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2_9_54p The Society and Individual
New vistas, new angles of vision, constantly appear as the procession - and the historian with it-moves along. The historian is part of history. The point in the procession at which he finds himself determines his angle of vision over the past. This truism is not less true when the period treated by the historian is remote from his own time. When I studied ancient history, the classics on the subject were-and probably still are-Grote's History of Greece and Mommsen's History of Rome. Grote, an enlightened radical- banker writing in the I840s, embodied the aspirations of the rising and politically progressive British middle class in an idealized picture of Athenian democracy, in which Pericles figured as a Benthanite reformer and Athens acquired an empire in a fit of absence of mind. It may not be fanciful to suggest that Grote's neglect of the problem of slavery in Athens reflected the failure of the group to which he belonged to face the problem of the new English factory working class. Mommsen was a German liberal, disillusioned by the muddles and humiliations of the German revolution of 1848-9. 새로운 시각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행렬이 이리저리 움직임에 따라. 물론 역사가도 그 행렬 속에 있다.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분이다. 그가 행렬 속에 서 있는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 이 같은 진실은 똑같이 진실이다. 역사가에 의해 다루는 시대가 그 자신의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가 고대사를 공부할 때 그 분야의 고전은,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로테’의 <그리스의 역사>와 몸젠의 <로마사>였다. 그로테, 그는 깨어있던 급진주의자였다. 1840년대 은행가, 구현했다. 열망을 솟아오르는 그리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영국의 중산층들의 정치적 열망을 이상화된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구현했다. 페리클레스는 벤담적인 개혁가였고 아테네는 얼떨결에 제국을 획득한 것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로테의 소홀함, 아테네에서의 노예 문제해결에 관한 소홀함은 반영한다. 그가 속했던 집단의 실패, 새롭게 등장했던 영국의 공장 노동계급의 문제를 직면한 그가 속했던 그룹의 실패를 몸젠은 독일의 자유주의였다. 그는 환멸을 느꼈다. 1848년 독일 혁명의 혼란스러움과 치욕에 대해서
Chapter 2_10_55p The Society and Individual
Writing in the 1850s-the decade which saw the birth of the name and concept of Realpolitik-Mommsen was imbued with the sense of need for a strong man to clear up the mess left by the failure of the German people to realize its political aspirations; and we shall never appreciate his history at its true value unless we realize that his well-known idealization of Caesar is the product of this yearning for the strong man to save Germany from ruin, and that the lawyer-politician Cicero that ineffective chatterbox and slippery procrastinator, has walked straight out of the debates of the Paulikirche in Frankfurt in 1948. Indeed, I should not think it an outrageous paradox if someone were to say that Grote's History of Greece has quite as much to tell us today about the thought of the English philosophical radicals in the 1840s as about Athenian democracy in the fifth century B.C., or that anyone wishing to understand what 1848 did to the German liberals should take Mommsen's History of Rome as one of his text-books. Nor does this diminish their stature as great historical works. I have no patience with the fashion, set by Bury in his inaugural lecture, of pretending that Mommsen's greatness rests not on his History of Rome but on his corpus of inscriptions and his work on Roman constitutional law: this is to reduce history to the level of compilation. Great history is written precisely when the historian's vision of the past is illuminated by insights into the problems of the present. 1850년대에 쓴 글에서. 그 시기는 <현실정치>라는 용어와 개념이 나타나고 있었던 시기였다. 몸젠은 어떤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어떤 강력한 사람에 대한 혼란을 정리해줄 강력한 사람. 정치적 열망을 달성하려는 독일 국민들의 실패에 의해 남겨진 혼란을 해결해 줄 강력한 사람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몸젠의 역사 진가를 맛볼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몸젠 그가 이상화한 케사르는 산물이다. 열망의 산물이다. 독일을 구해줄 강한 사람에 대한 열망이다. 패배로부터 독일을 구해줄 강한 사람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법률 정치인인 키케로는 효과 없는 말만 많은 사람이고 교묘하게 회의 진행을 늦추는 키케로는 방금 걸어 나왔다. 토론장으로부터 1848 프랑크푸르트의 바울교회로 부터 걸어 나온듯했다. 사실 난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래와 같이 얘기하더라도. 그로테의 History of Greece는 오늘날 1840년대 영국의 철학적인 급진파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만큼? BC 5세기의 아테네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만큼. . . 또는 1848년 독일 리버럴들이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몸젠의 ‘History of Rome’ 를 그의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참을 수 없다. 어떤 베리에 의해 제기된 유행을, 뷰리는 그의 취임사에서 몸젠의 위대함은 그의 <History of Rome>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문들의 광범위한 수집과 로마법에 관한 그의 작업에 있다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편집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는 씌어 진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비전이 현재의 문제들에 통찰력 있게 비춰질 때.
Chapter 2_11_56p The Society and Individual
Surprise has often been expressed that Mommsen failed to continue his history beyond the fall of the republic. He lacked neither time, nor opportunity, nor knowledge. But, when Mommsen wrote his history, the strong man had not yet arisen in Germany. During his active career, the problem of what happened once the strong man had taken over was not yet actual. Nothing inspired Mommsen to project this problem back on to the Roman scene; and the history of the empire remained unwritten. It would be easy to multiply examples of this phenomenon among modern historians. In my last lecture I paid tribute to G. M. Trevelyan's England under Queen Anne as a monument to the Whig tradition in which he had been reared. Let us now consider the imposing and significant achievement of one whom most of us would regard as the greatest British historian to emerge on the academic scene since the First World War: Namier. Sir Lewis: Namier was a true conservative-not a typical English conservative who when scratched turns out to be 75 per cent a liberal, but a conservative such as we have not seen among British historians for more than a hundred years. Between the middle of the last century and 1914 it was scarcely possible for a British historian to conceive of historical change except as change for the better.가끔 놀람이 표현된다. 몸젠이 공화국의 몰락이후의 역사를 계속 쓰기를 실패한 것에 대해. 그는 시간이, 기회가, 지식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다. 몸젠이 그의 역사를 썼을 때, 강한 지도자가 독일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활동 기간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문제, 강력한 사람이 나타나서 권력을 잡을 때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문제는 실현되지 않았다. 몸젠으로 하여금 로마 시대의 연구로 돌아가서 계속하게 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제국의 역사는 씌어지지 않은 채 남겨졌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의 예를 현대 역사가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지난 강좌에서 G.M.Trevelyan의 ‘England under Queen Anne’를 그가 자랐던 휘그 전통에 대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말한 적 있다. 이제 우뚝 드러나 보이고 중요한 업적을 성취한 한 사람을 들어보자. 그는 1차 대전 이후로 영국 학계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간주될 것이다. 네이미어는 진짜 보수주의자였다. 껍질을 살짝 벗겨내면 75%는 자유주의자로 드러나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백 년 동안 영국 역사가들 사이에 다시 볼 수 없는 보수주의자였다. 지난 세기의 중반부터 1914년까지 영국 역사가들은 변화란 더 좋은 쪽이다 라는 거 외에는 거의 상상을 할 수 없었다.
Chapter 2_12_57p The Society and Individual
In the 1920s, we moved into a period in which change was beginning to be associated with fear for the future, and could be thought of as change for the worse - a period of the rebirth of conservative thinking. Like Acton's liberalism, Namier's conservatism derived both strength and profundity from being rooted in a continental background. Unlike Fisher or Toynbee, Namier had no roots in the nineteenth-century liberalism, and suffered from no nostalgic regrets for it. After the First World War and the abortive peace had revealed the bankruptcy of liberalism, the reaction could come only in one of two forms-socialism or conservatism. Namier appeared as the conservative historian. He worked in two chosen fields, and the choice of both was significant. In English history he went back to the last period in which the ruling class had been able to engage in the rational pursuit of position and power in an orderly and mainly static society. Somebody has accused Namier of taking mind out of history." It is not perhaps a very fortunate phrase, but one can see the point which the critic was trying to make. Politics at the accession of George III were still immune from the fanaticism of ideas, and of that passionate belief in progress, which was to break on the world with the French revolution and usher in the century of triumphant liberalism. 1920년대, 우리는 변화가 미래에 대한 공포와 연관되어 생각되기 시작한 시기로 들어섰다. 그리고 변화는 더 약화된다고 생각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보수적인 생각의 재탄생의 시기였다. 액튼의 자유주의와 같이 네이미어의 보수주의는 유래했다 양쪽으로부터, 튼튼함과 심오함을 가져왔다. 대륙에 뿌리들 둔. 피셔나 토인비와 달리 네이미어는 19세기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도 향수어린 후회의 감정도 겪지 않았다. 1차 대전 후에 좌절된 평화는 자유주의의 붕괴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사회주의 아니면 보수주의 둘 중 하나의 형태를 띠면서 다가 왔다. 네이미어는 보수적인 역사가로 나타났다. 그는 두 개의 영역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둘 다 의미가 있었다. 영국 영사에서는 그는 마지막 시기로 돌아갔다. 그 마지막 시기는 지배 계급들이 합리적인 추구에 종사할 수 있던 시기였다. 질서 있고 대체로 정적인 사회에서 직책과 권력의 합리적인 추구에 종사할 수 있었던 시기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네이미어를 비난하기를 역사에서 마음을 뺐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적절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평가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볼 수 있다. 조지 3세의 즉위 당시의 정치는 이념의 열광이라든가 또는 진보의 열정적인 믿음등과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세계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자유주의의 승리가 문을 열게 된 것이었다.
Chapter 2_13_58p The Society and Individual
No ideas, no revolution, no liberalism: Namier chose to give us a brilliant portrait of an age still safe-though not to d remain safe for long-from all these dangers. But Namier's choice of a second subject was equally significant. Namier by-passed the great modern revolutions, English, French, and Russian-he wrote nothing of substance on any of them-and elected to give us a penetrating study of the European revolution of 1848-a revolution that failed, a set-back all over Europe for the rising hopes of liberalism, a demonstration of the hollowness of ideas in face of armed force, of democrats when confronted with soldiers. The intrusion of ideas into the serious business of politics is futile and dangerous: Namier rubbed in the moral by calling this humiliating failure 'the revolution of the intellectuals'. Nor is our conclusion a matter of inference alone; for, though Namier wrote nothing systematic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he expressed himself in an essay published a few years ago with his usual clarity and incisiveness. 'The less, therefore,' he wrote, ‘man clogs the free play of his mind with political doctrine and dogma, the better for his thinking.' And, after mentioning, and not rejecting, the charge that he had taken the mind out of history, he went on: 어떤 이념, 어떤 혁명, 어떤 자유주의도 없는 조용하고 화려한 시절을 그는 선택했다. 네이미어의 두 번째 선택도 똑같이 의미 있었다. 네이미어는 지나쳤다. 위대한 근대 혁명들인, 영국혁명, 프랑스 혁명, 그리고 러시아 혁명등. 그리고 그는 그것들에 대한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다.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1948년 유럽 혁명의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서. 그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었다. 전 유럽에 자유주의 열기가 퍼져 나가던 시점에서의 반동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념의 공허에 대한 예를 보여 주었다. 무장한 군인들 앞에서 이념의 공허함에. 그리고 군인들과 대치한 민주주의자들의 공허함의 예를 보여 주었다. 심각한 정치의 영역에 이념이 침투하는 것은 소용없고 위험한 것이다. 네이미어는 이 굴욕적인 실패를 ‘지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단지 추론의 문제에만도 아니다. 네이미어는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것을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그는 어떤 에세이에서 아래와 같이 간결하고 신랄하게 표현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독트린과 도그마에 덜 묶일수록 그의 사고는 더 좋아진다. 그가 역사에서 마음을 제거했다는 공격을 언급한 뒤,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했다.
Chapter 2_14_59p The Society and Individual
Some political philosophers complain of a 'tired lull' and the absence at present of argument on general politics in this country; practical solutions are sought for concrete problems, while programmes and ideals are forgotten by both parties. Some political philosophers complain of a 'tired lull' and the absence at present of argument on general politics in this country; But to me this attitude seems to betoken a greater national maturity, and I can only wish that it may long continue undisturbed by the workings of political philosophy. I do not want at the moment to join issue with this view: I will reserve that for a later lecture. My purpose here is merely to illustrate two important truths: first, that, you cannot fully understand or appreciate the work of the historian unless you have first grasped the standpoint from which he himself approached it; secondly, that that standpoint is itself rooted in a social and historical background. Do not forget that, as Marx once said, the educator himself has to be educated; in modern jargon, the brain of the brain-washer has itself been washed. The historian, before he begins to write history, is the product of history. The historians of whom I have just spoken-Grote and Mommsen, Trevelyan and Namier-were each of them cast, so to speak, in a single social and political mould; no marked change of outlook occurs between their earlier and later work. 구체적인 문제들을 위해서 실제적인 솔루션을 찾으려 노력한다. 반면에 강령과 이상들은 양당에 의해 잊혀진다. 그러나 나에게 이와 같은 태도는 더 큰 국가적인 성숙의 증거인 듯 보인다. 나는 오직 바란다. 그것이 오랫동안 방해받지 않고 지속되도록, 정치 철학의 작업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오래 도록, 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는 이슈에 참석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나중의 강의를 위해서 잠깐 미뤄놓고자 한다. 여기서 내 목적은 두 개의 중요한 사실을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당신은 이해하거나 음미할 수 없다. 역사가의 작업을 만약 당신이 어떤 관점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관점으로 그 스스로 그 작업에 접근한다. 둘째 그 관점은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잊지 마라.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교육자가는 그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 현대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뇌를 씻어내려야 사람은 자기 자신이 먼저 씻겨져야 한다.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역사의 산물이다. 방금 내가 말한 역사가들은 그로테, 몸젠, 트레벨리언 그리고 네이미어다. 그들은 각각 말하자면 단일한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서 지냈다. 어떠한 눈에 띄는 전망에 대한 변화가 그들의 초기작과 후기작 사이에 나타나지 않았다.
Chapter 2_15_60p The Society and Individual
But some historians in periods of rapid change have reflected in their writings not one society and one social order, but a succession of different orders. The best example known to me of this is the great German historian Meinecke(1862년~1954년), whose span of life and work was unusually long, and covered a series of revolutionary and catastrophic changes in the fortunes of his country. Here we have in effect three different Meineckes, each the spokesman; of a different historical epoch, and each speaking through one of his three major works. The Meinecke of Weltburgetthum and Nationalstaat, published in 1907, confidently sees the realization of German national ideals in the Bismarckian Reich and-like many nineteenth-century thinkers, from Mazzini onwards-identities nationalism with the highest form of universalism: this is the product of the baroque Wilhelmine sequel to the age of Bismarck. The Meinecke of Die idee der Staatsrason, published in 1925 speaks with the divided and bewildered mind of the Weimar Republic: the world of politics has become an arena of unresolved conflict between raison d'etat and a morality which is external to politics, but which cannot in the last resort override the life and security of the state. 격변하는 시기의 어떤 역사가들은 하나의 사회, 하나의 질서가 아닌 일련의 여러 가지 질서들을 그들의 글에 반영한다. 나에게 가장 좋은 예는 위대한 독일 역사가 마이네케다. 그의 생애와 작업 기간은 아주 길다. 그리고 그 시기동안 일련의 혁명적이고 재난적인 변화들을 그의 나라에서 겪었다. 여기 우리는 결과적으로 세 명의 마이네케를 보게 될 것이다. 각각은 다른 역사적 시대를 대변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들에 그것이 나타나 있다. 1907년에 발행된 <세계 시민주의와 민족국가>에서 그는 자신있게 비스마르크 시대에서 독일 국가 이상들을 실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19세기 많은 사상가들과 같이 민족주의를 세계주의의 최고로 보았다. ‘마치니’ 이래로. 이것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빌헬름 시대의 산물이다. 1925년에 출간된 <민족적 이성의 이념> 이란 책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분할된 혼란스런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정치의 세계는 국가적 이성과 정치 외적요소인 도덕사이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장이다.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