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숲을 지나, 벌집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대하여
— 폴 윤, 「벌집과 꿀」을 읽고 (폴 윤, 『벌집과 꿀』, 엘리)
「벌집과 꿀」은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다. 1881년 4월,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스물두 살의 치안관 안드레이 불라빈이 삼촌에게 쓴 보고서다. 그가 파견된 고려인 정착지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편을 살해한 여자를 마을 남자들이 밧줄로 나무에 매달아 죽인다. 안드레이는 막지 못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의 딸 하나가 남겨진다. 이후 마을에 유령이 출몰하기 시작하고 마을 전체에 불안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세 겹의 폭력 위에 서 있다. 남편의 폭력, 아내의 생존을 위한 폭력, 공동체가 승인한 폭력. 그런데 폴 윤이 주목하는 것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다. 폭력 이후에 남겨진 것,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자기들이 여자를 억울하게 죽였다는 것을. 그러나 그 진실은 묵살된다. 그리고 "불꽃처럼 환하게 타오르는 어떤 여자"의 형상으로 돌아온다. 억압된 것이 그렇게 돌아왔다. 여자가 죽은 지 35일째 되는 날까지 정착지의 거의 모든 구성원이 매일 밤 유령을 보며 소리를 지른다. 직접 처형에 가담한 사람만이 아니다. 방관한 사람도, 알면서 침묵한 사람도 모두 유령을 본다. 폭력은 공동체 전체에 균등하게 퍼진다. 방관과 침묵도 폭력의 공모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가장 약한 존재에게로 향한다. 공동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공포를 소녀에게 투사한다. 죽은 여자의 딸을 죽은 여자로 만들어버린다. 소녀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지만 그것을 말로 증언할 수 없다. 공동체는 바로 그 침묵 위에 두려움과 죄책감을 덧씌운다. 증언할 수 없는 자가 희생양이 된다.
「달의 골짜기」의 동수도 마찬가지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였던 사실을 끝내 말하지 못한다. 마음속에 "갇힌 파리 한 마리"처럼 웅웅거리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갈고리 발톱처럼 가슴속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고통이 되고, 결국 운식에게 폭력으로 분출된다.
이 와중에 안드레이의 질문이 낯설지 않다. "저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건가요?" 이 떠돌고 밀려난 사람들의 설명할 수 없는 곤혹스러움이 낯설지 않다.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한 채 어딘가에서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은 상태. 그것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기 삶 속에서 가지고 있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벌집은 질서와 돌봄의 이미지다. 그러나 벌집을 지키기 위해 벌은 쏜다. 공동체 역시 폭력을 사용한다.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과 공동체가 생산하는 폭력 —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폴 윤은 이 고통을 감상적으로 쓰지 않는다. 피해자 서사로 단순화하지도 않는다. 그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인물들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잔인해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억압을 거부하는 글쓰기 같다. 침묵은 기억을 억누르고, 억누른 기억은 반드시 돌아온다. 어떤 글쓰기는 고통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기억을 증언하는 일이 된다.
안드레이는 꿀이 아주 조금 남아있는 찻잔을 들어 올린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정착민들이 이윽고 근무지에 불을 지르기 위해 언덕을 올라올 것이다. 홀로 남겨질 소녀를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였다. 어머니가 죽던 밤, 소녀는 음악 꿈을 꾸고 있었다. 말이 없어도 됐다. 그는 꿀이 든 찻잔을 소녀에게 내민다. 소녀는 주저 없이 컵을 들어 올린다. 벌이 오고, 둘은 함께 벌을 따라 숲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는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라고요. 벌집으로. 그리고 꿀이 있는 곳으로."
어느 순간 안드레이가 걸음을 멈춘다. 소녀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 걷는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멀어질수록 빛의 착시 속에서 소녀의 어깨가 넓어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진다.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안드레이는 소리 내 말한다. "그러니까, 정말 네가 아니었구나." 아이는 온통 햇빛으로 둘러싸인 채 아주 조금만 보일 뿐이다. 숨겨진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돌아오던 벌은 이제 더는 돌아오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의 자리에서 — 턱을 잃고 전사한 아버지도, 밧줄에 매달려 죽은 여자도 되돌릴 수 없는 자리에서 — 삼촌에게 쓰던 편지가 마지막 순간 아버지에게로 닿는다. "아버지, 저는 지금 당신이 어디 계신지 상상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도요." 귀가 들리지 않는 소녀에게 말을 건넸듯이. 죽은 아버지에게도 말을 건넨다. 아버지의 자리를 찾는 것과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 안드레이에게는 같은 물음이었다.
「까마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무기력했다. 경계 위에 선 자에게 우리가 실제로 건넬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되는가, 하고. 폴 윤은 그 물음 옆에 하나를 더 놓는다.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의 무게를 안고서도 —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단 하나를 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먹다 남은 꿀 한 방울 같은.
봄이다. 봄은 여기 없는 자들이 말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보이지도 않았던, 썩어 없어진 줄만 알았던 씨앗 같은 것들. 여기 없는 자들, 이미 사라진 자들, 아직 말하지 못한 자들. 그들의 목소리는 억눌리면 억눌릴수록 더욱 강하게 돌아온다. 유령의 형상으로. 때로는 힘차게 움트는 새싹의 모습으로. 날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