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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상
제 1장 고대 지중해 연안의 사회유형
1. 1. 진보한 농업사회
당시의 지중해 연안은 농산물을 특징으로 하는 농경사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회의 분배 구조가 소수 집단의 통제력 아래 있음을 암시한다. 농경사회라는 개념은 그 나라의 경제적 기반이 곧 농업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농업사회를 의미하며, 도시의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시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중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에는 지주와 부자, 사회적 통제력을 장악하고 농촌과 도시를 지배하는 엘리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촌사회는 이들에게 종속되어졌으며, 이것은 생산방식이 전(前)산업적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노예사회?
지중해 지역의 사회 유형에 대해 저자의 평가는 “농업생산물과 그것의 재분배 체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사회를 특징짓는 근본적인 역할을 볼수 있다. 이것을 ‘의존적 노동의 전형적 형태’인 ‘노예 노동’ 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농촌 및 도시 생산의 토대’ 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정이 노예 노동의 기여와 중요성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이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브런트의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노예는 전체인구의 3분의1에 불과 했고, 더욱이 노예노동은 농업 생산의 핵심지역인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노예노동은 비중 있는 요소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중해 지역사회에서 가장중요한 생산요인은 경제적으로 다소간 의존적인 소농, 소작농, 품값 노동자의 노동력과 토지 소유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노예제도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였을 것이다. 기술수준 혹은 사회적 권력이 결정적인 요인인가?
토지나 생산요인 외에도 사회구조, 특히 사람과 재물에 대한 통제권 배분의 구조는 그 사회의 유형을 평가하는데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다른 사회이론들은 기술수준이나 사회적 권력의 시행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소버그는 사회형태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서, 핵심적인 독립변수의 기술에 따라 사회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민족/사회, 둘째는 전(前) 산업사회, 셋째는 산업 도시 사회로 기술수준이 사회구조 및 다른 변수(도시, 문화적 가치, 사회적 권력)에 대한 영향력과 더불어 위에서 언급한 사회 유형에 독특한 특성을 부여한다는 점을 참작하였다. 그는 고대 지중해 연안의 사회는 봉건적 -전 산업적 사회에 속한다. 맥뮬렌의 주장을 살펴보면, 토지는 가장중요한 부의 원천이었으며, 도시는 농촌 지역과 밀접한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고 저자는 그의 의견을 따르고 있다.
그의 의견을 어떤식으로 구분하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결정론을 배제하고, 기술 수준과 사회구조, 통제 권력과 기초적 생산관계를 나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견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있다. 어떤 것이 그 사회의 유형을 정의고 있다. 다른 사회유형들 중요한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을 따르고는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농업 사회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개념은 고대 지중해 연안 사회형태의 두 가지 근본적인 요인을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런 이유에서 농업사회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개념이야 말로 고대지중해 연안 사회 형태의 두 가지 근본적인 요인을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1.2. 농업 사회의 생성과 확대
렌스킨의 거시 사회학적 연구는 농업 문화를 초기 유형인 원예사회와 후기 유형인 산업사회로 양분한다. 그에 따르면, 농업문화는 ‘일련의 발견과 발명’에 의해 촉발되는 ‘생산과 운송과 유통에 엄청난 진보를 가져온 사회 혁명’이다. 기술 혁신 또한 이러한 사회유형의 발전을 부추겼다. 특히 철제 쟁기의 발명 및 생산, 짐승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작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것 같다. 더욱이 바퀴와 돛의 발명으로 운송조건이 발달되었다.
제 2장 고대 지중해 연안의 경제적 상황
2.1. 고대 경제에 대한 논의
고대경제에 관한 글을 쓰고자 할때,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요인들은 상세한 전승 자료의 부족, 특히 통계자료의 결핍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간접자료들, 즉 고고학, 제명학, 동전학, 파피루스, 그 밖의 문헌증거물이 전부이며 이것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더욱이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 혹은‘생산’ 노동, 자본, 시장, 등 일련의 개념으로 증명하려는 것에 해당하는 동의어가 고대 언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인들도 경제활동의 부분의 영역을 어느 정도 구분 ·할 수 있으나, 경제적 이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현상으로 일어났다.
오이코노미아
‘경제’라는 개념이 그리스어로 ‘오이코노미아’ 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단어의 뜻은 ‘집안의 살림살이, 혹은 ’행정, 내지 ‘조직’과 같은 일반적인 의미였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와는 다른개념이었다. 또 우리가 ‘경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주인’ 이 자신의 자신뿐만아니라. 기원전 4세기초에는 모든경제영역에 유일하게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농업’에 관해 많은 지면을 활해하고 있지만, 부인에 대한 남편의 태도등도 다루고 있다. 핀리는 그런 의미에서 ‘경제’가 ‘ 근본적으로 윤리에 관한 책’이라고 말한다. 핀리 이외에도 폴리니의 획기적인 연구는 고대 경제 이론을 둘러싼 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경제 개념
현대 경제학에서 원칙적으로 ‘경제’란 서로 각축을 벌이는 여러 가지 목표를 놓고 희소한 재산을 분활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경제적으로’ 행동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폴리니의 경제이론은 경제의 형식적 의미와 실제적인 의미를 구분한다. 그는 고대의 경제형태와 현제의 경제형태 중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실제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한편, 문화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의해 수용된 인류학적 경제 관념과 통하는데, 그는 “한사회에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할 책임을 가진 모든 행위의 총체”를 이해했다. 그러나 ‘인류학적’경제 개념은 현대적 개념보다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인간의 변함없는 경제적 관심을 전제하지 않고, 어떤 사회의 공급을 위한 구체적인 경제 ‘행위’에도 항상 전통 문화적 가치가 스미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경제와 문화적 가치
예를 들어 폴리니가 말의 소유를 중요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당시 말이 노동력 때문이아니라 사회적 서열등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의 ‘문화적 측면’은 ‘자본’운용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원칙적으로 자본운용 가능성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법, 보물처럼 간직하거나, 토지에 투자하는 것으로 이것을 졀정하는 요건이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의 문화적 가치와 고대사회의 그가 차지한 지위였다.
키케로는 부동산에 투자하기를 권했는데, 이것은 명예를 향상되나 최대의 경제적 효용성을 바라는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성을 피하는 동시에 이웃의 부러움을 사자는 것이다(달란트비유 참조“ 마 25:14-30;눅 19, 12-27). 그러나 이 비유는 당시의 상황과 달리 이윤의 극대화에 대한 관심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왜냐면 땅에 묻어두었던 종이 엄한 꾸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농촌 주민의 일상적인 활동은 상호주의 즉 제로섬 균형(zero-sum balance)으로 귀결되는 상호적 경제 행위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고대경제는 ‘돈’ 으로 일하는 대신에 돈을 보물처럼 집안에 간직했으며,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같으며, 오히려 재정적 소득보다는 여러 가지 문화적 가치와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경제가 합리주의적 경제와 다른것은 반드시 이런 문화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폴리니는 고대의 경제적 행위가 사회의 집행 기관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현대적 형태인 경제와 구분한다.
2. 사회구조 속에 귀속된 경제
폴리니에 따르면, 이렇듯 경제 활동이 사회의 집행기관에 ‘귀속된 것’은 고대경제의 주된 특징이며, 이것은 근본적인 현대적인 경제, 즉 사회로부터 ‘독립된’, 그 사회에 대해서 ‘귀속 탈피속적’인 형태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현대의 경제와 구별된다. ‘귀속되어’있는 사회적 기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 이다.
당시 경제 활동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대개 상류층의 소유였던 토지인데, 이것은 부의 축적이 특정계층에게 한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는 가정내부의 자급 경제형태를 띠고 있어 모든 가족 구성원이 실제로 일을 하여 생필품을 마련했여고, 이것은 시장경제의 생성을 제약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 국가 경제의 연구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며, 모든 경제활동의 총괄적인 집중과, 일정 정도 이러한 활동의 독립성을 전제로 한다. 고대경제에 대한 연구는 현대 경제 형태인 시장 지향적 경제 형태에 대한 분석 및 통찰에서 비롯한 범주와 이론에 기대고 있다고 할수 있다.
3 . 고대 경제 이론 시대에 대한 조망
이러한 생각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세기말의 경제학자 뷔혀였다. 그는 고대의 경제 질서가 국가 경제로 간주될수 없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그 이유는 국가경제의 기초 조건인 시장생산, 제품과 서비스의 교환, 공장식 대량 생산물시장, 시장 지향적 교역, 자유 임금 노동등이 대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이켄(가정경제)라는 개념을 사용했던 로드베르투스의 연구에 기대어, 고대의 경제를 닫혀있는 가정 경제로 규정하고 이것을 중세의 경제 형태인 도시 경제와도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고대경제 순환 구조는 본질적으로 가족내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교역도 이루어졌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 전문가들의 견해가 고대사 연구에 큰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마이어의 견해를 따랐는데, 마이어는 뷔혀의 진보모델에 경제사를 끼워 넣는것을 거부하는대신, 다양한 시기속의 주기적 발단단계라는 관념을 받아들였다. 그는 고대경제를 현대의 국가 경제와 유비시켜는 방식을 정당화시켰다. 마이어의 방법은 한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로마 제국의 사회사와 경제사에 대한 로제토프체프의 연구역시 현대의 자본주의적이고 시장경제적인 카테고리를 지향하고 있다. 베버, 하제브로에크, 외르텔, 하이헬하임, 그리고 이미 언급된 경제사가인 폴리니의 지지를 받고 있는 뷔혀의 견해는 존스, 던컨존스, 그리고 특히 핀리와 같은 학자들의 경제사적 연구에 의해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
4 . 고대 경제 연구의 근본적인 성과
1. 로마제국에서 농업은 경제적으로 각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 상공업은 시장 지향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결핍에 근거했다. 특히 육지 수송의 비용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술, 기름, 그밖에 운송에 편리한 귀중만을 교역했다. 곡물의 해상 운송은 부피로 보면 상당하지만 비용은 적게 들었는데, 가능하면 땅도 비옥하고 항구로 가는 노정도 험하지 않은 곳이라야 했다(북아프리카/이집트).
3. 고대에는 현대적 의미의 시장은 없었다. 고대시장은 지역중심의 소수의 특권층, 즉 즉 생계 이외의 영역에서 이윤을 남기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4. 당시의 작업장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량 생산에는 부적합했다. 소수의 작업장은(노예까지 포함) 가족 경영이었으며 여기서는 특정 제품(도기, 벽돌, 직물류, 무기)을 전문적으로 대량생산 했다.
5. 일반적으로 도시는 생산보다는 소비 지향적이었다.
6. 재정경제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7. 주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했으며 이들의 지급수준은 매우 낮았다. 생산은 대개
소비품이었고 대개는 잉여물이 없었으며, 지배층은 수시로 주민의 재산을 갈취했다.
원칙적으로 농촌가장은 식량, 의류, 공구 등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다.
8. 그 당시의 경제 활동은 그 사회의 구조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가정 자급 경제와 더불어 고대 경제의 핵심요인이었던 토지는 확고한 권력 및 소유 구조에 의해 지배층의 수중에 있었다. 부의 축척은 이미 사회적으로 소수에게 집단인, 엘리트 집단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2.2. 지중해 지역 경제의 경제조건
모든경제 체제는 일정한조건 즉, 농업과 상공업과 서비스 영역의 생산에 특징을 부여하고, 운송 및 교환 혹은 시장을 통한 생산품의 분배 혹은 제품의 교환을 조종하고, 그것의 소비에 영향을 끼치는 경계조건을 제시하고, 여기에 지리적조건, 인구밀도, 사회적 계층, 기술, 국가적 법률적 기본 조건을 포함시켰다. 생산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수준과 노동조직이고 소비영역에서 운송수단의 발달과 교환체계, 그리고 돈이다.
물론 문화적 행동양식과 사회적 규범, 지리적 요건은 특정 지역의 자연상태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농업 및 공업 생산의 집중도와 논동 및 운송의 주건은 기술수준에 의해 각인 되었다. 지리적 요인 외에 기본적인 정치적 요인도 경제체계에 끼쳤는데, 제국을 다져놓은 정치적 조건은 경제적 팽창과 상품의 순환에 잇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정치적 조건은 재산권과 소유권의 보장뿐만아니라 운송로의 건설 및 안전성 보장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한 로마제국의 단일화폐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인이 된다.
1. 생산: 기술과 노동조직
1) 기술
이미 언급한데로, 농업사회의 발전을 가져온 근본적인 기술혁신은 철제 쟁기의 발명과 동물 노동력의 이용이다. 지중해 지역도 이러한 오래된 성과를 기초로 형성되었으며 여러 가지 철제 농기구들(괭이 삽, 낫), 분쇄기나 제분기, 나귀의 이용, 압축기 등을 이용했다. 대도시와 와 인근에는 곡식창고가 있었고, 건설업에는 간단한 크레인 사용되어,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마루나 난방에는 열에너지가 사용되었다. 고대사회의 난방은 엄청난 양의 연료를 필요로 한다.
육로 운송 및 항해
철제 쟁기의 보급 이외에도 배와 차를 통한 운송 조건의 개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역선은 대개 돛이 하나인 법선이었고, 그밖에 단거리 이동에는 노젓는 배를 사용한다. 선박이나 항구의 건설은 특히 클라우디우스 네로, 트라아누스 황제 통치기에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바로 이 해상 교역이 로마의 특별한 영역이었던 것으로 해상선박과 세계 각국의 이윤을 거둬들였다. 당시의 에너지원은 바람과 물이 사용되지 못하여, 오로지 인간과 동물의 에너지원인 황소, 나귀나 노새가 사용되었으나 제약이 많았다. 도로형편이 나쁘므로 짐나르는 짐승의 대여비가 높았다. 특히 음식류는 동물을 이요해서 운송했으며, 부피가 큰 화물을 나르는 데는 마차로, 단거리운송에는 노예와 일용노동자가 투입되었다. 로마가 통치가 모든 지역에서는 도로망 건설이 증가했으며, 이 도로망은 교량건설을 통해 더욱 나아졌다. 로마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열악한 도로체계를 정돈했다. 이러한 건축 사업은 로마의 군사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것이었다.
운송료
열악한 운송조건은 시장 중심적 경제로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특히 시골길을 통한 내부 교역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일차적으로 운송에 필요한운송도구의 부족과 다른 한편 고가의 운송료와 관련이 있다. 오로지 해상운송만이 원거리교역이 중요한 운송체계였다. 그러므로 원거리 운송은 부자들의 관심사였으며, 또한, 로마에서 상당한 수요가 있는 밀을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에서 들려오는 경우처럼, 국가가 백성들을 위해 값싼 필수품을 조달하는 경우에는 경제적으로 의미를 갖게 되었다.
2) 노동에 대한 고대인의 태도
노동에 대한 고대인의 태도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원칙적으로 비천한 사회의 신분과 연결되는) 정신적, 육체적 활동과 엘리트들의 몫으로 남겨진 사업과 능력, 의무의 근본적인 분리가 바로 그것이다. 에를 들면, 조각가는 감탄할 만한 재주가 있어도, 로마 상류층의 눈에는 한갓 수공업자에 불과했다. 로마인들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맡기는 사람들이 실제로 예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크세노폰, 헤시오도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도 독립적이고 지급능력이 있는 지주야 말로 사회적, 정치적 의미에서 이상적인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나태한 대중에게 식량을 보장해주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었으나 구약성서 및 유대교 전통은 직업간의 구분은 있지만 생계유지를 위한 육체적 노동을 비교적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의 경시
그러므로 고대의 상류층들의 눈에 노동은 근본적으로 아무가치가 없는 것이었고,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은 원칙적으로 천시되었다. 그러나 농업 노동은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농사일에도 사회적 입장이 주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농부가 자기소유의 땅에서 나온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가 핵심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고대사회의 엘리트들이 유난히 대토지를 소유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제나 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어 평가 받는다. 키케로의 글(58)의ㅡ 경우 토지의 취득과 소유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를 안겨주는 것이지만 세리나 고리대금업자 뿐아니라 여러 가지 세공업과 교역과 서비스 직종까지 경멸했다. 의술이나 건축과 같은 기예도 사회적 지위가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에게만 영예로운 직업이다.
3) 농촌 노동:소농, 소작농, 노예, 품삯 노동자
농촌노동은 모든노동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고대시회에서는 대다수 노동력이 농업부문에 투입되었다. 농사일은 소농민과 그 가솔, 소작농, 품삯노동자, 날품팔이꾼, 노예의 일이었다. 토지소유의 축적으로 자립 소농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한 반면 자기 소유지가 없는 품삯노동자나 소작농의 수는 증가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품삯 노동자들은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다. 특히 수확철에는 더욱 그랬다. 품값노동자는 대규모 농업단위였을뿐 소규모 농가의 노동분업은 그 가족 경영체제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상
제 1장 고대 지중해 연안의 사회유형
1. 1. 진보한 농업사회
당시의 지중해 연안은 농산물을 특징으로 하는 농경사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회의 분배 구조가 소수 집단의 통제력 아래 있음을 암시한다. 농경사회라는 개념은 그 나라의 경제적 기반이 곧 농업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농업사회를 의미하며, 도시의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시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중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에는 지주와 부자, 사회적 통제력을 장악하고 농촌과 도시를 지배하는 엘리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촌사회는 이들에게 종속되어졌으며, 이것은 생산방식이 전(前)산업적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노예사회?
지중해 지역의 사회 유형에 대해 저자의 평가는 “농업생산물과 그것의 재분배 체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사회를 특징짓는 근본적인 역할을 볼수 있다. 이것을 ‘의존적 노동의 전형적 형태’인 ‘노예 노동’ 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농촌 및 도시 생산의 토대’ 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정이 노예 노동의 기여와 중요성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이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브런트의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노예는 전체인구의 3분의1에 불과 했고, 더욱이 노예노동은 농업 생산의 핵심지역인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노예노동은 비중 있는 요소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중해 지역사회에서 가장중요한 생산요인은 경제적으로 다소간 의존적인 소농, 소작농, 품값 노동자의 노동력과 토지 소유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노예제도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였을 것이다. 기술수준 혹은 사회적 권력이 결정적인 요인인가?
토지나 생산요인 외에도 사회구조, 특히 사람과 재물에 대한 통제권 배분의 구조는 그 사회의 유형을 평가하는데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다른 사회이론들은 기술수준이나 사회적 권력의 시행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소버그는 사회형태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서, 핵심적인 독립변수의 기술에 따라 사회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민족/사회, 둘째는 전(前) 산업사회, 셋째는 산업 도시 사회로 기술수준이 사회구조 및 다른 변수(도시, 문화적 가치, 사회적 권력)에 대한 영향력과 더불어 위에서 언급한 사회 유형에 독특한 특성을 부여한다는 점을 참작하였다. 그는 고대 지중해 연안의 사회는 봉건적 -전 산업적 사회에 속한다. 맥뮬렌의 주장을 살펴보면, 토지는 가장중요한 부의 원천이었으며, 도시는 농촌 지역과 밀접한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고 저자는 그의 의견을 따르고 있다.
그의 의견을 어떤식으로 구분하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결정론을 배제하고, 기술 수준과 사회구조, 통제 권력과 기초적 생산관계를 나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견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있다. 어떤 것이 그 사회의 유형을 정의고 있다. 다른 사회유형들 중요한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을 따르고는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농업 사회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개념은 고대 지중해 연안 사회형태의 두 가지 근본적인 요인을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런 이유에서 농업사회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개념이야 말로 고대지중해 연안 사회 형태의 두 가지 근본적인 요인을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1.2. 농업 사회의 생성과 확대
렌스킨의 거시 사회학적 연구는 농업 문화를 초기 유형인 원예사회와 후기 유형인 산업사회로 양분한다. 그에 따르면, 농업문화는 ‘일련의 발견과 발명’에 의해 촉발되는 ‘생산과 운송과 유통에 엄청난 진보를 가져온 사회 혁명’이다. 기술 혁신 또한 이러한 사회유형의 발전을 부추겼다. 특히 철제 쟁기의 발명 및 생산, 짐승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작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것 같다. 더욱이 바퀴와 돛의 발명으로 운송조건이 발달되었다.
제 2장 고대 지중해 연안의 경제적 상황
2.1. 고대 경제에 대한 논의
고대경제에 관한 글을 쓰고자 할때,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요인들은 상세한 전승 자료의 부족, 특히 통계자료의 결핍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간접자료들, 즉 고고학, 제명학, 동전학, 파피루스, 그 밖의 문헌증거물이 전부이며 이것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더욱이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 혹은‘생산’ 노동, 자본, 시장, 등 일련의 개념으로 증명하려는 것에 해당하는 동의어가 고대 언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인들도 경제활동의 부분의 영역을 어느 정도 구분 ·할 수 있으나, 경제적 이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현상으로 일어났다.
오이코노미아
‘경제’라는 개념이 그리스어로 ‘오이코노미아’ 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단어의 뜻은 ‘집안의 살림살이, 혹은 ’행정, 내지 ‘조직’과 같은 일반적인 의미였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와는 다른개념이었다. 또 우리가 ‘경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주인’ 이 자신의 자신뿐만아니라. 기원전 4세기초에는 모든경제영역에 유일하게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농업’에 관해 많은 지면을 활해하고 있지만, 부인에 대한 남편의 태도등도 다루고 있다. 핀리는 그런 의미에서 ‘경제’가 ‘ 근본적으로 윤리에 관한 책’이라고 말한다. 핀리 이외에도 폴리니의 획기적인 연구는 고대 경제 이론을 둘러싼 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경제 개념
현대 경제학에서 원칙적으로 ‘경제’란 서로 각축을 벌이는 여러 가지 목표를 놓고 희소한 재산을 분활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경제적으로’ 행동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폴리니의 경제이론은 경제의 형식적 의미와 실제적인 의미를 구분한다. 그는 고대의 경제형태와 현제의 경제형태 중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실제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한편, 문화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의해 수용된 인류학적 경제 관념과 통하는데, 그는 “한사회에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할 책임을 가진 모든 행위의 총체”를 이해했다. 그러나 ‘인류학적’경제 개념은 현대적 개념보다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인간의 변함없는 경제적 관심을 전제하지 않고, 어떤 사회의 공급을 위한 구체적인 경제 ‘행위’에도 항상 전통 문화적 가치가 스미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경제와 문화적 가치
예를 들어 폴리니가 말의 소유를 중요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당시 말이 노동력 때문이아니라 사회적 서열등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의 ‘문화적 측면’은 ‘자본’운용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원칙적으로 자본운용 가능성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법, 보물처럼 간직하거나, 토지에 투자하는 것으로 이것을 졀정하는 요건이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의 문화적 가치와 고대사회의 그가 차지한 지위였다.
키케로는 부동산에 투자하기를 권했는데, 이것은 명예를 향상되나 최대의 경제적 효용성을 바라는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성을 피하는 동시에 이웃의 부러움을 사자는 것이다(달란트비유 참조“ 마 25:14-30;눅 19, 12-27). 그러나 이 비유는 당시의 상황과 달리 이윤의 극대화에 대한 관심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왜냐면 땅에 묻어두었던 종이 엄한 꾸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농촌 주민의 일상적인 활동은 상호주의 즉 제로섬 균형(zero-sum balance)으로 귀결되는 상호적 경제 행위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고대경제는 ‘돈’ 으로 일하는 대신에 돈을 보물처럼 집안에 간직했으며,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같으며, 오히려 재정적 소득보다는 여러 가지 문화적 가치와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경제가 합리주의적 경제와 다른것은 반드시 이런 문화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폴리니는 고대의 경제적 행위가 사회의 집행 기관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현대적 형태인 경제와 구분한다.
2. 사회구조 속에 귀속된 경제
폴리니에 따르면, 이렇듯 경제 활동이 사회의 집행기관에 ‘귀속된 것’은 고대경제의 주된 특징이며, 이것은 근본적인 현대적인 경제, 즉 사회로부터 ‘독립된’, 그 사회에 대해서 ‘귀속 탈피속적’인 형태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현대의 경제와 구별된다. ‘귀속되어’있는 사회적 기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 이다.
당시 경제 활동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대개 상류층의 소유였던 토지인데, 이것은 부의 축적이 특정계층에게 한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는 가정내부의 자급 경제형태를 띠고 있어 모든 가족 구성원이 실제로 일을 하여 생필품을 마련했여고, 이것은 시장경제의 생성을 제약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 국가 경제의 연구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며, 모든 경제활동의 총괄적인 집중과, 일정 정도 이러한 활동의 독립성을 전제로 한다. 고대경제에 대한 연구는 현대 경제 형태인 시장 지향적 경제 형태에 대한 분석 및 통찰에서 비롯한 범주와 이론에 기대고 있다고 할수 있다.
3 . 고대 경제 이론 시대에 대한 조망
이러한 생각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세기말의 경제학자 뷔혀였다. 그는 고대의 경제 질서가 국가 경제로 간주될수 없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그 이유는 국가경제의 기초 조건인 시장생산, 제품과 서비스의 교환, 공장식 대량 생산물시장, 시장 지향적 교역, 자유 임금 노동등이 대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이켄(가정경제)라는 개념을 사용했던 로드베르투스의 연구에 기대어, 고대의 경제를 닫혀있는 가정 경제로 규정하고 이것을 중세의 경제 형태인 도시 경제와도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고대경제 순환 구조는 본질적으로 가족내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교역도 이루어졌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 전문가들의 견해가 고대사 연구에 큰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마이어의 견해를 따랐는데, 마이어는 뷔혀의 진보모델에 경제사를 끼워 넣는것을 거부하는대신, 다양한 시기속의 주기적 발단단계라는 관념을 받아들였다. 그는 고대경제를 현대의 국가 경제와 유비시켜는 방식을 정당화시켰다. 마이어의 방법은 한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로마 제국의 사회사와 경제사에 대한 로제토프체프의 연구역시 현대의 자본주의적이고 시장경제적인 카테고리를 지향하고 있다. 베버, 하제브로에크, 외르텔, 하이헬하임, 그리고 이미 언급된 경제사가인 폴리니의 지지를 받고 있는 뷔혀의 견해는 존스, 던컨존스, 그리고 특히 핀리와 같은 학자들의 경제사적 연구에 의해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
4 . 고대 경제 연구의 근본적인 성과
1. 로마제국에서 농업은 경제적으로 각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 상공업은 시장 지향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결핍에 근거했다. 특히 육지 수송의 비용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술, 기름, 그밖에 운송에 편리한 귀중만을 교역했다. 곡물의 해상 운송은 부피로 보면 상당하지만 비용은 적게 들었는데, 가능하면 땅도 비옥하고 항구로 가는 노정도 험하지 않은 곳이라야 했다(북아프리카/이집트).
3. 고대에는 현대적 의미의 시장은 없었다. 고대시장은 지역중심의 소수의 특권층, 즉 즉 생계 이외의 영역에서 이윤을 남기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4. 당시의 작업장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량 생산에는 부적합했다. 소수의 작업장은(노예까지 포함) 가족 경영이었으며 여기서는 특정 제품(도기, 벽돌, 직물류, 무기)을 전문적으로 대량생산 했다.
5. 일반적으로 도시는 생산보다는 소비 지향적이었다.
6. 재정경제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7. 주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했으며 이들의 지급수준은 매우 낮았다. 생산은 대개
소비품이었고 대개는 잉여물이 없었으며, 지배층은 수시로 주민의 재산을 갈취했다.
원칙적으로 농촌가장은 식량, 의류, 공구 등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다.
8. 그 당시의 경제 활동은 그 사회의 구조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가정 자급 경제와 더불어 고대 경제의 핵심요인이었던 토지는 확고한 권력 및 소유 구조에 의해 지배층의 수중에 있었다. 부의 축척은 이미 사회적으로 소수에게 집단인, 엘리트 집단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2.2. 지중해 지역 경제의 경제조건
모든경제 체제는 일정한조건 즉, 농업과 상공업과 서비스 영역의 생산에 특징을 부여하고, 운송 및 교환 혹은 시장을 통한 생산품의 분배 혹은 제품의 교환을 조종하고, 그것의 소비에 영향을 끼치는 경계조건을 제시하고, 여기에 지리적조건, 인구밀도, 사회적 계층, 기술, 국가적 법률적 기본 조건을 포함시켰다. 생산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수준과 노동조직이고 소비영역에서 운송수단의 발달과 교환체계, 그리고 돈이다.
물론 문화적 행동양식과 사회적 규범, 지리적 요건은 특정 지역의 자연상태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농업 및 공업 생산의 집중도와 논동 및 운송의 주건은 기술수준에 의해 각인 되었다. 지리적 요인 외에 기본적인 정치적 요인도 경제체계에 끼쳤는데, 제국을 다져놓은 정치적 조건은 경제적 팽창과 상품의 순환에 잇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정치적 조건은 재산권과 소유권의 보장뿐만아니라 운송로의 건설 및 안전성 보장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한 로마제국의 단일화폐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인이 된다.
1. 생산: 기술과 노동조직
1) 기술
이미 언급한데로, 농업사회의 발전을 가져온 근본적인 기술혁신은 철제 쟁기의 발명과 동물 노동력의 이용이다. 지중해 지역도 이러한 오래된 성과를 기초로 형성되었으며 여러 가지 철제 농기구들(괭이 삽, 낫), 분쇄기나 제분기, 나귀의 이용, 압축기 등을 이용했다. 대도시와 와 인근에는 곡식창고가 있었고, 건설업에는 간단한 크레인 사용되어,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마루나 난방에는 열에너지가 사용되었다. 고대사회의 난방은 엄청난 양의 연료를 필요로 한다.
육로 운송 및 항해
철제 쟁기의 보급 이외에도 배와 차를 통한 운송 조건의 개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역선은 대개 돛이 하나인 법선이었고, 그밖에 단거리 이동에는 노젓는 배를 사용한다. 선박이나 항구의 건설은 특히 클라우디우스 네로, 트라아누스 황제 통치기에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바로 이 해상 교역이 로마의 특별한 영역이었던 것으로 해상선박과 세계 각국의 이윤을 거둬들였다. 당시의 에너지원은 바람과 물이 사용되지 못하여, 오로지 인간과 동물의 에너지원인 황소, 나귀나 노새가 사용되었으나 제약이 많았다. 도로형편이 나쁘므로 짐나르는 짐승의 대여비가 높았다. 특히 음식류는 동물을 이요해서 운송했으며, 부피가 큰 화물을 나르는 데는 마차로, 단거리운송에는 노예와 일용노동자가 투입되었다. 로마가 통치가 모든 지역에서는 도로망 건설이 증가했으며, 이 도로망은 교량건설을 통해 더욱 나아졌다. 로마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열악한 도로체계를 정돈했다. 이러한 건축 사업은 로마의 군사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것이었다.
운송료
열악한 운송조건은 시장 중심적 경제로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특히 시골길을 통한 내부 교역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일차적으로 운송에 필요한운송도구의 부족과 다른 한편 고가의 운송료와 관련이 있다. 오로지 해상운송만이 원거리교역이 중요한 운송체계였다. 그러므로 원거리 운송은 부자들의 관심사였으며, 또한, 로마에서 상당한 수요가 있는 밀을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에서 들려오는 경우처럼, 국가가 백성들을 위해 값싼 필수품을 조달하는 경우에는 경제적으로 의미를 갖게 되었다.
2) 노동에 대한 고대인의 태도
노동에 대한 고대인의 태도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원칙적으로 비천한 사회의 신분과 연결되는) 정신적, 육체적 활동과 엘리트들의 몫으로 남겨진 사업과 능력, 의무의 근본적인 분리가 바로 그것이다. 에를 들면, 조각가는 감탄할 만한 재주가 있어도, 로마 상류층의 눈에는 한갓 수공업자에 불과했다. 로마인들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맡기는 사람들이 실제로 예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크세노폰, 헤시오도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도 독립적이고 지급능력이 있는 지주야 말로 사회적, 정치적 의미에서 이상적인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나태한 대중에게 식량을 보장해주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었으나 구약성서 및 유대교 전통은 직업간의 구분은 있지만 생계유지를 위한 육체적 노동을 비교적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의 경시
그러므로 고대의 상류층들의 눈에 노동은 근본적으로 아무가치가 없는 것이었고,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은 원칙적으로 천시되었다. 그러나 농업 노동은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농사일에도 사회적 입장이 주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농부가 자기소유의 땅에서 나온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가 핵심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고대사회의 엘리트들이 유난히 대토지를 소유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제나 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어 평가 받는다. 키케로의 글(58)의ㅡ 경우 토지의 취득과 소유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를 안겨주는 것이지만 세리나 고리대금업자 뿐아니라 여러 가지 세공업과 교역과 서비스 직종까지 경멸했다. 의술이나 건축과 같은 기예도 사회적 지위가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에게만 영예로운 직업이다.
3) 농촌 노동:소농, 소작농, 노예, 품삯 노동자
농촌노동은 모든노동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고대시회에서는 대다수 노동력이 농업부문에 투입되었다. 농사일은 소농민과 그 가솔, 소작농, 품삯노동자, 날품팔이꾼, 노예의 일이었다. 토지소유의 축적으로 자립 소농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한 반면 자기 소유지가 없는 품삯노동자나 소작농의 수는 증가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품삯 노동자들은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다. 특히 수확철에는 더욱 그랬다. 품값노동자는 대규모 농업단위였을뿐 소규모 농가의 노동분업은 그 가족 경영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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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