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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덕사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鐘
국보 제29호 / 통일신라 771년 /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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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은 신라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려고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치자,그의 뒤를 이은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한 종이다. 구리 12만근을 들여 높이 약 3.7m, 지름 약 2.2m의 웅장한 규모로 제작된 이 종은 18.9톤이다.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고, 아기를 시주받아 넣었다는 전설에 따라 아기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 조선시대에 봉덕사가 치명적인 홍수로 전 가람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나, 신종만은 그 무게 때문에 떠내려가지 않았다.
# 종복鐘腹에는, 이 종을 만든 취지와 목적을 밝힌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서문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된다. < 대저 지극한 도는 형상 밖에 있으므로, 아무리 그 모습을 보려고 해도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진리의 소리는 천지간에 진동하고 있으나 아무리 들으려 해도 그 울림을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비유의 말을 내세워 삼진三眞의 오묘한 진리를 알게 하고, 신종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 이 종명鐘銘의 내용처럼 성덕대왕신종에는 소리를 통해 불법의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신심이 서려 있다.
@ 반세기 전에 주한미군 라디오방송은 전국 사찰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범종소리를 녹음, 임택근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테이프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에밀레종을 비롯하여 이미 깨져 칠 수 없는 오대산 상원사종 등 수십 개의 종소리가 들어 있는데 그 해설 마지막엔 이런 말이 나온다. "서양의 종은 귀에 들리고 한국의 종은 가슴 깊은 곳에 울린다."
종신에 2구씩 마주하는 4구의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세우고 공양하는 공양상으로, 비천상 주위에는 보상화가 구름같이 피어 오르며, 천상으로 천의와 영락 등이 휘날리고 있다.
@ 안드레에카르트 독일미술사학자는 "그녀의 가벼운 천의가 몸에 두세 번 말려 하늘거리고 흐르는 구름과 함께 타원으로 공중을 나는 모습은 완전히 조선만의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처럼 음악적인 종소리가 그림으로 표현돤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요염한 듯 애잔한 듯한 자태 이것은 신라의 자태이다." 라고 했다.
종을 매다는 장치로 용의 모습을 하고 있어 <용뉴龍紐>라고 한다. 용의 자세는 오른쪽 앞다리는 뒤쪽으로, 왼쪽 앞다리는 앞으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이 용을 포뢰捕牢라고 하는데, 포뢰는 전래의 용생구자설龍生九子設에 나오는 아홉 용 가운데 하나로, 용의 또 다른 화신이다. 이 포뢰는 바다에 사는 고래를 특히 무서워 하여 그것을 보기만 해도 놀라 크게 비명을 지른다고 한다 . <삼국유사>에 "종은 모두 각閣과 포뢰가 있고 고래로 당撞을 삼았다" 라고 되어 있다. 옛 사람들은 포뢰형상을 만들어 종 위에 앉히고 고래모양의 당[鯨撞]으로 종을 쳤다. 그렇게 하면 고래를 만난 포뢰가 놀라 큰 소리를 지를 것이고, 그에 따라 종소리도 크고 우렁차게 될 것으로 믿었다. 범종의 소리를 경음[鯨音]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래쪽에는 다른 종에서는 보기 어려운 완만한 팔능형八陵形의 굵은 띠가 있고, 아름다운 보상화문과 연꽃 문양이 채워져 있다. 이 띠의 위아래에는 연주문대蓮珠紋帶가 있고, 그 내부에는 8개의 능陵부분 중앙에 연꽃문양이 각각 하나씩 새겨져 있다. @ 蓮珠紋- 구슬을 나란히 꿰어놓은 모양
명동鳴洞
이 명동의 역할은 일종의 공명동 역할을 해서 타종소리가 은은하고 오래 지속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현재의 명동은 신라 시대의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신라 시대의 명동 자리는 모두 파괴되어 현재 그 형상과 치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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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전기(前期) 한 마리의 용과 용통이 있으며 좌불상이 있다.
성거산 천흥사동종 聖居山天興寺銅鐘
구성요소로 볼 때 신라종의 특징인 단용, 음관, 상대, 하대, 유두, 당좌 및 비천상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대표적인 고려 전기종으로서 외형상으로는 신라종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유사점이 많으나 구성이 간소화되었고, 위패형의 명문곽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명문에 의하면 1010년에 주성된 종임을 알 수 있고 규모는 종고 1,676mm, 구경 955mm, 두께 88mm로 현존하는 고려 전기종前期鐘 중에서 최대의 종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에 전시되고 있는 이 종은 천흥사가 폐사된후, 어떤 이유인지 남한산성에 옮겨져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되던 것을 광주군청으로, 다시 덕수궁 미술관에 있다가 오늘에 이른다.
용뉴부분의 형태는 신라범종의 용뉴형을 닮고 있으나 다만 용두가 여의주를 물고 고개를 들어올리는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당좌와 교대로 배치한 비천상은 신라범종에서 보이는 비천상 배치와는 달리 각 1구軀씩 대각선상에 배치한 것이 다르다.
특히 유곽 바로 아래에 위패형 명문곽을 설치하여 그 속에 양주陽鑄한 [聖居山天興寺 鐘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 있어 고려헌종 원년(1010)에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화統和는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성거산은 충남 천안군 성거면 성거산으로 고려태조와 깊은 인연이 있는 천흥사임을 알 수 있다.
여주출토'청녕4년'명 동종 驪州出土“淸寧四年”銘 銅鐘 보물 제1166호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전기범종으로 길이 84cm, 입지름 55cm로 중형(中形)에 속한다.
종의 상단과 하단,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둘러싼 사각형의 유곽에는 가늘게 연이은 구슬 모양의 띠를 돌리고, 그 내부에 모란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유곽내의 유두는 꽃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용뉴는 한마리의 용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용통은 6단으로 구분되었고 각 부분마다 덩굴무늬를 양각하였다.
독특한 모습의 비천상은 천흥사종(국보 제280호)과는 달리 4곳에 있다.
당좌 역시 4곳에 있다.
종 몸통 아랫부분에는 제작 연대와 중량을 알 수 있는 글이 새겨 있어, 고려 문종 12년(1058)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특위(特爲) 려 문종 12년(1058)에 해당되며 이때 주조한 년대(年代)가 확실한 범종이다.
경기도 화성 용주사동종 龍珠寺銅鐘 국보 제120호 / 경기도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 용주사
용주사에 전해오는 범종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이 동종은 신라종의 구조와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상대에 반원형 문양이 장식된 점, 당좌가 아래쪽으로 내려와 구연부에 가깝게 배치된 점, 비천 외에 삼존불상이 출현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 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종의 고리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몸체에는 비천상과 삼존불상을 두고 있는데, 성덕대왕신종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撞座 乳廓과 乳頭 당좌는 8엽 연판으로, 그 주위에 연주무늬 테두리 안에 소용돌이무늬가 장식된 문양대를 돌렸다.
상대 바로 밑에는 당초무늬로 장식된 4개의 유곽(乳廓)을 배치하고, 그 안에 원형의 연판좌 위에 솟아 있는 9개의 연꽃 모양 유두(乳頭)를 표현했다.
종의 하대下帶는 연속된 당초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銘文
용주사 범종 오른쪽 옆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기(緣起) 성황산(成皇山) 후신 화산(花山)의 갈양사 후신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되었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하였다. -불기 2950년 7월 주기 석(釋) 송굴(松屈) 대련(大蓮)- 이 기록은 1923년 당시 주지였던 강대련(姜大蓮, 1875~1942) 스님이 적은 것으로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는 기록이다.
범종 뒷면에는 창건주 염거화상의 명문도 새겨져 있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를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려 주성(鑄成)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염거화상이 생존햇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넣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금상십육년(今上十六年)이라는 연기표현은 신라시대에는 없어던 표기법이고 더우기 범종은 양식적으로 보면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명문은 범종이 만들어진 후대에 추각(追刻)되었다고 보여진다.
고려 시대:후기(後期)
부안 능가산 내소사楞伽山來蘇寺고려 동종 보물 제277호 /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
명문에 따르면 본디 고려 고종 9년(1222)에 청림사 종으로 주조되었으나 청림사가 없어진 후 조선 철종 4년(1853)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한국종 특유의 음통과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의 모습을 한 종고리가 있고 상대上帶 위에는 여의두문과 비슷한 입화형立花形 장식이 솟아 있어 고려 후기 종의 특성을 보인다
유곽과 유곽 사이 가장 넓은 부분에는 삼존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두 뺨이 볼록한 *선정인禪定印의 본존은 연화좌대 위에 앉아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원형대 위에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다. 삼존상들의 두광 위로는 몇 줄의 평행 양각선이 나부끼듯 새겨졌으며 다시 그 위로는 보개寶蓋가 떠서 술을 휘날리고 있다.
*禪定印-부처가 선정에 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결가부좌한 상이 취하는 手印이다
하늘을 나는 보개寶蓋와 고려 시대 특유의 해바라기처럼 뾰쪽한 끝을 가진 복판複板 연화문의 당좌(撞座:종을 때리는 자리)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모두 보상당초문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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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두 마리의 용이 고리형태를 이루며 용통이 없어진다. 종신에 보살입상이 조각됨.
의왕 청계사동종 義王淸溪寺銅鐘 보물 제11-7호
경기도 의왕 청계사의 동종은 높이 115㎝, 입지름 71㎝, 무게 700근이나 나가는 큰 종이다. 종의 허리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두 줄의 굵은 가로선이 둘러져 있어, 사인비구가 '중국종'의 양식을 받아들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줄의 가로선은 강화동종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화계사동종은 강화동종과 마찬가지로 쌍룡뉴이다.
청계사 동종에도 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살상의 표정까지도 완벽하게 표현을 했다. 어떻게 이렇게 쇠붙이에 표정까지 그려낼 수가 있었을까?
"사인비구思印比丘의 8개의 동종"을 참고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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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시대의 범종
1. 신라의 범종
신라의 범종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현존하는 것이 11구에 불과하다. 이 11구중 유기명 범종은 6구, 무기명 범종은 5구로
현재 국내에 있는 것은 5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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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명 범종
755년 상원사 범종,
745년 일본 국부팔번궁사 소장 벙종(명치유신 당시 신불 분리소동으로 없어짐),
771년 봉덕사 성덕대왕신종
804년 선림원 범종(월정사 범종) 6.25때 소실 파편일부보관
833년 일본 상궁신사 범종
904년 우좌팔번궁 범종 무기명 범종 청주박물관 소장 신라범종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실상사 파종
일본 광명사 소장 신라범종
일본 주길신사 소장 신라범종
일본 운수사 소장 신라범종
이 11구의 범종에서 볼 수 있는 특징과 공통점은 상단에는 상대와 4개소의 방형유곽, 9유를 갖추고 하단에는 하대를 갖추었으며 상하대의 주된 문양은 반원권이다. 종복에는 천의를 날리며 주악하고 승천하는 비천상 2구와 연화문 당초문 및 보상화문을 양각한 원형당좌 2개가 대칭으로 배치되었다. 또 천판은 당시 성했하던 연판이며 상대와 접하는 경계에 원형으로 둘러서 장식하고 천판중앙에는 두다리로 땅을 딛고 머리를 숙여 범종을 한입에 물고 들어 올리는 듯한 용뉴를 만들었고 구부러진 용의 몸체로 범종을 매달도록 하였다. 그리고 용뉴체에 빗대어 만든 용통은 바뀐 부분을 몇 개의 단으로 구분하고 화려한 당초문, 보상화문을 장식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범종이나 일본의 화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특히 용통이 종신과 맞뚫려 있어 음색이 곱다.
2. 고려의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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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범종은 일반적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한다.
전기는 요나라 연호를 사용하던 918부터 1146년 인종말까지 후기는 의종때부터 1391년 까지로 독자적인 간지로 기명을 나타낸던 때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적 구분보다는 입상화문의 유무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전기의 범종은 성거산 천흥사 범종을 비롯하여 10구가 있는데 대부분 신라종의 양식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종보다는 왜소하고 치졸하며 평민화되어 각부의 조각을 형식적이거나 도식적인 형태가 되어 있다. 대표적인 종으로는 성거산 천흥사 범종, 경기도 여주 출토 청녕 4년명 범종, 경기도 화성 용주사 범종, 전북 부안 출토 고려 범종 등이 있다.
후기의 범종은 대략 64구가 있는데 그 특징은 한 마리의 용과 음통이 있으나 그 문양이 도식화 되었으며 용통 정상에 소주나 여의주를 두르기도 했다. 또 연판에는 입상 화문대를 갖추었고 상하대 유곽에는 반원권문양 대신 뇌문, 국화문, 모란문, 초화문 등 다른 문양으로 장식했고 유두는 퇴화하여 거의 약식 형식화되었다. 명문은 각자로 음각하였고 당좌는 2개에서 4개로 증가하였고 비천상은 각 한 구씩 합장한 형태로 보살상과 혼용하여 배치하던 전기와는 달리 당좌의 배치와 동일한 4개소에 4구의 보살상이나 여래상을 배치하었다. 대표적인 범종으로는 내소사 정우 10년명 범종, 정풍 2년명 범종, 탑산사 계사명 범종, 경기도 연천 출토 범종 등이 있다.
3. 조선의 범종
고려말 중국 종의 양식이 도입되면서 조선 특유의 형태와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기본 양식과 형태는 계승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중국 범종의 형태를 전반적으로 받아들였다. 단용 용뉴가 쌍용으로 변화되고 용통이 없어진 대신 종정의 천판 중화문 모란문 등 초화문이나 범자대문으로 장식되고 상대에 붙어있던 유곽을 독립되게 배치하고 유곽내의 9유도 역시 도식화된 화조유로 처리 되었다. 종복에는 비천상이나 보살상 대신 두광 보광을 갖추고 잡다한 장식을 한 보살입상을 2두내지 4구씩 배치하거나 범자로 대신 장식했다. 그러나 간혹 파뢔를 배치하기도 했다. 명문은 고려시대대 각자 했던 명문을 장문화하고 잡다해졌다.
이처럼 범종은 신라시대의 아름답고 우아하던 모양이 점차 도식화 퇴화되어 갔고 17c에는 완연히 본래의 전통양식과 형태를 상실한 범종이 나타났다.
[참고] 범종의 시대적 구분 신라: 한 마리 용과 용통이 있으며 비천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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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선에 들때 종소리로 상을 잡는다는 말씀이 있어서 종에 관심이 있습니다. 신라나 고려때 종에 관심이 가네요.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