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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
□ 갈라디아서 5:1,13-26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들어가는 말】
1880년 여름 미국 메릴랜드에 특별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 만남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은 집집마다 방문해서 물건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하루 종일 방문판매를 다니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는 온몸이 지칠 대로 지쳤고 배도 고팠습니다.
하지만 주머니에는 10센트 동전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0원 정도밖에 안 되는 돈입니다.
그 돈으로는 사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다음 집에 가서는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해야지!'
라고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계십니까?" 현관문을 두드리자 예쁜 소녀가 나왔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젊은이는 차마 배고프다는 말은 못하고 물 한 잔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젊은이가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알았고 큰 컵 가득 우유를 담아 왔습니다.
젊은이는 그 우유를 단숨에 마셨습니다.
그러자 온몸에서 힘이 솟아나고 눈이 밝아지는 듯 했습니다.
청년은 소녀에게 "우유 값으로 얼마를 주면 될까요?”묻습니다.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엄마는 남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돈을 받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Mother has taught us never accept pay for a kindness)
소녀의 말을 들은 젊은이는 이 말에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연신 고맙다고 말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학비 마련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젊은이는그날 우유 한 잔의 배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우유 한 잔을 건네주던 착한 소녀가 성인이 되었는데, 그만 큰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도시의 병원에서는 감당 할 수 없는 중병이라는진단이 나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큰 도시에서 전문의를 모셔오면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겨우 수소문하여 모셔 온 의사의 이름은 하워드 켈리(1858-1943년)박사였습니다.
하워드 켈리 박사는 환자를 보고 한 눈에 이 사람이 친절을베푼 바로 그 소녀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의사가 이 소녀에게 우유를 얻어마신 젊은이였던 것입니다.
이 의사는 모든 정성과 의술을 동원해 그녀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부인과 질환으로 상당히 힘든 케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되살아난 이 여인은 퇴원을 앞두고 치료비 청구서를 받았습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의료비용이 엄청 비쌉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비용이 엄청나게 나올 것이라 걱정하며 청구서 봉투를 뜯었는데,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봉투를 품에 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봉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유 한 잔으로 모두 지불되었음(Paid in full with one glass of milk)”
하워드 켈리는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 설립자입니다.
어린 소녀가 베푼 조그만 사랑이 절망적인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를 산부인과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다시 사회에 공헌하는 사랑의 선순환을 불러왔습니다.
사랑은 결코 지지 않습니다. 한 소녀에서 시작된 사랑의 섬김이 많은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스 홉킨스 병원에까지 이어진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 흘러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땅에 소망과기쁨을 주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부지중에 지나가는 손님을 접대하다가 하나님을 대접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섬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사도바울의 교훈을 조금 더 깊게 살펴봄으로서 오늘 이후에저와 여러분이 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푸는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 알고 굳은 결단의 기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음을 선포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적지 않은 성도들이 다시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육체의 일을 행한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육체의 일은 19-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일로 대표적으로 언급된 15가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육체의 일이 교회 안에서도 발견된다는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선한 행위나 율법으로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육체의 일을 행하면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20절에 보면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상숭배와 주술을 행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 맺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원수를 맺는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문맥을 고려해 볼 때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0절 말씀은 우상숭배와 주술로 하나님과 원수 맺는 일이라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원수 맺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들이 교회를 다니는 성도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과 원수 맺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적 마귀가 이들의 마음에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대적 마귀의 종이 되어 있는 이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성도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 안에는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분열,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음행과 호색 마음을 더럽히는 것들을 행하면서도 그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일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일에 붙들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13절 말씀을 새 번역 본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도바울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육체의 일을 도모하고, 종의 멍에를 다시 메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의무입니다.
요한복음 13:35에 보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대상이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임으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종의 멍에가 아니라 주님이 지신 사랑의 멍에를 함께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의 일에 붙들리지 않으려면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체의 일을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여러분도 아주 잘 알고 있는 9가지 열매입니다.
22-23절 말씀을 합독하겠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육체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는 육체의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육체의 일을 증오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주인이 바뀐 사람들은 주인의 말에 청종합니다.
종의 멍에를 메고 살아갈 때는 어둠에 속하고 대적 마귀의 말에 굴복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에 주님의 멍에를메고 주님이 뜻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종의 멍에와 주님의 멍에의 차이는 쉼, 즉 평안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29-30에 보면,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종의 멍에를 메지 않으려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육체의 일에 붙들리지 않으려면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할 만큼 성도들을 끝까지 괴롭히는 육체의 일이 바로 정욕과 탐심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정욕과 탐심으로 넘어지게 만듭니다.
요1서 2:16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지식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유혹되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녀가 본 선악과는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6)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은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넘어뜨리는 사단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러한 무기에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죽은 옛 사람의 삶의 습관에서 벗어나서 주님과 함께 다시 부활한 거듭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가던 우리가 성령으로 살게 되었으니,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투기나 시기가 없습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의 영광을 구하며 서로 다툴 일도 없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세워주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2010년 3월 8일에 SK건설이 에콰도르에서 정유공장 기본설계를 수주하여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당시 계약 금액이 우리나라 돈으로 3200억 원에 달하는 대형프로젝트로, 그동안 이러한 플랜트 공사는 세계 5대 건설사들이 독식해 왔었기 때문에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카이스트 교수를 역임하였던최광철 SK건설 사장이었습니다.
최광철 사장은 IT계열에서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었는데 1회적인 도움이 아니라 성공할 때까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미국의 쟁쟁한 기업들 사이에서 경쟁 할 수 있었으며 에콰도르에서 정유공장 기본설계를 수주 할 때도 에콰도르 대통령에게 당신들의 나라를 성공시키는 것이 우리 회사의 목적이라 말하며 직업학교를 지어주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심이 통해서 SK 건설의 수주 경력이 부족함에도 전례 없는 계약을 성사 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의 계약 규모가 약 100억-200억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최광철사장의정유공장 기본설계 수주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남을 성공시켜주는 최광철 사장의 리더십은 목자로서 섬김을 통해서체득한 리더십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정교회 360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큰 힘이 되어준 목자입니다.
최광철 목자가 사랑으로 섬기니 더 큰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사랑으로 섬김으로 경험하는 기적을 이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바보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리더십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세상에서 여전히 이러한 사랑의 섬김이 감동을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을 보여줍니다.
사랑으로 섬길 때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미국 중서부에 있는 미주리(Missouri)주, 시골마을에 위치한 어느 작은 미용실에 일어난 일을 잠깐 소개합니다.
이 작은 시골 미용실에 어느날 갑자기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하나같이 삭발을 요구했습니다.
미용사는 사연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의 사연을 들어보니,
이 사람들이 50여 명 출석하는 이 마을의 작은 교회 성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미용사는 이상한 광신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연을 다 듣고는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교인들로부터 늘 사랑받던 여자 중학생이 있었는데 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까지 마쳤지만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몇몇 성도가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창피해 외출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돌아온 목사님은 성도들과 의논한 결과, 교인들 모두 머리를 깎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는 방송국에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학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주일날, 엄마는 소녀를 간곡히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취재진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문을 연 순간, 소녀의 눈에는 50여명 까까머리의 성도들이 보였습니다. 이를 본 소녀의 눈은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모자를 벗어야 되나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결국 모자를 벗었습니다.
중계하던 리포터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언젠가 내가 교회를 나간다면 이런 교회를 나가고 싶습니다~~ ”
이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도 감동을 받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안에는 얼굴이 다 다르듯 순종의 사람, 긍정의 사람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사탄의 미혹에 넘어져서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넘어지고 부정적 시각, 비판적 사고로 다른 지체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이제는 종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고 나아가길 원합니다.
미주리 주의 산골마을의 저 교회처럼 연약한 지체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중보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은 감동의 꽃을 피웁니다.
감동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굳게 닫혀 있는 VIP들도 이러한 사랑으로 섬긴다면, 그들의 빙산 같은 마음도 녹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랑과 감동으로 수놓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한 번 합독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여러분 종노릇 한다는 것은 서로가 상대를 나보나 낫게 여기고 상대방을 주인 섬기듯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지체들이고 주님은 우리의 주인 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인 되신다면, 주님의 손과 발도 주님의 것입니다.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도 주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몸 된 지체들로서 서로를 주인처럼 섬기는 것은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섬김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 우리 교회가, 우리 목장이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서로에게 자원하여 종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듯이 우리가 사랑의 섬김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음으로 보람이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목녀로서 목원들이 성공할 때까지 사랑으로 섬기고, 또 목원들은 목자․목녀(목부)가 성공할 때까지 사랑으로 섬긴다면 서로가 서로를 성공시키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 이러한 기적이 저와 여러분의 기적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속한 목장과 가정, 그리고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서로를 섬김으로 사랑의 감동이 충만하여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찬양】
두 손 들고, 주 사랑이 나를 숨 쉬게 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하루의 은혜,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주 은혜임을, 일상,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결단찬양: 322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 수요예배 찬양 실황: https://youtu.be/5YzPZK4WMu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