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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는 시골집을 떠나기를 그토록 거부했다.
어쩌면 엄니의 나이 다섯 살 때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비의 등에 엎혀서 이사 온 집이라고 한다. 어미 생일이 섣달그믐이기에 일곱 살이라야 여섯 살일 테고, 그것도 봄철이라고 하니 실제 나이는 아마 다섯 살 조금 넘었을 게다. 다섯 살인지, 일곱 살인지는 더 이상 확인할 수는 없다.
엄니의 첫 기억은 이랬다.
서낭댕이(성황당)의 논가에 있는 우물가에서 올챙이를 바가지로 건져내던 용천뱅이(나병환자, 문등병 환자) 아이들을 봤다고 .
엄니 고향은 용머리(용두리).
갯바다 마을에서 십리 쯤 떨어진 이웃 면의 산골마을로 이사 온 뒤로 평생을 살았던 마을은 산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 곱부레.
꽃을 바라본다는 곱부레보다는 곶바레가 더 오래된 옛말일까?
일제시대부터는 화망(화망) 마을로 불리웠다.
어머니는 1920년 1월생이니 어머니가 이사왔다는 때는 1920년 대 초, 일제시대.
내 증조부는 일찍 상처한 뒤 거듭 재취하는 바람에 살림이 궁해서 살던 집을 용머리 사람한테 팔았을까?
용머리 사람은 배를 부리는 친척한데 논을 저당 잡혀 빚을 주고는 그 빚을 받지 못한 채 망했다. 이웃 면으로 이사갔는데도 그래도 부자여서, 이사 온 마을에서 집과 땅을 샀기에 마을사람들은 용머리 부자로 불렀다.
증조부가 집을 팔고 이사 갔다는 곳은 용머리 사람이 샀다는 집에서 불과 몇 백메타도 안 떨어진 곳, 터가 작은 곳이었고, 오두막집이었다고 어머니는 기억했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헐렸나도 모르겠다.
내 증조부의 호적에는 있는 주소지는 오두막집이 있었다는 번지이다. 내 본적지 주소도 작은 빈 터이지 현재 내가 사는 집 주소는 아니다. 그 작은 터에 있었다는 오두막집에서 구장이라고 불리었다던 증조부는 얼마 동안 살았을까.
엄니는 이사 온 집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열한 살 쯤에 아버지(나한테는 외할아버지)를 잃고는 큰오라비가 가장이 되었단다. 큰오라비는 큰외삼촌이다. 젊은날 허위대가 멀쩡하여 사당패를 따라 전국을 유랑하며, 노름도 즐겨하다가 왜경에 잡혀서 지방경찰서에도 갇혔단다.
조막손 황씨네가 소식 알려주어서 앞밭 다섯 마지기를 저당잡혀서 그 돈으로 경찰관을 무마한 뒤 빼왔다고 한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고문했기에 반쯤 죽은 송장이 되어서야 풀려났다고.
어머니는 열여섯 살에 서낭댕이(성황당) 주막강아지인 열여덟 살 난 앳된 젊은 사람과 동네혼인을 했다.
주막강아지는 술 배달꾼을 얕잡아서 하는 말일 게다.
내가 어린 시절을 기억하건대, 성황당에는 작은 초가가 셋 있었다.
한 집은 뒷마루에 송방(가게)를 차렸고, 한 집은 주막집이었고, 나머지 한 집은 당집이면서 주막집이었다.
일제시대에 찻길을 낸 신작로 말랭이에 있는 주막집이었기에 오고가는 객꾼이 자고 갔으며, 늘 술에 절은 사내들이 제집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아버지는 혼인한 며칠 뒤에 처가집을 되샀단다.
그래봤자 자기네 할아버지 옛집이었고.
외삼촌네는 장가 든 처남네한테 집을 넘기고는 이씨 성받이가 몰려 사는 옛집 용머리로 되돌아갔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어머니는 이사 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계집애가 되었고, 새댁이 되었고, 나이 듬직한 아낙이 되었고, 나중에는 극도로 쇠약한 할망구가 되었다.
그래서 일까?
하도 늙어서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고는 비쩍비쩍 거리다가 통나무처럼 쿵 쓰러지는 세월에 와 있었는데도 그 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한테는 옛집을 떠나지 않으려 하던 이유는 또 있을 게다.
나는 1949년 1월에 태어났으므로, 음력 생일이 섣달 스물사흘인 내가 두 살 때였을까?
어머니가 살던 초가집에는 우물이 없었다고 한다. 밥 짓고 마실 물은 산 밑에 있는 황씨네 옹담샘에서 물 길렀으며, 빨래 하려면 멀리 떨어진 앞뜰 논 가운데 있는 웅덩이까지 가야 했단다.
산밑 옹달샘은 황씨네 산자락 밑에 있어서, 황씨네 눈치를 늘 보아야 했으며, 황씨네 며느리는 보이지 않게 권세를 부렸단다.
어느날인가, 어머니는 쌀 씻다가는 수모를 당했고, 그참 돌아왔단다.
오기가 나서 앞마당에 막대기로 커다랗게 둥근 금을 그은 뒤에는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단다.
젖먹이 쌍둥이가 딸린 새댁이 혼자서 사다리를 걸치고는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고, 흙 퍼서 삼탱미에 담고는 다시 사다리에 기어 올랐다.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고, 흙을 파고 오르기를 숱하게 거듭하려면 힘이 무척이나 들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거쳐서 파낸 흙은 마당가에 산처럼 쌓이는데도 정작 물길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암반(바윗돌)에 걸려서 더 이상 팔 엄두를 못내서 자탄해서 노래를 부르는데 문득 그 돌틈에서 물이 새어 나오더란다.
땅 속에서 혼자 노래를 목청껏 부르자니 마침 누가 들여다보고는 '너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했단다. 저건너에 사는 육촌오빠가 방문했다가 샘 속을 들여다보고는 놀랬단다.
이 소식이 대전에 사는 시아버지 귀에도 들어갔고, 시골로 부랴부라 온 시아버지는 인부를 사서 돌팍으로 샘 벽에 축대를 쌓았단다.
몇 길이나 되는 샘이 생긴 유래다.
암반 틈새에서 새어 오른 물은 차갑고 한 길이 넘도록 가득 찼다.
처음에는 바가지로 물 뜨고, 함석 트레박으로 물 길르고, 펌프가 설치되었고, 나중에는 자동 모터로 물을 뿜어 올렸다.
예전에는 동네에는 샘이 없었단다.
새댁이 억척스럽게 혼자서도 샘을 판 뒤부터는 마을 사람들도 집 근처에 샘을 파기 시작했단다.
어머니가 평생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하던 샘이었다.
어머니가 시골 옛집을 떠나기를 거절한 이유는 또 있을 게다.
섣달그믐이 생일인 어머니는 열여섯 살 나던 해에 동네 결혼했고, 앳된 새댁일 때 첫딸을 낳아서 키웠다.
첫딸 네 살 때인가. 친척이 얻어 온 인절미를 먹고는 목갈려서(목에 걸려서) 나흘 만에 죽었고, 첫아들은 영특하다고 귀염을 받았는데 당시 유행하던 옴병에 걸려서 사흘 만에 죽었다.
쌍둥이 작은아들 스물두 살 때다. 대학교에 다니다가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 와서는 밤중에 소변 보려고, 울안에 있던 변소깐으로 가다가 독사에 물려서 스무 시간 만에 병원에서 죽었다.
세 자식이 졸지에 죽어가는 모습을 몸 떨어가면서 지켜보아야 했던 아픔과 한이 서린 집이었기에 어머니는 더욱 떠나지 않으려고 했을 게다.
어미니는 그 집에서 아흔 살까지 혼자서 살았다.
세 아들 가운데 가장 못났다는 나. 장성한 아들이 혼자뿐인 내가 서울에서 직장생활하였다.
나도 늙었다는 이유로 퇴직했을 때에는 어머니는 아흔 살의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사그라지고 있었다.
퇴직한 그날, 여름철. 나는 시골로 내려가서, 그때까지도 혼자서도 고록고록 살았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치매 살짝 걸린고 뇌경화가 진행 중인 어머니는 나와 함께 몇 년간 더 살았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시 반추합한다.
어머니는 일제시대인 1920년대 초에 아버지의 등에서 업혀 타 동네로 이사 왔다.
이사 오던 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른 봄철에 소로길 꼭대기의 길가에 있던 옹달샘에서 올챙이를 건져 먹던 나이 어린 용천뱅이(나병환자)를 보았단다.
소로길 꼭대기에 있던 서낭댕이(성황당).
신당수 아래 길섶에 옹달샘이 있었고, 당산 주변에는 당집과 주막집이 두 채나 있었다.
이들이 물 길러 먹던 옴달샘은 2017년인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수백 년 된 당산나무, 느티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당산나무에 줄 띠우고, 촛불 켜고, 술병과 사탕봉지를 올리고는 축원축수한 흔적이 이따금 보였다.
어머니는 나이 아흔일곱 살, 음력설을 쇤 뒤 며칠 뒤인 2015년 2월 말에 먼 길 떠났다.
싸래기 눈발이 날리던 날, 그 추운 날에 무덤으로 또 이사갔다.
서낭댕이(성황당) 바로 너머에는 어머니의 새로운 집이 생겼고,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지아비와 합방도 했다.
새 집이 된 무덤에서 내려다보면 서해바다가 보인다.
손끝에 닿을 듯한 짧은 거리다.
어머니가 태어났던 용머리 바다가 보인다.
산말랭이 무덤에서 내려다보면 용머리는 곧바로 보이지 않는다. 그 너머로는 바다.
울창하게 키 큰 소나무숲 뒷쪽 너머로는 넘푸른 바다가 보여도.
무덤으로 이사 간 어머니는 당신이 태어났던 옛집(외가)도 그리워 할 게다.
갯바닷가 방풍림 소나무 숲 바로 뒤에 있던 초가집이라도.
늙은 외삼촌이 그 집을 생질한테 팔고는 큰딸네로 들어가 살다가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
나도 외갓집이 이종 큰형한테 팔린 뒤로는 용머리 갯장불에 나가지 않았다.
외가집을 나한테 판다고 언약했다.
생질인 내가 폐암 걸린 아버지를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시키고는 병 간호에 매달렸기에 시골로 내려가 계약하지 못했다. 그 새 중간에 나도 모르게 이웃 마을, 감나무골에 사는 이종 큰형한테 팔렸다는 소식을 뒤늦게서야 들었다.
'어? 나한테 판다고 금(돈)까지 매기었는데...'
시골집에서 쉬엄쉬엄 걸어가면 한 시간 거리도 안 되는 외가인데도 나는 더 이상 그 바닷가로 가지 않았다.
그 초가는 또다른 사람한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그마저 헐렀는지도 모르겠다.
외가의 가깝고, 먼 친적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산다고 해도 나는 외가 마을을 찾지 않았다.
외가 뒷편 소나무 방풍림 뒤로는 작은 해수욕장이 있는데도 나는 더 이상 그 해변가를 걷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의 외가, 초가집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어머니가 평생을 살았던 곱부레시골집.
사실은 내 증조부때부터 살았을 게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도.
증조부가 근동에서 예쁜 색시한테 장가들었으며, 처남된 대목(大木, 목수)이 매제네 집을 새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 집터에서 증조할아버지대, 할아버지대, 아버지대, 아들인 나까지 몇 대를 거쳤다.
그 윗대는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낭댕이(성황당)에 묻힌 무덤, 아주 오래 된 무덤의 주인들이 옛일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귀 어두운 나는 아뭇소리도 듣지 못한다.
시골집은 내가 퇴직한 뒤에서 귀향해서 살기 시작했어도 정말로 오래된, 낡은 함석집이다.
나는 함석집 이전의 초가집을 기억한다. 사랑채 딸린 초가였다.
1957년. 초등학교 이학년 봄.
대전 사는 아비는 시골집 기둥과 흙벽을 들어내면서, 얼추 뜯어내면서 새롭게 보수했다. 대전에서 지엠무시(GM) 트럭으로 목재를 운반하고 대전에서 목수를 불러다가 지었다. 근동에서는 새롭게 고쳐서 지은 집이서 '함석집'이라고 불렀다.
60년간 긴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었는지 지금은 낡은 농가에 불과했다. 그 당시의 함석지붕이 지금도 지붕을 덮었다. 이십여 년 전에 두 차례나 내부를 보수했다고 해도 본질은 낡고 허름한 옛집에 불과하다. 아무도 '함석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냥 낡은 집, 빈 집으로 전락했다.
지금은 내가 은행나무집이라고 다르게 부른다. 은행나무가 빽빽히 밀집되어 있기에.
누대를 걸쳐 살았던 촌집.
그 집에서는 많은 사람이 살았으며, 죽었으며, 태(胎)를 이었다.
어미니가 재작년 2015. 2월 말에 먼 여행을 떠난 뒤부터는 진짜로 텅 빈 집이 되었다.
이따금 내가 내려가서 텃밭농사 짓는 체하면서 머물렀고, 지난해 2016년에는 선산 무덤을 이장하는 체를 하면서 잠깐씩 살기는 했어도, 본질은 점점 비어가는 옛집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새싹이 움트는 봄철이 오면 옛집이 또 생각난다.
시골로 내려가 살고 싶다고.
아쉽게도, 세월따라 늙어가는 아내는 그 구차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옛 농가에서 잠깐 머무는 것은 용납해도, 오래 머물려고는 하지 않았다.
나 혼자 내려 가서, 혼자서도 살겠다고 말해도 아내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으며, 내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부득히 나는 처자식이 있는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지금도 서슬이 시퍼런 늙은 아내와 함께 서울에서 머물러서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이렇게 기 죽어 사는 나한테 누가 안부 전화로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옛집에서 살다가 먼 길 떠났고,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을 떠올릴까?
그들 중에서 등 굽은데도 어둡도록 텃밭에서 일하는 어떤 늙은이, 또 하나의 나를 떠올릴까?
기억이 자꾸만 희미해지는데도 옛집, 옛사람, 옛일들을 조금이라도 떠올릴까?
'집 생각이 나아...' 라고 쓸쓸하게 대답할 게다.
나이 들어갈수록 이 말을 더 자주 할 게다.
2.
어떤 카페에서
'부부, 그리고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라는 글을 읽었다.
올해 일흔 살 난 할머니가 쓴 글인데 무척이나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다.
오남매.
네째인 글쓴이한테는 팔십 대의 친정 언니와 오빠가 있고, 제일 나이 많은 큰오빠는 올해 여든네 살.
큰오빠는 옛집에서 혼자 살았단다. 친정아버지 어머니가 살다가 돌아간 오래된 집, 친정 올케는 시골집에서 살다가 열두 해 전에 먼 길 떠났고, 자손인 친정 조카들이 함께 살자고 해도 거절한 채 옛집에서 혼자 살았단다.
몇 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고 혼자서도 살고, 견디었으나 그게 더 이상 안 되었는지 스스로 요양원에 입소했단다.
요양원에 입소한 큰오빠와 통화를 하는데 핸드폰에서 '집 생각이 나아...' 라는 쓸쓸한 소리를 들었단다.
그게 마음에 걸리고, 짠해서 쓴 삶의 글이다.
내가 아래처럼 댓글 달았다.
"글맛 좋습니다.
삶에서 건져낸 글이기에 아무런 거짓도 가식도 없이 글이 잔잔하게 이어지네요.
옆에서 도란도란 자랑자랑 들려주는 입말로 쓴 글이라서 후루룩 읽어도 내용이 한폭의 그림이 되어 잔상이 떠올려지네요.
님은 지금 일흔 살, 님보다 나이가 열 살도 더 많은 오빠,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노인요양원에 찾아가 입실한 오빠에
대한 안쓰러움이 그대로 글속에서 묻었네요.
'집 생각이 나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길게 여운을 남기는군요.
어쩌면 얼마 뒤에 나도 겪어야 할 여운이네요.
'집 생각이 나아...'
댓글 쓰면서도 내 눈이 눈물이 그렁그렁 입니다.
글이 쫗아서 꾸욱 누릅니다."
나는
'집 생각이 나아...'
라는 게 무슨 뜻인지를 알기에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내 시골집에 관한 글을 맨 위처럼 쓰고 있다.
몇 차례 더 다듬으면 그럴 듯한 글이 완성될 것 같다.
2017. 1. 9. 월요일. 최윤환
에디 닉으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카페, '아름다운 60대 삶 방'에서 글감을 얻었소이다.
무척이나 존경하는 카페인지라 오르는 글도 감동을 주고, 받지요.
덕분에 나는 글감 하나 얻어서 후루룩 작성하고 있소, 천천히 더 다듬어야겠고.
초안인데도 올렸소.
첫댓글 야~ 기억력 참 대단하오
어찌 그리 어미의 내력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기억 하시는지? 놀랍구려,
위의 소재만 가지고도 대하소설 하나 의 줄거리가 될 듯 싶소
마치 23권이나 되는 길고 긴 소설 "토지"가 생각 났다오
나는 내 어미의 내력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게 없는데...말이오
그만큼 나는 하늘가신 어미와 생전에 진솔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었다는 이야기 아니겠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인네들의 비슷한 굴곡많은 삶의 이야기가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내 어미는 아들에게 전하지 않고...묵묵히 그냥 살다가 가셨오
긴 글, 단숨에 읽었오, 나도 ..."집 생각이 나아..." ㅎㅎ
죽을 날이 점점 다가오나 보오...
나는 일찍 어미와 떨어져서 객지인 대전으로 갔소.
방학때라야 시골 내려갔고, 나이들어서는 서울에서 오래 살았기에 구구한 어머니의 한서린 이야기는 별로요.
그래도 책으로 쓴다면 몇 백 쪽은 우습게도 쓸 것 같소이다.
박경리의 토지 그거 23권? 나는 초판 6권인가를 읽고는 더 이상 읽지 않았소.
소설 초기의 이야기가 하도 장해서... 후편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몰라도 될 것 같기에...
요즘의 엄마들이란... 글쎄...
나도 이따금 화들짝 놀라오.
아내가 어디 몸이 불편해 하는 눈치가 보이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나이 들수록 나보다 아내 건강이 염려되오.
내가 '집 생각이 나아...' 이런 말을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기에.
@최윤환 늙어가면서, 아내가 아푸다면 겁나는 건 당연하지...ㅎ
그래도 최형이 효로 모범을 보였으니 자식들이 따라하지 않을까?
나야 기대난망이지만...ㅎ
토지...난 2014년에 23권으로 된 걸 완독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후반부는 지루하더구먼...ㅎ
앞부분이 그래도 재미있고, 최형이 읽은 6권은 아마도 완간하기전 아니었을까?
최근 발행본이 아마 20권인 모양일세,
소설가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최형의 증조부부터 조부모 부모 최형과 자식 손자까지 이야기를 엮으면 대하소설 깜 아닌가? ㅎㅎ
독립운동 같은 걸 슬쩍 끼워 넣고,ㅎ 예쁜 여종 이야기도 넣고,
무챙이 물방앗간의 사연도 슬쩍...소설은 허구를 바탕으로 한다잖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