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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太王(태왕)의 恩澤(은택)이 皇天(황천)에 두루 미쳤고, 太王(태왕)의 威武(위무)가 四海(사해)에 떨치셨다(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 부터 體格(체격)이 크고, 생각이 大凡(대범)하였다.
『三國史記(삼국사기) 高句麗(고구려) 廣開土王(광개토왕) 本紀(본기)』
高句麗(고구려)의 第(제)19代(대) 君主(군주). 談德(담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제법 알려져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基準(기준)으로는 高句麗(고구려)의 始祖(시조) 東明聖王(동명성왕)의 13世孫(세손)이다.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에는 17世孫(세손)으로 記錄(기록)되었는데 아마 直系(직계)가 아닌 王系(왕계)를 基準(기준)으로 한 것 같다.
18歲(세)의 젊은 나이로 王位(왕위)에 올라 39歲(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韓國史(한국사)에서 世宗大王(세종대왕)과 더불어 大王(대왕)이라는 稱號(칭호)를 '大衆(대중)'들이 자주 붙여 부르는 몇 안되는 王(왕)이기도 하다.
History Special(歷史(역사)스페셜)-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
第(제)1部(부) 東邦(동방)의 Alexander(알렉산더),
고담덕(高談德)
History Special歷史(역사스페셜)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
第(제)2部(부)Pax Koreana(팍스 코리아나)
高句麗(고구려)에 依(의)한 平和(평화)
KBS HDHistory Special(歷史(역사)스페셜)
高句麗(고구려) 天下(천하)의 中心(중심)을 宣布(선포)하다.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비 / KBS 2005年(년).
7月(월) 1日(일)放送(방송)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公式的(공식적)인 互稱(호칭)은 當代(당대)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等(등)으로도 標記(표기)되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서는 이것을 줄여 廣開土王(광개토왕)이라 標記(표기)하였고 이것이 現代(현대)에 들어 公式的(공식적)으로 주로 쓰이는 名稱(명칭)이 되었다. 現代(현대)에 들어 여기에다 大王(대왕)이라는 尊稱(존칭)을 붙인 標記(표기)가 바로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이며, 이것이 一般人(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標記(표기)이기도 하다. 한편 當代(당대)에 使用(사용)된 太王(태왕) 稱號(칭호)를 尊重(존중)하여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줄인 '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이라는 標記(표기)가 使用(사용)되기도 한다. 以下(이하)는 歷史書(역사서)와 碑石(비석)에서 大王(대왕)을 稱(칭)하는 이름들이다.
諡號(시호)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廣開土太王陵碑文(광개토태왕릉비문) ~ 高句麗(고구려)~ 414年(년)
高句麗(고구려) 公人(공인) 諡號(시호). 高句麗(고구려) 歷代(역대) 國王(국왕) 가운데 有一(유일)하게 完全(완전)한 諡號(시호)가 전한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廣開土太王陵碑文(광개토태왕릉비문) ~ 高句麗(고구려) ~ 414年(년)
陵碑文(능비문) 1面(면)에서 位(위)의 公人(공인) 諡號(시호)를 한번 標記(표기)한 뒤, 4面(면)에서는 이렇게 縮約(축약)해서 標記(표기)하고 있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好友名(호우명) 그릇
新羅(신라) / 高句麗(고구려) ~415年(년)
新羅(신라)가 高句麗(고구려)의 影響權(영향권)에 있었음을 證明(증명)하는 遺物(유물) 中(중) 하나. '平安(평안)'이 脫落(탈락)하고, '廣開土境(광개토경)'이 비슷한 意味(의미)인 '廣開土地(광개토지)'로 바뀌었다.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牟頭婁墓誌銘(모두루묘지명) ~ 高句麗(고구려) ~ 5世紀(세기)
'平安(평안)'이 脫落(탈락)하고, '廣開土境(광개토경)'이 비슷한 意味(의미)인 '大開土地(대개토지)'로 바뀌었으며, '好太王(호태왕)'이 더욱 强(강)한 意味(의미)인 '好太聖王(호태성왕)'으로 擴張(확장)되었다.
九里市(구리시)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銅像(동상)
王號(왕호)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三國史記(삼국사기) ~ 高麗(고려) ~ 1145年(년)
高句麗(고구려) 歷代(역대) 國王(국왕)의 王號(왕호)가 《三國史記(삼국사기)》에 一括的(일괄적)으로 傳(전)하고 있으므로, 다른 國王(국왕)들과 一貫性(일관성)을 갖추기 위해 大韓民國(대한민국) 歷史學界(역사학계)에서 주로 쓰인다. 諡號(시호)의 '國岡上(국강상)'과 '平安(평안)'이 脫落(탈락)하고, '廣開土境(광개토경)'이 비슷한 意味(의미)인 '廣開土(광개토)'로 縮約(축약)되었으며, '好太王(호태왕)'이 '王(왕)'으로 축소되었다.
가장 縮約(축약)된 形態(형태).
개토왕(開土王) ~ 海東高僧傳(해동고승전) ~ 高麗(고려) ~ 1215年(년)
《三國史記(삼국사기)》 年表(연표)의 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 死亡(사망) 記事(기사)에도 開土王(개토왕)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 一般的(일반적)으로 '廣開土王(광개토왕)'의 낙자[落字:印刷物(인쇄물) 따위에서 빠진 글자]로 본다.
광개왕(廣開王)~三國遺事(삼국유사)~高麗(고려) 1281年(년)
《三國遺事(삼국유사)》 王歷(왕력)에 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의 王號(왕호)가 廣開王(광개왕)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 一般的(일반적)으로 '廣開土王(광개토왕)'의 落字(낙자)로 본다.
諱(휘) ~ 담덕(談德) ~ 三國史記(삼국사기) ~ 高句麗(고구려), 高麗(고려)
《三國遺事(삼국유사)》에도 本名(본명) 談德(담덕)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
서울特別市(특별시) 龍山區(용산구) 梨泰院(이태원)에 있는
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 複製品(복제품)
평안(平安) ~ 廣開土太陵碑王(광개토태왕릉비)
高句麗(고구려) 王朝(왕조)(?), 中國(중국) 王朝(왕조)
中國(중국)學者(학자) 張福有(장복유)가 主張(주장)하는 이름. 《晉書(진서)》, 《梁書(양서)》, 《資治通鑑(자치통감)》 等(등) 中國(중국) 史料(사료)들이 이 平安(평안)을 안(安)으로 줄여 썼다. 《高麗圖經(고려도경)》에도 安(안)으로 나와있다.
互稱(호칭)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三國史記(삼국사기) 廣開土王(광개토왕)+代(대) 大韓民國(대한민국)
《三國史記(삼국사기)》에 傳(전)하고 있는 '廣開土王(광개토왕)'이라는 最大(최대)한 縮約(축약)된 互稱(호칭)에서 나아가,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을 英雄視(영웅시)하는 現代人(현대인)들의 情緖上(정서상) 이를 다시 大王(대왕)으로 尊稱(존칭)하는 것.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 가장 大衆的(대중적)으로 쓰이며, 이따금 學界(학계)에서도 使用(사용)되곤 한다.
호태왕(好太王) ~ 廣開土太王陵碑文(광개토태왕릉비문)
中國(중국), 日本(일본) 中國(중국)과 日本(일본) 學界(학계)에서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을 가리킬 때 주로 使用(사용)하는 互稱(호칭).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前半部(전반부)의 葬地(장지) 銘(명)과 業績(업적) 部分(부분)을 全部(전부) 省略(생략)하고 間斷(간단)히 남긴 것으로, 國內(국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名稱(명칭)의 意味(의미)와 이름 眞僞(진위)論難(논란) 다음은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諡號(시호)를 單語(단어)별로 區分(구분)하여 解釋(해석)한 것이다.
諡號(시호) ~ 國罡上(국강상)
一般的(일반적)으로 임금의 墓地(묘지) 場所(장소)를 뜻한다고 解析(해석)한다. 그 以前(이전)의 王(왕)들과 統一(통일)된 名稱(명칭)을 附與(부여)하자면 '國罡上王(국강상왕)'이라고 하는 게 맞다. 國罡上(국강상) 地域(지역)의 正確(정확)한 位置批正(위치비정)은 아직 確實(확실)한 것이 없음.
廣開土境(광개토경) 領土(영토)를 크게 開拓(개척)하였다는 임금의 業績(업적)을 意味(의미)한다고 解析(해석)한다. 광개토지(廣開土地), 대개토지(大開土地) 같은 諡號(시호)도 보인다.
평안(平安)
亦是(역시) 나라를 安定(안정)시켰다는 임금의 業績(업적)(諡號(시호). 그런데 임금의 本名(본명)이라는 解析(해석)이 있다.
호태왕(好太王)
임금의 美稱(미칭). 高句麗(고구려)만의 稱號(칭호)로 推定(추정)
2012年(년) 中國(중국) 吉林省(지린성)에서 集安高句麗碑(집안고구려비)가 發見(발견)되어 碑文(비문) 解析(해석)이 論難(논란)이 되고 있다. 中國(중국) 學者(학자) 張福有(장복유)가 解析(해석)한 碑文(비문)은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와 內容(내용)이 얼추 비슷하며 임금의 本名(본명)이 平安(평안)이라는 記事(기사)를 적어 두었다. 國岡上太王(국강상태왕) 好評安(호평안) 또한 다른 中國(중국) 王朝(왕조)의 史書(사서)들을 考察(고찰)해보면 임금의 이름을 '安(안)'이라고 稱(칭)하는걸 發見(발견)할 수 있다. 이는 集安高句麗碑(집안고구려비)의 眞僞(진위)를 强化(강화)시켜주기도 한다. '平安(평안)'이 임금의 진짜 本名(본명)이라고 斷定(단정)하는 意見(의견)도 있으나 이는 많은 反論(반론)이 있다.
集安高句麗碑(집안고구려비)는 文書(문서)에 敍述(서술)된 것처럼 中國(중국) 當國(당국)이 이 碑石(비석)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中國(중국) 國境(국경) 안에서 展開(전개)된 모든 歷史(역사)를 中國(중국)의 歷史(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年(년)부터 中國(중국)이 推進(추진)하고 있는 國家的(국가적) 硏究事業(연구사업)中國(중국)에서 滿洲(만주) 地方(지방)의 地理(지리), 歷史(역사), 民族(민족) 問題(문제) 따위를 硏究(연구)하는 國家(국가) 硏究(연구) 事業(사업). ‘동북변강사여현장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줄여 이르는 말로 現在(현재)의 中國(중국) 領土(영토)에서 展開(전개)된 모든 歷史(역사)를 中國(중국)의 歷史(역사)로 만들기 위하여 2002年(년)부터 推進(추진)하였다.]을 試圖(시도)했고 强化(강화)했으며 다른 遺物(유물)은 公開(공개)하지 않으면서 碑石(비석)만 公開(공개)하는 理由(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以前(이전) 文書(문서)에서 鄒牟王(추모왕), 유리왕(琉璃王), 大朱留王(대주류왕) 等(등)의 이름을 諡號(시호)에 傳(전)하는데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이름은 諡號(시호)에 傳(전)하지 않는다는건 異常(이상)하다고 했는데 이는 전혀 異常(이상)하지 않다. 처음 高句麗(고구려)가 세워졌을 때는 中國式(중국식) 諡號(시호) 制度(제도)나 高句麗式(고구려식) 諡號(시호) 制度(제도)가 완전히 세워지지 않았고 初期(초기)에는 그저 이름만으로 傳(전)해지다가 以後(이후)에 가서야 墓地(묘지)의 場所(장소)를 記入(기입)한다든지 初期(초기)와 다르게 發展(발전)했을 수도 있고 그렇기에 '平安(평안)'은 이름일 可能性(가능성)이 있을뿐 '平安(평안)'이 임금의 이름인 것처럼 斷定(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우리나라 古代(고대) 임금들의 이름은 大部分(대부분) 순우리말인데 이 이름들은 中國(중국) 王朝(왕조)에서 記錄(기록)될 때 많은 音借(음차)를 거쳤다. 代表的(대표적)으로 三國史記(삼국사기)에 '鄒牟(추모)'라고 傳(전)해진 이름을 中國(중국)에서는 '주몽[朱蒙:高句麗(고구려)의 始祖(시조)인 ‘東明聖王(동명성왕)’의 이름]'으로 傳(전)한다든지 百濟(백제) 임금의 姓(성)은 扶餘氏(부여씨)로 復姓(복성)인데 中國(중국)에서는 單姓(단성)인 餘氏(여씨)로 標記(표기)했다든지 잦은 誤謬(오류)가 있기 때문에 中國(중국) 史書(사서)가 集安高句麗碑(집안고구려비)와 비슷하다고 無酌定(무작정) 교차 검증[交叉檢證:서로 獨立的(독립적)으로 이루어진 實驗(실험)의 結果(결과)들을 利用(이용)하여 證明(증명)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이러한 理由(이유) 때문에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이름이 平安(평안)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主張(주장) 段階(단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무덤은 確實(확실)하진 않으나 集安市(家庭诗:집안시)에 位置(위치)한 太王陵(태왕릉)으로 推定(추정)된다. 確證(확증)할만한 根據(근거)는 없으나 어쨌든 廣開土王碑(광개토왕비)가 다른 곳에 있던 걸 뽑아다 박아놓은게 아니고서야 廣開土王碑(광개토왕비) 周邊(주변)에 王陵(왕릉)이랄 만한 무덤이 將軍塚(장군총)과 太王陵(태왕릉) 정도밖에 없어서 將軍塚(장군총)이나 太王陵(태왕릉) 둘 中(중) 하나가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陵(릉)일 可能性(가능성)이 매우 높다.
好太王(호태왕)이라는 銘文(명문)이 새겨진 동탁(銅鐸)이 出土(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 好太王(호태왕)이 一般名辭(일반명사)인지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을 特定(특정)한 用語(용어)인지 見解(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그러한 바 그 事實(사실)만으로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말하진 않고 오히려 太王陵(태왕릉)에서 出土(출토)된 遺物(유물)들의 東(동)Asia(아시아) 廣域(광역) 編年(편년) 體系(체계) 속에서의 時間的(시간적) 位置(위치), 그에 따른 赤石冢(적석총) 形態(형태)의 變化(변화) 等(등)을 考慮(고려)하여 볼 때, 太王陵(태왕릉) 出土(출토) 遺物(유물)들은 大略(대략) 4世紀(세기) 後半(후반)~5世紀(세기) 前半(전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으로 因(인)해서 太王陵(태왕릉)은 대체로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推定(추정)하고 있다.
比較的(비교적) 소수론이지만 太王陵(태왕릉)을 故國壤王(고국양왕)의 무덤으로 보는 見解(견해)도 있으며 이런 境遇(경우)에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무덤은 將軍塚(장군총)이라고 본다.
하지만 太王陵(태왕릉) 出土(출토) 遺物(유물)들은 太王陵(태왕릉) 墓室(묘실)이나 封土(봉토)에서 出土(출토)된 것이 아니라 太王陵(태왕릉)의 陵園內(능원내)에서 出土(출토)된 것으로, 盜掘(도굴)되었던 시점에 盜掘(도굴)꾼들이 나중에 가져가려고 退場(퇴장)한 것인지 아니면 太王陵(태왕릉)에 있었던 儀禮行爲(의례행위)의 結果(결과)로 남은 것인지는 不明確(불명확)하다는 根本的(근본적)인 限界(한계)가 있다.
《花郎世記(화랑세기)》의 著者(저자) 박창화(朴昌和)는 『廣開土王碑(광개토왕비)』를 高麗(고려)(王建(왕건)이 세운)에서 뽑아다가 現在(현재)의 位置(위치)에다 박아놓은 거라는 괴랄한 主張(주장)을 하기도 했다.
6. 東明聖王(동명성왕)과의 關係(관계)
吉安縣(지안현)의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옛적 始祖 鄒牟王(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왕)은 北夫餘(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天帝(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水神)하백(수신)의 따님이었다. ...(以下(이하) 中略(중략))... 顧命(고명)을 이어받은 世子 儒留王(세자 유류왕)은 道(도)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朱留王(주류왕)은 王業(왕업)을 繼承(계승)하여 發展(발전)시키었다. 17世孫(세손)에 이르러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歲(세)에 王位(왕위)에 올라 號(호)(年號(연호)를 永樂(영락)이라 하였다.]는 句節(구절)이 있다.
金富軾(김부식)의 三國史記(삼국사기)나 一然(일연)의 三國遺事(삼국유사)에 依(의)하면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은 東明聖王(동명성왕)의 13世孫(세손)이 된다.
東明聖王(동명성왕) - 瑠璃明王(유리명왕) - 再思(재사) - 新大王(신대왕) - 山上王(산상왕) - 東川王(동천왕) - 中川王(중천왕) - 西川王(서천왕) - 咄固(돌고) - 美川王(미천왕) - 故國原王(고국원왕) - 故國壤王(고국양왕)
-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만약 신채호(申采浩)처럼 次大王(차대왕), 新大王(신대왕)을 太祖王(태조왕)의 庶子(서자)로 본다 해도 1世代(세대)가 늘어나고,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의 說(설)을 採擇(채택)하여 新大王(신대왕)을 次大王(차대왕)의 아들로 본다 해도 2世代(세대)가 늘어난다. 신채호(申采浩)는 朝鮮上古史(조선상고사)에서 다른 史書(사서)를 參考(참고)하지 않고, 年代(연대) 計算(계산)을 다시 해서 太祖王(태조왕)을 琉璃王(유리왕)의 孫子(손자)가 아니라 大武神王(대무신왕)의 孫子(손자)라는 假說(가설)도 세웠다. 그렇게 보더라도
東明聖王(동명성왕) - 瑠璃明王(유리명왕) - 大武神王(대무신왕) - 再思(재사) - 太祖王(태조왕) - 次大王(차대왕) - 新大王(신대왕) - 山上王(산상왕) - 東川王(동천왕) - 中川王(중천왕) - 西川王(서천왕) - 咄固(돌고) - 美川王(미천왕) - 故國原王(고국원왕) - 故國壤王(고국양왕) -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이 東明聖王(동명성왕)의 子孫(자손)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新大王(신대왕)을 次大王(차대왕)의 아들로 보는 說(설)을 採擇(채택)해도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은 朱蒙(주몽)의 16世孫(세손)이 된다. 三國志(삼국지)의 魏書(위서) 東夷傳(동이전)에는 朱蒙(주몽)의 뒤를 閭達(여달)이 잇고 閭達(여달)의 뒤는 如栗(여율)이 잇고 如栗(여율)의 뒤를 莫來(막래)가 이었다고 하는데 莫來(막래)는 모본의 오타로도 推定(추정)된다. 그런데 閭達(여달)을 瑠璃明王(유리명왕)으로 보고, 魏書(위서) 東夷傳(동이전)에 莫來(막래)가 扶餘(부여)를 쳤다는 記錄(기록)을 根據(근거)로 莫來(막래)를 慕本王(모본왕)이 아니라 大武神王(대무신왕)으로 본다면, 瑠璃明王(유리명왕)과 大武神王(대무신왕) 사이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본다면 어떻게든 世代(세대)가 맞게는 된다.
한편, 位(위)에서 나온 17世孫(세손)의 意味(의미)는 直系(직계)가 아니라 王系(왕계)라는 見解(견해)도 있다.
太祖大王(태조대왕)의 生沒年(생몰년) 疑惑(의혹)에서 따르면 大武神王(대무신왕)이 44年(년) 死亡(사망)하고 77年(년) 再思(재사)와 扶餘人(부여인) 太后(태후)가 7살의 太祖大王(태조대왕)을 王位(왕위)에 앉히기까지 33年(년)의 空白期間(공백기간)이 있기에 그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王(왕)이 하나 있었을 可能性(가능성)도 있다. 實際(실제)로 再思(재사)는 나이가 많다는 理由(이유)로 自己(자기) 7살짜리 아들을 앉혔다고 하는데, 常識的(상식적)으로 異常(이상)한 光景(광경)이니까. 17世孫(세손)이 王系(왕계)라면 ?가 王(왕)이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7. 其他(기타) ~ 7.1. 史料的(사료적) 側面(측면)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과 關聯(관련)된 史料(사료)로는 金石文(금석문)으로는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 文獻(문헌)으로는 《三國史記(삼국사기)》와 中國(중국)의 史書(사서)를 中心(중심)으로 여러 史料(사료)들이 傳(전)하고 있다.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는 現前(현전)하는 韓國(한국) 古代(고대)의 碑文(비문)들 中(중) 內容(내용)이 比較的(비교적) 穩全(온전)히 傳(전)해지는 거의 有一(유일)한 것으로 當代(당대)) 歷史(역사)를 傳(전)하는 內容(내용)이 많아서 史料的(사료적) 價値(가치)가 대단히 크다.
《三國史記(삼국사기)》는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卽位(즉위)부터 死亡(사망)까지 高句麗(고구려)에서 일어난 事件(사건)을 年代順(연대순)으로 敍述(서술)했는데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와 相互(상호) 補完的(보완적)으로 作用(작용)하여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治世(치세)를 整理(정리)하는 가장 基本(기본) 史料(사료)이다.
中國(중국) 史書(사서)는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時期(시기) 後燕(후연)과 高句麗(고구려)의 關係(관계)를 中心(중심)으로 敍述(서술)했다. 以外(이외)에도 《三國遺事(삼국유사)》나 《日本書紀(일본서기)》에 斷片的(단편적)인 事件(사건)들이 傳(전)하고 운좋게 살아남은 牟頭婁(모두루) 墓誌銘(묘지명)과 好友名(호우명)그릇은 지워진 歷史(역사)의 片鱗(편린)을 傳(전)해주고 있다.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時期(시기) 史料(사료)는 韓國史(한국사) 前半(전반)에 걸쳐서 보면 적지만 韓國(한국) 古代史(고대사)로 限定(한정)한다면 매우 豐富(풍부)한 편이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傳(전)하는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時期(시기)의 統治(통치)와 戰爭(전쟁) 記錄(기록)이 高句麗(고구려)의 다른 王(왕)들 記錄(기록)보다 많고 考古學(고고학) 發掘(발굴) 成果(성과)도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時期(시기)에 集中(집중)되어 있다. 무엇보다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 있다는 점이 크다.
査實(사실)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은 高句麗(고구려)가 滅亡(멸망)한 뒤 한참 동안 잊혀졌고 再照明(재조명)은 19世紀(세기) 末(말)이 되어서야 이루워졌다. 이렇게 된 理由(이유)로는 近肖古王(근초고왕)이나 眞興王(진흥왕)과 비슷한 水準(수준)의 征服(정복) 君主(군주)로 評價(평가)된 部分(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가 있던 鴨綠江(압록강) 以北(이북)의 境遇(경우)에는 渤海(발해) 滅亡(멸망) 以後(이후)로 遼(요)나라, 金(금)나라, 元(원)나라, 明(명)나라, 淸(청)나라 等(등) 異民族(이민족) 國家(국가)의 領土(영토)였던 데다가 특히 淸(청)나라가 들어선 以後(이후)로 封禁令(봉금령)으로 因(인)해서 出入(출입)이 統制(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期間(기간) 동안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의 內容(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金(금)나라 皇帝(황제)가 세운 碑石(비석) 정도로 여겨져서 再照明(재조명)이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事實(사실) 우리가 잘 아는 文化財(문화재)가 다른 것으로 誤解(오해)받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朝鮮(조선) 後期(후기)까지만 해도 眞興王(진흥왕) 巡狩碑(순수비)가 無學大師碑(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該當(해당) 時期(시기)에 朝鮮(조선)이 日本(일본), 淸(청)나라, 英國(영국), 美國(미국), Russia(러시아) 等(등)의 强大國(강대국)들과 얽히면서 丙寅洋擾(병인양요), 辛未洋擾(신미양요), 雲揚號事件[운요호사건:1875年(년) 9月(월) 20日(일) 高宗(고종) 12年(년), 陰曆(음력) 8月(월) 21日(일) 또는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은 通商條約(통상조약) 締結(체결)을 위해 日本(일본) 軍艦(군함) 雲擾號(운요호)가 不法(불법)으로 江華島(강화도)에 들어와 測量(측량)을 口實(구실)로 朝鮮(조선) 政府(정부)의 動態(동태)를 살피다, 朝鮮(조선) 守備隊(수비대)와 戰鬪(전투)를 벌인 事件(사건)이다. 日本(일본)은 明治维新(메이지 유신)(1868年(년)을 通(통)해 안으로 中央集權化(중앙집권화)와 近代化(근대화)를 斷行(단행)하고, 밖으로는 侵略戰爭(침략전쟁)을 벌여 富國强兵(부국강병)을 摸索(모색)했다. 이러던 中(중) 日本(일본)은 이웃나라 朝鮮(조선)에서 通商(통상) 修交拒否(수교거부) 政策(정책)을 펴던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이 權力(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어(1873年(년) 11月(월)) 朝鮮(조선)을 開港(개항)시킬 機會(기회)를 捕捉(포착)하였다. 以前(이전)부터 朝鮮(조선)이 門戶開放(문호개방)에 微溫的(미온적)인 態度(태도)를 보였기에, 이번엔 武力示威(무력시위)로 軍艦(군함) 5隻(척)을 朝鮮(조선) 沿海(연해)에 派遣(파견)하기로 決定(결정)하였다. 1875年(년) 9月(월)(高宗(고종) 12年(년) 日本(일본) 政府(정부)는 軍艦(군함) 雲擾號(운요호)와 다른 한 척을 釜山港(부산항)에 碇泊(정박)시켜 艦砲(함포) 示威(시위)를 하고, 곧 이어 凍害(동해) 永興灣(영흥만)에 雲擾號(운요호)를 北上(북상)시켜 海路測量(해로측량)과 武力示威(무력시위)를 하였다. 9月(월) 20日(일)(陰曆(음력) 8月(월) 21日(일) 西海(서해) 江華島(강화도) 東南(동남)쪽 난지도[蘭芝島:서울특별시 麻浦區(마포구) 上岩洞(상암동) 一帶(일대)에 南(남)쪽으로 弘濟川(홍제천), 北(북)쪽으로는 城山川(성산천), 東(동)쪽으로는 난지천에 둘러싸인 2.72 km²의 땅이다. 예전에는 漢江(한강)의 하중도(河中島)였으나, 1977年(년) 埋立(매립)되어 陸地(육지)가 되었다. 중초도(中草島), 꽃섬, 오리섬, 압도(鴨島), 문도(門島) 等(등)으로도 불렸다.
附近(부근)에 碇泊(정박)하고 食水(식수)를 求(구)한다는 口實(구실)로 boat(보트)에 軍人(군인)을 分乘(분승)시켜 沿岸(연안)을 偵探(정탐)하면서 江華島(강화도)의 草芝鎭(초지진) 砲隊(포대)까지 接近(접근)하였다. 朝鮮軍(조선군)의 接近(접근)하지 말라는 命令(명령)에도 불구하고 不法(불법) 接近(접근)한 日本軍(일본군)에게 朝鮮(조선)의 草芝鎭(초지진) 砲隊(포대)에서 砲擊(포격)을 加(가)하였다. 이에 雲擾號(운요호) 艦長(함장) 井上吉川(이노우에 요시카) 少佐(소좌)는 一旦(일단) 母艦(모함)(雲擾號(운요호)로 돌아와 雲擾號(운요호) 그 自體(자체)로 應戰(응전)하기로 決心(결심)한다. 그 다음날 雲擾號(운요호)는 草芝鎭(초지진)에 接近(접근)해 전날 發生(발생)한 朝鮮郡(조선군)의 砲擊(포격) 意圖(의도)를 물으려 하였으나 다시 砲擊(포격)을 당하자 草芝鎭(초지진)에 猛烈(맹렬)한 砲擊(포격)을 가하였다고 日本(일본) 側(측)에서 主張(주장)하였다. 그러나 雲擾號(운요호) 艦長(함장) 井上吉川(이노우에 요시카)가 남긴 記錄(기록)에 따르면, 전날 朝鮮軍(조선군)의 砲擊(포격)에 대한 報復(보복) 攻擊(공격)을 가하기 위해 草芝鎭(초지진)에 接近(접근)하여 雲擾號(운요호)가 先制(선제) 發布(발포)했다. 砲(포)의 性能(성능)이나 砲術(포술)이 優勢(우세)인 日本軍(일본군)은 草芝鎭(초지진)을 破壞(파괴)하고, 永宗鎭(영종진)에도 猛砲擊(맹포격)을 가하면서 육전대(陸戰隊)까지 上陸(상륙)시켜 殺人放火掠奪(살인방화ᆞ약탈)을 恣行(자행)하였다. 日本(일본)은 한편으로 釜山(부산)에 戰艦(전함)을 派遣(파견)하고 兵士(병사)를 上陸(상륙)시켜 艦砲外交(함포외교)를 計劃(계획)했다. 朝鮮軍(조선군)은 戰死者(전사자) 35名(명), 捕虜(포로) 16名(명)을 내고, 大砲(대포) 35門(문), 火繩銃(화승총) 130여정과 무수한 軍旗(군기) 等(등)을 掠奪(약탈)당하였으며, 日本軍(일본군)은 但只(단지) 2名(명)의 輕傷者(경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日本(일본)은 砲擊戰(포격전)의 責任(책임)을 朝鮮(조선)에 돌렸으며, 아울러 武力(무력)을 背景(배경)으로 開港(개항)을 要求(요구)하였다.
江華島(강화도) 條約(조약)
1876年(년)(高宗(고종) 13年(년) 日本(일본)은 全權大使(전권대사)를 朝鮮(조선)에 派遣(파견)하여 雲擾號(운요호) 砲擊(포격)에 대한 힐문(詰問)과 開港(개항)을 要求(요구)했다. 그해 2月(월)에 日本(일본)은 黒田清隆(구로다 기요타카)를 全權大使(전권대사)로 派遣(파견)하여 使臣(사신) 一行(일행)이 軍艦(군함) 5隻(척)으로 江華島(강화도)에 이르러 朝鮮(조선) 政府(정부)에 談判(담판)을 要求(요구)하여 왔다. 朝鮮(조선) 政府(정부)에서는 重臣會談(중신회담)을 거듭한 끝에, 國際關係(국제관계)의 大勢(대세)에 따라 修好條約(수호조약) 締結(체결) 交涉(교섭)에 應(응)하기로 하고, 全權大臣(전권대신)(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 신헌(申櫶))을 江華島(강화도)에 派遣(파견)하여, 朝鮮(조선),日本(일본) 兩國(양국) 사이에 江華島(강화도) 條約(조약)의 調印(조인)을 1876年(년) 2月(월) 27日(일)(陰曆(음력) 2月(월) 3日(일) 보게 되었다.
雲擾號(운요호)
운요호(雲揚號, 운양)는 原來(원래) 長州藩(조슈 번)이 英國(영국)에서 購買(구매)한 배로, 明治維新(메이지 유신) 以後(이후) 1871年(년)(明治(메이지) 4年(년).3月(월)) 5月(월) 日本帝國(일본제국) 海軍(해군)에 編入(편입)된 日本帝國(일본제국) 海軍(해군)의 포함(砲艦)이다.], 巨文島(거문도) 占領(점령) 事件(사건) 等(등) 外勢(외세)의 侵奪(침탈)에 시달렸던 때였기도 했고 그동안 三田渡(삼전도)의 屈辱(굴욕)을 씻어내지도 못했던지라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業績(업적)이 再照明(재조명)되기에 時期的(시기적)으로 timing(타이밍)이 맞았고 당연히 民族主義(민족주의)적 自矜心(자긍심) 鼓吹(고취)의 觀點(관점)에서 다시 浮刻(부각)된 側面(측면)이 크다.
물론 碑文(비문)이 發表(발표)되는 過程(과정)에서 日本軍(일본군)이 介入(개입)해서 意圖的(의도적)으로 我田引水格(아전인수격)의 解析(해석)을 내놓았지만 根本的(근본적)인 解釋(해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 때문에 高句麗(고구려)가 亡(망)하고 近代(근대)에 이르기까지는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이 어떤 사람으로 記憶(기억)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끽해봤자 高句麗(고구려)의 王(왕)들 가운데 1名(명)으로 紹介(소개)되면서 特徵(특징)으로 싸움을 잘했다거나 땅을 넓혔다고 言及(언급)되는 것이 全部(전부)다.
歷史書(역사서)에서는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을 주로 武人(무인)의 氣質(기질)이 있고 雄大(웅대)한 野望(야망)을 품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재미있는 건 두 朝鮮(조선) 文人(문인)들의 評價(평가)이다. 14世紀(세기)에 권근(權近)은 三國史節要(삼국사절요)에서 '3年喪(년상)도 다 안 치른 채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고 復讐(복수)한답시고 지난 일이나 들추는 몹쓸 사람'이라 評(평)했고, 반대로 18世紀(세기) 安鼎福(안정복)은 '고작 22年(년)밖에 안 지난 할아버지 故國原王(고국원왕)의 怨讐(원수)를 갚았는데 그게 바로 道理(도리)'라는 主張(주장)으로 反駁(반박)하기도 했다.
2019年(년) 11月(월)에 最新(최신) 技術(기술)을 通(통)해 그동안 長壽王(장수왕)이나 文咨明王(문자명왕) 代(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推定(추정)하던 忠州(충주) 高句麗碑(고구려비)도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이 세웠다는 事實(사실)이 밝혀졌다.
梁芳秀(양방수)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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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금 2021-03-19 오후 7:05 ~ 좋은 역사 자료 감명깊게 참으로 잘 봤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시구요...늘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