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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가상성에 대한 불교적 이해
제3절 기타
1.중관사상
불교 사상 중에서 가상현실 기술이 가진 특성과 크게 맞닿아있는 사상이 있다면 중관(中觀)사상과 유식(唯識)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상 모두 현실 그 자체로 가상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한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공(空)'사상은 초기불교에서부터 설해져 왔음에도 용수보살에 이르러 '공(空)'사상을 바탕으로한 대승불교사상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중론을 중심으로 모든 사물이 고정된 실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무(無)'는 아닌,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다"는 가상현실의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관사상은 『반야경』을 중심으로 공관(空觀)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설일체유부의 법유(法有)설에 반대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용수보살의 대표적인 논서로 거론되는 『중론』에는 이러한 공의 논리가 자세히 적혀있는데 유(有)와 무(無) 모두를 부정하면서도 실체적인 존재성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가짐으로 인해 허무주의로 오해를 받거나 유명론자(唯名論者), 도무론자(都無論者), 부정주의(否定主義) 등의 갖가지 비판을 받았으며 공견(空見) 자체에 집착한다는 이유로 유가행파로부터도 적지 않게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중관사상 자체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열과 목재가 동시에 있어야만 존재하듯 불 자체로서는 온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적 존재론은 불이 홀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불의 존재를 온전히 부정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독립적인 불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불의 존재성 자체가 부정되는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불의 존재성은 불 자체에 의해서 결정되기보다는 바람나 나무 등의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특성을 살펴본다면 불의 존재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용수보살이 이러한 연기성에 완전히 따라 불의 독립적 실체를 부정하는가하면 되려 그렇지 않다. 연료에 의지해 불이 존재한다면 불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실제로 존재해야만 가능하므로 이 또한 부정된다. 결론적으로 일체가 공하다고는 하지만 '공한 것이 있다'고 하는 순간 다시 무엇인가가 생겨나므로 이 또한 존재한다고 하지 않는 공역부공(空亦復空)의 순환논리를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일체법에 자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공을 설하지만 그 공 역시 실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부정에 부정을 반복하게 되므로 왜 그처럼 많은 오해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죽어있기도 하고 동시에 살아있기도 할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에 따라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도 있고 또 입자와 파동을 오가는 자유로운 존재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고 있는 현대의 존재관에 의해서는 얼마든지 수용 가능한 탁월한 견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독립적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진실 그대로가 그러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가상현실 또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새롭게 창조된 인위적 세상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무상하고 자성이 없는 일체법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VR기기 속의 가상현실에 머물며 자아의 존재뿐만 아니라 마주하고 있는 세상 전체를 가상현실과 같은 무상한 존재로 수용할 수 있다면 이는 공성(空性)을 깨달음으로서 희론을 없애고 역으로 분별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업과 번뇌를 타파하도록 하고자 했던 용수보살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을 그 어떤 방법보다도 뛰어나게 자각하고 수용가능하도록 해주는 기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유식사상
유식(唯識)사상은 중관사상과 마찬가지로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시켰다. 즉 유식사상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뿐인 것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따라서 집착과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을 심도 있게 관찰하고 밝혀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가상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중관사상과 다르지 않지만 이러한 가상성을 바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 경험되는 세상은 오직 경험자의 인식 안에만 존재하고 있기에 외부적으로 드러나고 경험되는 모든 것 또한 마찬가지로 경험자의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관점을 가진다. 이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는 뜻을 지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마음의 구조와 그 심리작용 등을 잘 인식하고서 활동하면 궁극적인 목적인 성불(成佛)의 단계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조용길(2007)은 유식사상에 대해 '현실에서 우리의 인식은 실재하는 주체와 객체를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으로부터 나온 허구적이 되고 있는 미혹의 세계를 마음의 분석을 통하여 설명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구조를 비연속적인 연속으로서 파악하고 그와 동시에 시간의 허구성도 밝히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유가행파의 대표적 논서 중 하나인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나온 현상계에 대한 표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현상이 실제로 우리의 앎처럼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표상일 뿐이다.
아(我)와 법(法)을 있는 것처럼 가정해서 설정한 까닭에 온갖 종류의 모양(相)과 변화(轉)가 있게 된다. 저 현상계는 식(識)에 의존해서 변현된 것인데, 이러한 변화의 주체(能變)는 오직 세 가지이다.
이처럼 경험자의 인식체계에 따라 달라지는 외부세계와의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해 그 어느 학파보다도 마음의 변화와 작용에 대해 유가행파는 자세히 분석하고 분류함으로서 의식적으로 접근하기 쉽지않은 무의식 세계와 무의식의 작용까지 세세히 연구를 거듭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오늘날 불교심리학을 이야기할 때 유식은 빠질 수 없는 핵심적인 분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특히나 유식사상은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표상을 이용해 마음을 바꾸어내는 명상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일체 모든 것이 유식(唯識)임을 관찰할 뿐만 아니라 이를 역으로 활용토록 하는 '영상관법'은 표상 즉 영상이 있을 뿐 자아와 세계는 실재하지 않으며 영상은 단지 의식일 뿐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를 적용하는 순간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 마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영상은 실제를 반영한 것으로 드러난 존재와 닮아있으면서도 마음에 종자로 저장된 경험들이 투사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감각조차도 가상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전제는 현실 세상이 그대로 가상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가상현실 기술로 구현해낸 VR기기 속에서 경험하는 세상이 곧 지금 경험하는 세상과 얼마든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그 표상, 영상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의식이냐 컴퓨터 프로그램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명상법은 다소 난해하고 체득이 쉽지 않은 어려운 사상들과 달리 당장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을 대상으로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상관없이 적용해나가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적용하는 만큼의 변화를 바로 일으킬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진다. 따라서 유식(唯識)사상에서 제시한 유식관, 영상관법은 가상현실에 적용하기에 적절한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영상관법에서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는 영상을 떠올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도록 하는데 이러한 원리 및 유식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마음작용을 가상현실에 적용시킨다면 응용 가능한 실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명상법을 고안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3.화생사상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과 혼합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혼재되어가는 세계의 경계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듯 가상현실 속에서 활동하는 가상적 존재인 아바타 및 기계적으로도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로봇, 사이보그 등의 존재성에 대한 고민도 반드시 심도 있게 고민해봐야 할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내릴 것인가에 따라 이를 대하는 시각 또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1960년대에 미국의 항공우주국에서 화성에 생물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탐사계획을 세우면서 James Lovelock은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자유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를 유지하는 비평형의 상태'라고 정의를 내렸는데 이러한 정의를 내린 뒤 그는 지구 또한 탈 평형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생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으며 이를 기준으로 다양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가상현실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세상에서의 존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금강경』에 등장하는 '화생(化生)' 개념에 대해서도 한번 검토해볼 수 있겠다.
무릇 있는바 모든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기는 것, 태로 생기는 것, 습기로 생기는 것, 화하여 생기는 것, 형상 있는 것, 형상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모두 다 교화하여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라.
여기서 화생(化生)이란 산스크리트어로는 upapāduka(스스로 생겨난), 곧 가닿다는 뜻을 가진 upapad에 '~하는 것'이라는 뜻의 –uka가 합해진 것으로 아무것도 없는 데서 홀연히 생기는 중생이나 새롭게 형질을 바꾸는 중생, 전도된 변이(變易)의 번뇌로 새로운 것을 취하는 혹업을 일으키는 중생이나, 누에가 허물을 벗고 나방이 되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금강경』에서는 중생이 태어나는 여러 종류를 아홉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구류생(九類生)'이라고 한다. 여기에 어머니의 태에서 생기는 태생(胎生), 알에서 생겨나는 란생(卵生), 그리고 축축한 곳에서 생겨나는 벌레와 같은 습생(濕生), 그리고 앞서 말한 화생(化生), 여기에 더해 형질과 빛깔이 있는 중생을 말하는 유색생(有色生), 반대로 형질과 빛깔이 없는 중생을 뜻하는 무색생(無色生), 기억으로 생겨나는 유상생(有想生)과 마음이 혼미하여 지각과 의식을 못하는 중생인 무상생(無想生),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상도 무상도 아닌 비유상비무상생(非有想非無想生)이다. 『능엄경』에서는 비유상비무상생 대신 비유색생(非有色生), 비무색생(非無色生), 비유상생(非有想生), 비무상생(非無想生) 네 가지를 더해 십이류생(十二類生)을 이야기한다.
화생(化生)에 대해 백성욱(2012)은 대략 질펀한 곳에 습기와 더러운 것이 모여서 솟아나는 파리와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며 자기를 드러낼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자꾸 드러낼 궁리를 하면 나게 된다고 하였으며, 혜능대사는 좋아하는 것만 보려하는 성품에 의해 유전하는 것을 화생(化生)이라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로봇이나 벌레와 같은 개개의 존재성에 대한 단편적 논의가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다 폭넓게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수 백여 년 전까지는 유색 인종조차도 동물과 같은 범위의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동물과 지구환경까지도 사람과 동등한 존재성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다소 부족한 존재성으로 다가오는 로봇이나 아바타, 사이보그와 같은 존재들이 보다 큰 위엄과 존재성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혼재되기 시작했을 때 어떤 관점으로 이들에게 다가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이런 화생(化生) 존재들과 같이 하나의 존재가 만들어지는 다양한 방식 중의 하나인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면, 예견 가능한 다양한 갈등 앞에 불교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화신사상
화신(化身)은 불교에서 삼신설에서 기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시불교시대에는 삼신설이 아닌 법신과 색신으로 된 이신설(二身說)로 전해지던 것이 부파불교를 거치고 대승불교에서는 유식학파에 의해 자성신(自性身)과 수용신(受用身), 그리고 변화신(變化身)의 삼신설(三身說)로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변화신은 보신(報身), 응신(應身), 화신(化身)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깨달은 존재인 부처님은 법신의 본체로 생사를 벗어난 근원으로서 존재하지만, 일반 사람이나 보살, 천신이나 마왕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미혹한 중생들을 깨우치고 가르침을 주기 위해 가상적 존재로서의 몸을 시현한다는 개념이다. 미혹한 중생은 부처님 법신을 자각할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화신의 개념은 『대승장엄경론』에서 처음 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변화신이 언급된 게송을 살펴보면 화신은 부처님 한 분이나 법신의 화현이라기보다는 제불(諸佛), 즉 모든 부처님의 화작으로 그 수나 종류가 무한하며 그렇게 지구에 화현한 존재로서의 화신이 곧 '석가모니 부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중생과 같은 몸을 가진 비슷한 존재 중의 하나로서 깨 달음을 얻은 위대한 존재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화현으로서 나왔을 뿐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삼신설은 무착(無著, Asnga)에 의한 『섭대승론』에도 언급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법신과 보신, 화신의 삼신이 각기 별개의 존재인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아바타가 실제 인물을 대신할 때 분명 실제 인물과는 차이가 있지만 아바타가 실제 인물의 특성과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가상세계 속에 하나의 캐릭터로서 활동하는 것처럼 화신 또한 중생계에 맞는 모습을 취하여 깨달음을 드러내고 전해주었을 뿐이다.
힌두교에서도 비슷한 의미의 화신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때의 화신은 '하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힌디의 범어로 'avātara(아바따라)'라고 지칭하여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세계에서 실제 인물을 대신하는 가상적 캐릭터로서 '아바타'로 사용되고 있다. 힌두 사상에 의하면 화신인 아바타는 여러 가지 형상을 취하고 지상에 현현하는 가상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5.만다라 사상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MANDA(본질)'라는 어간과 'LA(소유, 성취)'라는 접미사로 이루어진 말이다. 이를 번역하면 단이나 도량, 원륜구족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보통은 그대로 부른다. 다시 말해 우주 또는 생명의 정수로 가득한 바퀴를 뜻한다고도 하며 조화와 질서가 바로잡힌 완전한 체계인 코스모스(cosmos)를 도식화한 것이기도 하다. 2차원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다차원으로 된 시공간을 담고 있으며 우주공간에 바로 연결되는 신비한 공간이자 통로로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도상 만다라는 깨달음을 위한 방편이며 가상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세상을 가상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여겨지며 깨달음의 본질을 상징하는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여러 부처님, 보살들과 각각의 경계를 다양한 색상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만다라의 본질을 대락(大樂, mahāsukha)이라고도 한다. 티벳에서는 이 만다라를 이용해 모래를 가지고 현상계의 허망성을 직접 체득하도록 이끄는 수행을 하기도 한다. 만다라 명상가들의 경우 냉정하고 깊은 사고와 정신이 집중된 정신상태에 신속하게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구 심리학계에서는 칼 융에 의해 만다라에 나타난 반복적이거나 통일, 확산, 반복되는 형태 속에서 마음에 담긴 심연의 기억이나 상처들을 도출해내는 심리분석의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만다라에 담긴 도상들이 인간의식세계의 표현이자 순수 본성을 상징한 깨달음의 세계라는 것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만다라 자체가 궁극적 깨달음을 상징하는 다양한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기에 만다라에 담겨있는 교리는 방대하다. 또한 관상수행을 중심으로 도식화된 만다라를 마음속에서 세세히 재현해낼 수 있도록 훈련을 반복한다. 궁극적으로는 겨자씨만한 크기 안에서 이 거대한 만다라의 세상을 마음속에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만다라는 드러난 세상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적인 세상을 가상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세상을 본질이 드러난 거대한 가상 세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상성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만다라 그림을 그대로 한 줌의 모래로 띄워 보내는 수행을 하기도 한다. 본질을 깨닫는 순간 가상과 실상의 경계는 무너지고 가상이 그대로 본질로서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앞서 거론한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만다라는 드러난 현상 세상의 가상성을 바로 보고 집착에서 벗어나 본성을 깨닫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본질적인 만다라의 의의와 더불어 만다라가 가지는 다양한 색상과 문양, 대칭형으로 이루어진 시각적 아름다움 등은 명상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상세계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만다라를 활용 가능하게 하는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도록 하고 있다.
<가상현실의 불교적 이해와 명상 활용 방향성 연구/ 김화영(은산)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