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252
12월23일(월요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의 바람, 성령의 계획은 자유롭습니다. 우리 인간의 계획과 철저하게 다릅니다!>
엘리사벳의 출산은 아인카림 온 동네의 큰 이슈요 관심거리였습니다. 이제 삶을 정리해야 할 연세에 도달한 엘리사벳, 요즘으로 치면 마을 경로당에서 민화투를 치고 계실 엘리사벳의 잉태는,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의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웃들은 다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엘리사벳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친척들의 눈길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저 연세에 과연 정상적인 출산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혹시라도 출산 중에 산모가 위험한 것은 아닌가? 아기는 과연 정상아로 태어날 것인가?
그러나 엘리사벳은 보란듯이 건강한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산모의 건강도 양호했습니다. 호기심반 걱정반 엘리사벳의 출산을 지켜보고 있던 이웃들과 친척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에 따라 아기를 안고 할례식에 갔습니다.
“대대로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세기 17장 12절)
당시 남아들은 할례를 받는 동시에 이름까지 받았습니다.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권한은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할례식에 참석한 친척들도 아기의 이름을 짓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토빗이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불려진 것처럼 아기에게 아버지 즈카르야로 이름을 붙여주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엘리사벳이 크게 외쳤습니다.
“잠깐 스톱!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복음 1장 60절)
그러나 둘러서 있던 친지들 역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뭘 안다고? 조용히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엘리사벳의 제안을 개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겠느냐며 손짓으로 물었습니다.
아직도 말문이 막혀있던 즈카르야는 글쓰는 판을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는 밀랍을 입힌 나무판에 글씨를 썼습니다. 사람들은 아기의 이름을 쓰는 즈카르야의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습니다. 즈카르야의 선택 역시 똑같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아기 이름을 짓는데 서로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영감을 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주님의 뜻, 주님의 의지는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 인간의 상식이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초월합니다.
성령의 바람, 성령의 계획은 자유롭습니다. 우리 인간의 계획과 철저하게 다릅니다.
엘리사벳와 즈카르야가 선택한 아기의 이름 ‘요한’이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는 ‘주님께서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신다.’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은혜로우심으로 인해 이제 즈카르야의 일시적인 벌은 종료됩니다. 즉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 즈카르야의 입에서 최초로 터져나온 말은 주님의 놀라운 구원 업적과 자비를 칭송하는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이제 구원의 때가 시작됨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선언입니다.
마지막 대예언자의 탄생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큰 목소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나 나약함 앞에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는데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악과 부조리 앞에 한탄하고만 있어서도 안됩니다. 약속에 충실하신 주님을 향해 부단히 시선을 들어올려야만 합니다.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자비와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마지막에 기쁘게 끝났다면 하느님 뜻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제가 어렸을 때 밤에 청사과를 먹었는데 심하게 체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소화가 안 되었던지 밤새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을 다 따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안 나아서 아침에 구토를 하였는데 그 청사과즙만 시퍼렇게 신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그 이후로 청사과를 먹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몸은 아마도 자신을 아프게 한 것을 더 이상 먹지 말라고 그 마지막 맛만을 기억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평생 청사과 맛은 고통으로 남아있습니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술을 엄청 많이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굉장히 힘들어서 고통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전날 얼마나 즐겁게 마셨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즐겁게 마셨더라도 마지막 기분이 좋지 않다면 그 마지막 안 좋은 기분이 즐거웠던 기분마저 잡아먹게 됩니다.
왜 어떤 때는 마지막에 기분이 안 좋을까요? 대부분은 끝에 어떠한 감정이 올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만족을 위해 끝나고 나서의 기분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루 종일 과자만 먹으며 TV를 보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때의 기분은 어떨까요?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떠한 감정으로 끝나게 될지 생각한다면 우리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마지막을 기분 좋게 끝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즈카르야의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만은 전통을 어기려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고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항상 끝에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뜻이나 세상의 뜻에 휩쓸리면 처음엔 기뻐도 마지막엔 항상 기분 나쁘게 끝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기분이 아주 오래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려면 항상 ‘마지막 기분’에 집중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의 맛은 처음엔 쓰고 마지막엔 답니다. 그러나 세상의 뜻은 처음엔 달고 마지막엔 씁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어떻게 끝나고 싶으냐에 따라 어떤 뜻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어떤 정치가가 연말에 어느 탄광을 방문했습니다. 광원들의 얼굴은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치가는 눈만 반짝이는 광원들이 불쌍하게 여겨져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날마다 이 굴 속에서 석탄을 캐는 단조로운 일을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그러자 한 광원이 석탄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고 명랑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캐는 이 석탄이 빛이 되고 동력이 되고 열이 되어 가정과 공장, 사회와 국가를 움직입니다. 그래서 제 일이 즐겁습니다.”
성공해야만 뒤끝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이라 믿으면 기쁘게 끝낼 수 있습니다. 순교성인들도 그렇게 끝을 맺으신 분들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으면 좋은 경험을 했다고 여기지만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뜻이 없으면 왠지 허무함만 느낍니다.
마지막 기분은 하느님의 뜻이 주는 의미에 달려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이 나의 삶 전반에 흐르게 하여 나의 모든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합니다. 소금처럼 모든 일에 양념으로 넣어야합니다. 그러면 일의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항상 기쁨으로 뒤끝 좋게 끝맺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하느님의 뜻을 결합시켜봅시다. 일과는 좀 더 고되어 질지라도, 결국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7-66 :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교회는 성탄 바로 전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배치하여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제시하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고리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정점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늙은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를 낳았고, 젊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들의 주님을 낳았다. 아론의 자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사 40,3)를 낳았고, 다윗의 자손은 권능의 하느님을 낳았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죄를 탕감하는 사람을 낳았지만, 동정녀는 죄를 없애시는 분(요한 1,29)을 낳았다.
엘리사벳은 회개를 통하여 사람을 화해시키는 사람을 낳았고, 마리아는 더러운 땅을 정화시키는 분을 낳았다. 늙은 여인은 선조 야곱의 집안에 등불을 밝혔고, 요한이 바로 그 등불이다(요한 5,35). 젊은 여인 동정녀 마리아는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을 낳았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고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더구나 하느님의 운동선수인 우리는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혜를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시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또한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 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를 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의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1)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나쁜 목자들에 맞서 쓴 말라키 예언서(기원전 5세기)의 말씀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종교 재건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사제들은 부패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시어 정화의 불로 경신례를 새롭게 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마음을 돌리면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주님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그리고 작명에 관하여 들려줍니다. 요한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호의’ 또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를 뜻합니다.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사명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지향하여 선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끊임없는 호의를 그의 인격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만큼 그분의 직접적인 선구자가 되는 사명과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통하여 계약을 충실하게 기억하십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를 뜻합니다. 이 세 주인공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그들 이름은 주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와서 마음의 회개를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닌 백성을 하느님께 준비하였습니다.
###############
(2)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나쁜 목자들에 맞서 쓴 말라키 예언서(기원전 5세기)의 말씀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종교 재건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사제들은 부패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시어 정화의 불로 경신례를 새롭게 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마음을 돌리면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주님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그리고 작명에 관하여 들려줍니다. 요한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호의’ 또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를 뜻합니다.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사명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지향하여 선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끊임없는 호의를 그의 인격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만큼 그분의 직접적인 선구자가 되는 사명과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통하여 계약을 충실하게 기억하십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를 뜻합니다.
이 세 주인공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그들 이름은 주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와서 마음의 회개를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닌 백성을 하느님께 준비하였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이, 즉 예수님의 탄생이 곧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라는 말은, “아기를 낳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라는 뜻입니다.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라는 말은 축하했다는 뜻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고만 생각하고,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또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에게(인류 전체에게) 주님께서 큰 자비를 베푸신 일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엘리사벳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자신들이 구원받게 되었음을 먼저 기뻐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전해 준 ‘기쁜 소식’을 이웃과 친척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즈카르야가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거나, 아니면, 전해 주었는데도 사람들이 무시했거나 흘려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전해 주지 않으면 힘을 잃어버리고, 또 들은 사람들이 제대로 듣지 않아도 힘을 잃어버립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일부러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 감춘 것은 아닐 것이고,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잠시 미루었다가 그 아들을 사람들에게 공개할 때에 기쁜 소식도 함께 전해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면, 그 노래는 메시아 강생 소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찬미가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의 출생 전후의 이야기를 보면,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축하했다.”)라는 말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성탄절을 축하하는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누구나 “성탄을 축하합니다!”(또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하는 인사인지, 또 무엇을 축하하는 것인지? 우리가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나를’(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음을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남의 일’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우리의 일)을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이고 ‘우리의 잔치’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성탄 인사를 주고받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루카 1,63-64)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말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었습니다.(루카 1,20)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날에 즈카르야의 입이 열렸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은 요한의 할례식 날입니다. 왜 그 날일까?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음을 알게 된 날도 아니고, 아기가 태어난 날도 아니고, 왜 할례식 날일까? 천사가 전해 준 말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음을 알게 되면서 바로 천사의 말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더욱 깊이 믿게 되었을 것이고,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할례식 날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다음에야 열렸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믿는다고 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증언해야 믿음이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일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증언한 일입니다.) 그가 믿지 못해서 말을 못하게 된 것은 믿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 아니고, 그의 믿음을 위한 ‘표징’이지만, 표징도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5-66)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이 사람들 눈에는 신기하고 놀라운 일로 보였고, 그래서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여기서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복음서 저자가 전한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손길이 자신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에게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는 입이 열리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했는데, 그 찬미는 68절-79절에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일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분명히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 선포’이고, 메시아를 보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래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일이고, 메시아 강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즈카르야의 노래’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주님의 손길이 자신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면, 메시아 강생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즈카르야는 처음에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못했으니 기쁨도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인의 ‘참 기쁨’은 ‘믿음’에서 생깁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 기쁨은 없고 불안감과 두려움 같은 어두운 것만 생깁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어린 시절, 심지어 신학생 때 까지도 저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해성사를 보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신부님께 고백하는 것이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고, 마치 잘못한 일들에 대해 심판받고 단죄 받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학생 때는 교수 신부님들이 내 목소리를 알아채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본 다음 날엔 마치 교수신부님의 눈빛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나의 죄를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고해실 안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용서의 하느님, 나와 화해하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히려 사제서품을 받은 다음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분노의 하느님, 심판의 하느님이라 착각합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하느님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벌을 받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나이가 아주 많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으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 아이의 탄생을 예고하며 이름을 세례자 요한이라 짓도록 명령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당시 흔한 이름이었지만 부모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이 통상적이었던 당시 문화에 그것은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고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 짓습니다.
그런데 앞선 복음 내용에서 즈카르야는, 늙은 아내가 임신할 것을 의심함으로써 말 못하는 벙어리로 지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짓는 순간 그의 모든 허물은 벗겨지고 장차 요한을 통하여 이룩하실 하느님의 구원을 내다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안에서 이제 새로운 구원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희랍 사람들이 알고 섬기는 신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초월한 존재, 인간을 미미한 존재로 여기는 무정한 신이었습니다.
또한 유다인들이 생각했던 하느님의 모습이란 율법을 통하여 한결 같이 인간을 심판하는 엄격한 하느님이었기에 공포 이외에 다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가 말을 하게 되는 모습, 아기를 원했던 나이 많은 부부에게 요한을 보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이 두려워만 하던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과 평화를 갖고 오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과정의 의미는, “요한”이라는 이름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자애로우시다” 입니다.
요한은 그 이름 뜻대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겸손한 그의 이름은 하느님의 역사에 새겨질 영원한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함으로써, 구원과 평화를 주시고자 우리에게 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확실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가지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이틀 후면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마음은 풍성한 잔치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곁에 오실 분이 어떤 분인지, 그분을 맞이하는 내 자신의 준비에 미비한 부분은 없는지, 그리고 그분에 대한 나의 믿음과 기대는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겨 보고 은총을 청하시길 바랍니다.
이 모든 일은 직접 경험한 즈카리야는, 내일의 복음에서 다음의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아멘.
=====================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얼마 전 초등학생들에게 ‘성탄절은 우리에게 누가 오는 날일까요?’ 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그중 몇몇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상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에 큰 선물 주머니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어쩌면 학생들에겐 더 친근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탄절’ 하면 산타크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또 연말연시의 분위기에 젖어 성탄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성당에 꾸며진 구유 안에서 태어나셔서 성당에만 계시는 분이고, 성당을 벗어나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우리 가운데 와있는 뭔가 의미가 달라진 듯한 성탄절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림 제4주간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들 중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 구원을 위하여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말을 못하게 된 즈카르야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정했을 때 그의 입이 풀렸고, 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있었던 요한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복음에 나오는 그의 설교와 삶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을 구세주 오심을 준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이사야 예언서 40장에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라는 내용처럼 요한은 구세주의 앞길을 예비하는 소리로서 하느님께서는 꼭 오시고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참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루카 3장 7절의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온전한 투신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권고합니다.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투신하고 절제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온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이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합당한 준비를 하라고 촉구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이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그는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6-28)라고 칭찬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시고,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며, 그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십니다. 또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요한처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진리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도 노력하고 기도합시다.
주님 성탄은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요한의 삶을 본받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시간임을 기억합시다.
=====================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습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원래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었는데, 나이마저 많았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즈카르야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반신반의하자, 천사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1,5-20 참조).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지요. 그러자 그의 혀가 풀려 말하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을 대하며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힘 있는 자아 중심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욱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권력이나 재물이 있어야만 더 많이 가질 수 있기에 경쟁과 질시, 불화와 다툼이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 세계에서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세계는 다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과 같이 아기를 잉태할 능력이 없는 여인을 택해 생명을 만드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생각하며,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게 묵상했으면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요한아>
루가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요한아>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사람이 물려준 이름
즈카르야 대신에
하느님이 정해주신 이름
요한이라고 불려야 한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가진 이들이 대물림하는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비움 낮춤 버림만이 이룰
하느님의 영광을 좇아야 하기에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타고난 밥그릇에 자족하는
즈카르야가 아니라
함께 배부르고 함께 배고픈
요한이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자신만을 살찌우려는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벗들과 함께 살아야 할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질긴 목숨 구차하게 이어갈
즈카리야가 되기보다
정의를 위해 단칼에 목 베일
요한이어야 한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단지 살기 위해서 사는
살아도 죽은 사람이 아니라
찰나의 삶과 죽음을 하나로 아우르는
죽음으로써 사는 사람이기에
=====================
[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제가 2017년 6월 24일부터 278일 동안 오후 3시에 매일 벙어리 침묵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시는지요? 저는 그 시간에 지향을 두지 않았었습니다. 다만, 그저 주님 앞에 1시간이 아니더라도 10분 만이라도 깨어있는 마음으로 있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 안에서 이루고 싶은 일들을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벙어리 침묵 기도에 고운님들을 초대했었습니다. 하루에 10분 만이라도 주님 앞에 앉고 싶은 마음으로 278일 벙어리 침묵 기도를 시작했던 첫날에 10년 동안 쉬셨던 스테파노 형제라는 분이 성사를 보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멀리에서 오셨던 그 형제가 우연히 그곳에 들려서 마치, 하느님이 그 형제를 초대한 것처럼 고해성사를 보시고 주일 미사에 참례하여 10년만에 성체를 모셨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278일 동안 주님께서 이루고 싶으셨던 일들을 저를 통해 이루어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정하는 시간에,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했으나, 어머니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버지 즈카르야 역시 글 쓰는 판에다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자 즈카르야는 곧바로 혀가 풀려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즈카르야는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278일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즈카르야에게 278일 동안 침묵하게 하시는 것은 “믿지 못하겠으면 그냥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지켜보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것은, 즈카르야가 278일 동안 침묵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놀라운 능력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과 함께할 때 행복은 저절로 주어진다.”라는 것을 즈카르야를 통해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오후 3시 벙어리 침묵 기도를 하면서, 제가 기억하는 고운님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부르며 하느님 앞에서 기도를 봉헌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눈을 들어 작은 십자가 언덕에 물들어진 붉은 피 위에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 쌓여주시기를 그리고 그 위에 구세주의 탄생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십자가 언덕에 구세주의 탄생을 바라보게 되기를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나, 일이 뜻대로 안 되어 막막할 때도 고운님들이 할 일은 ‘침묵 속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벙어리 침묵 기도’로 믿음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뜻이 고운님들의 소망대로 이루어지는 행복한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54)
♧♧ 시편 68편 12절….
"주님께서 말씀을 내리시니 기쁨 소식 전하는 이들이 대군을 이루네."
* 주님께서 말씀을 내리시니...
이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첫째, 암호. 둘째, 승리의 약속. 셋째, 큰 성과를 거두라는 명령 등입니다. 이 중 가나안 정복 및 정착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타당성이 큽니다.
* 기쁨 소식 전하는 이들이 대군을 이루네...
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하는 여자 합창단과 무용단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민족적 승리로 인해 하느님을 찬양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탈출기 15장 20-21절. 판관기 5장 1-3절. 사무엘 상권 18장 6-7절. 참조)
♧♧ 시편 68편 13절….
"군대를 이끈 임금들이 도망가는구나, 도망가는 구나. 규중 여인도 전리품을 나누네."
* 군대를 이끈 임금들이 도망가는구나...
여기서 ‘군대를 이끈 임금들’이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때에 패배하여 달아난 가나안의 여러 임금들을 말합니다.(여호수아기 8장 18-23절, 10장 16-21절, 11장 6-9절. 판관기 3장 10절 29절, 4장 14-16절, 7장 19-25절. 사무엘 상권 7장 7-11절. 사무엘 하권 5장 17-25절. 참조) 다윗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해주셨기에 이스라엘이 강성한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 규중 여인도 전리품을 나누네...
전쟁에서 이긴 남자들이 집으로 전리품들을 가져옴으로 해서 집에 가만히 앉아 있던 여자들도 이를 나누어 가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판관기 5장 28-30절. 참조) 이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에 대하여 거둔 승리가 크고도 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어떤 형제님께서 성지 사무실에 화난 얼굴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서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살지 마. 내가 다 보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을까요? 정말로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또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막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 제게 이런 말을 했던 형제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적으로 약간 아프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지금 아파서 했던 말일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잘 아는 사이라 해도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한다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그 말을 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좋게 생각되지도 않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기분이 나쁘지만,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잘 살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이 형제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조금 더 신경 써서 살아야 합니다. ‘이만하면 되었어.’가 아니라 ‘아직도 멀었어.’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장면입니다. 할례식 때에는 그의 이름을 결정하는 명명식도 함께 이루어지는데,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지요.
그러나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물었지만, 그 역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의 이 모습에 우리는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늘 부족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도 늘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견해와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에서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숙제>
초등학생 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는다면 방학을 마치고 개학하기 며칠 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난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 순간이지만 저의 경우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로 방학 숙제 때문입니다.
방학 시작할 때는 미리미리 하겠다며 하루 일과표를 꼼꼼하게 그려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노는 것에 익숙해지고 숙제는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개학을 며칠 앞두고서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해집니다. 숙제하지 않았으니까요…….
미리 조금씩 숙제를 했으면 충분히 다할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몰아서 하려고 하니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이 되고 말았지요. 시험공부 때문에 밤을 새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방학 숙제하느라 밤샌 적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준비도 이렇지 않을까요? 늘 ‘나중에’만을 외치다 보면 아예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준비한다면 편한 이 세상을 살면서도 기쁘게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신 이 세상 안에서의 사랑 실천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지금 얼마큼의 숙제를 하셨습니까?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타를 배울 때입니다. 코드를 외우고, 박자를 맞추고, 리듬을 맞추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음을 맞추는 거였습니다. ‘라’ 음을 정하고, 다른 줄에서도 같은 음이 나올 수 있도록 줄을 조절하는 겁니다. 줄을 너무 느슨하게 조절하면 소리가 나지 않았고, 줄을 너무 조이면 끊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줄을 맞추는 건 연습도 필요하지만, 음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자주 들으면 음에 대한 감각이 생깁니다.
운전할 때도 그렇습니다. 너무 긴장하면 경직되고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급정거하기도 하고,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면 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교통 신호를 무시하기도 하고, 무리하게 추월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안전하게 운전하면 좋습니다. 운전하기 전에 잠시 기도하고, 운전하면서 음악을 들으면 차 안은 아늑한 쉼터가 됩니다.
4개의 대림초에 불이 모두 켜졌습니다. 오늘은 대림초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 초는 ‘깨어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깨어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깨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깨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리야가 깨어 있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깨어 있었습니다. 목동들이 깨어 있었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주님의 오심을 알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초는 ‘새로운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입니다. 신분, 이념, 혈연, 계층, 성별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노는 세상입니다. 어린아이와 늑대가 손을 잡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는 세상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세 번째 초는 ‘자비로운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그렇게 따뜻하게 해 드렸으니,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네 번째 초는 ‘강생의 신비’를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마구간에 태어나십니다.
2019년 성탄은 제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을 떠나서 미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문제작이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제 마음의 줄을 잘 가다듬으려고 합니다. 너무 느슨하면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너무 긴장하면 몸도 마음도 지치기 마련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며 기쁘게 지내려 합니다. 여러분에게 2019년 성탄은 어떤 의미인가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다>
-우연은 없다-
포근하기가 겨울 속의 봄같습니다. 새벽 물안개 자욱하고 얼어 딱딱했던 대지가 사랑의 봄비같은 겨울비로 젖어 촉촉합니다. 아주 오래전 애송했던 자작시 ‘봄비’가 그립게 떠오릅니다.
-“마음을/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내 딸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요즘 간혹 뜬금없이 이런 봄비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곤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미소다”, 얼마전 교황님의 강론중 한 말씀이 참 신선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다”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탄생도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12월23일 마지막 ‘오 후렴’입니다.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요,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배고파하는 영혼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참으로 웃음이, 사랑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웃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오래전 써놨던 시가 반가워 나눕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 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버리고 살았는지
살아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폈다 지면 또 오늘의 꽃폈다 지고---
그렇게 평생을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
사랑의 향기로!”-2001.4.23.
늘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미소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여 ‘보속 말씀 처방전’에 늘 찍어 드리는 “웃어요!”라는 스탬프입니다. 어제 상담 대화중 드린 조언도 생각납니다.
“무조건 참으십시오. 기다리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말많이 하지 마십시오. 화내지 마십시오. 큰 소리 치지 마십시오. 죄짓지 마십시오. 특히 약먹으면서 죄지으면 안됩니다. 죄를 짓더라도 젊고 힘있을 때지 늙고 힘없을 때는 죄의 상처나 후유증도 오래 갑니다.”
말씀드렸는데 이 또한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모든 시간이 하느님 수중에 있고,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안에 있다면 이렇게 할 수 뿐이 없습니다. 어제 사랑하는 지인이 공주역에서 보내준 나태주 시인의 시도 좋았습니다.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 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평범하나 진솔한 사랑이 담겨 있는 글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말라기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약속도 감동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마침내 하느님 사랑의 약속은 실현되어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하느님의 미소인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당대 신자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이라 믿었습니다. 하여 모두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의 일치된 결론의 아기 이름 안에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아닙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강경한 엘리사벳의 말에 즈카르야도 글쓰는 판을 달라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씁니다.-
요한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호의’ 또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를 의미합니다. 그대로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드러내는 이름뜻입니다. 즈카르야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를 의미하며,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들이며 이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의 인물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연도 요행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순간 즉이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찬미입니다. 아마 즈카르야도 엘리사벳도 하느님 사랑의 구원 섭리를 절절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으니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은 은총의 대림시기 오늘의 우리 위에도 머물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끊임없이 세례자 요한 대신 우리에 대해, “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끊임없이 자문하며 하느님의 선한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 사랑의 섭리를 잘 깨달아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미소’로 살게 하십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야훼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가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주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우리 모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도 정성스럽게, 그리고 충실하게 주님을 맞으려 애쓰는 이들을 만납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60)
출산한지 열흘도 채 안 된 늙은 산모가 외칩니다. 이웃과 친척들이 부친이나 친척의 이름을 따서 아기 이름을 짓는 풍습에 따라 아기를 "즈카르야"라 부르려 하는데 아기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루카 1,13)
엘리사벳은 즈카르야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이 전언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 풍습이나 관례, 취향이나 선호도로 뒤집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재차 확인을 요구받은 즈카르야마저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이라고 쓰자 이웃과 친척들이 물러나지요.
이름에는 그 사람의 소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가 이름 안에 녹아듭니다. 이 존재의 호칭이 무수히 불리워지고 언급되면서 그 이름의 의미역시 그 존재 안에 더 깊이 각인되고, 그는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과 목적성을 더 깊이 살아가게 되지요.
요한에게 주어진 이름을 지키려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노력은 구원 역사 안에서 이 아기에게 배정된 하느님의 계획을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정성과 충직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숙제까지 마치고 나자 비로소 즈카르야의 혀가 풀립니다. 의심으로 묶였던 것이 믿음의 증언으로 제 구실을 되찾은 것이지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두려움에 휩싸인 이웃들을 통해 아기의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집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는 민중에게 일말의 희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람들 마음 안에 떠오른 이 질문의 답은 제1독서 안에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말라키 예언서 저자는,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세상을 준비시킬 "엘리야 예언자"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오늘의 아기,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아기의 이 역할과 정체성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기에, 주님의 뜻을 경외하는 이들을 통해 반드시 지켜져야 했지요.
살다보면 희생도 해야 하고 물러나 주는 편이 서로를 위해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 말씀의 완성과 관계된다면 더더욱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주님께서 당신 성전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성전은 이스라엘이고 예루살렘이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바로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영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충실히 제 역할을 다한 선조들처럼 우리도 그분의 오심을 위해 정성과 사랑으로 성전을 가꾸어야겠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영성체송)
주님께서 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성탄이 거의 임박했습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과 우리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꼭 오실 것이니 우리 편에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겸손과 가난으로 오시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혼의 문을 활짝 열지 않는다면, 구중궁궐 안에서, 거룩한 수도원 안에서, 교회 안에서 온갖 전례와 행사와 이벤트 한가운데 있더라도 성탄의 기쁨은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잠시 멈추고 숨을 고릅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뛰어난 성과나 고액의 헌금, 모두를 만족시킬 재주보다는 가난한 그분이 마음껏 편히 머무르실 수 있는 소박하고 정성스런 우리 마음의 구유입니다. 초라해도 좋고 빈한해도 좋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유를 값지게 해 주실 분은 거기에 누우실 아기 예수님이시니까요.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기드온의 군대가 손에든 횃불은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시편의 말씀이 떠오른다. “당신 말씀은 제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기드온의 군대가 손에든 횃불은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이처럼 성경의 모든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역사가 하느님 이름으로 적의 영토 안으로 들어가야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곧 내면의 적, 악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기 위한 상징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의 횃불을 손에 들여져 있지 않기에 내면의 적, 악과 어둠의 세력과 맞서서 싸워 이길 권능과 능력이 부족하여 신전전지 교회(神戰之敎會, 지상교회의 영적 싸움의 교회)는 힘을 잃고 80%이상의 냉담자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상교회의 적인 삼구(세속, 육신, 마귀)를 물리칠 ‘영적 완전한 하느님의 무기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령의 칼’(에페 6, 14-17 참조)을 손에 쥐지 않았기에 영적 참패를 당합니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에서
__________________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름은 단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지게 하는 것만을 넘어서,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이나 사명을 결정짓는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이름을 짓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로 다루어졌고, 오늘날에도 “작명소”라는 곳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요한의 탄생과 함께 그의 이름이 지어지고,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집니다. 곧 주님 앞에서 길을 닦게 되는 엘리야로서의 예언자의 신원과 사명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리아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리아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아멘.
###################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고통이 주는 교훈>
'즈카르야의 아들 탄생'
예수님의 탄생이 오시기 전, 준비할 대리자로
세례자 요한이 미리 탄생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면 한 가족이라는 표시로
이름을 지을때 돌림자를 사용하려 합니다만
하느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노선과 달리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짓게 하십니다.
선 경험이나 선 지식이 걸림돌이 될때가 있는데
그것을 놓치 않고 고집하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
순종하지 않을때 나처럼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내가 겪는 고통에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루카 1, 57)
따뜻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손길 안에서
요한이 마침내
탄생합니다.
탄생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간절함 뒤에 오는
눈물겨운 탄생입니다.
이와같이
그냥 이루어지는
탄생은 없습니다.
보살피시는
여정을 통해
소중한 생명이
탄생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탄생을 통해
하느님의 위로와
놀라운 희망을
보게 됩니다.
탄생을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탄생을 노래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사벳의 눈물을
기억합시다.
즈카르야의 기도를
생각합시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기다림을 봉헌합시다.
요한의 탄생으로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만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