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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묵상글 (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 하느님의 것이고 작은 이들의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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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의 것이고 작은 이들의 것
오늘 복음에 어린이에게 축복을 청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꾸짖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왜 꾸짖었을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축복 청하는 것이 꾸짖음을 들을 만큼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제자들이 터무니없이 꾸짖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잘못인지.
주님께서 쉬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이중 어떤 하나가 그 이유일 수 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제자들이 어린이를 업신여겨서 그런 것이 아닌지 추측이 됩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도리어 주님께서 꾸짖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힘 있는 사람들만 최고 권력자 가까이 갈 수 있고,
무엇을 갖다 바칠 것이 있는 사람들만 최고 권력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힘없는 사람이나 갖다 바칠 것이 없는 사람은 가까이 갈 수 없겠지요?
달라고만 하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가까이 갈 수 없음은 말 하나 마나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런 건 하느님 나라의 짓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짓이 교회 안에도 있으면 주님은 마찬가지로 꾸짖으실 겁니다.
예를 들어 10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교회 주교들이 교회 안의 힘 있는 이들은 교황을 만나게 하고
그 당시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 교황을 만나러 오는 것은 막았다면,
교황은 힘없는 “어린이들을 놓아두어라.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라는
오늘 주님 말씀을 가지고 한국교회 주교들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나라라면
세상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찾아오면 결코, 막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환영할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권이 오로지 하느님께 있고,
하느님의 주권 아래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별이 없으며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고 형제들이기에 차별도 배제도 없는 나라입니다.
마태오복음 23장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같은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였지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신자라면
신자 중에서도 작은 이들인 프란치스칸이라면
어린이나 작은 이들을 환대할 것이고,
인간으로 환대할 뿐 아니라 예수님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의 순교자 중에 황희광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회 최하층의 백정 출신이신데
배교하라는 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배교를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당신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는데 하나는 저 하늘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양반과 백정이 같은 형제라고 하는 이 천주교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지금 우리의 교회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환영받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인지.
우리 교회마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이 자기들의 교회인 양 차지하고
가난한 사람, 아쉬운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것인데
하느님마저 밀어내고 내가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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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나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곧바로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포기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전자가 우리의 기도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를 특별한 장소에서만 하는 것이라면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적, 장소적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디에서나 가능합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일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완벽한 장소, 완벽한 시간에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장소와 시간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상관없이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 맛을 알고 또 기도의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계속 기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엄마에게 매달려서 계속 칭얼거리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무엇을 부탁했고, 엄마는 안 된다고 거절한 상황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끈기가 대단합니다. 저 정도 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아이를 보면서 저도 저럴 때가 있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맞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쉽게 포기했던 것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냥 쉽게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포기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린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쉽게 깨닫습니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기도를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분심이 빠집니까? 이 분심에 빠지지 않기 위한 어떤 노력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에서 자기 삶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를 가리켜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자기를 낮추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매달리는 우리이지만, 그 매달림은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임해야 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엄마, 아빠’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것을 찾는 삶이 아닌 주님 곁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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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삶에 대해 절망하지 마라. 우리에겐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할 만한 힘이 있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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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심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자청년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다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련하여 이끌어갑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18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
“너희들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로 여기건만 제자들은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이처럼,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하며, 동시에 사회에서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복음의 뒷 장면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부자청년(19,16-22)과 자신들의 성과에 목소리를 높이는 제자들(19,27)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어린이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고, ‘작은 자’ 되게 하고,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가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면, 우리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복음화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단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나 혹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단지 ‘어린이에게 다가가라’ 혹은 ‘어린이를 돌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 곧 ‘어린이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주님!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어린이처럼,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진정 약하기에,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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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린이들과 같은 모습
오래전의 일입니다. 구역 미사를 봉헌하러 갔더니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했습니다. 어른들‘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하면서 특혜를 준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 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 봐야 합니다. 시끄럽고, 철없고 교회의 거룩함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고 십자성호를 긋는 동작이 기특합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막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구라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시편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주일학교 미사 때 가장 신나고 크게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저학년 유치부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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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철학 시간에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배웠습니다. 영국 경험론의 석학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는 실로 그물을 만들어 놓고, 먹이가 들어오면 유유히 잡아먹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라는 그물을 던져서 죽음으로 몰았던 대사제와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사기꾼들이 그렇습니다. 독재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그물을 던져놓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세력이 그렇습니다. 조작과 회유, 별건 수사와 압박으로 거짓 증언을 시켜놓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아놓고 사냥하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은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성서는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형’ 인간입니다. 개미는 누구를 해치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솝우화에서 개미는 배고픈 베짱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개미형 인간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가톨릭교도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지구 온난화, 환경 파괴, 전쟁과 폭력은 개미형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미형 인간이었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꿀벌형’ 인간입니다. 꿀벌은 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꽃가루를 수분(受粉; pollination)시켜 줍니다. 꿀벌은 꿀을 얻는 대신에 나무의 번식을 도와줍니다. 남는 꿀은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율법 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지 못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주인공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꿀벌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의 노래는 암울했던 시대에 맞서 투쟁했던 이들에게 귀한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만들었던 소극장 ‘학전(學田)’은 젊은 연극인들에게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연출한 작품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꿀’이 되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달릴 길을 다 달렸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꿈꾸었던 ‘이 세상 어딘가에’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 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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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본당 신부로 살면 매주 아이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곳 성지에서 지내면 아이들을 만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가끔 가족들이 함께 이곳을 방문할 때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전부입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부모의 모든 감정과 행동과 표정은 자들에게 그대로 스며든다.’
이 말은 아직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외로움, 소외됨, 함께 하지 않는 모습은 그대로 아이들에게 스며듭니다. 또한 어머니의 불안과 초조, 불신과 감정 기복 역시 아이들에게 스며듭니다.
부모가 집에서 큰 소리로 싸우는 날이면 아이의 불안은 극도로 치닫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이기적인 모습과 과도한 사랑 역시 아이들에게 스며들어 자신이 대우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삶의 모습을 마주하면 못 견디는 모습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이는 오늘 복음 속의 아이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완전하고 안정된 사랑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라도 삶이라는 파도를 건너다보면 불안과 초조, 미움과 다툼을 겪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 아이들의 사이를 막지 마십시오. 우리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는 핑계로 주님 만날 기회를 막지 마십시오.
주님을 만나며 아이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성장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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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는?
어느 날 동생에게 이렇게 톡이 왔습니다.
도마뱀은 파충류
고래는 포유류
그럼, 오징어는?
저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오징어는 연체류
음…. 아니면 무 뼈류^^
동생은 이내 답을 했습니다.
오징어는 안주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류’일까요?
선한 류? 착한 류? 하늘나라 적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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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되라
“회개의 여정”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어제 저녁식사중 찐 계란이 담긴 작은 잔마다 깨알같이 작은 영문 글자가 있어 자세히 읽어봤고 반가워 옆 수도형제와 나눴습니다.
“Happiness is enjoying the little things in life”
(행복은 삶에서 작은 것들을 즐기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이같은 단순함의 특징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에서도 어린이같은 단순함이 빛납니다.
“공자의 진정한 뜻은 문장과 글자가 아니라 일을 이룸에 있다.”<다산>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간직하겠습니까, 아니면 팔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논어>
이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단순함 역시 어린이같음의 특징입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천진무구天眞無垢, 마음의 순수는, 어린이다움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진리 추구의 열정에 있음을 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도 어제 결혼에 대한 잠언처럼 통찰과 지혜가 가득합니다. 제가 50년전 20대 후반 초등학교 교사시절 함석헌 선생님이 번역한 <예언자>를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부하는 마음, 배우는 마음으로 독수리 타법으로 “아이들에 대하여” 일부를 옮겨 봅니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뿐 너희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을 지라도 너희의 소유가 아니니라
너희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라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음으로
너희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이런 경외의 마음으로 대할 때 어린이같은 아름다운 겸손한 영혼입니다. 분명코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어린이같음의 최정상에 있는 분이라 단언합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했을 때 사람들을 꾸짖은 제자들의 완고함은 꼰대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과연 달랐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다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단순성, 개방성, 배움의 정신, 편견으로부터 자유, 변화와 적용에 준비되어 있는 유연성일 것입니다. 오직 이런 이들이 온전히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어린이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얹어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다음,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처럼 유유히 떠나시니 뒷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즉시 연상되는 앞서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18,4)
하느님 앞에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역시 기도와 회개도 함께 갑니다. 끊임없는 기도에 끊임없는 회개요 어린이다움의 순수와 진실, 그리고 겸손입니다. 어제 교황님은 기도와 평화의 복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는 변형의 시작이다. 기도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오늘날은 어느때 보다 인류는 평화의 복음을 필요로 한다. 모든 신자는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나누라 불림 받고 있다.”
평화의 복음 선포에 앞서 기도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회개의 구체적 내용을 적시합니다. 공정과 정의의 의로운 사람들이요 어린이와 같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1.산 위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집안의 우상들에게 눈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2.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고 달거리하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3.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4.강도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5.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주고,
6.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7.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8.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9.주님의 규정들을 따르고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이런 삶의 현장에서 회개의 구체적 실천에 충실한 자들이야말로 어린이와 같은 좋은 심성의 사람들입니다.
죄지은 자만 죽습니다. 위에서처럼 역겨운 짓을 한 이들은 살지 못합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가 죽은 책임은자신에게 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선행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어린이와 같은 삶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요! 기도와 회개를 일상화하는 “기도와 회개의 시스템” 같은 수도원 일과표가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충고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생 영을 갖추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회개의 여정과 어린이와 같은 삶은 함께 갑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날로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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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앞에 한 아이>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보니
나를 보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웃으니
내게 웃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다가가니
내게 다가오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손 내미니
내게 손 내미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건네니
내게 건네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안으니
나를 안네
내 앞에 한 아이
너를 보니
내가 보이네
내 앞에 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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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9,15)
어린이의 특성
우리가 창조주께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피조물의 사악함과 타락뿐입니다. 지혜가 모자라는 것이 그 길을 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완전함을 추구하시며, 여러분이 다가가는 것은 완전함을 추구하시는 그분께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이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혜의 결핍이 어린이들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생각히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1코린 14,20)이라고 합니다. 마르코도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고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루카도 마태오가 앞에서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루카 18.16),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이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런 자질들을 우리가 선택에 의해 갖추기를 바라십니다. 순박함, 남들한테 당한 해를 쉽사리 잊어버리는 것, 부모에게 매 맞을지라도 그들을 사랑하는 것 같은 것들이 그런 자질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에게 당신의 손을 얹으신 것은 안수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무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우리는 엑카르트가 하느님 나라를 천국, 영생,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는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의 복과 연결 짓는다. 그는 이렇게 하기 위하여 야곱의 꿈을 두 차례나 인용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꿈속에서, 하느님은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한다. 야곱이 꾼 꿈의 주제는 복이다. 그 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앞에 소개된 여덟 개의 설교에서 살펴보았듯이, 엑카르트의 창조신학 전체는 복의 신학이다. 생명은 전부 창조주의 선물이자 복이다. 존재, 생명, 존재의 평등, 신성의 공유도 창조주가 내려준 복이다. 하느님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의 천 배라도 주고 싶어 하는” 게 바로 그러한 복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수용성을 요구한다. 엑카르트와 예수도 우리의 수용성을 강조한다. “진실히 말하거니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르 10,15). 복음서들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회개 및 메타노이아 혹은 마음의 변화와 연결짓는 반면, 엑카르트는 하느님 나라를 깨달음과 연결짓는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회개와 메타노이아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우리가 창조주의 은혜로운 축복의 그물 속에 들어 있음을 깨닫는 것, 하느님 나라는 준비되어 있다. 우리가 받아들일 채비만 한다면 말이다.(222)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에서 '성전'은 없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지휘관들이 “하나님이 북군 편을 들어 주도록 기도하자”고 했을 때, "하나님께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 북군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군대가 되도록 기도하자'라고 말했던 링컨의 태도는 훨씬 더 신앙인다운 태도이며 오늘날에도 음미할 만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전쟁은 범죄이고 악일 수밖에 없다. 다만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지적한 대로, 인간의 집단 이기심으로 인해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더 큰 악을 견제하고 징치(懲治)함으로써 더 작은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인간 상황 때문에"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념은 결국 정의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세계를 창조해 가려는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거룩한 것을 지향하는 열정이 ‘하나님의 뜻과 명령' 이라는 신앙 고백적 반향으로서 울려퍼지는 종교적 이데올로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聖戰)은 없는 것이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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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9,14)
어른은 예전에 모두 다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어린이다움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른이 된 다음에 어린이들을 보면서 어린이다움을 정의하지만, 어린이다움을 한마디로 정의한다, 는 게 쉽지 않음을 느낄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모든 어린이는 다 다르고, 서로 다른 어린이가 각자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한 어린이에게도 다양한 특성과 마음이 있는데도 대개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보편의 어린이다움을 찾으려 합니다. 어린이들에게서 각자 다른 점을 보려 하기보다는 어른을 기준으로 해서 어른과 대비되는 어린이들만의 공통된 특성을 찾고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점이 분명히 있으며, 그 점들 상당수는 어른이 본받을 만큼 반짝이며, 그 점이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물론입니다. 아직도 저는 어린이를 잘 모르고, 어린이다움이 무언지 잘 모르지만, 다만 어른이 되면서 어른들을 볼 때, 어른을 두고 어른다움으로 묶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어른은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이는 자기가 기준이 아니고 여전히 어른이 기준이어서 어린이다움으로 묶으려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어린이다움이라는 동일하고 고정 불변한 속성으로 어린이를 묶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다움을 모른다고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 어린이의 존재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에선 아버지가 아들에게, 율법 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을 빌어주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요즘 모든 본당에서 영성체 시간이 되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어른 예비 신자들과 어린이들이 축복받기 위해 나오기도 합니다. 축복을 내려주고 축복받고자 하는 마음 밑바닥에는 하느님께서 여기 함께 계시다, 고 하는 믿음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순수한 마음으로 청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9,14)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어린이들이 지닌 그 무엇이 하늘나라에 가장 최적화된 영성적인 면일까를 궁리하다가, 오래전에 읽었던 이현주 목사의 「예수에게 도를 묻다.」라는 책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책에 보면, 오늘 복음과 병행 구절인 마르코 10,13-16의 대목을 해설하는 부분인데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하려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그래서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이 물을 받아들이고 불이 불을 받아들인다. (...)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어렸을 때 지녔던 ‘순진한 마음’을 버리고 이것과 저것을 가려 좋은 것은 잡고 싫은 것은 버리는 ‘분별심’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고통과 절망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축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에게도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자녀보다 더 귀한 하느님의 선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프랑스의 종교 학자인 르낭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천국의 요소는 첫째로 어린아이이고, 둘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 즉 소외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 시대 가장 작은 자들에게 가장 친절하고 호의가 넘치셨기에 늘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언제라도 어린이들에게 축복을 내리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어 축복하시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19,15)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며 축복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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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마음비운 겸손한 이만이 하늘 나라에 /
박윤식 [big-llight] 24016 21:14 ㅣNo.175098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결코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는 그곳을 떠나셨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는다. 아마도 그분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는 데 그들이 방해된다고 생각하였으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막지 말라셨다.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다.”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배울수록 겸손해져야만 할게다. 자신이 가진 지식에 만족하다 보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에 빠지기에. 자신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알고,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자부심’이 생기곤 한다.
나아가 오로지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하느님마저도 평가하게 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할게다. 그러면 도대체 어린이들은 왜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게 하는 걸까? 그들은 어른들처럼 죄 짓지 않고 순수하기에. 또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잘 의탁할 줄 알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겨지기에. 둘 다가 딱 맞는 것 같지만, 여기 한 가지 더 바로 ‘약함’이란 게 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의 뚜렷한 특성일 게다.
어쩌면 그들처럼 단순하고 순수하게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음을 지녀야만, 하늘 나라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기에. 곧, 그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이들의 차지라는 거다. 사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먼저 배려해야 할게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스스로가 사회적 약자가 되어야 하리라. 강자의 처지에서 약자를 보살펴 주는 게 아닌, 스스로 약자가 되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기에.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이 약함이다.
이 어린이들처럼 아무런 개인적 욕심이나 이기심에 얽매이지 않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실천하려 할 때만 우리는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될게다. 예로부터 ‘순수한 이들만이 랍비들보다 하느님께 더 가깝다.’라는 유다인들의 격언이 있다. 그러기에 늘 순수함과 겸손한 자세를 잃지 말고, 주님의 뜻을 옳게 깨우치도록 노력해야만 하겠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과 생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할까? 해맑고 순수한 어린이처럼 단순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에 우리 삶에서 맑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자꾸자꾸 비워 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멀리하려고 하는 어린이를 받아들이신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사랑에 온전히 자유로우시면서, 모든 이, 특히 철부지 같고 덜 성숙한 어른들의 그릇되거나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셨다. 그분께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정과 교회가 당연히 보여 주어야 할 관심이라고 선포하시듯이,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셨다.
악의 없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어린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는 이의 상태이다. 사람은 나이 들면 기력은 물론 기억력도 많이 떨어져 단순하게 생각할 게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어린이들이 자주 삐지듯 곧잘 섭섭해지기 일쑤다. 이렇게 단순해지는 게 나쁘다 할 수 없다.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고 기도한 이들은 천진한 ‘어린이마냥’ 해맑아지는 게 보기에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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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라고 묻습니다.
어린이들은 그런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하늘 나라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그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19,13)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그렇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당하다고 하여야 할까요? 그러나 현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릴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세례를 받은 이들의 신앙에서, 나이 들어 교리와 신학을 연구한 이들의 신앙과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신앙이 그들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른들이 “데리고” 온 어린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고 먼저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시고, 당신 가까이 머물도록 곁을 내주십니다. 그 어린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이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19,14)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묻기 전에 먼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를 거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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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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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것을 막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보자면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여기까지의 모습에서 어린이들은
단지 사람들과 제자들, 즉 어른들의
행동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즉 어린이들이 직접 예수님께 다가왔다던지
그런 어린이들을 제자들이 막았다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은 이야기에서 하나의 배경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표현이 바뀝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들을 축복해주십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어린이들이
아직 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사가 역시 어린이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쉽게 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과 직접 관계를 맺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또는 다른 사람이 대변하는 식으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직접 그를 만나
그의 생각을 듣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 전해 준 내용을 바탕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그 사람의 뜻과 정 반대로 전달되어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을 직접 만나고
그들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관계가 편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적고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렇게 상상한 것이
그 사람의 원래 모습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에게 집중하십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그들을 막는 제자들도 아닌
어린이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쏟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주위의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한 사람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배경으로 밀어내는 사람이 없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한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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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어린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이곳 태안에서는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마을 입구에 큼지막한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가정에서건, 학교건, 성당이건, 아동양육시설이건, 어디든지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상전 모시듯이 정성껏 양육하고 동반합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그간 너무한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남자 성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유아나 어린이 사망률이 높던 시절, 일단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한 인간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도들은 예수님께 축복을 청하러 오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과도한 사목활동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린 예수님이신데,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사도들은 언짢아하며, 그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때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어린이들을 무시한 사도들을 크게 꾸짖으십니다.
어린이들도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그들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여름 내내 많은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처럼 속이 구리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도 않습니다.
노회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순수하고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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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13절) 제자들은 아이들 때문에 예수께서 피곤해지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얼마 전에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앞에 세우시고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하셨다. 이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어린이의 순수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예수께 올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막고 있다. 순진한 어린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막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빛바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4절)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거룩한 삶의 방식으로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갖추라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어린이들처럼 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되지 않는 한,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18절) 사도 바오로는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1코린 14,20)라고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하느님께서는 어린이가 지닌 자질들을 우리가 선택하여 갖추기를 바라신다. 즉 순박함, 남들에게 당한 악을 악으로 갚을 줄도 모르는 것, 부모를 사랑하는 것 같은 자질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으신 것은 바로 그 안수를 통해 그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무장하게 해 주신 것이다. 아이들에게 축복하시고 떠나시는 예수께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초대하신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도 순박한 어린이와 같이 앞뒤를 재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천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삶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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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린이처럼 다가가라
인형인 줄 알았는데 악마였다는 설정의 공포영화들이 많습니다.
예전의 ‘처키’가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귀여운 처키 인형에 도둑의 영혼이 들어가 사람을 해치려한다는 설정입니다.
인형이 분명히 움직였는데 배터리를 확인하니 배터리가 없는 것을 발견할 때의 공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요즘엔 제임스 완 감독의 ‘애나벨’이 있습니다.
인형을 통해 마귀가 사람의 영혼을 빼앗으려 한다는 내용입니다.
성당의 유리로 쓰였던 곳에 가두어놓고 매주 사제가 와서 기도하고 성수를 뿌려주지만 누군가 호기심으로 그 문을 열었다가는 큰일이 벌어집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마귀가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형은 그냥 죽어있어야 가장 예쁩니다.
인형이 칼 들고 서 있는 포스터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보일까요?
나도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또 다른 사람도 나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런 많은 만남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사람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밀쳐내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내가 위 공포영화처럼 겉모습은 인형이지만 손에는 칼이 쥐어져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왜 하늘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일까요? 어린이는 무언가 달라고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의 손에는 칼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안아주면 만족하는 인형과 같습니다.
어린이는 예수님께서 그저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께 뭔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예수님을 좋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형에게 준 재산을 자신에게도 주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진 것이 없어야 어린이처럼 욕심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내 손에 쥐어진 칼입니다.
어린이는 왜 욕심이 없을까요?
무언가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먹어 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먹어보지 못해서 맛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고, 힘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권력을 쥐고 싶은 것입니다.
이 욕구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내 손에 쥔 칼이 됩니다.
톰 행크스의 ‘그린마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두 여자 아이의 살인누명을 쓴 몸집이 거인 같고 험악하게 생긴 흑인 죄수와 그를 지키는 간수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처음엔 그 거인에게 잡히면 자기 목숨도 위험할 것 같아서 항상 주의했지만 나중엔 마음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자신의 병도 고쳐줍니다.
사실 그 흑인은 죽어가는 두 아이를 살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생김새만 보고 사람들이 그 사람이 죽였다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인데,
어린이들은 사적인 욕구가 적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있어서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어린이처럼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욕심이 없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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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소외와 차별은 큰 죄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9,13-15).”
1) 여기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이었거나, 아니면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지 말라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람들을 막은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0,14).
‘언짢아하시며’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막은 일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실 정도로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2)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라는 말씀은, 어린이들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해 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또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일을 해야 하고, 원한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연결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가장 크고 중요한 사명인 ‘복음 선포’는, 바로 그 ‘연결 통로’가 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연결 통로’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할 이유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라는 말씀과,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말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라는 임무를 주신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늘나라에는 소외와 차별이 전혀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에 없는 소외와 차별이 지상의 교회에 있다면, 그 교회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작은 이들, 즉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에게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작은 이들’이 한 사람도 소외당하지 않고, 차별 당하지 않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라고 계시니,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교회 안에 ‘소외’와 ‘차별’이 분명히 있고, 그 소외와 차별 때문에 신앙생활 하기를 어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연결 통로’가 되기는커녕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목소리가 큰 사람들, 즉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죄이기도 하고, 공동체 전체의 죄이기도 합니다.
4) 사도들은 그 소외와 차별을 대단히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야고 2,1-4)”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은, 사도시대 때부터 있었던 일이고, 사도들은 그것을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소외와 차별은 사랑의 정반대 쪽에 있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아주 엄하게 말씀하신 가르침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그래서 교회를 다스릴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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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주일학교 미사에서는 어른들의 영성체가 끝난 다음 아직 첫영성체를 하지 않아서 예수님의 몸을 모실 수 없는 꼬꼬마 친구들이 제대 앞에 길게 한 줄로 섭니다. 사제의 안수를 받기 위해서지요. 선생님이 나가라고 떠미니까 영문도 모르고 나오는 아이, 자기 형아가 나가니까 따라 나오는 아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부모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끌려나온 아이 등 나오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안수를 받는 그 순간만큼은 차분하고 조용해집니다. 자기가 받는 ‘안수’라는게 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게 자신에게 좋은 거라는거 정도는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부모가, 신뢰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이끌었기에 기꺼이 따라주는 겁니다.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하려고 드는 어른과는 달리, 자기가 믿고 사랑하는 이의 말에는 기꺼이 순명하는 것이 어린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른들 손에 이끌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간 어린 아이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부모님 손에 이끌려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잔뜩 서 있는 곳 한가운데로 나왔으니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게다가 그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자기를 데리고 나온 부모님께 언성을 높이며 혼을 내기까지 하니 아이들이 느꼈을 공포감은 더 커졌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제지하시고는 따뜻한 음성과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들을 달래주십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런 예수님의 손길을, 그분께서 당신 손을 통해 전해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제자들은 자신들도 한 때 ‘어린이’였음을 망각했나봅니다. 나이가 어려서 덩치가 작아야만 어린이가 아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이란 순수한 사랑으로 당신만 바라보고 철저하게 믿으며 따르는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분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답해 모든 걸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섰던 그 때에는 아무 계산 없이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는 ‘어린이’였을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큰 기쁨과 행복을 누렸겠지요. 그런데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대접도 받으며 그 안에서 나름 자기 ‘자리’도 생기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새 그만 우쭐해져 버렸습니다. 순수하게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르던 ‘어린이’의 모습을 잃고 예수님을 이용해 다른 것을 얻으려 드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어른인 그들의 눈에 어린이는 그저 ‘큰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귀찮게 만드는 하찮은 존재였고, 예수님 같은 중요한 분이 그런 별 볼 일 없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자기가 ‘질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꾸짖으며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든 겁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하찮게 여기는 그 어린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처럼 당신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라십니다. 이것 저것 재고 따지며 계산하지 않고, 예수님과 세상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는게 더 이득인지 저울질 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께 다가가고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 뜻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이 주는 물질적 이익이나 세속적인 쾌락이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그분과 함께 하는 기쁨만 있으면 충분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만으로는 성에 안차는 어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어린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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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주시고 ”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 (예레 31,29; 에제 18,2)라는
재미 있는 표현을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는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잘못을 아들이 물려받는다는 의미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배어 있는 사상입니다.
그 흔적을 마태오의 주님 수난복음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에게 한 마디 던집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27,24-25)
그런데 예언자는 이 사상을 반대합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이스라엘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에제 18,3-4)
예언자는 반대로 정의를 실천하는 의로운 사람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규정하신 법을 지키며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각자의 죄에 대한 응징은 각자가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31-32절)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단 한사람이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에서 나타나는 어린이들은 순진하고 욕심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거기에다 주님께서는 약하고 보잘 것은 사람을 의미할 때 이 어린이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부모에 뜻에 따라야 하는 힘없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자신의 죄의 댓가를 물려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예언자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약한 아이들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 정신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는 사실도 일깨워 주십니다 .
오늘 하루를 멋지게 보내며 내 가장 가까운 이웃을 존중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날이 됩시다.
특히 내가 무관심하며 그들의 아픔이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한 이웃, 이물이 없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했던 이웃, 병들고 늙고 아무 힘도 없다고 해서 깔보던 이웃,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해 주는 좋은 날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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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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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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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만군의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
<2024.8.17> 아침을 여는 묵상 (렘 50:33~46절)
❝만군의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
❚ 위험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보호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안전한 품에 거해야 합니다.
✔ 어떠한 삶의 모습이 요구됩니까?
➲ 하나님만을 자랑거리로 삼아야 합니다(33~37절).
하나님은 바벨론에 의해서 억압받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형편을 소상히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모두 억눌리고 있다. 적군이 그들을 사로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33절,쉬운성경).. 그러나 그들의 구원자는 강하니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을 위해 싸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참 평화를 바벨론에게는 불안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4절).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이 바벨론 내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예외 없이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특별히 ‘칼이...떨어지리니...’라는 표현을 다섯 번이나 거듭 반복함으로써 바벨론이 전쟁을 통해 완전히 파멸하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35~37절).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전쟁으로 인해 바벨론은 총체적으로 파괴될 것이며, 대적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하늘과 땅과 전 우주의 군대를 통치하시고 지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여 부르신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유 없이 조롱을 당하기도 하고, 고통을 맛보기도 합니다.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면제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시는 만군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은혜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에 찬양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낙심하지 말고,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만을 자랑거리로 삼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38~40절).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즉, 바벨론의 멸망의 원인은 교만과 우상 숭배에 있다는 것(38절)입니다. 그 땅에 임한 기근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 수 없고 들짐승들만 거하는 폐허가 될 것입니다(39절). 소돔과 고모라 성을 그 주변 성들과 함께 완전히 멸망시키셨던 것처럼 바벨론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머물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0절).
만군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땅은 물이 마르고 사람이 거하지 못하는 황량한 땅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영혼의 마음 역시도 메마른 심령이 되어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목말라 하고, 배고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돈과 권력과 세상의 지혜 등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비겁하게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만군의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만군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분의 능력의 팔이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삶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만을 나침반으로 삼아야 합니다(41~46절).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칼’은 북쪽에서 오는 ‘한 민족’입니다. 그 나라는 메대와 바사로 구성된 고레스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활과 투창을 가졌고, 잔인하고 용맹스럽습니다(41~42절). ‘한 민족’의 공격에 대한 소문을 들은 바벨론의 왕은 기력을 잃을 뿐만 아니라 해산하는 여인처럼 극심한 괴로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43절). 먹이를 순식간에 포획하는 사자처럼 바벨론의 대적은 바벨론 왕이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는 순간에 바벨론을 신속하게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44절). 결국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이며, 그 계획과 의도에 따라 바벨론은 파괴를 당할 것이며, 바벨론의 멸망은 열방 중에 분명히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45~46절).
아무리 견고한 처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수 없을진대 우리는 혹 여전히 세상적인 지혜와 우리의 노력 등을 도피처로 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뜻하신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믿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취될 것이고, 악인을 향한 철저한 심판 역시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철저하게 말씀을 의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우리 인생에서 겪게 되는 모든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할 때 현실을 뛰어넘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우리의 인생에 나침반으로 삼고 살아가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현장을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담대한 삶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말씀의 성취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50:33~4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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