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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매오와 삭개오
누가복음 18:35〜19:10
십자가의 수난을 목표로 하고 최후의 직선 코스에 들어간 예수의 발 길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군중의 주의를 끈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된 일이요, 또 하나는 삭개오가 신앙에 들어온 일이다. 둘 다 방금 예수가 목적하시고 가시는 그 큰일에는 일견 아무 직접관계가 없는 조그마한 사람들의 일이다. 그러나 길가에 피는 모양 적은 들풀의 꽃도 꺾이어 여왕의 가는 길에 던져지면 일단의 광채를 발하는 것같이 미미한 이 두 영혼도 메시아의 영광의 길 위에 떨어져서 영원의 향기를 발하고 있다.
바디매오는 소경이요 걸인이었다. 광명을 잃은 그는 인생의 태반을 잃은 자였다. 삶의 즐거움을 그는 모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는 알 수 없었다. 남들이 밝음을 기뻐하나 밝음이 무엇인지, 어둠을 피하나 어둠이 무엇인지, 그에게는 푸른 하늘이 공연히 푸르렀고 맑은 시내가 뜻 없이 맑았다. 봄날의 만발한 꽃이 그에게 소용이 없고, 가을밤에 반짝이는 별이 그에게는 좋을 것이 없다. 요단 강 위에 희망의 금파(金波)를 타고 오는 아침 햇빛도 그의 것은 아니요 유다 산상에 평화의 채하(彩霞)에 쌓여 넘는 저녁별도 그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영원의 암흑뿐이었다. 발이 있어도 자유로 걸을 수 없고 손이 있어도 자유로 쓸 수 없고 살아가는 생계를 내 힘으로 할 수가 없다. 무시가 머리 위에 있고 모멸이 전신에 에워 있다. 그리하여 집집마다의 문간을 더듬어, 혹은 지나가는 길손의 동정을 얻어 가엾은 존재를 남의 세상에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평생의 소원은 부도 아니요 귀도 아니었다. 가정이란 생각도 못할 바요, 나라일이란 꿈꿀 자격도 없다. 오직, 다른 것은 다 말고 오직 광명을 주시옵소서, 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눈을 열어주어 이 몸을 부자유에서 풀어주시옵소서! 그러나 사해 영원의 저주를 푸는 자 없는 것같이 이 바디매오의 멀어진 눈을 뜨게 하는 자는 없었다. 저는 영원히 불행한 자로 세상을 마칠 것인가.
어떤 날 그는 들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 있어 큰 권능을 가지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며, 앉은뱅이를 걷게 한다고. 그러나 그 예수를 어떻게 만나나. 심중에 그윽히 전능한 하나님께 빌 뿐이었다. 그런데 천우냐 신조냐. 그 예수가 오늘 이 여리고 성에 왔다. 메시아가 임하였고 하늘나라가 이제 당장 온다고 온 성의 군중이 뒤떠든다. 바디매오의 흉중은 얼마나 울렁거리고 얼마나 조급하였으리오. 그러나 이 가련한 인간의 찌꺼기를 손 끌어 예수에게 가져다주려는 자는 없었다. 저는 스스로 부자유의 몸을 이끌어 그 지나가시는 큰길가에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사람들의 소리가 더 가깝고 예수의 가까이 오신 것이 분명하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었다. 그의 가진 유일의 무기는 구하는, 애원하는 목소리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열광하는 군중은 이 거룩한 행차에 어떤 거지 소경이 불경하게 들레는고,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그러한 인간의 찌꺼기는 메시아의 나라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저에게 이는 생사의 갈리는 시간이었다. 저는 전신의 힘을 다 짜내어 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군중의 생각과는 어그러지게 예수는 친히 서서 이 미친 듯이 절규하는 소경을 부르라 하시었다. 그리하여 전하는 사람의 말이, 부르시니 안심하고 오라 할 때 저는 옷을 집어던지고 허방지방 달음질을 쳐서 나갔다.
“네가 나더러 무엇을 하여 달라느냐.”
“주여, 보게 하여주소서.”
가슴 속에서 창자 깊은 속에서 생명의 맨속에서 나오는 애원이다. 그저 이 먼눈을 보게만 하여 주시옵소서.
“곧 보라, 네 믿음이 너를 성케 하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감격 없이는 보지 못한다. 군중이 꾸짖어 잠잠하라 할 때 더욱 부르짖어 “다윗의 자손이여……”하였다는 것, 오라 할 때 옷을 벗어던지고 갔다는 말을 볼 때, 어린 맘에 견딜 수 없이 눈물짓게 동정스럽고 통쾌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저의 신앙의 태도는 실로 통쾌하기 짝 없다. 급단(急湍)이 가로막는 바위를 단숨에 차고 넘으면서 굉굉(轟轟)한 소리를 발하는 것 같다.
삭개오는 바디매오와는 다르다. 저를 울음짓고 외치는 급단이라면 이는 낙엽 밑으로 숨어드는 물이다. 인간사회에서 찌꺼기 대우를 받는 것은 일반이나 저는 꺼릴 것이 없이 반항하고 나서는 자요 이는 눈 맞아 굽는 솔가지처럼 피하는 자였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도 삭개오는 세리인 탓으로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또 무리가 아니었다. 나라는 이미 망하였을망정 선조 전래의 거룩한 종교는 있거니, 그를 무시하고 이(利)를 위하여 압박자 로마인의 고견(雇犬)이 되어 동족에서 가혹한 세를 받는 이들 세리는 양심 없는 무리라 할 수밖에 없다. 고로 애국심 강한 유대인이 이들을 침 뱉어 매국노라 하고 손가락질하여 죄인이라 하며 같이 서기를 부끄러워하고 한자리에 먹기를 즐기지 않은 것은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일은 외양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나라가 이미 망하였거든 매국노 아닌 자 어디 있으며 이미 받치는 자 있거늘 받는 자를 특히 악하다 할 것이 무엇이리오. 세상에 가증한 것은 형식주의자다. 스스로 고결한 체하며 가련한 혼을 학대하는 것으로써 자기 의(義)를 드러내려 하는 자다. 삭개오도 그 짓밟는 발밑에 신음하는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리장이요, 또 부(富)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매장당한 자였다. 심중에 생각하는 바 없지 않건만 사회의 신용이 벌써 떨어졌고, 이해를 구하려 하여도 말할 벗이 없었다. 저가 스스로 버린 것 아니건만 지금 저에게서는 선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이 빼앗겨버렸고 선조를 잃어버렸다. 인인(隣人)의 가슴도 저에게 대하여는 막혔고, 교회의 문도 저를 향하여는 닫혀버렸다. 부야 없지 않건만 그것이 무엇이리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저는 방축(放逐)당한 자였다. 생명재산을 보호하는 로마의 법률만 아니라면 저는 어느 날에 뭇손의 던지는 돌 밑에 묻혀버렸을는지 모른다. 저는 가엾은 자였다. 겸하여 저는 체모조차 보잘것없이 적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이 가련한 소인이 등을 꼬부리고 그 조그마한 알몸을 굴려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하는 곁눈으로 좌우를 가만히 살피며 여리고의 거리를 왕래하는 모양을. 저는 영원히 외로운 사람으로 그칠 것인가.
그러나 직업이 천하다 하여 사람을 천히 보지 말라. 귀한 양심이 저에게도 있음을 알라. 몸이 적다하여 맘도 보잘것없다 말라. 높은 정신은 반드시 장대한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서기관만이며, 하늘나라를 대망하는 것이 어찌 바리새교인의 특권이리오. 삭개오의 흉중에도 일편 썩지 않은 생각이 있었다. 예수가 여리고에 왔다고 하자, 저는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나갔으나 에워싸고 떠드는 군중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겉으로, 기분으로 미치는 군중 때문에 정직 겸손한 영혼이 자유로 그리스도 앞에 갈 수 없는 것은 예나 이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반이다. 바디매오와 같이 용기있는 자는 불고(不顧) 염치하고 그를 헤치고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바람에 불리는 갈대 같은 영혼이 없지 않다. 저들은 직선으로 돌격할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나 직선으로 못하면 돌아서라도 가고야 만다. 삭개오는 열광하는 군중은 싸울 것 없이 그대로 맡겨두고 자기는 돌아가는 길을 취하기로 하였다. 예수가 지나가실 길 앞으로 나가서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갔다. 군중은 이 소인의 소인다운 행동을 보고 일장의 웃음을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올라가는 자에게는 장난이 아니었고 진실이었다. 지성이 신을 움직인다. 삭개오의 이 우스우리만큼 단순한 진실이 무한한 사랑을 움직이고야 말았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누가복음, 19:5)
‘속히’다. 예수를 독점하려는 군중에게는 그대로 맡기고 자기는 돌아가자는 자에게 ‘속히’ 오라는 길이 특허가 되는 것은 또 무슨 익살이요 또 무슨 도리인가.
바디매오와 삭개오가 서로 달라도 또 서로 같은 것은 그 열심 그 단순이다. 열심인 고로 단순이요, 단순한 고로 열심이다. 직면로(直面路)를 취하거나 측면로(側面路)를 취하거나 육박(肉迫)을 하거나 도피를 하거나 하나님 앞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맘이 주를 향하는 것, 이 한 일뿐이다. 강한 것이 자랑될 것도 없고 약한 것이 염려될 것도 없다. 문제는 우리 맘이 주를 향하였나 아니 향하였나 하는데 있다. 두 사람은 그 맘을 단순히 주에게로 향하였다. 주를 만나자, 주를 보자, 이 일념이 저들의 생각의 전부였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이다. 단순인 고로 열심이 있고, 열심 있는지라 달(達)할 수가 있다. 경(經)에 일러 말하기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8)
현대인에게 부러운 것은 이 열심이 단순이다. 오늘날 사람처럼 생각 많은 사람은 없고, 생각이 많은지라 주저하고 호의(狐疑)할 수밖에 없다. 저들은 유리하기 위하여, 합리롭기 위하여, 현명하기 위하여, 언제 까지 머뭇거리고 반(半)만치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믿으라고 권하면 저들이 대답하여 왈(曰) “하나님이 정말 있을까” “사후 영생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 할까” “학문을 어떻게 하리오” “가정을 어떻게 하리오” “국가 사회를 어떻게 하리오” “왈 무엇 왈 무엇……” 그리하여 저들은 복잡한 사념을 하는 사람일수록 진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현대인도 단순한 열심을 발하는 점이 없지 않다. 도(道)에 대하여는 그렇게 다사(多思)할지라도 이(利)에 대하여는 단순하다. 사혹(思惑)의 운무중에 헤매다가도 “유리(有利)!”라고 들리면 불빛을 본 나비처럼 안위를 불고(不顧)하고 돌진한다. 원래 본말을 전도(顚倒)하고 경중을 바꾸는 것이 사람의 맘이라. 가치 있는 것일수록 천대하고 쓸데없는 것일수록 귀히 여긴다. 금강석은 일 분의 실용가치 없는 것이건만 천만의 값을 주고 사고 공기 일광은 분초를 떠날 수없이 긴한 것이건만 청정한 전원보다도 더러운 도시를 더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버릇이다. 가극단이 지나가는데 나뭇가지에 오르고 지붕에 올랐다면 이상할 것이 없으되 도덕의 선생 종교의 교사를 보기 위하여 하면 중인(衆人)의 웃음거리가 된다. 관인(官人)이 내 집에 온다면 살계작식(殺鷄作食)하고 탑(榻)을 쓸고 대하고 유산가(有產家) 나를 만난다면 고두수배(叩頭數拜)하고 은근(慇懃)을 다하여 접한다. 그러나 전도사 나를 찾는다면 턱으로 가리켜 문전에서 보낸다. 그리스도 신자라 하는 사람까지 저와 이(利)와를 저울의 양단에 놓아보지 않는 자 없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저 가련한 나사렛 사람은 일원 지폐보다도 가볍고, 술 한 잔보다도 맛이 없다. 이해를 위하여는 기독교 신사도 성경책을 책상 밑으로 넣고 사업을 위한 교섭을 한다면 기독교 교사도 창녀를 본받아 술잔을 들어 맘몬의 호의를 구한다. 만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여, 그대처럼 경시되는 자는 세상에 없고, 존경받는 듯하면서 그대처럼 모욕당하는 자는 없다. 연말에 헛날리는 엽서를 그대는 한 장 받았던가, 과자 한 상을 받았던가. 그대의 유식한 현대의 제자들이 한 손에 그대를 넌지시 잡고 한 손에 세상을 잡고 현금주의의 교섭을 행한 후 그대를 놓고 돌아서버릴 때 그대는 심중이 어떠하던가. 아아, 황금에 대한 현대인의 열심을 그대에게 향하였더라면, 사업에 대한 현대인의 성의를 그대에게 들였더라면, 학문에 대한 진실한 탐구를 그대에게 향하였더라면.
정신보다는 육체가 긴하고 하늘보다는 땅이 더 가깝다. 오관의 쾌락을 위한 열심이 첫째요, 지상의 사업을 위한 열심이 둘째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에 이르러는 새벽하늘에 별처럼 드물다. 발달한 물질문명을 가진 현대인은 도를 구하려 하여 생각이 번잡하지 않을 수 없다. 바디매오의 해어진 누더기 일건(一件)도 그리스도에 가는데 방해가 되었거던 버려야 할 장식이 많고 많은 현대인이 어찌 생각이 적으리오. 그러나 신앙은 단순한 것이다. 많은 비교를 하고 많은 헤아림을 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다. 그리고 단순한 영혼 앞에 길은 스스로 열리는 것이다. 눈먼 바디매오와 키 작은 삭개오가 군중을 헤치고 예수를 만날 방법을 연구만 하고 있었더라면 그 기회는 영영 없을 것이다. 예수는 그런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단순한 열심이 있으면 특별한 방법을 강구할 것 없이 예수를 볼 수 있는,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짧은 영혼을 도와 예수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자연히 있다.
길 가의 뽕나무면 족하다. 삭개오가 올라간 것은 신앙의 뽕나무였다. 많은 사람이 뽕나무는 마다하고 사다리를 제작하려는 동안에 예수는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만다. 또 단순한 맘으로 뽕나무를 추어오르는 자는 예수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시 영혼의 자람이 있다. 구한 것 이상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원한 것은 단순히 한 번 보기만 하는 것이었지만 거기 대하여 갚아주시기는 넘치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그 집에 가서 유하시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신앙의 법칙이다. 예수를 진실로 보기 원하는 자는 볼 뿐 아니라 예수가 자기 안에 와 거하고 자기가 또 예수 안에 거하게 된다. (요한복음,14:23) 그리하여 드디어 영혼의 성장을 본다. 예수를 집에 맞게 된 삭개오가 마침내 심중에 변화가 일어나 가산의 반분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모세 율법대로 4배를 갚아주겠다고 한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의 중심적 의미는 그보다도 차라리 다른 데 있다. 영광의 입성을 하시기 일보 전에서 이 두 사람을 만나게 되신 것은 두 사람의 불행을 제하고 그 아름다운 신앙의 태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요 심대한 가치가 거기 없다는 것 아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영혼의 먼눈을 어루만지기만 하며 다사(多思)다의(多疑)하여 머뭇거리고만 있는 현대인에게,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산 가르침이요, 선악이 뒤바뀐 생각에 쓸데없는 것을 위하여 광분 열중하고 생명의 주를 대하는 데 냉담을 극하는 문명인에게, 뽕나무 위에 앉은 삭개오의 작은 키는 배울 만한 높은 모범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더 큰 의미가 오히려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한복음, 9:3)
두 사람에 의하여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맘이다.
이때에 예수는 십자가를 목전에 바라보시는 때였다. 여리고에 오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드디어 자기 결심을 명언(明言)하시었고 이제 조금 더 가서 벳바게에 이르면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 입성을 하시게 된다. 고로 당시에 군중은 “하나님 나라가 곧 나타나실 줄로”(요한복음,19:11) 알았고 예수 자신도 심중이 대단 긴장하고 절박한 감을 가졌을 것은 추지(推知)할 수 있는 일이다. 수난속죄 인류구원의 큰일로, 이 우주의 굉대(宏大)를 가지고도 비할 수 없는 큰일로, 흉중이 가득하시었을 것이다.
사람이 대사(大事) 있으면 소사를 잊고 전체를 위하여는 부분을 버린다. 대의 친(親)을 멸한다고 한다. 이때 예수는 우주 역사의 중심적 문제를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잊고 돌아보지 않으실 때였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고, 길가에 떨어지는 들국송이 같은 이 두 사람을 일일이 수응하고 있었다. 발길로 무심스러이 그 꽃을 차고 가는 것이 그 영광 그 존업을 드러낼지언정 일일이 허리를 꾸부려 그를 집어드는 것은 치(稚)인 듯하고 속(俗)인 듯하다. 예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하셨을까.
바디매오가 접근을 구할 때 군중은 꾸짖었고, 삭개오를 만나실 때 예수를 원망했다. 그리고 그는 무리가 아닌 일이었다. 전 인류, 전 이스라엘의 구원회복이 목하의 일인데 어느 겨를에 이 미미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고 있을까. 더구나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기까지 하시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우선 메시아에 합당치 않은 일이다. 저 삭개오는 죄인의 무리다. 선조의 유전을 무시하고 조국을 모르고 양심이 없는 파렴치한이다. 사람은 그 짝하는 벗을 보아 그 위인을 안다고, 예수 만일 삭개오와 친고되면 메시아 될 자격이 없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된다. 저는 위엄이 만민을 압도하고 스스로 높이 가지기를 레바논의 고봉같이 하는 자가 아니면 안된다, 그대의 그 권능과 중인의 감복하는 능변을 가지고 일기(一氣)에 예루살렘을 직도(直搗)하여 모든 악한 자를 물리치고 반항하는 열방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 자리에서 이룰 것이요 향간(鄕間)의 세리 죄인배로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다 라고 무리는 생각했다.
또 그뿐 아니라, 예수의 그 일은 불공평 한 처사라고 생각하였다. 옹위하는 사람이 많고 많으며 자진 수종하는 사람이 있고 또 있는데 그를 다 버리고 하필 세리 삭개오에게 가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중에 깨끗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여리고 성이 비록 적다기로 그 안에 예수에게 일야의 안숙(安宿)을 드릴 자격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저는 죄인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메시아를 고대하는 자라 우리에게 박(薄)함이 어찌 그러하며, 그에게 까닭없이 후함이 어찌 그러한가. 우리를 무시함이요 모욕함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저는 기벽(奇癖) 있는 자인가, 호사자인가.
중인(衆人)의 이 생각, 이 의심, 이 불평은, 인간으로 생각하여 반드시 잘못 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예수의 태도는 따라오는 모든 사람에게 적지 않게 거리끼는 일이었다. 그러면 예수는 왜 사람의 뜻에 벗어나는 이 일을 하시었나. 왜 많은 사람을 의혹과 차질의 위험에까지 두면서 그런 일을 일부러 하시었나. 거기 대하여 몸소 대답하신 것이 10절의 말씀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너희들은 내가 저 불쌍한 바디매오를 위하여 고쳐주었다 하여 의심이냐. 이 불행한 삭개오의 집에 축복을 하였다 하여 불평이냐. 너희는 내가 메시아로서 영광의 즉위를 할 길에서 어느 겨를에 그런 것을 상대하고 있느냐고 원망하느냐. 그 인간의 찌꺼기들을 위하여 때를 허비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라고 나를 가르치려느냐. 너희는 의롭고 저희는 악하며 메시아는 의인을 위한 왕이요 악인의 적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는 너의 인간의 생각이요 내 생각은 아니다. 인자가 온 것은 봉사를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요 봉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 뭇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성한 사람을 위하여 온 것 아니요 병인을 위하여 왔고 의인을 위하여서가 아니요 죄인을 위하여 왔다. 너희 의인은 스스로 의인의 의자에 앉아 의인의 살림을 하라. 나는 내려가 저 세리와 죄인과 창기의 벗이 되고 형제가 되고 구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예루살렘에는 왜 가는 줄로 아느냐. 왕이 되기 위하여 인 줄 아느냐. 아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다. 너의 세상 의인의 사업은 의인의 사회에 있으나 내 사업의 분야는 죄인의 사회에 있다. 병든 몸을 고쳐주고 상한 영혼을 소생케 하는 것이 내 일이다. 그를 위하여 나는 사회의 하수도에 내려간다. 그것이 내 사명이요 내 일이다. 유식계급과 교양사회는 나와 관계가 없다. 나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내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는 지리적 예루살렘에만 있는 것 아니다. 광명을 갈급하는 한개 영혼이 있으면 거기가 곧 십자가 있는 곳이요 죄 중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한 생명이 있으면 거기가 곧 예루살렘이다. 바디매오의 절규를 무시하고는 그 외에 또 십자가가 없고 삭개오의 집을 지나치고는 그것 말고 또 다른 구원사업이 없다.
너희 듣기에 이것이 알아들을 수 없느냐. 예루살렘은 촌보다 더 중하고 많은 사람은 한둘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이 되느냐. 너희 인간의 이해타산으로 하는 인간 수리로 하면 그러니라 만은 내 천국 수리는 그렇지 않다. 내게는 99는 1보다 더 많은 것이 아니요 의인은 죄인보다 더 자격 있는 것 아니다. 잃어진 1수는 남아 있는 99수(首)보다 내게는 잊을 수 없고 나갔던 탕자는 방정한 장자보다 나는 더 사랑스럽다. 바디매오, 삭개오는 헤매이던 한 마리요 나갔던 탕자다. 내가 어찌 그를 잊을 수 있으리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
그렇다, 모든 다른 사람은 또 몰라도, 적어도 나는 이 복음을 절대 필요로 한다. 잃은 자를 찾는 이 복음을 요구한다. 천지의 어느 구석에 내 몸을 용납할 곳 없을 때, 그래, 내 자신조차도 용납하려 하지 않을 때에도 저만은 팔을 벌려 나를 받는다. 세상의 강자 나를 향하여 너희는 몸을 던져 이 비참의 구렁을 채워 우리로 하여금 문화의 고탑을 쌓게 하라 하고 강요할 때에도 저만은 그 자비의 옷자락을 벌려 나를 가린다. 나는 나의 값을 저같이 높이 보는 자를 세상에서 볼 수 없다. 그렇다. 나는 들레는 세상의 길거리에 앉아 저가 올 때까지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을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혹은 그것도 허락치 않는 세상이라면 삭개오와 같이 뽕나무 위에 앉아 저가 올 때까지 한 세상을 기다렸으면!
성서조선 1938.11 118호
저작집30;18-237
전집20;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