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교수님 때문에 알게 된 카페인데 좋은 내용이 많이 있어 자주 옵니다. 글을 읽다가 보니까 틱낫한 스님 관련 내용이 더러 있길래 저도 하나 퍼왔습니다.
불교와문화 2003년 3/4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www.kbpf.org
좀 길긴 하지만 아래 <성자가 되어버린 투사>라는 글이 나오기 전에 나왓던 글이기도 하고, 또 더 상세한 설명이기도 하여 올려 봅니다.
틱낫한은 음유시인이 아니다
- 틱낫한 스님에 대한 기존의 왜곡된 오해들
내가 틱낫한 스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7년 전쯤, 그러니까 1995년 어느 불교단체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스님이 등장하는 한 방송국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어느 일요일엔가 무심코 켠 TV에서 스님이 두건 달린 수행복을 걸친 벽안(碧眼)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한 산사의 주변을 산책하다가 대웅전에 들어가 영어로 『반야심경』을 외우는 장면이 어슴푸레 기억에 남아있다.
그 때만 해도 그렇게 큰 인상은 받지 못했다. 그저 서양에서 불교 포교에 성공한 베트남 스님 정도랄까?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무렵 틱낫한 스님의 책이 국내에 몇권 번역되어 출간되었지만,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어언 7년이 흐른 작년 봄부터 틱낫한 스님의 책은 서점가에서 일약 베스트셀러로 등장하더니 이윽고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혔다. 이에 발빠른 출판업자들이 가세하여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스님의 책은 어느덧 십여 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스님이 그동안 영어로 발표한 저작물은 약 80여 권에 이른다. 출판업계의 동향을 보니 올해만도 약 20∼30여 종이 더 국내에 선보일 것으로 짐작된다. 한 개인의 저서가 이렇게 집중적으로 번역 출간되는 것은 출판가에서 아주 이따금씩 볼 수 있는 기현상으로 가히 신드롬(syndrome)이라 부를 만도 하다.
각종 미디어에 밀려 날이 갈수록 침체되고 있는 독서계에 저자가 스님인 불교책이 두각을 나타내고 많은 사람이 읽고 있다는 사실에 불자로서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저 흐뭇해하고만 있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틱낫한 스님은 과연 그의 책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펴고 있는가? 현대화와 대중화라는 미명아래 알맹이는 온 데 간 데 없고 그저 불교의 껍데기만 우려먹고 있는 대수롭지 않은 산방한담(山房閑談)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런 책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은 과연 불자로서 살아가려는 발심을 하게 될까? 한마디로 불교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자비문중(慈悲門中)에 귀의하여 보살도를 실천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틱낫한은 불교의 수행자, 즉 비구로서의 정체성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요즘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무종파 영성 수련 지도자는 아닐까? 또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흔히 명상공동체라는 말로 자주 소개되고 있는 그곳은 절인가 아니면 일종의 명상학교 내지 요양원 같은 곳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교계 일각에서 제기되어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고, 나 또한 이러한 문제를 진작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직접 나서서 풀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한 출판사의 도움으로 2002년 플럼 빌리지의 하계 수련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일주일 간의 체류와 그 이후 그 때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정리해서 책으로 엮고 또 스님의 저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비록 부족하나마 나름대로 확고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결론 삼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틱낫한은 비구로서의 정체성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는 불자 모두가 존경해마지 않는 스님이고, 플럼 빌리지는 우리의 송광사나 해인사와 다름없이 거룩한 삼보가 상주하고 있는 엄연한 절이었다. 한 사람의 불자로서 더 나아가 불교 저술가로서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나름대로의 상세한 이유는 『틱낫한과의 소박한 만남』(근간)이라는 책을 통해 선보이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틱낫한 스님과 플럼 빌리지가 오해되고 있는 이유를 짚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한 실수 또는 정보 부족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고의적인 기획과 소개 그리고 번역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1) 명명(命名)의 정치학
틱낫한을 시인, 에세이스트(essayist), 평화운동가 그리고 명상가 등의 말로 지칭하는 것을 흔히 본다. 스님은 시도 쓰고 글도 많이 쓰고 반전 및 평화운동도 벌이고 계시니 딱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님 이외에 여러 가지 직업을 나열하고 있는 데에는 불순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스님이 시를 쓰고 반전 및 평화운동을 한다 해서 굳이 별도로 그렇게 불러야 한다면, 사명 대사가 임진왜란을 맞아 승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우고 나중에는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점을 들어 스님이자 군인, 외교관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세존께서는 시(게송)를 짓고 반전운동을 안 하셨던가? 카필라국의 석가족을 몰살하려고 군사를 일으킨 유리왕을 소가 닭 보듯 하셨더란 말인가? 그리고 여러 조사님들은 어떤가? 이 분들을 소개하는데 모두 시인, 학자, 저술가, 명상가 등의 직업을 나열해야 한단 말인가? .
다시 틱낫한과 사명 대사의 예로 돌아가보자. 이 두 분 다 스님으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의도로 때로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 반전 및 평화운동을 하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시퍼런 칼날을 부여잡았을 뿐이다. 이렇게 했던 것은 비단 두 스님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불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출가한 불제자, 즉 비구는 스님 외에 다른 직함이나 직명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들은 스님이라는 호칭과 병렬로 나열될 것이 아니라 스님이라면 당연히 하고 있는 자비교화행(慈悲敎化行) 아래 들어갈 성질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스님이라는 말로 충분한 틱낫한을 그렇게 번거롭게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만해 한용운을 떠올려보자. 한용운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님이라는 말보다는 한용운 선생이라는 호칭을 떠올릴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청소년 시절의 국어 교과서나 참고서에 한용운 스님을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로 소개한 데 있다. 거두절미한다면 한용운을 굳이 이렇게 규정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한용운의 정체성을 스님에서 찾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도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불자들도 한용운 하면 『조선불교유신론』을 쓴 스님이라기보다는 「님의 침묵」을 쓴 시인 또는 삼일독립선언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것이고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한용운이 시를 쓰고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것은 그가 훌륭한 스님, 즉 제대로 된 스님으로서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이지 별도의 직업의식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용성 스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
자, 그러면 내가 명명의 정치학이라고 부르는 말 속에 숨어있는 불순한 의도를 파헤쳐 보자. 틱낫한을 스님 외에 여러 가지 직명으로 부르는 것은 자세히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본래 기도는 스님으로서의 정체성, 즉 불교적 정체성을 희석화 시키려는 데 있다. 영악한 기획자나 편집자 그리고 번역자나 출판사는 불교적 정체성이 본래 그대로 표출되면 독자가 제한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즉, 불자가 아닌 사람들은 사보려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불교색을 희석화시키기 위하여 명명의 정치학을 사용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심지어는 원문의 일부를 뭉텅뭉텅 잘라내 버리기도 한다. 특히 틱낫한 스님이 자신의 논지를 불교 교리에서 찾고 있는 대목이 그 대상이 된다. .
나는 저 영악한 출판업자들의 판단이 일종의 편견이자 잘못된 견해라고 보는 사람이다. 도리어 원서 그대로의 불교적 정체성이 확보될 때 더 많은 반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독서시장에서의 실질적인 결과, 각종 판매자료를 통해서만 대답할 수 있는 것이지 탁상공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
명명의 수사학은 틱낫한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플럼 빌리지를 지칭하는 데도 이용되고 있다. 이 말은 그대로 옮겨 ‘자두 마을’이라 부르기도 하고 뭘 좀 눈치챈 사람은 ‘매화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만으로는 플럼 빌리지가 도대체 뭐 하는 곳일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명상 공동체라고 하는 이상야릇한 말로 부름으로써 플럼 빌리지의 정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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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럼 빌리지의 한문명은 ‘매화촌도량(梅花村道場)’이다. 플럼 빌리지는 세 개의 작은 마을, 즉 뉴 햄릿(the New Hamlet), 로어 햄릿(the Lower Hamlet), 어퍼 햄릿(the Upper Hamlet)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차례로 자엄사(慈嚴寺), 감로사(甘露寺), 법운사(法雲寺 - 이것만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했고 영어로 미루어 본 것임)라는 편액이 달린 법당이 각 마을에 하나씩 자리잡고 있다. 규모로 봐서 자엄사가 본사라면 나머지 두 절은 암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참고로 틱낫한 스님의 오두막은 법운사의 한 귀퉁이에 있다. 그리고 각 법당에는 불상이 모셔진 단촐한 불단이 자리잡고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플럼 빌리지는 우리나라의 여느 산사처럼 전통적인 사격(寺格)을 완전히 갖추고 있지는 못하지만, 거룩한 삼보가 상주하고 있는 현실의 불국정토(佛國淨土), 즉 가람(伽藍)임에 틀림없다. 언뜻 감이 안 잡히는 분들은 우리나라 중소 도시의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소박한 포교당을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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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엄연히 절 이름이 있는데도 굳이 명상 공동체 등의 말로 지칭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종교에 관계없이 일반 사람들이 모여 명상수련을 한다고 해서? 그렇다면 송광사 등지에서 여름이나 겨울에 종교에 관계없이 일반 사람들이 모여 참선 수련을 한다고 그곳을 송광사가 아니라 송광 명상 공동체로 불러야 한단 말인가? 플럼 빌리지의 하계 및 동계 워크숍(workshop)은 우리나라 절의 사찰 수련회와 하등 다른 점이 없다. 우리의 사찰 수련회 역시 모든 종교인과 비종교인에게 활짝 열려 있다. 플럼 빌리지라는 말은 이제 고유명사로 굳어져 있으므로 사용해도 무방하겠지만, 적어도 플럼 빌리지를 명상 공동체 같은 단순 직역이나 오해에 근거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불자라면 삼가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잘못 알려지고 있는 것은 플럼 빌리지를 일종의 종교 백화점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뭐 각자가 가진 종교에 따라 모여서 예배한다나? 우리의 사찰 수련회에서 타종교인이 참가했다고 해서 별도의 시간을 내서 자기 종교식으로 예배를 보거나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플럼 빌리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곳 법당 중의 하나에는 그리스도의 초상이 걸려있기는 하지만, 워크숍에 참가한 타종교인들이 별도로 종교회합을 하고 또 그러한 회합을 위한 예배당이나 모스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플럼 빌리지가 불교로의 개종을 은근히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못된 전통은 우리 불교에는 없다. 개종이 깨달음이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모든 종교에 열린 자세를 가지며 굳이 불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해서 플럼 빌리지를 무슨 종교통합주의자들의 소굴인 것 마냥 묘사한다면 가장 먼저 기절초풍할 분들은 플럼 빌리지에 계시는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일 것이다.
2) 치환의 수사학
위에서 보았듯 명명의 정치학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틱낫한 스님과 플럼 빌리지의 불교적 정체성을 희석화하려고 하는 이들은 이제 치환의 수사학을 통해 독자들의 오해를 공고히 하려 한다. 틱낫한 스님을 사랑과 행복 그리고 평화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자 에세이스트라는 이미지를 심기에 바쁘다. 문제는 스님이 말하는 사랑과 행복 그리고 평화 등등의 개념이 불교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속류적인 개념으로 치환시켜버리는데 있다.
그러면 “깨달음의 열매는 이미 무르익었다네”라고 하는 틱낫한의 시 한 대목을 살펴보자.
그러나 사랑하는 법을 배운 이래
내 영혼의 문은 활짝 열린 채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작금의 상황은 혁명을 부르고 있다네
깨달음의 열매는 무르익었고
이제 그 문은 두 번 다시 닫히지 않는다네.
어떤가? 스님이 노래하는 사랑이 과연 갑돌이와 갑순이의 그것일까? 물론 아니다. 스님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 불문의 대자대비를 말함이다. 이 시는 깨달음과 대자대비가 둘이 아님을 이미 알아버린 후에는 꾸준히 이타행(利他行)을 하는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암시하고 있는 선시(禪詩)이자 일종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백마 타고 오는 왕자님을 기다리는 철없는 소녀의 취향을 만족시키고자 시를 쓰는 게 아니다. 불교의 깨달음, 적어도 스님이 얻은 깨달음을 이 세상의 모든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일 게다. 그런데 영악한 출판업자들은 불교적인 내용을 속류적인 것으로 슬쩍 바꿔치기함으로써 더 많은 독자대중의 지갑을 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의 책에 무슨 삼류 애정 소설이나 드라마에나 어울릴 법한 제목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다.
스님이 말하는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평생 살아보세”하는 종류의 사랑이 아닐 것은 삼척 동자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찬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수많은 경이로움으로도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고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이 보여주는 경이로움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이 고해(苦海)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설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불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기에 자칫 잘못하면 사고팔고(四苦八苦)와 무아(無我)에 집착하는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이 행복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악취공을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삶이 보여주는 수많은 경이로움을 간과하지 않고 올바로 볼 때 우리는 진여(眞如)의 세계, 열반의 행복의 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비관론이나 허무론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결국 스님이 말하는 행복은 속류 혹은 세속적인 차원의 행과 불행이 아니라 절대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저 푸른 초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말하는 틱낫한 스님이 어떻게 살고 계시느냐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답게 무소유의 삶을 살고 계신다. 나는 스님이 낡은 경차의 조수석에 앉아 플럼 빌리지의 세 마을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본 기억이 난다. 스님의 소박한 모습 속에서 우리 불교계의 창피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스님이 말하는 행복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어떻게 보면 우리 같은 범부가 극구 피하려드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오해의 번역술(飜譯術)
꼭 불교학자나 불교 관계자만이 불서를 번역하라는 법은 없지만, 기왕이면 관련지식을 가진 사람이 번역하면 오해나 오역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명명의 정치학과 치환의 수사학을 통해 오직 판매고를 올릴 생각밖에 없는 영악한 출판업자들이 온전한 번역 따위에 신경을 쓸리 만무하다. 그래서 관련지식 소유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그저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번역가를 섭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물론 외서(外書)를 100% 완전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자면 어학 실력도 실력이지만 관련 지식이 풍부해야 하고 저자의 생각을 완전히 읽어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번역할 당시 저자가 가지고 있는 어학 실력과 관련 정보의 소유 정도 그리고 이해력에 따라 오역이나 오해는 거의 반드시 발생하고 만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판을 거듭해나감에 따라 계속해서 고쳐나가려는 자세다. 그런데 영악한 출판업자들은 사서고생일 뿐만 아니라 돈까지 들어가는 이러한 작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한 번 잘못된 것은 절판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기 십상이고 그로 인한 독자의 오해 역시 정정될 여지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일례로 틱낫한 스님의 모든 언행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마인드 풀니스(mindfulness)라고 하는 개념을 보자. 역자에 따라서는 ‘주의 깊음’, ‘마음 다함’, ‘의식적임’ 등의 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틀렸다기보다는 영어를 그대로 직역한 데서 비롯되는 어색함이다. 스님이 마인드풀니스라고 부르는 것은 짠 니엠(chan niem)이라고 하는 베트남어의 번역으로 알고 있다. 이 짠 니엠은 팔정도의 정념(正念)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념하면 우리 불자들은 보통 ‘바른 기억’이라는 통상적인 해석을 떠올릴 것이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뜻으로는 틱낫한 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놓칠 우려가 있다. 스님은 짠 니엠을 ‘바로 지금 여기에, 즉 현재를 염두에 두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나는 ‘전념(專念)’이라는 말로 옮기는 것이 스님의 취지에 보다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줄곧 그렇게 쓰고 있다. 그러자면 물론 ‘정념’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역어를 선택하는데 필요한 이러한 과정을 생략하거나 고의로 무시할 경우 스님의 마인드 풀니스는 바로 현재 유행하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오해를 낳기도 한다. 하기야 틱낫한 스님이 속한 베트남 불교는 우리와 같은 북방 대승불교에 속하고, 스님이 속한 종파는 선종임에도 불구하고 틱낫한을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선사로 소개하며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하고 있던 대단한 지식(?)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으니 할 말이 없다. 스님의 마인드풀니스는 근처의 남방불교권에서 위빠사나를 별도로 배워서 성립된 것이 아니고, 선승인 스님이 화두선의 원리를 정념으로 단순화시켜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게 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정념을 풍부하게 해석해서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동시에 그리고 유기적으로 닦을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까 오해의 번역술은 비불자는 말할 것도 없고 불자들까지 오해의 늪에 빠지게 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영리만을 목적으로 한 일부 출판업자들이 고의적으로 명명의 정치학과 치환의 수사학 그리고 오해의 번역술을 권장함으로써 틱낫한 스님과 플럼 빌리지를 오해하게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교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틱낫한 스님에 대한 의구심은 근거없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의심의 눈초리는 틱낫한과 플럼 빌리지에 향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일부 출판업자들에게 돌려져야 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 불교계 신문사나 잡지사는 밀려드는 불교 신간에 지면이 모자라는 호황(?)을 겪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그 중 적지 않은 책이 내가 말하는 세 가지 항목에 저촉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일반 불자들에게 도서 정보를 제공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우리 불교 독서계는 풍요 속의 빈곤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 불자들에게 정말로 추천할 만한 책인지 가려줄 수 있는 정론(正論)이 확립되어야 비로소 일부 영악한 출판업자들의 술수도 수그러들 것이다. 겉으로만 친불교적(pro-Buddhist) 행세를 하고 있는 마구니들이 불자들의 지갑과 사중의 삼보정재(三寶淨財)를 노리며 오늘도 무슨 수행자인 양하며 절집 근처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쉬운 점: 같이 틱스님책을 번역하는 입장에서 타인의 번역에 대해서 전문지식..운을 띄우는 것은 좀 아쉽네요. 마인드 풀니스(mindfulness)는 목사이신 이현주님도 진현종님의 해석처럼 해석하신 것 같은데요. 틱스님의 책을 번역하신 입장이 아닌가운데 비판하셨더라면 모양새가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현종님의 글을 올려주신 보리님, 잘 읽었습니다. 직접 쓴 작은 영문의 글도 직역으로 번역을 하면 어색하거나 본래의 뜻과 거리가 먼 것을 종종 경험하기에 진현종님의 글에 감히 크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외곡된 번역은 바로 인식시키는 것이 열 번 옳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Borhi님, 좋은글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동안 틱낰한 스님의 저서 영문판 몇권을 읽었지만 한글 번역판은 한권도 읽지않어 상황을 모르고있던차 님이 올려주신글을 읽고 스님에대하여 더알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 같이 틱스님책을 번역하는 입장에서 타인의 번역에 대해서 전문지식..운을 띄우는 것은 좀 아쉽네요. 마인드 풀니스(mindfulness)는 목사이신 이현주님도 진현종님의 해석처럼 해석하신 것 같은데요. 틱스님의 책을 번역하신 입장이 아닌가운데 비판하셨더라면 모양새가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현종님의 글을 올려주신 보리님, 잘 읽었습니다. 직접 쓴 작은 영문의 글도 직역으로 번역을 하면 어색하거나 본래의 뜻과 거리가 먼 것을 종종 경험하기에 진현종님의 글에 감히 크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외곡된 번역은 바로 인식시키는 것이 열 번 옳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