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가톨릭대 개교 1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이 작품은 회화나 동상이 아닌 부조로 만들어졌다. 세라믹을 소재로 하고 있어 회화나 동상과는 또 다른 느낌을 전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김대건 신부는 참수형을 당한 자신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많은 사제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김 신부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다. 작품을 제작한 조각가 조숙의(베티)씨는 김 신부의 편지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마지막 편지 중에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라”고 당부하는 글귀는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김 신부가 입고 있는 옷의 주름은 우리들이 걷고 있는 신앙의 발걸음에 함께하시는 살아계신 성령을, 뒤 벽의 형틀 이미지는 죽음을 상징한다. 사제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만나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부조작품은 또 색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특히 사제의 해를 보내는 한 해 동안 김대건 신부의 모습을 보면서 사제로서의 직분을 깊게 생각해 봐야 하겠다.
성 김대건 신부 얼굴 복원
가톨릭의대 가톨릭응용해부연구소(소장 한승호 교수)는 최근 대구가톨릭대 김일영(환경조각 전공) 교수와 성 김대건 신부 얼굴 재복원 작업을 마치고 종전보다 실물에 가까운 성인 얼굴(사진)을 완성했다. 기존 복원 작업은 2001년 서울 명동주교좌본당 주임 백남용 신부가 가톨릭응용해부연구소에 의뢰해 이뤄졌다. 이 때 가톨릭의대를 비롯한 7개 대학 해부학 관련 전문가와 미술가들이 참여해 성인 유해를 실측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성 김대건 신부 얼굴 복원은 첨단 해부학 기술을 토대로 일궈낸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됐다. 이번 재복원 작업은 가톨릭의대가 성 김대건 신부 흉상을 학교 기념물로 제작하기 위해 김일영 교수에게 기존 복원상을 축소 모형으로 제작해줄 것을 부탁하면서다. 김 교수는 복원상에서 드러난 얼굴의 전체적 비례 오류 등 조각적 관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축소 모형을 만드려면 재복원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가톨릭의대는 김 교수와 기초 실측 작업부터 다시 시작하며 복원에 나섰다.
재복원상은 기존의 두개골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는 한편 눈과 코 등 전체적 얼굴 비례를 수정했다. 또한 해부학 실측으로 표현할 수 없는 눈과 코, 귀 등은 한국인 표준으로 맞춰 제작했다. 김 교수에게 제작을 의뢰한 가톨릭의대 사무처장 윤성호 신부는 "가톨릭의대가 자랑하는 해부학 기술을 통해 우리나라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 얼굴을 실물에 가깝게 복원한 것 자체로도 큰 의미있는 일이다"며 "재복원된 얼굴상은 가톨릭의대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쓰일 것이다"고 말했다. 재복원된 성 김대건 신부 흉상은 가톨릭의대 성의회관 1층 로비에 전시돼 있다. 김 교수는 13일까지 열리는 '가톨릭대 초청 성의회관 개관기념 서울가톨릭미술가회전'에 재복원된 흉상을 출품했다.
교가 /진리관 /진리관 /진리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서 말씀을 라틴어로 적은 것
대건관과 성당
대건관과 성당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성신 교정) 성당
1960년 5월 준공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가 제대에 모셔져 있고, 또한 1984년 5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문하시어 미사를 봉헌하셨던 곳이다.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57년에 가경자, 1925년에 복자가 됐고 1984년 한국 교회 창설 2백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 되셨다.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의 효시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이 처음 시도된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을 비롯한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 보내었다. 그중 김대건과 최양업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모두 순교했던 것이다. 그 후 1855년 충청도 제천 배론에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 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다. 1882년에는 신학생을 선발해 페낭의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 바 있고, 드디어 1885년 경기도 여주 부엉골(또는 범골)에서 현 가톨릭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성심신학교가 개교함으로써 최초로 국내 신학교의 설립을 보게 된다.
이듬해 학교는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다.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 덕원 신학교 등이 연이어 설립되지만 1942년 예수성심신학교는 일제에 의해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1945년 경성 천주공교신학교로 개칭, 다시 설립되고 그 후 성신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1995년 3월 140여 년의 찬란한 역사를 지닌 가톨릭대학교의 신학대학과 8개의 부속병원을 보유하는 한국 굴지의 의과대학, 그리고 40년에 가까운 여성고등교육 역사를 지닌 성심여자대학교가 지금까지 산재해 있던 모든 힘을 하나로 모아 종합대학교인 가톨릭대학교로 통합 출범하게 되었다.
성당 /성당 /김대건 신부 상 /김대건 신부 상
성당내부, /제대 /오른쪽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그 위에 감실이 놓여 있다.성당내부 성당내부 성당내부 감실
감실과 김대건 신부 유해 김대건 신부 유해 김대건 신부 유해
성당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성모동산 성모동산 성모동산 성모동산
사목관과 /성당,/사목관은 /부제와 새사제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사목관 성당내부 /사목관 /성당내부 /사목관 /성당 제대 /사목관
성당 /제대 /사목관 /성당 /제대 /십자고상 사목관 /성당 /제대
십자고상 /사목관 /성당 /감실 /사목관 /성당 감실 /사목관
성당 /독서대 /사목관 /성당 /성모상 /도서관 /주교관 /양업관과 /지혜관
양업관은 신학생들이 생활하는 곳이고, 지혜관(돌건물)은 옛 소신학교 교사 및 기숙사의 일부로 현재 은퇴사제 숙소로 사용중이다
양업관 앞마당에 세워진 소신학교 기념물
소신학교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중고등학생들을 위해 설립되었으나 1983년에 폐교되었다. 현재는 중고등학생 성소자를 위해서 예비신학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인 사제 양성은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1835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베드로) 신부는 이듬해 초부터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인재를 탐문, 신학생으로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김대건(안드레아)을 선발,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1837년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 역시 정하상(바오로)·이문우(요한) 등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직접 신학교육을 시켰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중국 장춘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함께 받고, 중국 상해에서 1845년 8월17일과 1849년 4월15일에 각각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도 채 못돼 순교했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 말 귀국, 1861년 6월15일 선종할 때까지 10년 6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조선교회는 박해 와중에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1855년 충북 제천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들을 교육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학교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교회는 1882년부터 말레이반도 페낭 신학교로 신학생을 선발해 유학을 보내 사제 양성에 힘썼다.
한국인 세번째 사제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지 50년 만에 탄생했다. 그 첫 결실이 1896년 4월26일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정규하(아우구스티노)·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사제품을 받았지만 나이 순에 따라 강도영(1863~1928) 신부가 세번째, 정규하(1863~1943) 신부가 네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번째 사제로 각각 기록된다. 사제교육을 위한 이들의 여정은 험난했다. 서울을 출발, 인천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끼 홍콩, 또다시 싱가포르를 지나서야 최종 목적지인 말레이 반도 페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페낭까지 무려 50여일이 걸린 유학출발 길이었다.
페낭 유학 생활은 강성삼이 1882년에, 정규하가 1883년 그리고 강도영은 제일 늦은 1883년에 시작했다. 이들을 비롯한 페낭의 조선 유학생들은 언어와 풍습, 기후와 음식이 다른 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다했다. 그러나 "조선의 명예를 위해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분투해" 2~3개월만에 라틴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이들 조선 유학생들이 다른 풍토와 기후 그리고 음식등의 차이로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국내에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신학생들을 귀국시켰다.블랑 주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 1885년 10월 7명의 신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블랑 주교는 이듬해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자마자 서울 인근에 신학교 부지를 물색, 1887년 3월에 용산신학교 터(현 성심여고 자리)를 매입,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귀국한 페낭 유학생들은 용산신학교에서 수학, 마침내 1896년 4월26일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세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 땅에서 거행된 최초의 사제서품식이었다. 한국인 세번째 사제인 강도영신부와 네번째 정규하 신부, 다섯번째 강성삼 신부는 각각 경기도 안성 미리내본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본당, 경남 밀양(당시 명례)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목활동을 하였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서 34년간 사목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묘소를 단장하고 그 옆에 기념 경당을 건립했으며,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쳐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정규하 신부는 본당 부임과 함께 '투전'에 빠져 있는 신자들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으며, 지금의 풍수원 성당을 건립하였다. 또 1920년부터 매년 6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성체거동' 행사를 거행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당'을 세워 한글과 한문, 수학, 역사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삼위학당은 오늘날 광동초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성삼 신부는 밀양 본당에서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와 500여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사목하던중 6년만에 37세로 요절했다. 페낭 신학생 시절 얻은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당시 사제가 되기위해 걸어야했던 험란한 길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페낭 유학길에 올랐던 21명의 신학생 가운데 7명이 병사한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한편 조선교회는 이후 용산예수성심신학교를 통해 1897년 여섯번째 이내수(아우구스티노)·일곱번 째 한기근(바오로)·여덟번째 김성학(알렉스) 신부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1900년까지 12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