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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크레스토이)
에베소서 4:22-32 2023/4/16 부활절 제2주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과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레미야 17:14절을 보면
선지자 예레미야의 짤막한 기도가 나오는데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새)렘17:14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제가 찬양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처한 그 시대의 현실은 정 반대였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시고 고쳐주신 하나님
그 좋으신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찬양을 받아야할 분이 오히려 조롱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고쳐주시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고도 거룩한 행실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안식일의 거룩함(구별됨)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아주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함(구별됨)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렇게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새)렘17:21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생명을 잃지 않으려거든, 안식일에는 어떠한 짐도 옮기지 말고, 짐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성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말아라.
17:22 안식일에는 너희의 집에서 짐도 내가지 말아라.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17:23 그러나 너희 조상은 아예 듣지도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지도 않았고, 교훈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고집을 꺾지도 않았다.
17:24 나 주의 말이다. 너희가 이제 나의 말에 잘 순종해서, 안식일에 이 도성의 성문 안으로 어떠한 짐도 가져 오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그 날에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으면,
17:25 다윗의 보좌에 앉은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대신들을 거느리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까지 거느리고, 이 도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도성에서는 영원히 사람이 살 것이다.
17:26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변과 베냐민 땅과 평원지대와 산간지역과 남방에서부터 사람들이 번제물과 희생제물과 곡식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로 바칠 것이다.
17:27 그러나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안식일에 짐을 옮기며, 예루살렘의 성문 안으로 짐을 가지고 들어오면, 내가 이 성문에 불을 질러, 예루살렘의 궁궐을 태워 버릴 것이다.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이는 중세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을마다 교회고 산마다 수도원이었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희망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그 시대에 원망과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예배당 건물이 더 커질수록, 지도자들의 옷차림이 더 화려해질수록, 하나님이 높여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믿음의 증거 곧 거룩함이나 구별된 행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신앙의 갱신운동(종교개혁)을 주도하면서 내건 첫 번째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었는가?’
곧 ‘거룩한(세상과 다른) 양심과 거룩한(세상과 다른) 행실이 있었는가?’ 였습니다.
95개 논제, 전체의 서론인 제1조를 보겠습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 하신 것은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서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하라’란?
단순히,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는 그 말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의 행실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구별된 양심 그리고 성령과 함께하는 거룩한 행실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250장(182장) 4절의 가사로 표현하자면, ‘내 주께 회개한 영혼(양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인 생명수 가운데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내 주께 회개한 영혼(양심)은 생명수 가운데 젖었네
흠 없고 순전한 주 이름 찬송합시다.
‘내 주께 회개한 영혼(양심)’
이것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907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1월 2일부터 15일까지 1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냉랭했지요.
그러던 마지막 날, 회개의 포문을 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길선주 목사님입니다.
당시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였던 길선주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거금을 착복합니다. 그렇게 아무 탈 없이 여러 해의 시간이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명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가운데 젖자,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공중 앞에서 땅을 치며 회개하지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성령의 임재를 막는 아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마른 뼈가 살아나듯 회개한 양심들이 살아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907년에 일어났던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내 주께 회개한 양심이, 그로 말미암은 거룩한 행실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부흥 운동과 맞먹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평양에서도 일으켰던 것입니다. ‘내 주께 회개한 양심’입니다.
‘내 주께 회개한 양심’
여기에서 좀 멀리 떨어져 나간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근심을 안겨 준 교회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사람들
교회가 세워지기 전 에베소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살았던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또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갔던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임하자, 그렇게 복음위에 교회가 세워지자, 정말 모든 것이 변화가 됩니다. 가장 큰 변화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진노의 아들 에베소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칭호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5 ①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2:6 또 ②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겸손으로부터 거룩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 것입니다.
계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4-5절입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회개’ 그 실체는 무엇일까요?
거룩한 양심과 거룩한 행실로의 회복이었습니다.
처음사랑, 거룩한 양심과
처음행위, 거룩한 행실로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도의 권위로 오늘본문에서 이렇게 권면했던 것입니다.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처음사랑’ ‘처음행실’
‘내 주께 회개한 양심’으로 다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주께 회개한 양심’
그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거짓을 버리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엡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여기서 바울은 ‘회개한 양심’
곧 ‘거룩한 행실’을 갈아 먹는 두 가지 실체를 고발합니다.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 거짓행동과 거짓말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 분노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행동이나 거짓말이나 분노는 이웃과의 평안을 깨는 마귀(사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자기 이웃과 더불어 서로 참된 말을 하고
그리고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해가 지도록 이웃에 대한 노여움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회개한 양심, 곧 거룩한 행실을 가진 새사람의 특징은 도둑질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좀 지나칠 정도로 세세히 설명합니다.
엡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①도둑질하지 말고 ②돌이켜 ③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세 번째 증거입니다.
선한 양심으로 거룩하게 변화된 새사람은 선한 말로 공동체의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네 번째 증거는 친절, 크레스토이(χρηστοί)’입니다.
엡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크레스토이(χρηστοί)’ ‘친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발음이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토(Χριστῷ)’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크리스토’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크리스토’와 ‘크레스토이’를 혼용해서 사용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들이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서로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친절한’ ‘크레스토이’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신앙의 근본이 성경이라면 회개의 근본은 거룩한 양심과 거룩한 행위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가치를 일어버린다면 더 이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크레스토이’ ‘친절한’사람으로 비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러니 다시 정리합니다.
첫째 거짓과 분을 버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둘째 도둑질 하지 마십시오.
셋째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십시오.
그렇게 해서 넷째 ‘크레스토이’ 서로 친절하게 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