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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맥주와 대포동-2
제6장. 남북경제협력과 문재인 정권
6-1. 지금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지만, 1960년대까지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 남북의 경제관계는 역전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 1960년대부터 군비확장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쿠바 위기(1962년 10~11월)와 통킹만 사건(1964년 8월)을 목격하고 경제 건설과 국방건설을 동시에 추진하는 ‘병진 노선’을 선택했다, 동시에 추진한다고 해도 목적은 국방력 강화에 있었다. 그 결과, 1961년부터 시작하여 1968년에 종료 예정이던 제1차 7개년 경제계획의 완수는 2년 늦어져 1970년으로 늦어졌다. 당시, 국가 예산에서 차지하는 국방비 지출은 30%였다.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북한의 긴장완화로 북한의 1972년 국가예산에 차지하는 국방비는 전년대비 14.1%가 감소한 17%까지 삭감되었고, 그 후도 같은 수준을 유지했다.
6-2. 1984년 9월8일은 북한 당국이 두 가지 큰 결단을 내린 날이다. 하나는 ‘합영법‘ 채택과 공포다. 이는 국내에 처음으로 외자를 도입하는 형태로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수해로 재해를 입은 한국 국민에게 구호물자를 보낼 것을 결정한 것이었다. 한국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분단사상 첫 북한 수해복구 지원이 실현되었다. 실제로 이 수해복구지원이 계기가 되어 같은 해 11월에는 분단 후 첫 남북경제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1988년 7월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10월7일에는 ‘대북교역 관련조치’가 발표된다. 이 조치는 남북교역을 전면적으로 해금하는 것으로 (주)대우는 이 조치에 따라 1988년 11월, 도자기 등 북한 물품반입 허가를 얻었다.
아래 도표는 남북 교역이 시작되고 년 간 교역액 추이를 나타낸 것인데, 1989년 18,724천 US$로 시작한 것이 5년 후 186,592천 US$로 8,7배로 성장한 것을 나타낸다. 이후로도 꾸준히 성장하여 1999년에는 17.8배나 증가한 333백만 US$를 나타낸다. 이 시기 북한은 건국 이래 전에 없는 경제적 곤경에 빠져있었지만, 남북 경제협력은 진전되고 있었다.
6-3. 김일성 주석은 1991년 10월4~13일 방중 했을 때,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 최고 지도자들로부터 세 가지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경제 개혁·개방, 남북관계 개선, 핵개발 의혹 해소다. 노태우 정권 시절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를 지낸 임동원씨가 방한한 중국의 한 북한 전문가한테서 들은 이야기라는데, 그 후의 전개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감일성 주석은 1991년 11월, 당과 정부의 경제 관료들 앞에서 역설하였다; ‘이미 세계에는 사회주의 시장이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 방법으로 무역을 해서는 안 되며 자본주의 시장에 진출하여 무역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기서 무역의 사회주의 방법이란 구상무역, 우호가격 적용, 루블 결재 등이다. 1991년 12월에는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남북기본합의서에는 ‘경제협력과 교류실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993년 상황이 돌변했다. 같은 해 2월에 IAEA가 핵무기 개발 의혹이 있는 시설의 특별 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이에 불복해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를 표명했다. 이렇게 제1차 핵 위기는 발발했다.(제7장에서 상세히 논의)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여 위기는 모면했지만, 직후 1994년 7월8일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조문 가려는 국민들을 저지하여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한편 북미 관계는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가 체결되었다.
6-4. 2000년 3월9일, 김대중 대통령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설한다. 베를린 선언 발표 후 3개월 후인 6월, 분단 후 첫 남북 정상 회담이 평양에서 실현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 사이의 정상회담에서는 ⑴ 화해와 통일, ⑵ 긴장 완화와 평화, ⑶ 남북의 교류 협력, ⑷ 이산가족 상봉 4가지 의제가 논의 되었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경제협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2005년에 10억 달러를 돌파하고, 2008년에 18억 달러에 달했다.
2007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갖었다. 정상회담을 통해서 발표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은 다음과 같은 6개 항목의 조치가 명기되었다. ⑴ 인프라 건설과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 ⑵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특별지구’ 설치, ⑶ 개성공업지구 건설 추진, ⑷ 공동이용을 목적으로 한 개성-신의주철도와 개성-평양고속도로의 개보수 추진, ⑸ 안변과 남포의 조선협력단지 건설과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각 분야에서 협력사업 수행, ⑹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
이대로 경제협력관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면 남북관계는 다른 구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북한의 선 핵 포기를 주장하는 보수파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어 그 계획은 중단되었다.
6-5. 1998년 10월 정주영씨는 방북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담판해 금강산관광사업허가를 얻었다. 정주영씨는 1998년 10월27일 소 5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 북한을 방문했다. 금강산 관광객은 관광이 시작된 1998년 11월부터 2000년까지 37만여 명이었고, 2004년에는 전년의 3.6배로 급증하였고, 그 후도 일정하게 증가하여 2008년 7월 중단하기까지 총 193만 명이 방문하였다. 개성관광객도 2005년 1484명, 2007년 7427명에서 2008년 10만 3122명으로 1년 만에 13.8배로 증가하였다.
관계가 악화된 계기는 2008년 7월11일, 조선인민군 병사가 금강산에서 한국인 여성관광객을 사살하는 사건이었다. 한국정부는 즉각 금강산관광사업을, 같은 해 11월28일에는 개성관광사업을 중단하였다. 징후는 있었다. 이해 2월에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명박 정권은 전임 정권의 햇볕정책과 달리 ‘비핵개방3000’으로 북한에게 가혹한 것이었다. 핵 포기를 전제로 하는 대화를 북한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또 다른 납북경제협력을 상징하는 개성공업단지사업은 단지가 조성된 것은 2002년 11월이지만 실제로 한국기업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다. 2005년에는 겨우 18개 업체였던 입주 기업이 2009년에는 117개 사로 증가하였다. 생산액도 2005년의 약 1400만 달러에서 2009년에는 2억3000만 달러까지 상승했다. 근무하는 노동자 수도 일정하게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연도 |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노동자수(명) | 6013 | 11160 | 22538 | 38931 | 42561 |
2009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과 회담하고 , 금강산 관광재개 등 5개항에 합의하였다.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즈음해 최고위층 조문단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관계수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6년 2월10일, 3일 전에 실시된 미사일 발사 시험에 항의하는 형태로 박근혜 정권이 개성공업단지의 조업을 중단하였다. 북한은 다음날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자산을 동결했다. 아울러 개성공단을 군사통제지역으로 지정하고 오늘에 이른다.
6-6. 비선 실세들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의 촛불시위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파면되고, 2017년 5월9일 대선에서 승리한 문재인은 제19대 대통령에 취임하므로 정권이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었다. 2017년 7월6일, 문재인 대통령도 베를린에서 베를린 구상을 발표하고, 동시에 ⑴ 이산가족 상봉 재개, ⑵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북한 참가), ⑶ 군사분계선에서 적대행위 상호 중단, ⑷ 남북 대화 재개의 4개 항목을 제안했다. 아울러 남북 정상회담 실현을 표명했다. ‘한반도에 새로운 경제지도를 그린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 베를린선언에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주된 내용은 4 가지다. ⑴ 3대 벨트 구축, ⑵ 민간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남북한이 하나의 시장협력방안 마련, ⑶ 경제협력 재개, ⑷ 남북의 접경지역 발전. 여기 ⑶에서는 개성공업단지 정상화와 금강산 관광 재개를, ⑷에서는 통일경제특구와 서해 평화협력지대 추진 여건 조성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이 ’10.4선언‘을 실천한다면, 신경제지도 구상 실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했던 한국정부는 5월 개성공업단지사업을 제외한 모든 남북교역·교류를 전면 중단하는 5.24조치를 단행하여, 남북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
보수정권의 뒤를 이은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2016년 2월10일, 박근혜 정권은 마지막에 남아있던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업단지사업의 조업을 중단하였다.
6-7. 2018년 4월27일 정상회담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이에 맺은 ‘판문점선언’에는 동해선 및 경의선 도로·철도를 연결, 현대화하여 활용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명기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두 사람만의 ‘도보다리 산책’ 때 ‘신경제 구상’이 담긴 'USB메모리‘를 직접 건넸다. 그러나 UN의 제재 하에서는 결코 쉽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3월 25~28일 첫 외유지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하는 베이징의 중관촌도 시찰하고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는 대규모 경제협력을 요청했다 한다.(아사히신문, 2018.4.26.) 그 후로도 김정은 위원장은 4월과 6월에 중국을 방문했다. 시진핑 주석과 만나 경제협력을 요청했다고 한다.
2018년 9월19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의 릉라도 경기장에서 15만 명의 평양시민 앞에서 7분 간 연설을 하였다. 분단 후 처음 있는 일이다. 9월18~20일,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 내외는 평양국제공항에서 마중하였고, 두 정상은 포옹하는 모습도 보였다. 평양공동선언에는 군사적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문제가 명기되고 부속문서로서 군사 분야의 ‘합의문’도 채택되었다. 경제협력과 이산가족의 재회, 문화·스포츠 교류도 ‘선언’에 포함되었다. 초점인 비핵화도 포함되었다.
구체적으로 북한이 ⑴ 관계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평북 동창리 미사일 관련 시설을 영구적으로 폐기하고, ⑵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 단, ⑵에 관해서는 ‘미국이 6.12북미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른 상응조치를 취하면’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북미공동선언에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에 의해 적대관계가 해소된다면 핵시설을 폐기한다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다. 폼페이오 미국무장관은 물론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를 환영했다.
다만, 북한은 지금 단계에서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 대상 리스트와 행정표 제출, 검증조치에 응하지 않고 있다. 29일 UN총회에서 연설한 북한의 리용호 외무상은 ‘북미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북미 간의 불신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되다. 북미 간의 불신을 없애는 데는 ’양국이 신뢰 구축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또 한반도의 비핵화도 신뢰 구축을 우선시킨 평화체제의 구축과 동사행동의 원칙에 기초하여 할 수 있는 것부터 단계적으로 실현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 일에 관해서 미국으로부터 상응조치의 회답을 얻지 못하였다‘라고 미국에 불만을 표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26일 UN총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가능한 빠른 시기에 비핵화를 마치고 경제발전에 집중하고 싶다는 희망을 분명히 밝혔다.---북한은 우리들의 바람과 요구에 보답하였다.---이번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새로운 선택과 노력에 보답할 차례다.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결단이 올바른 판단임을 확인해 주어야 한다.”
7장. 핵개발과 미사일
7-1.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처음으로 핵 실험을 했고, 북한은 2006년 10월 9일이었다. 두 나라 같이 핵무기 개발 목적이 미국 제국주의의 핵전쟁 위협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도 핵무기 선제 사용을 부정하고,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고 북미 간에 신뢰가 조성되어 미국의 위협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면 일개 핵무기도 필요 없어진다(2006년 10월, 외무성 대변인 성명)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2월24일,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도쿄에서 워싱턴의 요구에 회답으로 소련과 중국의 원폭 투하 표적 후보지 도시명 21곳이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 자신이 1950년 11월3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전쟁에서 원폭을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한 편, UN의 다수파 형성을 중시해 한국전쟁을 한정전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어(소련의 전쟁 개입) 결과적으로 원폭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고,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7-2. 북한이 핵개발을 결단했던 것은 냉전붕괴와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국교를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 유사시 소련과 중국은 자국을 지켜주지 않아, 결국 핵우산을 제공 받을 수 없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27일 북한과 중국 그리고 UN군 사령관이 정전협정을 조인했다(한국은 불참). 정전협정에는 외국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명기했다. 중국의 인민지원군은 1958년 10월에 북한에서 철군했으나, UN군의 주력부대인 미군은 아직도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이에 북한 정부는 계속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한결같이 요구해온 것은 ⑴ 한국전쟁 끝내기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 ⑵ 한미합동군사연습 중지, ⑶ 체제보장이었다. 결국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다.
7-3. 김정은 위원장은 핵개발과 경제건설을 병행해 추진하는 ‘신병진노선’을 발표했던 2013년 3월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국들을 쳐다보면서 강력한 자위적 국방력을 갖추지 못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압력과 회유에 못 이겨 이미 있던 전쟁억제력마저 포기하였다가 종당에는 침략의 희생물이 되고만 발칸반도와 중동지역 나라들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발칸반도는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대통령과 부인 에레나를, 중동지역 나라들은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과 리비아의 카다피 대령을 지칭한다.
“새로운 병진로선은 국방비를 늘리지 않고도 적은 비용으로 나라의 방위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 큰 힘을 돌릴 수 있게 합시다.”위의 김정은 위원장의 계속되는 말이고, 북한측의 설명이다. 핵무기 개발에 예산을 집중시킨다면 재래식 무기 등의 방위비를 삭감 가능하고 그 만큼을 경제건설에 돌릴 수 있다는 이론이다. 다만, 경제건설을 우선한다고 말하면서도 북한은 소형화한 핵무기를 탑재하기 위한 미사일 개발도 같이 진행해 왔다. 핵실험은 6차이지만, 미사일 실험은 17년도만으로도 16회 실시되었다. 발사비용이 경제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7-4. 북한은 2018년 4월에 중단을 표명하기까지 6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 김정일 정권기
1차, 2006년 10월9일, 첫 핵실험 성공
2차, 2009년 5월25일,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안전하게 실시
* 김정은 정권기
3차, 2013년 2월12일, 소형화 경량화한 원자폭탄 사용.
4차, 2016년 1월6일, 첫 수소탄 실험 성공
5차, 2016년 9월9일, 핵탄두 표준화 · 규격화
6차, 2017년 9월3일, ICBM탑재용 수고폭탄 실험 성공.
일본 방위대신은 3일 후 기자회견에서 당초 추정규모 70K.Ton에서 160K.Ton으로 대폭 상향 수정하였다. 이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10.7배, 나가사키의 7.6배란다. 북한 핵무기연구소는 북부 핵실험장에서 ICBM탑재용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7년 9월3일 오전, 김정은 위원장 외 5명의 상무위원이 참가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위원회에서는 ICBM탑재용수소탄 실험을 실시하는 ‘결정서’를 채택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명령서에 서명했다. 북한은 1993년에 NPT를 탈퇴할 때에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여 결정했다. 독재자가 독단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닌 내부의 민주주의적 토론을 거쳐 당 · 국가로서의 결정인 것을 어필할 목적이었다고 여겨진다.
2017년 11월, 북한은 미 본토에 도달할 거라고 생각되는 ICBM 실험에 성공했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공격해 오지 않도록 핵과 ICBM으로 무장한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핵보유국으로서 대등하게 미국과 교섭하고 싶다.’라는 게 그들의 논리이다.
7-5. 지금까지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할 기회는 적어도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제1차 핵 위기를 거쳐 제네바합의에 이를 때(1994), 두 번째는 제2차 핵 위기를 거쳐서 6자회담으로 ‘9.19합의에 이를 때(2005), 세 번째는 첫 핵실험에서 자신감을 높인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진행했을 때(2007~2008)다. 간단히 되돌아보자.
⑴ 1991년 12월, 한국과 북한은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1992년 1월에는 한미합동군사연습 중지가 발표되고, 뉴욕에서 첫 북미고위급회담이 열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북한은 IAEA와 핵사찰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1993년에 상황은 돌변한다. 재처리시설 존재를 문제시한 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반발해 1993년 3월12일 NPT 탈퇴를 선언한다. 제1차 핵 위기다. 한반도에 드리워진 위기는 1994년 6월 카터 전미 대통령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김 주석이 핵개발 동결을 약속하여 벗어났다. 같은 해 10월 제네바합의가 체결되었다; 북한의 NPT 잔류와 핵 개발 동결, 북미국교정상화 과정이 들어있다. 이의 이행을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설립되고, 북한의 흑연감속로 동결 해체를 조건으로 2003년까지 경수로 2기를 제공받고 1기가 완성될 때까지 연간 50만 톤 중유를 제공받는다. 미국과의 협상기간 중 미사일 발사도 동결한다.
나아가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방미해서 클린턴 미 대통령과 회담하고 북미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방북했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시한을 넘겨 방북을 단념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2011년 11월, 미국이 동시다발 테러를 당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일반교서연설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비난했다. 같은 해 10월 방북한 켈리 국무차관보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시설 건설 등을 인정했다고 국무성이 발표했다.(북한은 이를 부인) 이를 계기로 제2차 핵 위기가 발발했다. 2003년 12월부터 KEDO는 중유공급을 정지하고, 경수로 건설도 중단했다. 2006년 5월 이사회에서 경수로 프로젝트 종료를 정식 결정했다.
⑵. 2003년 8월, 제1차 6자회담이 시작된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 해결을 위해서 북한, 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국장급 담당자가 직접 협의를 하는 것이지만, 2005년 2월에 북한 외무성은 6자회담에 참가 무기한 중단을 표명하고,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밝히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그 후 중국과 한국의 고위급 관료가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한 결과, 같은 해 7월에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하였다. 9월19일에는 6자가 처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의 핵무기 폐기에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 재무성이 마카오의 BDA은행에 예치되어 있던 북한 자금을 동결한다. 명분은 북한이 이 자금이 위조지폐나 마약거래 등 범죄에 쓰인 자금이라는 것인데, 북한의 요청에도 미국은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6자회담공동선언문은 파기됨) (앞의 괄호 안은 이글 편집자가 삽입함). 북한은 이듬해 2006년 10월에 1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대치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핵실험 성공으로 자신감이 충만한 것을 배경으로, 북한은 핵개발을 동결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진행했다.
⑶. 2007~08년에는 원자로의 냉각탑 폭파 등 핵개발 동결의지를 과시하는 행동이 이어졌다. 중유와 식량원조가 재개되는 등 북미관계 정상화 조짐이 보였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평양 공연에서 북미 양국의 국가가 연주되고 성조기가 북한에서 처음으로 계양되었다. 미국은 2008년 10월, 북한의 테러지원국지정을 해제했다(2017년 11월 재지정). 이게 3번째 기회였다. 그러나 핵동결 검증절차의 문서화에서 합의를 얻지 못하고 2008년 12월에 6자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김정일 위원장이 방북한 클린턴 전 대통령과 만나 구류되어 있던 미국인 여성 기자 2명을 석방하는 등 개선의 조짐도 보였지만 북한의 핵개발은 계속됐다.
2012년 2월29일, 북미는 베이징 고위급 회의 결과를 동시에 발표했다. 미국 측 성명에 의하면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의 모라토리엄, 우라늄 농축활동을 포함한 영변에서 핵 활동 모라토리엄에 동의했을 터인데, 북한은 같은 해 4월에 위성을 발사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발사는 가속화되었다. 2017년 11월29일, 미국 본토까지 사정권에 넣은 것처럼 보이는 ICBM 화성15형 시험 발사에 성공하고 ‘국가 핵무기 완성’을 선언했다.
7-6. ‘국가 핵무기 완성’을 선언한 직후 2017년 12월 초순, 김정은 조선노동당위원장은 백두산 정상에 섰다. 김정은 위원장은 ‘국가 핵무력 완성의 대업’을 완수해온 격동의 나날을 뒤돌아보았다고 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전한다.
북미 군사적 충돌의 긴장이 고조된 2017년과는 달리 북한은 2018년 초부터 대화공세로 전환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남북은 코리아팀으로 입장했다. 개막식에 참석한 김여정 당중앙위원회부부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면회하고 방북을 요청했다.
3월에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 특사단이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직후에 방미한 정의용 실장은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즉석에서 북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 미정상회담이 결정됐다. 월말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베이징을 방문, 첫 북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발표된 ‘판문점선언’에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북미정상회담이 6월12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볼턴 미 대통령보좌관과 펜스 부통령이 선 핵 폐기를 기본으로 하는 ‘리비아 방식’을 언급한 것에 대해 북한이 강력 반발하여 우여곡절을 간신히 극복하고, 예정대로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은 틀림없이 역사에 남을 날이다. 70년 가까이 적대관계에 있던 두 정상은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키페라호텔 안의 정원을 함께 산책했다. 공동성명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게 안전담보(체제)를 제공할 것이 명시되고, 이에 대해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의지를 재확인 했다. 또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이 한반도 및 세계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할 것을 확신하면서 상호 신뢰구축이 한반도 비핵화를 촉구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 전제로 ⑴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⑵ 한반도에서 항구적이며 강고한 평화체제를 구축, ⑶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한 북한의 노력, ⑷ 전쟁포로·행불자들의 유골 발굴과 즉시 송환 등이 포함됐다. 6자회담 참가국들은 정부차원에서 환영의 뜻을 냈다. 그러나 한·미·일 등에서 CVID가 포함되지 않고, 비핵화 기간도 명기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8. 맺음말
8-1. 북한 국내에는 경제특구가 24개소 있다. 기업에게 경영권을 주기도 하고, 중국의 농지경영도급제와 닮은 제도가 협동농장에서 채용되는 등 개혁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공급시스템이 사실상 붕괴하고 경제의 시장화도 진행되고 있다.(208쪽) 실제 김정은 정권하에서 북한경제는 거듭되는 제재조치에도 불구하고 플러스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평양에 한정된 일인지 모르지만,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에 의하면 평양 등 도심부의 북한인민 생활수준은 향상되어 있고, 변함없이 건설 붐도 계속되고 있다.(222쪽)
북한의 지도부는 개혁·개방에 의해 시장경제로 이행하고, 체제가 동요하는 일은 현재까지도 두려워하는 점이 있다. 그들이 과감한 정책전환을 단행할 수 없는 것도 그런 까닭에 있다.(216쪽)
8-2. 이하는 본 ‘맥주와 대포동’에 실리지 않은 것인데, 본 편집인이 덧붙인 글이다.
2019년 2월27~28일, 북미정상은 합의한 대로 하노이에서 다시 만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합의서는 고사하고, 회담이나 만찬도 하지 않은 채 헤어지고 말았다. 평양에서부터 최고지도부가 전용열차를 타고 며칠을 걸려 하노이까지 간 김정은 일행의 낙담한 모습은 언론보도에 나온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싱가포르 회담 때 북한의 반발로 빠졌던 볼턴 보좌관이 회담장에 참석했다는 점이다.
2019년 6월 30일, 남·북·미3국정상이 판문점에서 깜작 회담을 가졌다. 트럼프 미대통령이 일본의 G20회의에 참석한 후에 한국을 찾은 것이다. 판문점에서도 하노이와 같이 어떤 합의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8-3. 위의 3차례 북미정상의 만남은 공화당 트럼프 대통령의 얘기이고, 현 민주당의 바이든 대통령은 어떨까? 이제까지는 북한의 요구에는 귀를 닫고 조건 없이 만나자는 수준이다. 며칠 전 TV조선의 보도는 최근 1월말 북한이 한꺼번에 미사일을 여러 발 쏘아 올린 이유는 남한의 대사로 내정된 필립 골드버그에 대한 불만이란다. 골드버그는 오바마 정권에서 대북 강경 제제정책을 세운 장본인이란다.
8-4. 20대 대선이 가까워지자 각 당 후보들의 공약이 현란하다. 그 중에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드 추가 배치, 멸공 등 대북 강경대응을 앞세우는 윤석열 후보다. 사드 배치로 인해 중국의 엄청난 경제보복을 받은 기억이 뚜렷하다.. 나의 의견으로는 MB의 5.24대북조치(금강산관광 금지 등)와 KH의 개성공단 폐쇄는 북한을 통째로 중국의 품안으로 밀어 넣는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20세기와 달리 군사력으로 식민지를 만드는 게 아니고, 경제 침략으로 경제식민지를 만드는 시대다. 북한이 2017년부터 연간 50만 배럴의 석유로 체제를 유지하고 버티는 것은 중국이 밀수를 눈감아주기 때문이라는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중국이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런 일을 할까? 그간 엄청난 이권이 중국으로 넘어갔을 거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독도가 문제가 아니다. 더 위험한 것은 북한 시민들의 감정이다. 문성희 기자도 책에서 여러 차례 안타까움을 간접적으로 표시한다.
8-5. 주한미군사령관이 UN모자를 쓰고,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딴지를 걸고 있는데,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UN군은 모두 철수 하고 남은 것은 오직 미군뿐이다. 1975년 11월18일 제30차 UN총회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UN군 해체를 결의했다. 미군은 평택에 모여 있고 DMZ 남측은 한국군이 맡고 있는데도 철지난 정전협정 규정을 들고 점령군 행세를 하고 있다. 몇 가지만 예로 들면, 2018년 8월23일, 남북정상합의에 의해 개성-평양 간 철도 선로 조사를 하기 위해 북으로 가려던 열차 통과를 가로막았다. 6.15공동선언기념으로 금강산에서 열리는 남북합동 회의에 참석하려 가는 대표들의 PC와 CAMERA를 모두 압수하여 맨손으로 통과 시키고, 시민단체가 모금하여 마련한 독감약을 실은 트럭을 막아선 등등 이들의 횡포가 한이 없다.
8-6. 1991년 9월17일, 남북한은 동시에 UN에 가입한다. 이때 중국과 소련은 남한과 수교를 한데 반해.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수교를 거부한다. 일본이 수교할 움직임이 있자 미국이 단념시켰단다. 이러한 미국의 외교 정책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일까? 일부 전문가들은 한반도 분단을 대 중국 외교에 활용하기 위함이란다.
이러한 잘못된 행위는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과거 군사독재시절에 흔히 보아왔고 지금도 국내 일부 자칭 보수에게서 자행되어왔다. 앞으로 분단을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2022년 2월7일, 맹 행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