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때 어머님은 이미 전도자로 서계셨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 불신자 뿐인 가정에서 아버지는 여러 부인을 거느리며 퍽이나 어머니의 속을 썩이셨고 결국 어머니는 화병으로 쓰러지셨고, 여러 고난의 과정을 거쳐 그 불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게 되셨다. 처음 몇년은 목숨을 살려주신 주님이 감사하여 교회에 나가주는 종교적인 신앙 생활을 하셨고, 그후 계속된 시련과 고난에 마침내 내가 10살경에 광주에 있는 기도원에 가셔서 목숨을 내놓고 기도하던중 주님을 만나게 되고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체헙하시게 되었다.
하늘에서 벼락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신천아( 교회에서 지어준 어머님이름)! 신천아! 네가 사람을 의지하고 살겠느냐? 주를 의지하고 살겠느냐?"물으시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하도 바람을 피워 "남자라면 신물이 나니 주님만 의지하고 살겠습니다"고 응답을 하셨다. 산에서 그대로 삼일간을 주야로 회개를 하게 하시고, 내면의 죄와 응어리진 아픔을 싰겨주시고, 새로운 능력있는 피조물로 다듬어 주셨다. 그후 어머니는 전 인생을 주를 증거하는 전도자로 헌신하며 사셨다. 나는 어머니가 산동네 산동네만 돌며 환자를 돌보고, 아이를 받는 산파노릇을 하며, 굶어지친 자들을 위로하며 함께 울며 기도하자 놀라운 주님의 기적과 능력이 계속 되었고 놀라운 사도행전 29장의 전도의 행진으로 이어가셨다. 2남3녀중 막내인 나는 늘 어머니의 사역을 따라다니는 별명이 "쫄쫄이"여서 나도 배운게 전도라고 친구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와 어머니는 어른 전도왕이었고 나는 어린이 전도왕으로 자라났다. 어머니가 큰 은혜를 받으시고 얼마 되지 않으셔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생계와 살길이 막연한 그때에도 주님은 계속하여 세상일을 잡지 못하게 하시고 전도에 매진하게 하셨고, 밤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는 날들로 이어져가게 하셨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주님께 부탁을 올렸다. "한달에 6일만 일당이라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24일은 주의 일을 하겠노라"고....... 당시 목포 바닷가에 나가 일하면 하루 일당이 5천원 이었다. 그러면 6일 일하면 삼만원으로 어머니 계산으로 이 돈이면 보리쌀과 밀가루를 살수 있으므로 나와 어머니가 남에게 손벌리지 않고 굶어 죽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네가 벌지 않아도 굶지 않게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시며 주의 일에 100% 전념하라고 말씀하셨다. 덕분에 난 중학교때도 모두다 가는 수학여행도 못가보고, 교복도 얻어 입고, 고등학교도 실업계를 진학하며, 스스로 학비를 벌기위해 고1때부터 중1,2학년 과외를 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하지만 주님께서 과외 한번도, 참고서 한권도 사보지 못하는 형편으로 공부하였으나 주님의 은혜로 공부도 탑권에 들게하시고, 내가 돈도 없지만, 유순하여 리더가 될 기질도 없었는데 1학년때부터 계속 우연히 반장이 되게 하셨고, 3학년때는 전교회장인 연대장도 하게 하시며 리더로서의 훈련을 하게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테레사 수녀의 비젼을 품게된다. "나도 정말 저렇게 불쌍한 이웃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라는 간절한 소망을!!!!! 고3여름에 어머님의 기도대로 은행에 특채로 시험도 치르지 않고 취업하게 되었다. 난 KAL에 입사하고 싶었으나, 그 시험 볼 기회도 갖지 못한채 그 어렵다던 은행 취업을 우리 학교 주간 학부에서 한명 뽑았는데 ..... 나도 모르는 사이 특이하게 은행 면접이 교장실에서 치뤄졌다는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것이다. 주택은행 목포지점 여행원을 뽑는데 특이하게 그해만 지점에서 직원을 뽑아 본부에서 교육받은 후 발령을 확정하는 케이스였다. 몇명의 학생들을 차례로 교장실에 갑자기 불려갔고 몇가지 질문을 하시기에 엉겁결에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도 안나고 그때가 면접이라는 것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취업의 문턱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너무도 쉽게 은행에 입사한 후에야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고 뽑아주신 조지점장님께서는 "내가 너를 뽑은 거야! 하시며 아주 귀여워해주셨다." 그럴때마다 더 열심히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실하게 근무하리라 다짐하며 그분의 손길을 통해 주님이 일하셨음을 알기에 더욱 주님에 대한 경외감은 깊어져 갔다.
그 가을 "동명원"이라는 부랑아 일시 보호소를 만나게 된다. 학생회장과 교회 부회장을 하면서 고아원등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전혀 이름조차 몰랐던 동명원을 친구의 소개로 알게되어 좀 외진곳에 있긴하지만 방문하게 되었다. 1978년 그때 당시만 해도 목포가 남도의 관문이었다. 그러므로 낙도에서 중증장애를 가진 자녀들을 키울수 없으면 그곳에서 버리면 시골사람들이 누구의 자손인지 다 알고있으므로 그곳에 버리지 못하고 목포에 데려와 버리곤하였다.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파출소에서 신체가 건강하면 고아원으로 보내고 학교도 갈 수 없는 장애아들은 당시 마땅히 장애인 복지센타 같은 시설이 없었기에 "부랑아 일시보호소"라고 하는 동명원에 맡겨 성인이 될때까지 이곳에서 방치되어 살게 된것이었다. 뼈만 남아있는 해골같은 모습의 아이들을 보았을때, 난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내가 일할곳이 여기구나!"라는...... 70여명 아이들에게 빵도 먹이고 싶고, 부모는 버려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그분! 예수님을 소개하고픈 간절한 열망을 갖게 된다.
친구들을 모으고 이를 위해 주님께서 학생회장을 하게 하심이 아닌가 싶어 여러 친구들과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써클을 만들어 어려운 그시절, 나도 못먹어 본 70인분의 빵과 우유를 준비하여 매주 주일 오후에 친구들을 방문하여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배를 드리고, 체력 단련을 위해 체육도 하고, 게임도 하며 아이들에게 한줄기 소망과 기쁨을 주게된다.
이 비용을 만들기 위해, 나는 집이 어려워 월급전체를 어머니에게 드려야 했기에, 나는 다니는 은행에 한시간 일찍 출근하여 남자직원들의 구두를 닦기로 결심하고 그 의견을 말하자 어차피 닦아야 할 구두니까 좋은 일을 위해 하는 나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모두를 흔쾌히 승낙해주며 격려와 함께 마음을 모아주었다. 다른 친구들도 동명원아이들을 위해 알바를 하고, 때론 기금모금을 위해 길거리 땅콩판매도 하며 우리의 최선을 다하자 언제 부터인가 후배등 서로 돕는 분들이 생겨 아이들을 위한 간식이 충당되어 지게 되었다. 5년여 이 사역을 꾸준히 계속하자 지켜보시던 동명원 원장님도 자주 나를 부르셔서 감사의 마음을 전해주셨고, 뿐만 아니라 결단도 해 주셨다. 마음이 완전 바뀌신듯 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멀지않은 미래에 아이들을 위한 훌륭한 보금자리 공동체를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고 나는 1983년 1월인가?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후 그 원장님은 약속을 지키셔서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의 복지타운을 만들어 이사하셨다.
몇년의 동명원 봉사를 하며 그 어린 나이에 너무 큰것을 배우게 되엇다. ** 어떻게 70여명의 집단 전체가 주님 영접과 회심을 할 수 있었을까?하는 기쁨이다. 그들이 예배하는 모습은 아마 천상의 예배 광경을 연상케하였다. 냄새나고 열악하다 못해 경악하는 그런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예배하는 모습은 기쁨을 감추지못해 오그라진 손과 발로 통통구르며 주님을 경배하는 모습은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던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또한 아무리 없어도 사람은 줄것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용돈과 관계없이 살아도 될 만큼 근면이 몸에 베어 있는 삶이 훈련되어 있었으나 아이들에게는 주고싶었던 것이 있었다. 사랑과 함께 빵과 우유와 옷등을 할 수 있으면 많이 ~~~~~ 무일푼에서도 마음이 일어나면 물질은 연결되어 함께 부어짐을 보며 그 어린시절에 봉사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이 부유한 자만 할 수 있는 특권임을 터득해가며 기쁨의 행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또한 공부를 하여 더 큰 그릇을 준비해가야 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마침 은행 지점장님께서 인사부에 추천해주셔서 서울로 전근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고 뜻을 새우면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며, 주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발견하게 된다. 이 동명원의 아이들은 19세 소녀인 나에게 70명의 자녀로 다가왔고 너무도 소중하고 많은 깨우침을 주는 스승이 되었다. 지금도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아름다운 시절은 동명원에 쏟았던 5년이 넘는 가장 순순한 시절에 주께 올린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다! 누군가 부자와 가난뱅이의 차이는 물질의 유무가 아니라 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이웃에게 나눌게 없는 사람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내가 왜 이렇게 부자가 되어 살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그렇게 사셨고, 우리 끼니가 없어도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미시는.... 하다못해 병든자,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을 영육간 다 사랑으로 헌신하시는...그 뒷모습을 보고 자랐기에!그 뒷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주님의 사랑의 손길의 통로가 되는 놀라는 축복의 부요자가 된것이다. 그렇게 주님은 나를 손잡고 이끌어 가셨다. 그리고는 더 열망하게 된다. 더 큰 세상에 나아가 주님의 손길이 되어지길.... 더 많은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기를... 그 테레사의 꿈을 어린 소녀는 계속 꾸게 된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