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눈만으로도 체조를 할 수 있을까.
그러고도 아시아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을 김동화(26·울산중구청)가 해냈다.
최악의 조건에서 불굴의 의지와 끝없는 노력으로
일궈낸 '인간승리'다.
지난 10월 4일,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벌어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기계체조 남자 링 종목 결승에서
김동화는 십자버티기와 몸펴 수평버티기 등의 고난도 기술을
흔들림 없이 구사하며 9.8점을 받아
중국의 후앙주와 나란히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김동화는 전날 28년 만에 따낸
아시아경기 개인종합 은메달에 이어 이번 대회에서
금 1, 은 1개를 목에 걸었다.
김동화는 선천적 약시로 오른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콘택트렌즈를 끼어도 시력이 0.1 정도에 불과하다.
균형감각이 필수인 체조선수에게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왜냐하면, 한쪽 눈만으로는 번개 같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거리 및 각도 측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공중동작을 마치고 착지할 때가 더욱 어렵고
균형을 잡기 어려워 감점요인이 되며,
부상 위험까지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핸디캡을 끊임없는 훈련으로 극복했다.
자신의 착지 모습을 반복해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서 극복한 것이다.
한윤수 대표팀 코치는
김선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루 7, 8시간을 착지훈련으로 보냈다.
심리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고 털어놨다.
또한, 김선수를 괴롭힌 것은 눈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11월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링 연기 도중 오른쪽 이두박근이 파열되는 바람에
6시간이 넘게 걸리는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체조선수에게 근육파열은 사형선고와 같은 일이었다.
이 때 김선수는 체조계를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 사귀어 온 여자친구의
"평생을 두고 후회 안할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해 금메달을 따달라"는 말과
'당신은 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에
김선수는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각오를 다지고
재활훈련과 물리치료를 받아 근육보조기구와 씨름하여
결국 올해 4월 국가대표선수로 플로어에 다시 설 수 있었다.
아울러 김선수를 어렵게 하는 것은
이외에도 오른팔 통증이었다.
이 통증은 아직도 그를 괴롭혀
대회 개막 직전까지 약을 먹어야 했단다.
김동화선수는 초등학교 4학년때 부모를 속이고
체조부가 있는 다른 학교에서 운동을 하다
부친에게 혼이 나기도 했고,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물리치고
체조에 입문을 했다.
그렇지만 세계 정상을 바라보고 시작한 체조인생이
그리 평탄하지 만은 않았다.
마산중-경남체고를 거치는 동안
김동화는 뛰어난 재능을 자랑하며
한국 체조의 기대주로 떠올랐지만
고교 2학년때 오른쪽 손목 골절을 방치해 뒀다가 상태가
악화돼 골반뼈를 이식해 손목에 붙이는 대수술을 받았었다.
이 바람에 그는 늘 이주형 여홍철 등 쟁쟁한 선배들에 가려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런 김선수는 지난 96년 애틀랜타올림픽 출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국가대표생활을 시작했으나,
2차례 올림픽에 나선 것을 비롯해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했지만
98년 방콕아시안게임 마루운동에서 준우승해
은메달을 딴 것 외에는
특별히 이렇다할 개인 성적을 내지 못한 채
단체전에 기여하는 선수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 김선수가 90년대의 간판스타들이
시드니올림픽이후 은퇴하면서
세대교체를 이룬 남자대표팀에서
지난해부터 대들보역할을 맡게 된 가운데
뒤늦게 기량향상을 거듭하더니
지난해 8월 베이징유니버시아드 링에서
은메달을 따는 성과를 거뒀다.
이어진 11월 세계선수권에서도 입상이 기대됐던 김동화는
단체전에서 입은 부상때문에
링과 철봉 결승에 오르고도 출전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지만
시련을 딛고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개인종합 은메달이라는 의외의 성과와 함께
자신의 첫 국제대회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위기 때마다 오똑이처럼 일어난 김동화는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부모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친구인 북한의 김현일과 함께 우승에 더욱 기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오늘날의 김동화가 있기까지는 감독과 코치의 힘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욱 큰 힘은 불어넣어준 사람은
김선수의 아버지인 김용근씨(63)였다고 한다.
김씨의 특별한 자식사랑은 체조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김씨는 초등학교 4학년때 자신을 속이고
다른 학교 체조부를 기웃거리던 아들을호되게
야단치기도 했지만,
체조를 향한 아들의 집념을 안 뒤부터는
그의 둘도 없는 후원자가 됐다.
과거 택시운전을 했던 김씨는
김동화의 중,고교시절 영업을 뒤로 팽개친 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아들의 모든 경기를 지켜봤고
훈련장에도 거의 개근하다시피 해가며 지원을 했다.
마산중 2학년때 그 나이 선수에게는
위험한 기술을 익혔던 김동화가 연습도중
고난도의 기술을 구사하다 철봉에 부딪혀
눈썹 부위가 찢어졌을때
그를 병원으로 실고간 것도 아버지였고
시합도중 철봉에 머리를 부딪힌 충격으로
그의 혀가 입안으로 말려 들어갔을때 혀를 끄집어 낸 것도
김선수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들이 경기때마다 숱하게 부상을 당했던 까닭에
김씨는 시합에 구경갈때마다 의료보험증을 챙기는 것이
일상이 될 정도였다.
또 김동화가 경남체고에 재학중일 당시,
김씨는 아들이 새벽 조깅을 할때
행여나 차에 치여 다치지 않을까 싶어
자신의 차에 서치라이트를 켠 채 뒤를 따라가며
지켜주는 지극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김동화가 고교 2학년때
손목골절로 골반뼈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은데 이어
지난해 11월 이두박근이 파열돼 대수술을 받아
선수생활을 포기해야할 상황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선 데는
아버지의 사랑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스물여섯살이면 체조선수로는 거의 '끝물'이지만
그는 2년 뒤 아테네올림픽 정상 도전을 꿈꾸고 있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김동화에게
이번 대회 금메달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