다운 계집을 뽑는 벼슬아치)와 채청사(採淸使. 처녀 중에서 장래 아름다워질 계집아이를 뽑는 벼슬아치)를 전국에 파견하여 얼굴이 예쁜 기생과 처녀는 물론이고 여염집 아낙네까지 불러올렸다. 그리고 기생은 흥청(興淸), 또는 운평(運平)이라 했다. 흥청이라는 말의 본디 뜻은 ‘나쁜 기운을 씻어낸다는 의미에서 기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는 또 성균관과 운각사를 폐지하여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지방의 창기들은 궁에 들어와 흥청이 되는 것만으로도 지체가 높아졌는데 왕과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여 급수가 더 높아졌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기녀는 그보다 낮은 지과흥청(地科興淸)에 머물러야 했다.
연산의 이런 패륜은 신하도 가리지 않아 교리(校理) 이장곤(李長坤)의 처까지 범했다. 그런 사실을 안 장곤은 처를 살해하고 전라도 보성으로 도망갔다. 그런데 마침 보성군수가 친구여서 그의 도움으로 백정(白丁) 양수척(楊水尺)의 사위가 되어 지냈다. 그 후 연산이 몰락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장곤은 다시 복귀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 바람에 백정의 딸은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또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박원종(朴元宗)의 누나는 연산의 백부(伯父.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후처였는데, 연산이 어느 날 뜰을 거닐다가 백모(伯母, 큰어머니)를 보고 그 미모에 반해 자기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봉변을 당한 백모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박원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나중에 반정을 일으켜 연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연산군은 흥청거리며 집권 기간을 지냈으나 스스로 망하기를 자청하였다. 그래서 흥청망청(興淸亡請)이라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그러니까 흥청거리다가 스스로 망하는 일을 끌어 들였다는 망청이 된 것이다. (임종대의 한국고사성어에서)
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1506) 9월 2일(무인)에
사신(史臣)은‘연산군의 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연산은 성품이 포악하고 살피기를 좋아하여 정치를 가혹하게 하였다. 주색(酒色)에 빠져 사사(祀事)를 폐하고 쫓겨난 어미[出母]를 추숭(追崇)하면서 대신(大臣)을 많이 죽였으며, 규간(規諫)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여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였으며, 서모(庶母)를 장살(杖殺)하고 여러 아우들을 찬극(竄殛)하였다. 날마다 창기(娼妓)와 더불어 음희(淫戲)하여 법도가 없었고, 남의 처첩을 거리낌없이 간통하였다. 상제(喪制)를 고쳐 날로 달을 바꾸는[以日易月] 강상(綱常)이 전혀 없었고 죄악이 하늘에 넘쳐서 귀신과 사람이 분해하고 원망하였으므로 마침내 이렇게 된 것이다.
[생략]
여기(女妓)를 고쳐 운평(運平)이라 하고, 대내(大內)에 들인 자를 흥청(興淸), 혹은 가흥청(假興淸)ㆍ계평(繼平)ㆍ속홍(續紅)이라 했으며,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를 지과(地科) 흥청, 임금의 굄을 받은 자를 천과(天科) 흥청이라 하고, 원(院)과 각(閣)을 분설(分設)하여, 원은 취홍(聚紅)ㆍ뇌영(蕾英)ㆍ진향(趁香)ㆍ함방(含芳)ㆍ취춘(翠春), 각은 회사(繪絲)ㆍ청환(淸歡)ㆍ채하(彩霞)라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을 연방원(聯芳院)이라 고치고, 또 열읍(列邑)에 모두 운평을 설치하여 뽑아 올리게 하였다.
[생략]
항상 대궐 안에서의 연회에 사대부(士大夫)의 아내로서 들어가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고, 미모가 빼어난 이는 녹수를 시켜 머리 단장이 잘 안되었다고 핑계대고 그윽한 방으로 끌어들이게 해서는 곧 간통했는데, 혹 하루를 지난 뒤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시 내명(內命)으로 인견(引見)하여 금중(禁中)에 유숙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부인은 세자의 양모라는 핑계로 항상 금내(禁內)에 머물게 하였고, 성종의 후궁 남씨(南氏)도 대비의 이어소(移御所)에 있으면서 자못 총행(寵幸)을 입어 추한 소문이 바깥까지 퍼졌다.
박동량(朴東亮)기재잡기(寄齋雜記)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
○ 평성(平城= 박원종.朴元宗;중종 옹립의 반정(反正)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이 이미 큰 공을 성취시켜 바로 명상을 하게 되었는데, 중종이 특별히 후하게 상을 내리고 훌륭한 저택을 골라주어 살게 하고 또한 흥청(興淸) 3백을 내려 주어 장획(藏獲= 사내 종과 계집 종)과 보화가 풍족하게 되니, 의복, 거마의 모셔 받듦이 분수에 넘친 것이 많았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예조 좌랑(禮曺佐郞)으로서 공사(公事)를 가지고 찾아가 통자하였더니, 즉시 부르므로 대문을 3개나 지나서 들어가 대청 앞에 당도하니, 돌 다듬어 섬을 쌓았고 뜰에는 반송(盤松 가지가 옆으로 퍼진 키가 작은 소나무) 두어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볼 뿐이었는데, 붉은 난간 푸른 창문 안에는 비단 자리가 가득히 깔려 있는데 화려하여 눈이 부시었다. 한 대문을 더 들어서니, 날아갈 듯한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붉은 발이 땅에 닿도록 드리웠고, 말소리가 은은하여 마치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누각 동쪽에서 한 여인이 머리에는 큰머리 장식을 하고 몸에는 노란 장삼(長衫)을 입고 붉은 치마를 땅에 끌면서 나와서 상공(相公)이라고 불렀다.
호음(湖陰)이 허리를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그 여인 앞에 이르니, 또 한 대문이 조그마한 당(堂) 밖에 있었는데,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드디어 그 문을 들어서니, 평성(平城)이 연못 동쪽 평상 위에 앉았는데 수놓은 베개와 화려한 자리에 두 계집종이 파리채를 들고 좌우에 서 있었으며, 당 위 발안에 앉아 있는 시녀가 또한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평성이 일어서서 맞으면서 호음에게 앉으라고 하면서 손을 들어 서쪽 평상 위에 앉혔다.
호음이 절한 다음 꿇어앉으면서,
“이 공사(公事)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였으니, 대개 예문(禮文)에 관한 일이었다.
평성공이 그 공사를 받아서 자리 오른쪽에 놓으면서,
“내가 무부(武夫)로서 무슨 의리를 아는 것이 있겠나. 종묘사직의 덕으로 때를 만나 일어났다가 이런 과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를 뿐인데, 어찌 감히 조정의 공사에 참여하여 의논 할 수 있겠나? 본조(本曺)의 판서가 있는데, 어찌 잘 처리하지 않겠나? 좌랑(佐郞)의 젊은 풍채를 보니, 앞길이 지극히 원대하겠네. 이 늙은이의 술이나 마셔주게나.”
하고, 곧 술을 올리라고 외치니, 여러 시녀들이 일제히 꿇어앉아 대답하자, 벌써 네 시녀가 술상을 받들고 나왔는데, 진수성찬이 질펀하여 어디서부터 젓가락을 대야 할지 몰랐다.여자 악공 수십 명이 각기 관현악기를 들고 못 위에 둘러앉아 풍류를 연주하는데 맑은 소리와 묘한 가락이 흥겹게 귀를 울렸다.
공이 자주 잔을 들어 권하면서,
“무부라고 싫어하지 말게.”
하므로, 호음이 일생 동안 크게 경계하는 것이면서도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취하게 마시고 일어서니, 공이 여러 시녀를 시켜 문 밖까지 부축하여 주게 하였다.호음도 많은 저택을 두었고 자기 몸 봉양하기를 극히 사치스럽게 한 것이 대개 평성을 흠모했던 것이다. 말년에 가세가 대성하였는데도,
“어찌 그의 만분의 일을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蛇足; 연산군을 몰아 낸 세력들이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연산군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첫댓글 역사는 돌고 도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