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카15, 21~24 참조)
원문에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휘오스 수'(hyos su;your son)
즉 '당신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주인으로 인식하고 부르고 있는 것을 드러내 준다.
아들에게 있어 그의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의
자의식(自意識) 속에는 아버지가 주인(主人)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서'라고 표현되는 '타퀴'(tachy; quickly)라는 부사로서
응답하신다. '재빨리','신속하게'로 시작되는 이 말에는 아들을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깨끗하게 단장하여 집으로 맞아들이려는 부성애(夫性愛)가 녹아 있다.
한편,'옷'이라고 번역된 '스톨렌'(stolen; robe)은 발까지 내려오는 남자용의 헐렁한
겉옷을 말한다. 이런 류의 옷들은 주로 왕들과 사제들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만 입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존귀하게 여겨 이전에 그가 지녔던 아들로서의
권위와 품위와 지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좋은'으로 번역된 '프로텐'(proten; best)이라는 단어가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처음의', '첫째의'라는 의미로서 명사, 관사와 함께 쓰여 실제로나
생각에 있어 가장 완벽한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그가 입었던 옷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옷을 말한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에서 '가락지'('닥튈리온'; daktyllion; a ring)는
'손가락'을 뜻하는 '닥튈로스'(daktyllos)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손가락이나 가락지는 어떤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가락지도 아버지의 재산이나 권위를 이어받는 상속자로서의 자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반지를 끼었다는 그 사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위를 아들에게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에서 신발은 '샌달'을 의미하며 고대인들에게 신발은
자유인의 표시였다. 당시의 종들은 맨발로 생활하였고, 또한 손님이 집에 들어오면
신발을 벗게 되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주인(主人)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버지가 신을 신도록 허락했다는 것은 종살이하던 먼나라에서 맨발로 돌아온
아들을 집을 나가기 전과 같이 여겨주었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상속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락지도 손가락에
끼웠으며, 더군다나 아버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인만이 신을 수 있는 신발을
가져다가 신김으로써, 아들의 신분은 이제 집에서 나가기 전에 누렸던 상속자의 위치로
회복되었다.
작은 아들이 자신을 스스로 아버지의 종으로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살진 송아지'는 가장 귀한 손님이 오는 날에 잔치를 베풀기 위하여 준비해
둔 것이다. 이 송아지는 여러 마리 송아지 가운데 살이 가장 많이 오르고 기름이
흐르는 것으로서 귀한 손님이 올 경우에 잡으려고 특별히 양육해 왔던 송아지이다.
어떤 학자들은 '잡아라'로 표기된 '튀사테'(thysate; kill it)의 원형인 '튀오'
(thyo)가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주로 희생 제사에 관련된 것이기에
일단은 사람이 먹기 위해 송아지를 죽이는 의미가 있지만, 그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송아지는 어쩌면 죄를 지은 자신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 앞에서 송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송아지가 죽는 저 자리에
죄를 지은 자신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버지와 하느님께 크나큰 죄를 지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리라 보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떠났다가 회개하고 다시 하느님의 자녀의 자리로 돌아온 자를
맞이하는 하느님의 기쁨이 바로 이런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이렇게 다시 정리되니 참 기쁘다.
무엇보다도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죄인들인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품에 돌아왔을 때, 하느님께로부터 이런 감당치 못할 자비를 영적으로 얻어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래서 이런 주님의 크신 용서와 자비로 표출되는 사랑에 대해 어떻게 사랑으로
보답해야 되겠는지를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묵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