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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에 유감을 표한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문혜원, 이재복 선생과 더불어 지난 5년 동안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2005 젊은 시(문학나무사 간)를 편찬하면서 2002~4년의 신춘문예 당선자 중 우리 나름의 기준에 맞는, 수작을 쓴 사람을 골라보았더니 문성해․윤성학․장석원․장승리 네 사람이 선정되었다. (선정된 총 인원은 20명이다.) 문예지 신인상 수상자의 수에 비하면 비교적 많은 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6 젊은 시 편찬 작업을 하면서 2003~5년 3년 동안의 문예지 신인상 당선자와 2003~6년 4년 동안의 신춘문예 당선자 중에서 수작을 쓴 사람을 선정하여 청탁을 하기로 했다. 세 사람이 다 높은 점수를 준 사람만이 선정되었는데 2006 젊은 시에는 신춘문예 당선자로는 문성해․이윤설 두 사람만 뽑혔다. 선정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써본다.
“신춘문예 당선작의 수준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작품도 당선이 되?! ? 큰일이에요. 시인 지망생들이 이런 작품을 모범작으로 생각할 거 아니에요.” “한 심사위원이 여러 곳을 심사하거나 어느 신문사에서 고정적으로 심사하는 것은 악습인데 영 안 없어지네요.” “20년 이상, 30년 이상 신춘문예 심사를 하는 분들이 있지요. 심사위원이 40대로 확 낮춰야 작품들도 좀 젊어질 텐데.” “신문사가 반짝스타를 만들어놓고 책임을 안 지니 시인 지망생들조차 기피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교수가 자기 제자 뽑아주는 것을 두고 문단의 축제라고 하니 한심한 일이죠.” “7, 8명 당선자 중에서 한두 사람이라도 살아남나요?”
나 자신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사람이기에 그래도 이 제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있는데 이런 말들이 오가는 자리에 있자니 난감하기만 했다. 아닌게아니라 근년의 당선작 중에는 정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개성이 없는 시, 어디서 본 듯한 시, 상투적인 표현, 뻔한 소재……. 이제는 이런 것들이 당선작들의 공통점이 되고 있으니, ‘신춘’이라는 이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결과가 아닌가.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도 목수 이야기, 거미 이야기가 있을까 기대했?! 쨉?(?), 역시 있는 것을 보고 허탈하게 웃기도 했다. 아무튼 지난 5년간 중 앙지 신춘문예 당선자 가운데 세 사람의 공인을 함께 받은 시인은 2명뿐이었다. 신춘문예 출신자인 나로서는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방지, 혹은 비(非) 메이저급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 혹시 괜찮은 작품이 있는가 살펴보기로 했다. 작년에는 네 군데 지방지의 당선작이 볼 만하여 이 자리에서 다뤘는데 올해는 작년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찾아본 것은 강원일보․경남신문․경인일보․광주일보․국제신문․대전일보․동양일보․매일신문․부산일보․불교신문․영남일보․전북도민일보․전북일보․전북중앙신문․한라문예 등 15개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다.
살펴보지 못한 지방지도 있을 터, 올 한 해 당선자가 이렇게 많다. 시인이 양산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얘기가 아니랴. 서울과 지방의 신문사에 투고된 작품의 수를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은 시의 나라, 시인 공화국이다. 그런데 시집은 왜 이렇게 안 팔리는 것일까. 최근에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시집 코너가 형! 편없이 줄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의 7분의 1? 6분의 1? 많은 사람이 시를 쓰고는 있으나 많은 독자가 시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미완의 대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몇몇 문예지에서는 지방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사람들의 작품을 ‘절대’ 실어주지 않는다. 그 문예지의 주간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건 등단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래서인지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이른바 ‘중앙의 문예지’를 통해, 혹은 중앙지 신춘문예를 통해 다시금 등단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노력해도 안 되면 그것으로 시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시를 잘 썼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첫 발표 지면이 지방에 있는 신문이라고 하여 ‘당신은 아직 시인이 되지 않았소’, ‘큰물에서 놀기 전에는 당신은 시인이라고 할 수 없소’, ‘중앙에 진출하기 전에는 절대로 청탁하지 않겠소’ 따위의 말을 듣는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서운할 것인가. 나는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자 중에서 상찬을 해주어도 좋을 몇 분을 골라서 이 자리에서 언급함으로써 그! 분들의 전도를 빌어드리고자 한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물론, 중앙지 신춘문예 당선작들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한밤, 봉숭아꽃 가득한 마당에서 숭어들이 튄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한다. 청상과부 선아엄마, 집 나간 서방을 기다리는 애경엄마, 그냥 이모라 불리던 사투리 걸죽한 부안댁이다. 아침이면 식당이나 병원, 공사판으로 마른 꽃씨처럼 흩어졌다가 밤이 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오던 여인들.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며 한 겹씩 옷을 벗고 있다.
빨랫줄에 걸린 이불 호청 사이로 달빛이 든다. 보초 세운 어둠이 슬쩍 돌아서 있다. 좁은 수돗가에서 미끈한 숭어들이 비늘을 떼고 있다.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 같은 비음이 흘러나온다.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깔깔, 허공을 질러 담을 넘어간다. 숭어들이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고 있다.
몰래 숨어든 달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심인숙, 「숭어」 전문
전북중앙신문이란 지방지가 있는지 몰랐는데 그런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전체 4개 연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산문시! 이면서도 그 나름의 리듬을 타면서 전개된다. 가난한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 뿐 별다른 내용은 없다. 그런데 장면 묘사가 진부하지 않게끔 심인숙 씨는 특별한 장치를 했다. 달빛에 드러난 세 여인의 몸을 미끈한 숭어에 비유한 것이 그것이다.
세 여인은 모두 식당과 병원, 공사판에 나가 밥벌이를 해야만 한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것은 이들의 젊은 나이와 육체적 건강함이다. 그런데 한 명은 청상과부이고 다른 한 명은 서방이 집을 나가버렸다.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이들이 내는 한숨 같은 비음이 암시하는 것은 이들 육체의 건강함과 이성에 대한 성적 갈망일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몰래 숨어든 달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고 했으니, 제1연과 짝을 이룬 멋진 마무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밤이 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와 한바탕 얘기꽃을 피운다던가, 보초 세운 어둠이 슬쩍 돌아서 있던가, 또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허공을 질러 담을 넘어간다던가 하는 표현이 이 시를 잘 살려주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시 전체가 메타포로 되어 있는 것도 장점이며, 생활에 찌들지 않은 이들! 의 밝은 웃음에 내일의 희망을 걸어본 주제의식도 이 시가 갖고 있는 미덕? 甄?. 그런데 기왕 “사투리 걸죽한 부안댁”을 등장시켰으니 그 걸죽한 사투리를 한두 마디 들려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은 제법 길다. 일단 반 정도만 읽어보도록 하자.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 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 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 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 ?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 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이은규, 「조각보를 짓다」 전반부
구어체로 슬슬 풀어나가는 말이 여간 감칠맛 나지 않는다. 전설 속의 마고할미까지 등장하지만 ‘외할머니가 조각보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외에 여기까지 구체적으로 이야기된 것은 하나도 없다. 대단한 입담이다. 후반부를 보자.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 見? 서 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 낡究낡逑?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조각보를 짓다」 후반부
하하, 시가 끝나도록 이뤄진 실제상황은 ‘외할머니가 조각보를 다 만들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 과정이 흡사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천태만상이요 점입가경이다. 의성어와 의태어, 그리고 순우리말과 한자어가 멋들어지게 어울려 한마당 언어의 놀이판을 벌이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에 별 대수로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나갈 줄 안다는 것은 이은규 씨의 타고난 재능 덕분일까, 습작의 연륜 덕분일까. 나는 후자로 보고 싶다. 내면세계에 오랜 삭힘과 익힘이 있었기에 이런 시가 만들어진 것이리라. 신춘문예용을 만들어 요행수를 노린 이라면 이런 시가 쓸 수 없다. 또한 어조와 어투, 분위기와 흐름, 소재와 주제 등 모든 것이 참으로 한국적인 시임에도 상당한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 역시 이 시인의 돋보이는 ! 부분이라 상찬하지 않을 수 없다. 조각보가 완성된 순간을 표현한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와, 이 시를 설화적인 분위기로 이끌고 가기 위해 등장시킨 마고할멈에 대한 이야기, 예컨대 “마고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같은 부분은 이 시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원숙한 언어 조율 능력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소재 선택과 주제 설정, 그리고 표현력과 형상화 부분에 있어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몇몇 중앙지 신춘문예 당선작들에 비해 이 시는 몇 길 위의 작품이다. 현빈(玄牝)이란 노자(老子)의 도의 오묘한 곳을 가리키는 말인데 현빈지문이라고도 쓰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무지한 탓이려니.
도마 위에 퍼덕이는 순풍씨는요 한 마리 바다여
입이 댓 발 나온 분녀가 단칼에 기절시키고
바닥만 긴 미주구리* 아랫도릴 올려쳤거든요
성난 파도로 일어서던 비늘이
날 무딘 칼날에 힘없이! 쓰러지데요
두터운 파고를 한 숨에 쓰윽 떠냈어요
대추씨 만? ? 부레
저렇게 작은 꿈 가지고 태양 향해 펄떡였던가 봐요
물컹한 가문에 뼈대라도 세우려는지
발라낸 뼈에서 활시위처럼 탱탱한 시간이 꽉 찼어요
가실 삼켰던지 살 속 깊이 박혔네요
바람 부는 대로 출렁였던 것은 고통의 몸부림이었던가
천 날 만 날 바람 들락였을 허파는 다 녹아 없어지고
참빗 같은 아가미에 그 바람 걸렀던 것 같아요
어딜 쏘다녔던지 얼룩진 상처 비릿한데
바다 깊은 심장 속에서 헤엄치는 분녀
꼬들꼬들 바다를 씹는 달디단 성찬 차려
황홀한 순풍씨, 쇠주 한 잔 받으셔
* 미주구리:물가자미의 경상도 사투리
―김광희, 「바람 들어 좋은 날」 전문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이 시는 앞의 두 시와 달리 이야기가 그다지 명료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분녀와 순풍씨가 누구인지도 명확하게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순풍씨가 도마 위에 퍼덕인다고 했으므로 물가자미인가? 입이 댓 발 나와 있는 분녀가 순풍씨를 단칼에 기절시키고 바닥만 긴 물가자미 아랫도리를 올려쳤! 다고 한다. 분녀는 그럼 횟집에서 회를 뜨는 아가씨가 아닌지 모르겠다. (혹은 아주머니?)
이 시의 중반은 회를 뜨고 있는 물고기에 대한 묘사이고, 이것이 이 시를 살리고 있다. 성난 파도로 일어서던 비늘이 날 무딘 칼날에 힘없이 쓰러진다거나 대추씨 만한 부레가 그리 작은 꿈을 가지고 태양 향해 펄떡였다거나 발라낸 뼈에 활시위처럼 탱탱한 시간이 꽉 차 있다거나 하는 표현은 상당한 시적 수련을 거친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고난도의 비유법이다. 2행으로 처리된 후반 연도 상큼하게 의인법과 과장법 등을 구사하여 재미를 주고 있다. 물가자미의 대추씨만한 부레에 얼마나 많은 바람이 들락거렸을까. 참빗 같은 아가미에 그 많은 바람을 걸렀으니 허파는 다 녹아 없어졌다. 순풍씨를 ‘順風氏’로 해석, 바다 그 자체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럼 바다의 산물인 물가자미는 곧 순풍씨가 되는 것이다. 언어를 배치하는 것은 재치에 속하고 시상을 전개하는 것은 재간에 속하는데 김광희 씨는 재치도 재간도 다 능하다. 앞으로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조금만 더 진지해진다면 더 좋은 시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15편 중에서 내가 좋은 인상을 ! 받은 시는 이 3편이다. 나머지 가운데에서도 수작이 없지는 않았지만 앞날? ? 기대되거나 흡족한 수준에 이르러 있지 않아 언급을 피한다. 아마도 이번 수상을 계기로 다들 열심히 시를 쓰실 테고, 그것이 우리 시 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분들의 앞날을 기대 반 불안 반의 마음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여러분들의 당선을 축하드리며, 앞으로 길이 남을 좋은 시 많이 써주실 것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