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롱집사의 조선족 선교 편승기 글 쓴 이 : 잔치집아줌마 조 회 수 : 10 날 짜 : 2004/01/19 00:08:36 내 용 : 한겨울에, 그것도 압록강에서도 훨~떨어진 봉림대군 귀양갔던 심양이라니~~
남편은 중국(?)에 한번 가 보자며 몇번 이나 이야기했지만 내 대답은'싫어, 추워'였다. '우리나라도 추버죽겠는데, 무신 중국씩이나 그것도 얼어 죽을라꼬~~~'
궁시렁궁시렁 하는 마누라눈치가 보였던지 별말이 없었다, '끝났는 갑다' 생각하고 있는데, 일대일 훈련 중에 느닷없이 중국에 가기로 했단다. '나 안가, 추버서 몬가겠다.당신 혼자가'했더니 ' 돈도 다 대주는데 가기나 하면 될낀데 김새게 만든다고 장집사 삐졌다.
여권기간을 넘겨서 여권도 새로 내야하고 번거러운 일도 많은데, 심드렁하니 계속 궁시렁거렸더니, 정색을 하고 기분나쁘단다. 나도 기분 나쁘다.춥은데...
아무튼 우여곡절긑에 우리는 일행보다 하루 늦게 출발 하게 되었고(그것땜에 돈을 엄청 더 들었나본데, 내가 바가지 긁을까봐 정확한 금액은 안가르쳐준다)
'위풍당당 중국여행'이란 핸드북하나들고 심양공항에 내렸다.
앗, 중국 군인이다. 국방색옷에 빨간 견장과모자.. 웬지 긴장된다.
'니하오' 입국수속대의 무표정한 공항직원에게 살짝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힐끗 쳐다보며 '니하오' 한다, 나는 속으로' 문디자석 좀 웃으면 안되나?
'당신은 중국말도 못하면서 인사는 와 하노? 뒤에 뭐라물어보면 우짤라고' 한다.
'치~ 물어보면, 나 중국말 몰라, 한국말로 하자 카면되지 뭐가 걱정이고' 하며 짐 찿으러 가는데 웬지 걱정이 된다. 종이에 이름 써가지고 마중나온다고 하긴 했는데.. 혹시 엊갈릴까봐 ' 로밍' 이란것도 해가지고 오긴했는데 , 와 안 보이노.마중나온 사람이... 한참 두리번거리는데 끄트머리쯤에 남편 이름이 보인다.
' 니하오' 니하오는 무지 잘 나온다.
따라 오라는 손짓을따라 공항밖으로 나가니 날씨가 무척 맵게 춥다.
빨간 자가용뒤 트렁크에 짐을실고 뒷자석엔 안으려니 차가 너무 비좁다.
내가 뚱뚱한 탓이려니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택시타도 이정도는 아닌데싶다. 뭐라고 기사양반 쏼라대지만 먼소린지 알수 가 없다.
'중국말 모른단 말여, 한국말로 하시쇼 좋은말로 할때 ~ ' 기사 양반 답답 한지 핸드폰으로 목사님을 바꿔준다.' 한 세시간쯤 걸린다는 이야기 였는갑다.
우리는 우리목사님 전도사님 그리고 혜진이와 함께, 택시에 나눠타고 한 두시간쯤 어딘지도 모르는곳으로 갔다 여전히 빙판길 질주는 계속되고, 뿐만 아니라 길이 끊어지자 밭두렁으로도 택시가 간다. 완전히 묘기대행진이다.
어둑해지면서 도착한곳은 반석시에 있는 '사랑의 교회'였다.
말이 교회이지, 다 허물어져가는 집을 개조해서 교회로 만든곳이었다.
우리를 인도해온 박장로님은 복음 신학교 1회졸업생이신데, 목사보다는 장로님으로 계시기를 희망하셨다고 한다. 공산당원이면서 중국군 장교였는데, 예수를 믿게되면서 당원을 포기하셨다고 한다. 당원을 포기한다는 것 은 많은 혜택을 포기 하는것이
고 삶의 질도 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분이 모든기득권을 포기 하면서 까지 선택한 예수님 , 왠지 착찹하다. 그분의 표정에서 느끼는 허허로움, 그러나 나머지 여생을 위한 선택에 그분은 자유하신것같았다.
사랑의 교회아랫목을 따듯했다. 교회지키시는분이 초상집에 가셨다며 앞집 할머니께서 대신 교회를 지키시고 겨신다. '물 드시라요' 따뜻한 물이 이곳의 대접이다.
아마 추운지방이라 배려 해서 인 듯 하다.
' 아니, 물만 드리면 어떡해요. 사탕이라도 타시구랴'하며 장로님께서 핀잔이다.
설탕물, 하하, 내가 아주 어렸을적에, 추운 겨울날 학교 갔다오면, 따뜻한 설탕물을 타주시곤했다. 꿀물은 냄새를 싫어 해서 사탕물을 먹었댔다.
부엌도 들여다보니, 어릴때 살던집 부엌처럼 일자 부엌이다. 큰 가마솥엔 물을 끓이고있었고 개숫대야(설거지통)에선 김이 무럭 무럭 피어 오른다. 부엌안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차있다. 연료로 옥수수대와 짚을 태운단다. 온 도시가 매캐한다.
장로님께서 나갔다 오시더니, 오늘은 예배를 못드리겠다며 민망해 하신다. 초상집에 온 교인이 다 가셔서 내일 새벽다섯시나 되어야 돌아들 오신단다.
우리는 아랫목이 좋으니 이곳에서 자겠다고 했지만 손님 대접을 그리할수 없으시다며 굳이 나가시잔다. 택시를타고 식당에가서 대접을 너무 융숭하게 받고보니 교회의초라한모습이 상기되어 미안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숙소는 기대보다 따뜻했다. 전도사님과 혜진이는 전날 너무 고생을 해서인지 살 것 같다고 했다. 혜진이와 한방을 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발맛사지도 받았다 발맛사지는 피로를 푸느데 아주도움이 많이 되었다 한국돈으로 삼천 삽십원
중국돈으로 이십원, 너무 싸서 미안했다.
다음날 사랑의 교회에서 식사를 하고 간단 하게 예배를 드렸다. 한 열 대여섯명쯤 모였는데, 그중에는 탈북자도 한사람이 있었다. 눈치를 보며 기웃거리는 모습이
무척 가슴을 짠하게 했다. 장집사에게 그분에게 돈을 좀 드리라고 했다. 혹시 어려움이 생겼을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좀 넉넉하게 드리라고 했는데 그분이 안받으셔서 드리지를 못했다.
손을잡고 잘가라며 인사하는 그분들을 뒤로 하고 떠나오는길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느낌, 열악한 환경에서도 해맑은 눈동자로 마주보며 선한 웃음을 짓는 우리의 어머니들, 물론 열악하다는건 우리의 기준일지도 모른다. 그 분들은 그게 삶, 그 자체니까.. 그 곳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을모며, 참 부끄러운 생각이들었다. 너무 편하게 예수믿는다는 생각과 너무 게을렀었다는생각이 들었다.
다시, 신광교회로.. 도착하자마자, 늦었다며 식당으로 데려간다.
샤브샤브집이었다. 먹는건 좀 나았다. 중국음식은 그 향내나는 향채(고수라는 미나리과의채소)란것때문에, 아주 먹기힘들다. 어렸을때 김장김치에 이 향채를 넣는바람에 김치를 안 먹었었다. 아마 다른 분들도 그러신 것 같다.
한 스무명 남짓먹었는데도 음식값이 사백원정도, 우리돈으로 육만원가량이다.
무지 싸다.
목사님들은 또 회의 하신다.
우리 보곤 시내구경하고 오라신다.
'말도 못하는데 우짜란 말이여?'
신광교회 장목사님 딸내미가 초등학생인데 아주 똘똘하다. 이름이 지혜란다.지혜와함께시내구경을 나갔다.
백화점에갔는데, 입구는 두꺼운 비닐로 된 버티컬브라인더, 그다음엔 누비이불이 두장씩 겹쳐서 두군데, 모두 매서운 바람을 막기위한 조치 인것같다.
봐도 별것없고 중국차를 사러갔다. 시장이니까 엄청싸다.지혜의 통역으로 흥정하는 재미가 아주좋다, 차 파는 자매들을 아주 미인이라고 추켜주었더니 12원짜리 국화차를 10원준다. 통역한 지혜를 위해 햄버거집에도 갔다. 맛도 없고 값만 비싸다.
'길가에 장미꽃감사, 장미꽃 가시감사' 응답하신기도 감사. 거절하신것감사' 이 귀절이 좋아서 이곡을 배웠었는데, 이런 기회가 있을줄이야...
주책바가지 나이롱집사가 또 울 뻔했다.
우리목사님은 나는 기도 안 시키신다. 시작부터 울어제끼니까. 안 시키시는게 낮다.
눈물이 나는걸 어쩔꺼냐구, 안 울려고 해도나는걸 어떡하냐구요.
예배는 참 감동적이었다(진짜집사는 이럴때 은혜스러웠다고 해야되는데)
어디서 그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지 교실 세개쯤 되는 예배당이 꽉찿다.
찬양을 인도하는 전도사님 음성이 아이들말로 짱이다.
두손을들고,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이런 곳에 계실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배를마치고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할머니를 만났다. 우리부모님 교향도 사리원이라했더니 끌어안고 놓칠 않으신다. 마치 혈육을 만난듯이 하신다.
이산가족의 절절한 마음도 잠시 느껴지며, 눈시울이 드거워진다.
단동으로 출발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우리목사님과.나목사님은 소식도 없다. '사고가났나? 이렇게 안올리가 없는디? 하시며 장목사님께서 이곳저곳으로 전화하신다.
열시가되어서야 두분 목사님께서 돌아오시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집사님 이 버스가 그 버스예요' 전도사님이 첫날 히터가 안들어와 고생했다던 그버스란다. 히터는 고쳤다는데 다른건 잘 모르겠단다.
조마조마 하긴하지만 주님을 믿고 출발!!!
얼마를 갔나? 잠결에 차가 섰다. 부산스러운 소동이 일더니, 뭐가 얼어서 차가 섯다네, 조금있더니 차가 간다.' 아, 인젠 되나보다. 또 자자'
또 잠결에 부산스러움 또섯다네, 가다 서다를 몇번이나 반복하고 나니 어스름 해가떳는데,얼마 못 왔다는것이다. 이,황망함이란, 어딘지도 모르는 도시에서 정비공장을 찿았다. 차는 기사에게 맞겨두고, 우리는 식당을 찿았다. 길가에 군고구마장수가있었다. 군고구마가 한보따리에 칠원이란다. 우리도 1000원남짓한돈에 고구마는 오천원어치도 넘겠다. 길바닥에서 군고구마 먹는 맛이란 , 그것도 무척.추운 중국산간어딘지도모르는 길, 밤새 추위에 떨다가먹는 맛을 누가 알까? 경험하지 않은 삶은 알수 가 없을껍니다.
원래 새벽5시쯤 도착예정이였는데 오후두시에 도착한 우리는 일단 짐을 풀고, 압록강변으로 갔습니다.
역사속의 사진으로만 보던 압록강철교, 가깝게보이는 압록강너머 신의주.
갑자기 말문이 막혔습니다. 얼음덩어리가 강가로떠다니는 압록강은 찬바람을 보내며 무심히흐르고있지만, 사치스런 센티한 감정이 아니라, 묵직한 답답함으로 와 닫는건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유롭지 못함때문이 아니었을까?
유람선을타고 북한땅가까이 가보지만 유람선 즐기는 마음은 들지않았고, 나도 알수 없는 답답한 마음만 가득인데, 중국아가씨는 북한 우표와 돈을 팔기에 여념이 없다.
친정언니에게 고향냄새라도 맡으라고 하나 사다 줘야겠다.
이른 아침을 먹은탓에 출출하다.
점심은 우리가 당첨되어서 우리가 내야한다. 모이는데 지각했기때문이다.우리의 지각은 이미 유명하다. 우리가 지각 안할때가 되면 그땐 성공할꺼라고내가 남편에게 말한적이 있다.
나목사님께서는 당첨시킨게 미안하신지 간단하게 햄버거나 먹자고 하시지만, 맛도 없고 비싼 햄버거 먹을일이 뭐있냐고 평양 송도원식당가서 겨울 냉면이나 하그릇씩하자고 권했더니 모두 좋다고 하셨다.
'오매, 진짜 북한처녀들이네', 깁일성인지, 김정일인지 뺏지달고 우리를 자리도 안내한다.
평양메밀도토리냄면, 평양온반, 빈대떡, 해물파전,을 시켰다. 김치맛은 예술이다.느끼한 중국음식먹다가 오랫만에 개운한 우리음식을 먹으니 모두 살것같은 모양이다.
김치는 가자미식혜맛이 조금 나는게 가자미를 넣은 모양이다. 김치를 무려 네접시나 시켰는데 김치값도 따로계산이다.
배부르게먹고, 김광복전도사의'샘물교회'설립예배 드리러광복전도사의집으로 향했다. 젊은 내외의 모습이 밝아보였다. 또 사모의 당참과유머감각, 그리고 열정이 전도사님에게 많은 힘이 될것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한족을 주로 전도한다는 다른 전도사님 한분도 복음 신학교 1기졸업생이란다.그분의 인상도 발고선했고 열정도 대단한것같았다, 그 열정은 순수 한 것 같았다.
가지고 같던 내성경을 반석교회에드렸다. 성경책도 귀한것같았다 진작 알았더라면 몇권사가지고 오는건데... 괜시리 투덜대다가 준비 미흡이 못내 아쉬웠다.
정성껏헌금을 하고 예배를 마쳤다 간단한 다과를 하고(상도 없이 방바닥에다 펼쳐놓았지만 누구하나 그것에 신경쓰는 사람이없었다) 아쉬운 작별을하고 숙소로 왔다.
마지막 밤,
새벽4시50분까지로비로 모이란다. 남편은 발맛사지가 못내 아쉬운가보다. 어떻게 좀 해보란다.
내 참, 위풍당당을 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니 하우' 우라질 , 니하우는 잘나오는데, 딴말은 아는게 있어야지. 한문으로 '족' 을 쓰고 '맛사지 했더니 알아듣는다.
'얼마예요'는 위풍당당보고 하고 '싸게해 주세요'도했다.
그런데 거기는 관광지라서 비쌌다. 남편소원은 풀어주고 나는 돈아까워서 그냥잤다
조마조마한버스를 타고 심양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고속버스를 이용해야하나?를 이야기하시더니, '주님 믿습니다.하고 조마조마를 이용하시기로 결정하셨단다.
우리는 아무 걱정도 없었다 '응답하신기도 감사, 거절하신것도 감사'인데 뭐가 문제겟는가.다행이 조마조마는 무사히 심양공항에 도착햇고 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