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쓰는 생활 기록부 / 박선애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채워 넣어야 할 여러 항목 중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종합 의견 및 행동 특성’이다. 이것만 쓰면 끝나는데 만만치 않다. 한 사람을 1년 동안 지켜본 걸로 다 아는 것처럼 행동 특성을 찾고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몇 줄 글로 의견을 말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 남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거나, 눈에 띄게 착한 행실을 보이는 특별하게 좋은 면을 가진 학생들은 그나마 쉽다. 그러나 있는 듯 없는 듯한 학생은 할 말이 별로 없어 애를 태운다. 또 좋지 않은 특성이 두드러진 학생의 것은 졸업 후 50년 동안 보관하는 생기부에 차마 사실대로 남길 수 없어 고민하게 된다.
가끔 중․고등 학교 시절 내 생기부 종합 의견은 어떻게 돼 있을지 궁금하다. 또 스스로 쓴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1년 겪으며 보는 학생들 이야기는 채워야 할 의무가 있어 어떻게든 마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 본 내 특성은 매번 빈 칸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오늘은 글을 내야 한다는 의무감의 힘을 빌려 최대한 객관적인 눈으로 나를 관찰해 볼까 한다.
먼저 정직하다. 물론 살아오면서 거짓말도 하고, 나를 포장해서 보이기도 하면서 그리 나쁜 의도는 아닐지라도 남을 속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래도 정직하다고 말하고 싶다. 중학교 2학년 때다. 그때는 학교 행사가 있으면 근처 사진관 아저씨가 와서 사진을 찍었다가 현상해 가져오면 돈을 내고 찾았다. 소풍을 갔다 와서 아버지께 사진 두 장을 찍었으니 그 값에 맞는 오백 원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 선애는 정직해서 이쁘다."고 하며 천 원을 주셨다. 그 시대의 분위기 탓에 아버지를 어렵게 생각하고 대화를 거의 하지 않으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다가 인정을 받으니 기쁘면서도 앞으로 부모님을 속이면 믿음을 저버리는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 더 정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로는 더욱 거짓이나 꾸밈없이 바르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지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직장에서 맡은 일은 꽤 열심히 하는 편이다. 내 일을 못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좀 못 견딘다. 능력이 안 돼서 잘못하는 것은 있지만 꾀를 부리며 피하지는 않으려 한다. 요즘에 수업 외에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독서하는 일이다. 사탕 주면서 꼬드기고, 때로는 한번 와 보라고 호소하고, 책 읽고 있으면 넘치도록 좋아했더니 순박한 우리 아이들은 제법 잘 따라 준다. 전교생 여든 명 중 스무 명쯤 오더니, 지난 금요일에는 스물다섯 명이 왔다. 점심 먹는 시간이 아까워 빨리 먹고 도서관에 가면 아이들이 먼저 와서 책을 읽고 있다. 너무 예쁘다. 가슴이 기쁨으로 꽉 찬다. 또 수업 시작을 한 문단 글쓰기로 한다. 글감을 주고, 통일성 있게 한 문단을 쓰게 한다. 교과서 진도 때문에 매시간은 못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잠깐 틈을 내 하는데 아이들이 교과 내용 배우는 것보다 재미있어한다. 수업 후에는 이훈 교수님처럼 꼼꼼하게 지도는 못 해 주지만 흉내는 내어 글쓰기 공책에 빨간 펜으로 틀린 것 고치고 내용에 맞춰 필요하면 댓글도 써 준다. 아이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혼자만 듣는 것 같은 짜릿한 행복도 맛본다. 바쁘기는 하지만 아이들에게 책 읽는 기쁨을 알게 하고, 글쓰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자는 내 나름의 목표를 이루려고 정성껏 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내 일을 잘 하려고 힘쓰는 나는 분명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남을 배려하고 마음이 따뜻하다. 사랑이 많으면서도 밥 먹고, 말하는 것부터 행동거지 하나하나 엄하게 다스리신 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인지 이기적인 본성을 누르고 배려하는 마음을 조금 지닌 것 같다. 부모님 집에서 직장에 다닐 때는 차가 없는 이웃 할머니들의 심부름도 곧잘 하고, 차도 태워 드렸다.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따르고 또 이웃 노인들과 친하게 살아서인지 나이 들고 약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긴 시간 병상에 누워 지내는 시어머니를 보면서도 애처롭고 안타까워하며 따뜻한 마음만은 드렸던 것 같다. 돌아가신 후에 아쉽고 후회되는 것은 많을지라도. 지금도 고향 친척 할머니가 마늘 농사가 잘돼 먹고 남게 생겼다고 걱정하는 소리에 팔아 주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다. 이래서 가끔 오지랖 넓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얘는 이래서 짠하고 쟤는 저래서 안쓰럽다고 여기는 걸 보면 나는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지나쳐서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일도 많다. 정직한 것을 중요시하다가 원칙만 강조하는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또 작은 속임수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끝까지 따져 잘못을 꼬집다가 아이들과 갈등을 일으킬 때도 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을 보면 힘들다. 자신의 일을 떠넘기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다. 그렇게 남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못마땅해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잔소리를 많이 하고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사람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도 좀 느슨해지려고 한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만 옳다고 나에게 맞추라고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이제 내 생활기록부의 종합 의견 및 행동 특성을 스스로 쓴다면 ‘정직하고 규칙을 잘 지키며 바르게 행동하지만 융통성이 없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다. 남을 배려하고 마음이 따뜻하여 약한 사람을 도우려고 애쓰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려는 자세가 부족하다.’라고 하겠다. 글쓰기 덕분에 오랜 숙제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