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軒文集 安禧遠 (1846~1919) 吉叟(길수) 時軒(시헌) 廣州(광주) 거주지 : 密陽(밀양)
時軒文集卷之二 詩 與金文直孫殷瑞辛士衡登觀海亭 亭在昌原寒岡所建
探奇搜勝到艱關
百里雲煙卽海灣
澗雨纔晴生白石
巖花已盡見靑山
文昌古廟依前日
崔孤雲影幀在昌原斗谷來路瞻拜
寒老遺亭又此間
七十猶存子長癖
南遊多日不知還
[최치원이 보내온 편지] (3) 창원에 집을 짓고 가족과 정착
“합포현 풍광에 반해 머물렀는데 발걸음 안한 곳이 없답니다”
기사입력 : 2016-03-30 22:00:00
땅거미 질 무렵 바닷물 찰 때
달그림자 모습에 반해
‘월영대’라 이름 붙여
정착 후 유유자적 삶 꿈꾼 별장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 찾아와
서재이자 강론장·사랑방 돼
통일신라 말기 당대 최고 학자이자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은 경남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함양에서 마지막 관직생활을 했고, 창원에서는 집을 지어놓고 한동안 머물렀다. 또 경남 곳곳을 유랑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마지막 여생을 가야산 해인사에서 보냈다. 도내 곳곳에 남아 있는 그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삶의 교훈을 남겼는지, 환생한 그를 통해 들어본다. 1000여년 전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은 전문가의 조언을 바탕으로 약간의 각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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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합포구 만날고개와 마산시내 전경. 최치원 선생의 행적을 중심으로 월영대를 거쳐 만날공원~무학산 고운대(학봉)~서원곡유원지~창원시립마산박물관~마산문학관으로 이어지는 8㎞ 코스의 문학탐방로가 있다./김승권 기자/
천령군(지금의 함양) 태수로 있을 당시 신라는 이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왕권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타락한 귀족들은 민초들의 고혈을 짜내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기근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화적패에 가담해 반란을 일으켰고, 지방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중앙정부에 종종 반기를 들곤 했지요.
저는 비록 외직을 전전하면서도 어지러운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반발과 신분적 한계가 발목을 잡아 결국 실패했습니다. 고국이 망가지는 꼴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답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때는 풍운(風雲)의 뜻을 품었지만, 욕심도 관직도 모두 내려놓고 외로운 구름(孤雲)이 되기로 한 것은 제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벼슬은 내려놓았지만 한평생을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가 평안할지 고민해왔던 저는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할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자유로워졌으니 마음껏 시도 짓고, 여행도 더 자주 다녀야겠다 생각했지요. 이를 위한 장소로 택한 곳이 바로 지금의 창원인 합포현입니다.
1145년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에도 제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의 삶에 대해 쓰여 있습니다. ‘방랑하면서 산 아래와 강가·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라고요. 경주 남산, 강주(경북 의성) 빙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別墅)’ 등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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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회원구 두척동 두곡마을에 있는 최치원 선생 영당.
기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소들을 잘 살펴보면 강이나 바다, 산과 절같이 자연경관이 대부분이지만 마지막에 있는 ‘합포현 별서’는 좀 다릅니다. 인위적인 건축물이죠. 별서는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하면 별장 같은 건데, 제가 합포현에 지은 별서는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별장일 겁니다.
경주를 떠난 이후 잠시 스쳐간 다른 지역과는 달리 합포현에다가는 집(별서)을 짓고 가족들과 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만큼 애착이 남다르다는 뜻이지요.
여유를 즐기기 위해 창원에 왔지만 생각보다 한가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창원에 있다는 소문이 제자들과 지역 사림들에게 다 퍼졌는지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시구도 주고받고 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버립니다. 멀리서 온 손님은 별서에 며칠씩 묵기도 했지요. 합포현 별서는 제가 시를 짓고 공부를 하던 서재이자 강론장이자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거처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요.
제가 이렇게 별서까지 지어가며 창원에 머물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빼어난 풍광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경남대학교가 있는 부근에 자주 산책을 다녔는데요. 매월 열엿샛날 땅거미 질 무렵, 바닷물이 한창 찰 때에, 대에 올라 달 그림자를 바라보면 달이 바다에서 뜨는데, 풀 덮인 산이 그림자를 이루며, 달 그림자가 바다 가운데에 있어 넓이가 구십칠억삼만팔천 척이나 되고, 기묘하며 지극한 풍경이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달이 사라지면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어디에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달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이곳을 저는 ‘월영대(月影臺)’라 불렀습니다. 제가 떠난 이후에도 월영대는 고려·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의 순례지가 됐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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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합포구 만날고개에서 시작하는 ‘최치원의 길’ 입구.
하지만 강산이 수백 번은 바뀌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군요. 3년 가까이 머물렀던 별서는 원래 어디쯤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월영대도 마찬가지고요. 주변으로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섰으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 그림자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겠지요. 게다가 월영대 앞은 2㎞에 달하는 백사장과 해안을 따라 우거진 소나무숲이 일품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1935년 신포동 매립공사로 바다가 육지로 변해버렸다죠. 너무 아쉽습니다.
이제 월영대라 하면 제가 글을 새겨 놓은 비석만 쓸쓸하게 남았네요.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정도군요. 이후 후손들이 1932년에 비각과 추모비를 세워 보존해주고, 1993년도에는 경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됐다고 하니 그나마 서운한 마음이 좀 덜어집니다.
이외에도 저는 두척산(무학산) 고운대(孤雲臺)에 올라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지금은 뭍으로 변해버린 진해구 웅동에 있는 청룡대(靑龍臺)에서는 낚시도 즐겼습니다. 고맙게도 제가 떠난 이후에도 창원에서는 저를 추억하려는 사람들이 참 많았나 봅니다. 월영서원이나 두곡영당 등에서 지역 유림들과 제자들이 제사를 지내줬다고 들었습니다.
달 그림자에 이끌려 운명처럼 정착한 창원 곳곳에는 제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떠난 뒤에도 저를 추억하는 이들 덕분에 제 영혼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 숨쉴 테지요.
김언진 기자 hope@knnews.co.kr
☞ 창원에 남겨진 최치원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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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대(月影臺)=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에 있다. 최치원이 대를 쌓고 해변을 소요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 옛날에는 바닷가 축대로 물 위에 비치는 아름다운 달빛을 노래한 곳이기에 월영대라 이름 붙였다. 월영대 입석비에 쓰여진 글씨는 최치원의 친필 각자로 전한다. 경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215호로 지정돼 있다. 비각으로 문창후 최선생 월영대 추모비(文昌侯崔先生月影臺追慕碑)와 문창후 최선생 유허비(文昌侯崔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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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대(孤雲臺)=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에 있다. 최치원 유상지(遊賞地), 수도하던 곳이라 전해진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고운대는 월영대에서 북쪽 5리, 두척산(현 무학산)에서 남쪽 5리 정도의 봉우리에 있으며 매우 높은 절벽이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자료에 따라 유추해볼 때 지금의 학봉(鶴峰·부엉산)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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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대(靑龍臺)= 창원시 진해구 가주동에 있다. 최치원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 당시에는 조수가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뭍으로 변했다. 자연암석에 최치원 친필로 ‘청룡대 치원서(靑龍臺 致遠書)’라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후손들이 기리는 문창후 최선생 청룡대비가 건립돼 있다. 경남도기념물 제188호로 지정돼 있다.
▲월영서원(月影書院)=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 경남대학교 내에 있었다. 최치원의 유지(遺址)이므로 1846년에 세워졌다 고종 5년에 철원됐다. 후손들은 월영대 창건 유지에서 세워졌다는 취지에서 시조서원(始祖書院)이라 불렀고, 선비들은 문창서원(文昌書院)이라 불렀다고 한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척동의 두곡서원(斗谷書院)으로 이건됐다고 한다. 월영서원 철원 이후 문창공 원허비(文昌公院墟碑)가 있었는데 1988년 두곡서원 옆으로 이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