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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평론 통권 109호 2023 여름 PP. 98-103
느리고 느리게, 그리고 장중하게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김남석
최인훈의 희곡 중에서도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독특한 감성과 감명을 자랑하는희곡이다. 처음 읽을 때는 그 묘미와 속뜻 그리고 깊이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수도있지만, 여러 차례 읽게 되면 이 희곡이 지닌 스케일과 깊은 상징성이 가슴 벅찬 감격을 누를 길이 없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이 희곡의 무대화에 도전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최근 부산의 공간소극장은 최인훈의 희곡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작년 <봄에 오면산에들에>에 이어 2023년 4월에는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최인훈작, 전상배 연출,부산 공간소극장, 2023.04.05~04.15)를 무대화하였다. 느리고 어눌하고 미약한 이들이잔뜩 등장하는 이 희곡은 어쩌면 21세기 초 스피드 시대이자 가상 현실의 한복판에서어울리지 않는 공연일 수도 있었다. 즉자적인 감성과 전자 문명의 풍토에 기반한 2020년대의 젊은 감수성과도 어울리지 않은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용감하게 이러한 편견과 불리함을 뚫고 공간소극장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무대화하였다.
느릿한 말투와 어눌한 태도의 민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연극적으로 형상화할 때, 최인훈은 연출 디렉션으로 느릿한 말투를 당부하고 있다. 배역상으로도 아기장수의 부친은 말더듬이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한 번에 발화하고 유창하게 응답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느릿한 말투의 아기장수 모친과 말더듬이 부친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몇몇 관객들은 이러한 느린 말투와 굼뜬 행동에 적응하지못하기도 하다.
개인의 취향 차이야 어쩔 수 없지만,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서 느릿하고 어눌한 말투는 빼놓을 수 없는 관극 묘미이다. 인물들이 구사하는 느릿함, 그러니까 느림의 정서 이면에 포함된 함의를 읽어내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아기장수의 부모는 산속에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가난한 소작농이다. 그들은 힘겹게 농사를 짓고 있지만, 수확물은 대부분 '높은 사람'에 돌아가 버려셔, 임신한 여인이 씨앗조 한 그릇 먹는 것에 두려워해야 할 정도이다.
이러한 가난은 이 집만의 문제는 아니다. 곳곳에서 도적 떼가 출몰하고, 그러한 출몰도 한 해만의 일은 아니다. 아기장수 부모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인물은 늘어난 빛과 세도가의 등살에 결국 양민이기를 포기하고, 같은 처지의 인물들을 모아 도적 떼로 나선다. 하지만 이러한 도적 떼의 등장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도적 떼를 처벌하는 관아(권력)의 서슬푸른 칼날이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2막에 등장하는 노파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되찾기 위하여 관아로 향하고 있다. 관아의 높은 곳에 참수된 소금 장수(목)가 내걸려 있었는데, 그 소금 장수가 노파의 아들이었다. 아기장수의 부모들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소금 장수가 도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결국 처형되었다는 소식에는 공포심을 느껴야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당사자 격인 모친(소금장수 어머니까지 만나자 심적 격동을 금하지 못한다. 그만큼 현실의 시간은 왜소한 민중에게 무섭고 잔인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는 이러한 권력의 당위성을 묻는 텍스트의 여백이 잔뜩 들어 있는 희곡이다. 작품 속 세상에는 폭정과 불합리에 도적이 들끓고 있었고, 그 도적을 빙자한 잔인한 처형이 자행되고 있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민중의 분노가 끓어오르자, 이를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토벌대가 몰려와 폭력을 자행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결국 양민이 양민으로만 살기 어려운 세상이 도래한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불공정과 비상식의 세상-공정과 상식을 주장하는 이들이 앞장서는 세상이 대개 그러하듯 - 에 '하늘(옥황상제)'이 개혁자를 예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는 놀랍지 않다. 난세는 영웅을 부르고 영웅은 민중의 해방을 개혁의 기반으로 삼기 마련이다. 그러한 영웅이 끝내 민중을 돌보는 일도 많지 않았지만, 민중을 돌보지 않고 시작한 영웅의 존재도 많지 않다. 그러니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그려내는 난세는 필연적으로 영웅의 등장을 예고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자가 실패하는 과정과 이유이다. 민중은 하늘이 내린 영웅을 거부하고 스스로 그 영웅을 제거한다. 그리고 다시는 영웅(아기장수)을 자신들의 마을에 내려보내지 말아 달라고 기원한다. 시대와 민중을 구할 영웅을 기원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선택에 동참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더 이상 피폐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앞세우는 셈이다.
일반적인 논점으로 하면 패배자의 논리이고 현실적응주의자의 자기 옹호에 가깝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민중이 가지는 중요한 속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민중은 자신들의 질서와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 일쑤이고, 그러한 존재의 폐해를 공유하면서 그를 제거하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는 이러한 민중의 의도와 힘 그리고 관습적 처벌 과정을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정리하고, 이러한 메커니즘이 궁극적으로 집단의 존속과 문명의 존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 왔음을 설파한 바 있다.
최인훈 역시 이러한 의도를 희곡 창작 의도로 표한 바 있다. 가난과 폭정에 억눌린 민중은 이를돌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구하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기존의 상황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안을 지키는 일에 더 매달린다. 그들은 위험보다는 현 상태를, 미래보다는 익숙한 현재를 선택하는 셈이다. 결국 아기장수의 부모는 아기장수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여야 했다. 죽인 자는 부모이고, 실제로 아이를 목 조른 자는 남편이지만, 그들 부모로 하여금 민중의 영웅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을 죽이도록 조장한 이는 이웃이고, 마을이고, 관장이고, 토벌군이고, 나아가서는 국가 권력이며, 이러한 모든 것은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집단, 즉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국가의 존치나 집단의 안녕을 빌려, 자신들에게 위해가 되거나 위험을 끼칠 인물을 압사시키도록 종용한다. 그리고 마을의 안녕, 양민의 생명을 이유로 가장 희생자를 아껴야 할 인물이 아이를 죽이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참사는 개인적으로도 참담한 일이지만, 문명사적으로 볼 때는 냉정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아무리 부인해도 우리라는 집단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고를 수 있는 냉혹함을 가진 존재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우리를 대신하는 등장인물들이 느릿하게 말하는 이유를 들어 보자. 그들은 더듬고 느리게 말하면서, 일반 사람들 혹은 권력을 갖춘 사람들과 분별된다. 착해 보일 수도 있고 순진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 실제로 그들은 착하고 순진한 이들이고,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영악하지 못한 세상에서 늘 피해자처럼 주눅 들어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사는 집은 산속 외딴곳이고, 그들이 사는 마당은 가축 한마리 없는 빈곤한 공간이다. 그들에게 먹을 것은 모자라고, 바칠 것은 넘쳐난다. 그들을 돕는 이들은 드물고, 그들을 위협하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한 이들은 세상의 권력에 짓눌린이들이고, 그 압력에 결국 그들의 말은 어눌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내면에도 폭력성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착하고 순진한 속성으로 인해 그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으로서의 잔인한 속성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느릿하고 어눌한 말투 뒤에 도사린 잔인할 정도로 냉혹한 성격은 결국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든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희곡이, 그리고 그 희곡 위에서 세워진 연극이 묻는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세상과 이상 사이에서,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의 문틈으로
최인훈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뿐만 아니라 <봄이 오면 산에 들에〉, 혹은 〈둥둥낙랑둥〉 같은 작품에서 어눌하게 말하고 흐릿하게 번지는 목소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에 걸맞은 몇 가지 장치를 극 내부에 암시해 놓았다.
가장 먼저 주목되는 장치는 '문'이다. 산골에 홀로 사는 아기장수 부모의 집을 외부와 단절시키는 이 문은, 나중에는 아기장수의 존재를 감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는 감금의 기능을 더하게 된다. 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기장수가 문 너머에 있어야 했지만, 아기장수는 그 문을 넘어서야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문은 부모와 아기가 맞부딪치는 갈등의 공간이다.
동시에 그 문은 세상과 아기가 접촉할 수 없도록 만드는 벽이기도 하다. 아기장수는 그 문을 걸어 나와야 하고, 그 밖에 그를 기다리던 용마를 타야 하며, 어쩌면 더욱 간절하게 아기장수의 현현을 갈망하는 민중과 대면해야 한다. 하지만 그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부모들이 그 문을 들여다보고(자신이 사는 집이지만, 어느 순간 부모는 그 문밖의 존재가 되고 그 문을 가로막는 문지기가 된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당혹스러워한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한다. 아기장수를 문 저쪽의 존재로 사멸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은 아기장수에게는 세상으로 나가는 다리이지만, 아기의 부모에는 아기를 묻어야하는 무덤이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공연하기 위해서는 이 문이 단순한 문이 아니고, 소위 말하는 현실적 세계와 이상적 세계 사이의 간극이라는 점을 어떠한 형식으로든 보여 주어야 한다. 공간소극장은 이러한 문의 의미를 재현하기 위하여, 문의 위치를 옮기고 무대 정면으로 가져와 그 너머의 세상이 극 속에서 자리 잡도록 배려했다. 짧은 이동이고 작은 변화였지만, 문이 무대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그 너머의 세상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가정을 관객에게 심어줄 수 있었고, 이러한 가정은 문 너머의 존재였던 아기장수의 존재에 대해 관객들이 자문하도록 자극할 수 있었다.
아기장수는 민중의 지도자 혹은 구원자일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존재를 지우고 추방하는 존재가 민중이다. 민중은 무리를 이루었지만, 그 힘을 권력의 전도에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구원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를 죽이는 선택을 한다. 문은 아기장수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세상을 바꾸고 잘못된 권력을 전복하여 민중이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고 권력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음에도, 아기장수에 걸려 있던 희망은 그렇게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에 대해 성찰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최인훈의 그토록 강조했던 군중과 권력 사이에서 스러지는 존재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최인훈은 『화두』에서 인간 사회가 가진 원형적인 특성에 대해 성찰했다. 인간은 무리를 이루어야하고, 그 무리에는 공통의 이념이 존재해야 한다. 그 이념은 독재 권력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특정한 이념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무리 자체가 폭력적이고그 폭력을 무마시키기 위한 희생(양)을 선택하는 기본 메커니즘일 수도 있다. 『광장』에서 남한과 북한그 어디에도 틈입할 수 없는 문제적 인물 이명준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특정 체제하에서 속박되고 구속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문명을 만들고 그 내부를 단속하면서 생겨났던 그 많았던 희생양 중 한 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인훈의 말대로 하면, '시'에서 인민재판에시달렸던 한 소년(『화두』)이나, 남과 북 어디로도 갈수 없었던 이명준(『광장』)이나, 세속의 권력자를 피해 산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문둥이 일가(<봄이 오면산에들에>>나, 자신의 가족 역시 희생하면서 세상의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현실의 질서에 순응해야 했던 아기장수(가)는 모두 그러한 인간사회의 본질적 메커니즘의 희생자이자 희생양 메커니즘의 증언자들이다.
최인훈이 소설을 통해 피해자들의 관념을 헤집었다면, 희곡을 통해서는 그 피해자들의 영원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설화나 민담 같은 넓은의미에서 신화적 메시지를 끌어들인 것도, 영속적인 이야기가 인간 문명(사회)과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문 앞에서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무리가 폭력적이어서 자신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었다. 그래서 문 밖의 인간들은 그들이 문 안에서 조용히 스러지기를 기다렸다. 르네 지라르 말대로, 역사는 늘 승리한 자의 역사였기에 희생양들은 정당한 죄수이자 처형자로 기록되어야 했다. 그런데 성서가 세상에 예수의 선택과 죽음 그리고 그 원인을 파헤치면서 억울하게 죽은 자에 대한 주목을 끌어냈고, 그 주목은 인간 사회 전체의 성찰로 이어질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우리의 사회는 아직도 집단과 무리, 단체와 군중이라는 힘이 약자와 희생자를 양산하고도 그 자체를 정의라고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군중의 거대한 권력이 그 권력에 반하는 이들을 찾아 처벌하는 과정을 정당하다고 믿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이들은 그 자체로 처벌 대상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물을 수 있다. 아이가 인간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그 의지가 다른 이들의 의지와 반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문 안의 세상에서 스러져야 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예수가 스러져야 할 진짜 이유가 없었듯이, 문둥이 일가가 핍박 속에서 숨어 살아야 할 근거가 없듯이, W시의 소년이 북과 남 그리고 세상 어디에서도 원하지 않는 자아비판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듯이, 아기장수 역시 자신의 문을 나와 세상에서 의지를 펴고 삶을 이어갈 권리가 있고 비참하게 스러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늘 그렇지 않았고, 그러한 세상을 바꾸어야 할 민중 역시 그렇지 않았다.
평 - 김남석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연극과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부산의 좋은 작품(공연)을 알리는 데에 나의 역할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러한 믿음이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채워주기를 기대한다. 부산의 연극이 유일한 연극은 아니겠지만, 세상 연극의 당당한 일부가 되기를 또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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