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을 찾아서
구순에 90명
제자들이 축하연주회 주최 “나는 복 받은 사람”
서울대총동창신문 제487호(2018. 10.15)
정진우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의대 나와 피아니스트로 성공 / 대한민국 현대음악사 산증인
6·25 전쟁 군의관으로 참전 / 동상 입어 양 발가락 절단
딸 정소희 씨는 아버지가 잘 때 머리맡에 늘 지갑과 열쇠를 놓고 주무신다고 했다.
“6·25 전쟁의 트라우마 같아요. 언제든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듯해요.”
아버지 정진우(의학46-49)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는 상이군인이다. 8사단 10연대 의무장교로 참전해 양쪽 발가락을 모두 잃었다.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거대 피아니스트 사단을 일궈냈다. 지난 9월 13일 예술의 전당에서 그의 구순을 축하하는 제자 90명의 축하 연주회가 열렸다. 주최자가 ‘정진우 동문회(회장 김용배)’다. 지난 9월 27일 서울 구의동 음연 집무실에서 만난 정 동문은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정 동문은 답변이 짧았다. 자랑할 게 많을 것 같은데 담담했다. 배석한 딸이 보충 설명을 했다. 인상적인 것은 “정말 발가락을 잘랐느냐? 기분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신발을 벗어 보여준 장면이다.
돌아와 그의 딸이 건네준 정 동문의 자서전을 펼쳤다. ‘한국 피아노 계의 영원한 스승, 피아니스트 정진우’란 표제에 커다란 프로필 사진을 보고 그저 그런 자서전이겠거니 했다. 자서전이 이렇게 흥미로울 수 있을까.
1940~1954년 그의 청장년 시절 이야기는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겪은 전쟁의 참혹상을 꼼꼼한 묘사와 유려한 필체로 그려냈다. 아래 글은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에 자서전 내용을 더한 것임을 밝힌다.
김 석, 김용배, 강충모, 윤철희, 김 영 등 90명의 제자들이
지난 9월 13일 그의 구순을 축하하는 음악회를 열었다.
월간 피아노음악 제공
-다른 학과에서는 교수 명칭의 동문회를 찾기 쉽지 않은데 음대에서는 간혹 있어요.
“음악의 특성 때문이겠지요. 1대1 레슨이 이뤄지고 졸업 후에도 연주회 등으로 끊임없이 교류하니까요. 타 학과보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끈끈하죠.”
-90명의 제자가 90세 생일을 축하하는 일은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운 좋게도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어요. 훌륭한 연주자, 교수가 됐지요. 고마운 일이죠.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돌봐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 기회 될 때마다 제자들을 봤어요.” 정 동문의 비서 노릇을 하는 큰딸 정소희 씨는 “아버지가 제자들 연주회 소식이 있으면 대전, 부산 어디든 꼭 간다”고 덧붙였다.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의족을 하고 지팡이가 있으니까요. 운전은 딸이 해주고요.”
-발가락은 왜 절단하게 되셨나요.
“6·25 전쟁 때 8사단 10연대 1대대 의무장교로 입대했어요. 그 해 겨울 중공군이 남하하는 가운데 우리 부대가 전몰위기에 닥쳤습니다. 사방에서 중공군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달려드는데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지요. 전투화 벗겨진 지도 모르고 도망쳤어요. 그 부대에서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보름 이상을 굶주림, 추위와 싸우다 양쪽 발가락이 동상으로 시커멓게 썩어 버렸죠. 사경을 헤매다 한 농부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대구 군 병원에서 절단 수술을 받게 됐어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운명이구나 생각했죠. 의대 출신이니까 그럴 수 있다, 담담했어요. 대학시절 피아노를 가르쳐주시던 이애내 선생님 남편이 안병소 바이올리니스트였어요. 이 분이 소아마비로 한 쪽 발을 절었어요. 병원에 자주 오셔서 ‘너에게는 음악이 있지 않느냐. 운동선수도 아니고.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음악이 안 돼서 비관은 해 봤지만 다리 때문에 비관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큰 위로가 됐지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우셨는데 왜 의대 진학을 하게 됐나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어요. 음악은 남자가 할 일이 못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지요. 평양제이중학교 졸업 후 1945년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해방 후 러시아 군인들이 평양을 장악한 후 그들의 무자비한 횡포에 시달리다 가족 모두가 남한 땅으로 넘어오게 됐지요. 서울에서 경성음악전문학교 입학을 내심 꿈꿨습니다만 경성의전에 강제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오기로 더 음악에 매진했던 것 같아요. 피아노가 귀한 시절이라 교회에서, 충무로 피아노 판매점에서 한을 풀곤 했죠. 나중에는 서울합창단 반주자로 반 직업 음악가 활동을 시작했죠.”
-당시 서울대는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안) 파동으로 어수선할 때죠.
“학생들의 정치적 활동이 대단했어요. 서울의 관립대학들을 서울대학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통합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반정부적 학생들이 정부가 학교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길들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고 비난했지요. 반대 데모가 2년 이상 계속됐어요. 또 하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우익과 좌익이 뚜렷했어요. 우익은 서북청년회가 주축이 됐고 좌익은 조선공산당 청년회가 이끌었죠. 갖가지 시위가 끊이질 않던 시절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정치적인 사건들이 저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어요.”
-친하게 지낸 동기들은 누구셨죠.
“임진우, 김종은, 오현명과 친했어요. 다들 먼저 저 세상에 갔지요. 임진우와 김종은은 의대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음악을 그리워했던 나와 아주 비슷한 형편의 친구들이었어요. 임진우는 평양의전 동기기도 했고요. 오현명은 서울 음대 1기생으로 대단한 성악실력을 자랑했지요. 임진우, 김종은 두 친구도 한때 성악가를 꿈꿨습니다만 의사의 길을 걸어갔죠.”
그의 자서전에는 의학, 치의학도로 음악 또는 예술가의 길을 걸어간 동문들을 소개하고 있다. 의대 출신의 성악가 이인선, 치대 출신의 성악가 김노현, 길옥윤으로 잘 알려진 치대 출신의 최치정, 치대 출신 신영균 영화배우, 김기영 영화감독 등.
-군의관으로 전역도 하셨는데 어떻게 서울음대 교수로 오실 수 있었나요.
“군 전역 후 부산 피난지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어요. 서울의대 출신, 양 발가락을 절단한 상이군인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언론에서 크게 주목했습니다. 당시 음악회는 성악가,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가 한 팀을 이루는 게 일반적이었죠. 독주회가 뭡니까 질문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버지도 더 이상 제 인생에 대해 뭐라 하지 못했어요. 충격이 컸으니까. 음악 하려면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아 비엔나로 유학을 갔습니다. 이후 현재명 선생님의 부탁으로 서울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습니다.”
-음대 교수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음대 교무과장을 맡았을 때 관악캠퍼스 이전이라는 큰 일이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급하게 진행돼 준비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결국 협소한 장소에 설비도 불안전한 공간으로 들어가게 됐지요. 제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 생각하면 참 마음이 불편합니다.”
-가장 나이 많은 제자가 몇 살입니까.
“김 석 교수가 83세로 가장 많을 거예요. 그 제자가 초대 동문회장을 맡아서 잘 챙겨줬어요.”
-제자들이 지금까지 따르는 것 보면 무서운 선생님은 아니셨나 봐요.
“훈육하는 선생님은 아니었죠. 물론 젊은 시절엔 말 수가 적어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있었죠. 아이들 성향에 따라 가르치려고 했어요. 음악을 느끼고 연주하라고 했지요. 그래서 늘 노래를 먼저 들려줬어요. 기계적으로 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요.
“휴머니즘입니다. 음악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또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중요합니다. 청중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휴머니즘이 있어야 해요. 좋은 생각 하고 많이 베풀어야죠. 우리는 들으면 다 알아요. 애는 좀 좋긴 한데 포옹하는 맛이 없구나. 소리에 성격이 나타나요.”
그는 “한국과 폴란드에서 좋은 음악인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역경을 이겨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6·25 때 경계근무 태만으로 총살 당하는 소대장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죄책감, 그런 게 제 내면에 흐르면서 음악에 투영되고 있지요.”
-음악 교육 외에 피아노 잡지 사업에도 관심을 쏟으셨어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세계적인 음악 흐름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음악도 국제적인 흐름을 알고 있는 게 중요합니다. 또 구하기 힘든 악보를 제공하고 싶었고요. 우리 세대는 일본 잡지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창간 당시만 해도 음악도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잡지 산업이 어려운데.
“사명감을 갖고 하는 거지요. 경영 어렵다고 폐간할 일은 아니거든요.”
-요즘 피아노 배우는 인구는 늘고 있나요.
“학생들은 많이 줄었지요. 과거처럼 무턱대고 학원에 보내지 않아요. 2, 3년 가르치는 정도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지요. 반면 중국과 베트남 등 신흥국은 한국의 80년대처럼 피아노 교육에 열정을 쏟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발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하시지요.
“그럼요. 제가 그래도 의사 아닙니까. 규칙적으로 잘 자고 잘 먹습니다. 무엇보다 낙
천적인 성격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딸 정소희 씨는 “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시면 주무실 때까지 절대 눕지를 않는다. 피곤하셔도 앉아서 꾸벅꾸벅 하실 뿐 절대 눕지 않으신다”고 했다. “그게 생활의 리듬인데, 하루의 리듬을 잘 타야 합니다. 저는 꿈도 많이 안 꿉니다.”
-음식은요.
“특별히 가리지는 않지만 아침은 어렸을 때부터 빵을 먹었어요. 빵이 저염식이라 좋은 것 같아요. 아침 빵을 먹으면 점심이 참 맛있습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으세요.
“제가 인복이 있어서 동문회도 매년 열리고. 복을 타고 났어요. 이렇게 와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김남주 기자
정진우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정 동문은 1928년 1월 8일 평양 출생.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강권으로 모교 의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군의관으로 6·25 동란에 참전해 다리 부상을 입고 1952년 제대했다. 제대 직후 부산 피난지의 이화여대 강당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다. 이후 서울대·이화여대·서울예고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주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콘서바토리움으로 유학을 거쳐 현재명 교수의 뜻에 따라 1959년 모교 기악과 교수로 부임해 1993년 2월 정년퇴임 했다.
정 동문은 국내에서의 왕성한 활동과 더불어 러시아, 스페인, 일본, 대만 등 외국과 국내의 유수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한국 음악계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에도 공헌했다. 한국쇼팽협회, 한국베토벤협회를 창립했으며 지난 1990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2회 ‘쇼팽국제콩쿨’ 및 ‘쇼팽협회 국제연맹(IFCS)’ 회의에 초청받아 그곳에서 ‘한국쇼팽협회’를 IFCS에 정식으로 가입시켰다. 또 정 동문은 올해로 창간 36주년을 맞는 월간 ‘피아노음악’을 발행해 우리 음악계의 발전에 일익을 담담했다.
1973년 가톨릭대학에서 ‘일정한 음악이 정신과 환자에게 미치는 정서반응’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한국 피아노 음악계의 거목인 그는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오며 1991년 대만민국 문화훈장상, 2014년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90세의 나이에도 매일 구의동 스튜디오에 나가 악보와 음악 서적을 보며, 피아노를 치며,
또 제자들과 만나며 음악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