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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을 위한 일곱가지 방법 / 시의 공간과 그 이동에 대하여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강은교
첫째
장식없는 시를 써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시적 공간만으로 전해 지는 것, 그것이 시의 매력이다. 시를 쓸때는 기성시인의 풍을 따르지 말고 남이 하지 않는 얘기를 하라. 주위의 모든 것은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시의 자료가 되는 느낌들을 많이 가지고 있게되면 시를 쓰는 어느날 그것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 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임을 기억하라
시는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구체적 언어를 이끌어 내 준다. 단지 감상만 갖고서는 시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시는 감상을 넘어서야 나올 수 있다. 시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개인을 넘어 서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시만 계속해서 쓰면 '나'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쓰라. 단, 시를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누군가를 격려하는 일임도 기억해야 한다.
(예) "따뜻함" - 강은교
웅덩이 건너편 모개가/웅덩이 쪽 모래를 손짓하는 새/ 아침별이
저녁별을 손짓하는 새/햇빛 한 올이 제 동무 햇빛을 부르러 간 새
셋째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고 자신을,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내가 정말로 시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지 말고 신념을 갖고 시를 쓰라.
나의 시를 내가 맏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으며 나의 시에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누가 감동해 주겠는가.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라.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이렇게 충고한다.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은 시를 쓰려고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는가?'라고. 우리는 신녀을 갖고 시를 쓰되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네 번째,
시의 힘에 대하여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다. 미국의 자연 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물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몰과 일출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 그는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느끼라고 충고한다. 우리의삶에서 가장 전율을 많이주는 것은 무엇일까? 연애가 주는 스파크, 음악 등이 아니겠는가. 허나 살다가 보면 이때의 전율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시는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면 전율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
표현과 기교는 차차로 연습할 수 있지만 감동과 전율은 연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에게 감동이 혹은 전율이 스무살때처럼 순수하게 올 수 있을까? 그 순수한 전율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인의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 번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에 대해서
원래 '노마드(Nomade)' 란 정착을 싫어하는 유목민에서 나온 말이다. 이말은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예술의 힘, 시의 힘은 바로 이 노마드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있는 국화빵의 틀에 이미 찍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을 깨는 연습부터 해야한다.
흔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틀을 깨는 과정에서 술(알콜)의 힘을 빌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술을 도구로 하여 얻어지는상태가 과연 진짜 자유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그건 자유를 빙자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술의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려지 있지 않은 순백의 캔버스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만 술을 마셔야 하지 않을까.
여섯 번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읽히자
우리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야 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자. 감상적인 시는 분위기로밖에 남지 않으며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적은 것은 시의알맹이가 아니다. 시적인 것에만 너무 붙들려 있으면 시가나오지 않는다. 우리의시가 긴장하여 이데올로기의 자유를 성취하는 순간 깜짝 놀랄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정신을 지니자. 몸의 자유가 뭐 그리 중요한가?
또한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도 익히자. 예를 들어 T.S. 엘리어트 의 황무지라는 시는 우리에게 침묵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시다.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의미있는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 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보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할 것이다. 말라르메는 말했다.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 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 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이는가?
그러나 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워야 한다. 시를 쓸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곱 번째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
시를 쓰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되지 않을까?
; 강은교 시인, '계간 시인세계'에서
시의 공간과 그 이동에 대하여
- 강은교 -
1
헤라클레스의 화살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라캉 연구가인 슬라보예 지잭은 그것을 패러독스라고 말한다. 헤라클레스는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올리지만 그 화살은 말하자면 정지해 있다. 마치 꿈과 같은 不動性.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미 하늘로 나는(飛) 그런 경험도 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꿈. 이는 아마도 시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즉 시를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언어의 화살을 쏘아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부동의 언어의 화살이기 쉽다. 어디에도 가 닿지 않는, 길고 긴 화살(당신이 많이 경험한 것처럼).
그런데 그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직 당신의 시가 당신 주위에서 맴돌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시의 언어가 그 무엇인가의 패러독스라면 그 패러독스는 그 무엇인가의 공간을 옮겨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읽는다는 행위는, 특히 시를 읽는다는 행위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주체의 공간과 타자의 공간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좋은 시는 모든 타자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끌어올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재빠른 이동' 나는 그것을 재빠른 이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당신이 무엇을 쓰든 간에 그 단어가 놓인 공간은 타자의 공간 속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헤라클레스의 화살은 그 무엇인가를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공간의 불일치를 일치로 바꾸어 놓는 힘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자주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간의 이동을 원고지 위에서, 또는 A4용지 위에서 당신은 과연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오늘의 나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시를 읽는 순간 그 주체가 서 있는 공간 속에 잠시 서 본다. 마치 꿈의 부동성처럼 우리의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부재의 존재가 되어 그 공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그러다 몇 개의 언어가 달려들어오는 순간 그 공간 속에서 기적처럼 우리는 우리의 팔 다리를 허우적 대기 시작한다. 타자가 주체와 겹쳐진다. 타자의 눈물이 나의 눈물의 공간을 끌어안는다. 타자의 외침이 나의 외침의 배경이 되다가 아예 나의 외침이 되어 버린다. 타자의 슬픔이 나의 슬픔의 얼굴로 변환된다. 타자의 공간은 실체가 되어 나의 공간 속으로 들어온다.
그 공간을 허구(虛構)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흔히 소설 속에서만 허구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시의 공간이야말로 짙은 허구의 공간이다. 시의 공간이야 말로 타자의 정서에 그 깊은 창을 대고 있는 리얼리즘의 공간이다. 우리의 팔다리의 허우적 거림의 가능성, _______그 일치된 공간을 어떤 사람은 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환상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 환상, 혹은 꿈은 곧 상상이 된다. 허구의 공간을 지나 상상이 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합칠 수 없는 타자들의 공간의 합치, 허구는 그것을 이루게 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말해보면,
환상______그 공간은 우리를 허구의 바다에 빠뜨린다.
시적 주체의 허구의 바다이다.
시적 주체이면서 타자인 허구의 바다이다.
상상______그 공간은 우리를 허구의 바다에서 날개가 돋게 한다. 역동적이게 한다. 환상과 상상의 다른 점은 환상은 짙은 부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상상은 현실과 연결되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은 환상과 비슷하다. 라캉의 말솜씨에 의하면 '불가능한 응시'이다.
꿈______그 공간은 우리의 팔다리를 지배하려고 한다. 주체와 타자가 함께 나타난다. 환상과 상상이 하나의 토대 위에 있게 되는 곳. 그 하나의 토대란 부동의 역동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없이 그 얇은 허구의 커튼을 들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환상, 꿈은 '부동성'의, '불가능한 응시'이므로 시적 주체와 읽는 주체와 또는 타자의 서로 다른, 또는 서로 멀리 있는 공간의 겹침은 사실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는 그 허구의 서로간의 이해_____그것을 순간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그것을 오늘의 시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공간을 바라본다.
당신은 지금 네 개의 공간 사이에 있다. 아니다. 당신은 지금 사방이 퀭하니 뚫린 길 위에 서 있다. 또는 당신은 지금 모래밭 위에 서 있다. 아니다. 당신은 지금 두 개의 벽이 보이는 한 나무 밑에 서 있다.
하긴 아무래도 좋다. 당신은 그 어디엔가, 산소와 햇빛이 모여 있는 곳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지금 네 개의 벽이 당신을 가두고 있는 곳에서, 다시 말하면 벽 사이에서 출가(出家)를 서두르고 있다. 출근이든 외출이든 가출이든. 아뭏든 어디로인가로 당신은 가려고 하고 있다. 당신의 공간과 겹쳐지는 또 하나의 공간 속으로 당신은 지금 이동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가방을 든다. 또는 그저 간단한 주머니를 든다. 당신의 가방은 하나 뿐이다. 또는 당신의 주머니는 하나 뿐이다, 당신의 가방 속에는 수첩 하나와 종이 몇 장과, 책 한 권, 볼펜. 또는 은행통장, 은행카드, 빗, 거울...........그런 것들이 들어 있다. 당신은 당신의 가방이 또는 주머니가 이루어 주는 공간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지하철을 타러 갈 것이다. 어떤 이는 푸른 자동차를 타러 갈 것이다, 또는 흰 자동차를. 어찌 됐든 당신의 공간은 이제 달라지고 있다.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당신은 벽을 지나간다. 당신은 길을 지나간다. 당신은 타자들을 지나간다. 그러나 그 순간을 좀 더 들여다 보자. 그 순간 실은 당신은 타자의 환상 혹은 타자의 꿈들을 지나가는 것이며, 길의 환상 혹은 길의 꿈들을 지나가는 것이며 벽의 환상 혹은 벽의 꿈들을 지나가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지나가는 공간에서 그림자들이 일어서는 것을 본다. 아침 햇빛에 그것들은 아주 새까맣다. 그것들은 아주 새까맣게 당신의 공간을 들여다 본다. 아니다. 당신의 공간에서 다른 이의 공간으로 삐져 나온다. 당신은 당신의 그림자를 들고, 그러나 동시에 다른 이의 그림자도 든다. 그림자들은 환상속에 빠진다. 혹은 꿈을 꾼다. 당신의 벽에 기대어서. 또는 당신이 지나가는 공간의, 타자의 벽에 기대어서.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 지나가는 공간에 서있는 그림자의 향기를 맡아보았는가. 그림자의 향기의 색깔은 까만색이 되기 전의 잿빛이라고, 혹은 푸른 색이라고 그런 다음 까만 색이 된다고 중얼거려 보았는가.........당신은 당신의 책상에 앉는다. 당신은 당신의 의자에 앉는다. 아침 햇빛이 창으로 비쳐 들어온다. 그 햇빛에 당신이 앉은 의자의 키가 길게 바닥 위에 늘어진다. 마치 당신의 움직이지 않는 환상처럼, 그림자는 당신의 공간을 길게 늘이기 시작한다. 그 길게 늘어진 환상 위로 길 하나의 꿈이 당신의 시 위에 올라와 앉기 시작한다............... 당신의 공간의 환상은 상상이 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현실과 가는 접속로를 열기 시작한다. 당신은 빼꼼히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기 시작한다.
당신의 공간은, 그림자가 누워 있는 당신의 공간은 허구의 토대를 지나면서 더 이상 당신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의 공간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적 주체의 부재의 공간이다. 타자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재가 된다. 허구의 그림 속에서 당신의 부재가 당신의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역으로 말하면 당신의 시는 당신의 부재에서 존재로 이르려는 당신의 부단한 환상-꿈이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당신의 부재의 공간.
당신은 가방을 들고 당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허구를 깔고 앉은 상상 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당신의 가방.
2
당신의 공간 앞에서 나는 지금 몇 개의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 몇 개의 질문이란 이런 것이다.
문1: 너의 공간은 너의 존재의 공간이 되고 있는가.
문2: 너의 존재의 공간은 너의 실재가 되고 있는가
문3: 너의 시는 너의 상상과 실재 그리하여 현실을 쓰고 있는가.
문4: 현실이기도 하면서 상상인 시를, 상상이기도 하면서 존재인 시를.
문5: 존재이기도 하면서 실재인 시를.
문1에 대한 답: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나의 공간은 아무래도 부재(不在)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나타나는 산과 들을 보던 기차 안에서(그때 나는 잠에서 마악 깨었었다.)의 경험처럼. 그 흐릿한 나의 눈 속으로 산과 들이 달려왔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없는 공간의 산과 들이었다. 나는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허구를 만들 수가 없었다. 허구를 만들 수가 없으니 나는 환상으로 빠져 들 수가 없었다. 환상이 없는 나는 꿈을 꿀 수 없었으며 꿈이 없는 나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문2에 대한 답 : 그러므로, 그랬으므로 존재는 자꾸 사라졌고, 존재가 없는 나는 실재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림자도 오지 않았다. 그림자의 향기도 오지 않았다..............
문3에 대한 답 : 그러므로 나의 시는 상상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며, 현실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과 접속된 존재에의 상상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문4에 대한 답 : 나의 없는 그림자는, 나의 없는 그림자의 향기는 부재의 밑바닥을 없는 날개로 날려 하고 있었다.
문5에 대한 답 : 네가 시인이라면 존재가 실재로 합쳐지는 공간을 만들어라. 허구를 통해서존재와 실재는 합일되는 것을.
그러므로 시인은 없는 존재에서 실재를 끄집어 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두 공간_______시적 주체와 시인과 시를 읽는 이의 공간은 하나가 된다.
「화가의 시선은 잔인한 손처럼 얼굴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화가의 시선은 그 얼굴의 본질, 그 내면 깊숙한 곳에 놓여 숨어 있는 다이아몬드를 소유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그 깊은 내면이 정말로 뭔가를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를 우리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더라도 상관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잔인한 몸동작, 즉 손놀림이 있다. 타인의 얼굴을 쓰다음으며, 타인의 가슴 속에................」( 프란시스 베이컨과 아생보의 대화 중에서)
「........................예술이란 결코 모방이 아니며 또한 본능적 욕구나 훌륭한 취미에 의해 서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표현과정일 뿐이다. 마치 언어의 기능이 우리에게 혼돈된 방식으로 나타난 것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대상으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스께의 말을 빌리면, 화가의 임무란 :"객관화"하고 "투영"시키고, "포착"하는 일인 것이다. ............화가는 만일 그가 아니었더라면 의식의 각기 분리된 삶 속에 갇힌 채로 있었을 것들, 즉 사물을 담는 요람인 외관의 진동을 가시적인 대상으로 재포착하여 적합하게 변화시킨다, 이러한 화가에게 있어서는 단지 하나의 감정, 즉 낯설음의 느낌만이 존재할 따름이며, 하나의 서정 즉 존재의 끊임없는 재 탄생의 서정이 있을뿐이다.」
(메를로 퐁티, 『의미와 무의미』중에서)
이제 당신은 '꺼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화가가 공간을 꺼내는 사람이듯이 시인인 당신은 공간을 꺼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수한 팔이 허구의 밑바닥에서 그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한 이야기를 추억한다. 실크로드의 한 지점인 명사산의 전설이다.
「문성공주는 당나라에서 티베트로 결혼하러 가고 있었다. 문성공주의 품에는 거울 하나가 있었다. 그 거울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다 비친다고 하였다. 끝없는 모래가 산을 이루고 있는 명사산에 이르러 공주는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이 비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거울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절망한 공주는 거울을 던져 버렸다. 거울은 조각조각이 나 모래 위에 떨어졌다. 그 중 한 조각이 호수가 되었다. 월아천이라는 새파란 호수.」
사막 가운데 그런 호수를 바라보는 것은 정말 기이하다.
그런데 문성공주의 '그 후'의 이야기는 없다. 과연 문성공주는 어찌 되었을까. 아니 그녀가 던져버린 그 거울 조각들 중 호수가 되지 않은 것은 어찌 되었을까.
실크로드를 가는 사람들은 그 거울 조각들을 모아 끊임없이 이어맞추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순간 한 공간은 두 공간 속으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처럼 당신의 공간은 읽는 이의 공간으로 올 수 있어야 한다!.
재빠른 이동이 가능해야 한다!.
당신의 공간의 확장, 또는 틈새에 갇혀 있던 것을 가시화(可視化)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이다. 다른 사람이 시를 읽는 이유는 그 가시화를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주체의 타자화와 타자의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의 이동.
그 공간은 이저가 미정성(未定性)의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당신의 공간을 거기 미정성 위에 놓아라. 환상이 되게 하여라. 환상을 넘어선 상상이 되게 하여라. 상상을 넘어선 꿈이 되게 하여라. 꿈의 부동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즐겁게 기다리고 있다.
부재에의 꿈은 존재에의 꿈이다. 당신과 당신을 읽는 이가 만나는 합일의 공간에서의 생명이다.
축하한다. 당신의 존재를. 당신의 존재의 일어섬을. 당신의 부재의 존재로의 이동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화가 베이콘이 말하듯이, 당신 자신을 위하여 하고 있는가. 당신의 속된 명예가 아닌. 당신 자신의 실재와 실재의 전달을 위하여, 또는 당신 만이 쓸 수 있는, 당신만의 허구를 위하여 하고 있는가.
당신 자신을 위하여 당신은 A4용지와 언어 사이에서, 언어와 현실 사이에서 지금도 끝없이 '놀고' 있는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강은교
하나/ 전율에 대하여
-예술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아마도 그것은 「전율」이 아닐까요?
-「전율」은 반드시 예술활동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한때는 펄럭이는 깃발만 봐도 「전율」을 느끼고 심할 때는 눈물까지도 흘렸는데요.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깃발의 펄럭임이 당신 속의 어떤 정서를 건들였기 때문이겠지요. 아무튼 어디서 「전율」을 느꼈건 「전율」을 느꼈다는 것은 그것의 정서와 당신의 정서가 부딪히면서 「정신의 피(血)적 스파크」를 일으킨 것입니다.
_ 그렇다면 당신은 맨 처음 「전율」을 느꼈던 순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죠. 그 「전율」은 너무나 강렬했으므로 나에게 「전율」을 준 그 모델을 따라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닙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내 안에 부글부글 끓고 있던 그 어떤 것에 그것이 자기의 극선(極線)을 갖다 댄 것이라고나 할는지........ . 아무튼 그 「전율」은 나의 잠재된 그 무엇을 그 순간 현재화(顯在化)시키라고 충동질했고 그 충동을 따르다보니 나는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최초의 「전율」을 준 그 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박두진의 「해」가 아닙니까.
▲그때는 그 시를 지은 이의 이름 같은 것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았지요. 다만 그 시의 리듬과 그 리듬이 주는 긴장, 그런 것이 나에게 「전율」, 일종의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아주 햇살이 화사한 초여름의 오후였던 것 같습니다. 장소는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 교실이었구요. 하얀 옥양목 커튼이 바람에 살살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보다는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던 햇살이 아직도 나의 기억에 생생합니다. 나는 학교 신문을 읽고 있었지요. 그때 나는 학교 신문 한 귀퉁이에서 그 시와 만난 것입니다.
-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까.
▲아주 좋은 시를 읽을 때, 리듬과 이미지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시를 읽을 때, 또는 아주 아름다운 음악의 멜로디를 들을 때, 그 음악의 멜로디와 리듬이 합일됨을 피 속으로 느낄 때, 그림도 「아주 감동스러운」 어떤 그림은 그 상상력의 긴장을 접하는 순간, 전율이 일어나곤 합니다. 하긴 요즘은 박수를 치곤 하지요. 그러니까 전율의 형상이 좀더 확대되었다고 할까요? 꽃이 핀 것을 보는 순간, 수평선이 환하게 열린 것을 보는 순간, 깜깜한 어둠 속에 앉으려고 하는 파도의 흰 거품을 보는 순간, 은빛 달을 보는 순간..................일출을 보는 순간. 일몰을 보는 순간.........길을 보는 순간...........길을 뛰어가는 달팽이라든가 게같은 작고 느린 존재를 보는 순간..................그래서 나의 시집 중(『어느 별에서의 하루』)에는 후기에 이런 글을 쓴 것이 있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라/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라/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라/ 들리는 것을 들리지 않게 하라.」 아마 그럴 때 다가오는 팽팽한 對象들의 긴장은 우리에게 「교환」이라는 문학의 선물을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 잠복기에 대하여
그때 나는 6층짜리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병원에서 막 퇴원한 무렵이어서 외출이 불가능하기도 했고, 아이가 한창 유모차를 탈 무렵이기도 해서 나는 매일 옥상에서 유모차를 밀며 살았다. 아파트 옥상 밑은 숲이었다. 어느 대학교의 뒷숲이라고 했다. 나는 매일 그 숲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햇살이 거기 나무들로부터 와서 나의 살을 뚫고 옥상의 맞은 편 벽을 지나 도시로 내려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바람이 불면 잎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러고 조금 있으면 다음의 나무, 잎이 흔들리기 시작하며 그리고도 조금 더 참고 바라보면 그 뒤의 나무, 잎이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점점 높아지는 바람 소리에 따라 숲의 온 나무, 잎들이 흔들리는 걸 전신의 힘을 다 하여, 나의 시력 속에 가두곤 하였다. 숲의 흔들림이 내 안의 그 무엇인가를 건들이며 한 일주일 쯤 지났을 때, 그러니까 그 숲의 어떤 모습이 나의 시력 안에 멈추면서 축적되었을 때, _____그것을 나는 「잠복기」라고 말한다._______그 잠복기가 일주일 쯤 지났을 때, 그 숲은 내가 옥상에서 내려와 책상 앞에 앉았을 때에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린다./ 나무 셋이 흔들린다.」처음에 그 말은 거의 외마디 외침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다. 나는 나의 「멈춤」 속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그 다음 날 저녁무렵 옥상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나무들의 말을 또 들었다.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나무 하나가 꿈을 꾼다/ 나무 둘도 꿈을 꾼다. 」나는 나무들이 고개를 저으며 꿈꾸는 이미지 앞에서 나의 잠복기 가 끝났음을 살며시 알아챘다. 나는 숲의 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의 리듬을 일으켜 세우면서.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이렇게 이렇게 함께//』
_______「숲」전문
이렇게 80년대에 나는 「숲」이라는 시를 썼다. 그것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잠복기를 거친 숲이 말한 것이었지, 나의 말이 아니었다.
나는 현대시는 「잠복기의 동굴-침묵의 밀실」속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동시대에 사는 타인(읽는 이)의 정서의 줄을 건들일 수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 많은 현대시들이 그러는 것처럼 타인에게 나의 정서와 같은 정서를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의 정서의 極線을 슬쩍 갖다대도록 하게 하는 것이 되리라. 그 정서의 극선이 닿자 마자 그 타인은 흠칫 몸을 떨게 되는.............! 나의 정서가 나도 모르게 타인의 정서 속에서 주관화되는...........!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또는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결국 연결되리라. 연결은 우리의 가장 밑부분_____근원에서 일어나게 되리라.
셋/ 그러면 젊은 시인들이여
그러면 젊은 시인들이여, 또는 시인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여
모든 존재하는 것에서 思惟의 형상을 꺼내는 이들이여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서, 그 존재의 사유로부터, 그 존재의 사유의 형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시여 어디로 갔는가, 시여 어디 숨어 있는가, 시여 어디서 없는 길을 헤매고 있는가, 시여 재가 되어버린 어둠 속에 있는가, 시여 재가 되어버린 어둠 속에 서 어둠의 껍질만을 핥고 있는가,
분명 시는 있었다. 시는 어느 날 정오의 사과 껍질 속에도,
쏟아져 내리는 비와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쓰다듬고 있는 지붕 끝에도,
집으로 돌아오는 모든 길목에도,
나뭇잎 그림자 뒤에 숨은 모든 골목길에도,
저녁이 걸어오는 그 큰 어깨 끝에도,
보이지 않는 별 끝에도
시는 찰랑찰랑 별의 소리를 내면서 달려오곤 했다. 그 별을 비비면 따뜻한 감촉이 손바닥안에서 일어서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가 없어졌다. 아무도 시의 별을 손바닥 안에서 부딪히지 않게 되었으며 시로서 사유하는 사람도 없게 되었다. 시로써 말초의 감각을 휘저으려고만 할 뿐, 시로써 저 보이지 않는 산을 넘으려는 자도, 시로써 저 다가오지 않는 빛을 밝히려는 자도 , 시로써 모든 열매의 껍질을 들여다 보려는 자도...................
저녁이 걸어온다, 걸어오는 저녁 끝에서 누구인가가 웃는다. 자꾸 웃는다. 오랫만에 보는 시의 가냘픈 웃음이다. 윗옷을 벗어들고 세상을 향하여 초인처럼 팔을 흔들고 있다. 그런데 그것의 팔뚝은 형편없이 가늘다. 파란 핏줄이 비칠 것만 같다. 그 핏줄로 어떻게 피가 흐를까 의심하게 할 정도로.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한 것같이.
그리하여 그 흔듬은 금방 사라진다. 이곳에 가득한 안개의 뒷켠으로, 이곳에 가득한 허공의 뒷켠으로. 아무도 그를 먹여주지 않아 너무도 기운이 없었으므로, 그것은 얼른 팔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그의 팔 끝으로 따라오고 있었던 초인도 그를 따라 저녁 뒤로 사라진다.
저녁은 곧 어둠이 된다. 어둠 속으로 등불들이 켜진다. 그러나 그 등불들에 내걸리는 짧은 외침같은 것은 없다.
동물적 삶이거나 소시민의 삶이거나 간에 짧은 외침 또는 노래가 이제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니.
시가 분명 삶의 깃대 끝에 달린 짧은 외침 또는 노래가 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없다. 아무도 시의 깃대 끝에 자기와 함께, 자기를 살려줄 짧은 외침 또는 한숨같은 노래를 거는 자는 없게 되었다.
시의 깃대 끝을 향하여 깔깔깔 웃는 웃음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려온다.
시가 사유이던 때가 없어졌다. 사유는 시를 음악보다도 더 음악이게, 그림보다도 더 그림이게 하는 것이다. 시는 사유이다.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는 힘으로서의 사유.(니체) 그중에도 형상하는 사유이어야 한다. 시는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
도 지금 시는 감정으로 끝나려고 하거나, 또 하나의 가짜의 감정 속에서 말의 유희로 끝나려고 한다.
한 마리 새의 飛上을 그린다 하여도, 한송이 꽃의 開花를 그린다 하여도, 시는 원고지 위에 한 마리 새의 비상과 함께, 또는 한 송이 꽃의 개화와 함께, 사유의 형상을 앉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졌다.
시인들이여, 사유하여라. 사유가 그대들의 식사가 되고 그대들의 잠이 되며 잠끝에 별 하나 걸어놓을 때까지 사유하여라. 감옥 속에서 감옥이 아님을 깨달을 때까지, 또는 감옥 밖에서 감옥을 깨달을 때까지, 말이 말을 뛰어넘어 말 아닌 것이 될 때까지, 시인들이여, 시인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여. 눈으로 듣는 법(니체)을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눈으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루 한 시간 씩 무목적-무보상에 바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하루 한 시간 씩 집에서 집을 떠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하루 한 시간 씩 길에서 길을 떠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시인들이여, 시인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을 떠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창문을 열면서 창문을 닫을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잠들면서 잠들지 않는 이들이어야 한다.
노래하지 않으면서 노래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침묵하면서 침묵하지 않는 이들, 꿈꾸지 않으면서 꿈꾸는 이들.
가장 작은 것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저기 달려가는 개미의 땀을 볼 수 있는 이여야 한다.
눈으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눈으로 듣는다는 것은 저 달려가는 개미의 헐떡거림을 들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형상화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저 개미의 헐떡거림이 세상에 밧줄을 거는 것을 볼 수 있는 이를 말함이다.
길을 가면서 길을 떠날 수 있는 이들,
길을 가면서 길 속을 볼 수 있는 이들.
벽을 따라가면서 벽 뒤를 볼 수 있는 이들,
한 마리 파리의 가장 깊은 눈물을 볼 수 있는 이들,
안개의 혀 속을 볼 수 있는 이들,
아침바다의 물결을 보면서 물풀과 사랑을 나누는 물고기를 볼 수 있는 이들,
햇살에 반짝이는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볼 수 있는 이들.
저녁의 도마 위에 놓인 고등어를 보면서 문밖 바다로 나아가는 고등어의 자유
로 펄럭이는 지느러미를 볼 수 있는 이들
그리하여 사유의 돛을 그 없는 길에 매달 수 있는 이들,
그리하여 사유의 닻을 그 없는 벽에 맬 수 있는 이들,
그리하여 사유의 형상을 그 없는 물결에 누일 수 있는 이들,
그리하여 존재의 깊은 그림자를 그대 만의 언어로 형상할 수 있는 이들,
그리하여 존재의 심해 위에 삶의 사다리를 걸쳐 놓을 수 있는 이들, 눈으로 듣는 이들이란 이런 이들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사유이다. 사유의 형상화이다. 가장 작은 것들의 형상화이다.
이 후기 산업사회 속에서 마치 마이크로 필름을 보듯이, 소외와 일찍 달려오는 죽음을, 마이크로의 세계를 언어로 그릴 수 있는 이들이다.
빗방울에 넘어지는 귀뚜라미의 다리를 그릴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런 뒤 사유가 명증해지는 시각을 만드는 이들. 모든 사유의 날개가 그대를 지상의 깃대에 매어두고 그리고 그대를 피의 흐름에서 구하는 그 시각을 기다리는 이들.............. .
오늘의 시는 노래의 깃대에 매어달린 사유이다. 저 개미의 방울져 흐르는 땀의 형상화이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_강은교 詩話集' (문학동네,200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