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22
4월9일[부활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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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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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lu1YNb6aA
[작은형제회 최영준 베르나르디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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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들에게서 볼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 외 여타 대상들이 희미해지고 존재감을 상실합니다. 빛도 바래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만이 눈에 띄고 빛을 발합니다. 여러 존재들 가운데 오직 그만 보입니다. 오직 그만 바라보고, 그에게 몰입하며, 그를 위해 헌신합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도 그러한데 하느님과의 사랑은 얼마나 더 강렬하고 더 각별하고 뜨거운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가장 잘 나가던 유다 지도층 인사였던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의 진의를 묵상해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깨닫는 작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인식하는 것,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 생명조차 바치심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들 사이에서도 상대방을 향한 헌신과 사랑이 깊어지게 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결국 생명조차도 내어놓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게 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사방이 온통 꽃천지입니다. 하느님께서 고달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화사한 위로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한송이 청초한 꽃 안에 굳게 현존해 계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내 안에, 그리고 동료 인간 안에도 굳건히 현존해 계십니다. 위로부터 태어나게 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지긋지긋하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지루하고 고달프게 만들었던 일상생활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이상 멀고 먼 옛사람, 이천 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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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q44PIqh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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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는 영의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부는지 아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바람’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이 새로 나지 않으면 영의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영으로 새로 난 사람도 그와 같다고 하십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은 영으로 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신비로움이 사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는 사랑, 희생, 생존이라는 주제를 혼합한 복잡하고 감성적인 SF 영화입니다. 영화는 농작물 마름병과 먼지 폭풍으로 인해 지구가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어가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암울한 시나리오 속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NASA는 토성 근처에서 웜홀을 발견하는데,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지능이 인류에게 생존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그곳에 배치했다고 믿습니다.
이야기는 전직 NASA 조종사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쿠퍼와 그의 딸 머프와의 깊은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인류를 위한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해 웜홀을 통과하는 중요한 임무를 위해 쿠퍼가 모집되면서 줄거리가 전개됩니다.
임무에 참여하기로 한 쿠퍼의 결정은 개인적인 희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채 아이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머프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느낌을 받고 해결되지 않은 분노와 슬픔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쿠퍼와 인듀어런스 호의 승무원은 머나먼 은하계에서 거주할 수 있는 행성을 탐색하면서 블랙홀 근처의 시간 팽창 효과를 비롯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지구와 시간이 다르게 흐르게 됩니다. 한편, 어느덧 성장한 머프는 미션의 설계자인 브랜드 교수와 함께 일하는 뛰어난 과학자가 됩니다.
그녀는 결국 지구 인구를 새로운 행성으로 이동시켜 인류를 구하려는 계획인 플랜 A가 임무가 시작되기도 전에 브랜드에 의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으며 인류에게 희망이 필요하다고 믿고 이를 비밀로 유지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머프는 결국 아버지가 이루지도 못할 일에 희생되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전환점은 쿠퍼가 임무를 저장하고 중요한 데이터를 지구로 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로 자신을 블랙홀로 스스로 빨려 들어갈 때 옵니다. 블랙홀 안에서 그는 다양한 시간에 머프의 침실을 볼 수 있는 5차원 공간인 정팔면체를 발견합니다. 이것도 지구를 구하려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머프는 어렸을 때부터 유령을 보아왔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프는 자신과 소통하는 그 ‘유령’이 아빠 쿠퍼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쿠퍼는 머프가 연구하고 있는 중력 방정식을 푸는 데 필요한 양자 데이터를 전송합니다. 이 데이터는 인류가 지구에서 거대한 우주 서식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는 플랜 A의 성공에 매우 중요합니다.
영화는 인류가 토성 근처의 우주정거장으로 이주한 것으로 끝나고, 미지의 존재들에게 구출된 쿠퍼는 노인 머프와 잠시 재회하면서 거주 가능한 행성에 식민지를 시작한 브랜드를 찾기 위해 출발합니다.
황당한 내용의 영화일 수 있으나 사실 과학적으로도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미지의 존재가 지구의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한 남자를 선택하였고 그의 희생을 요구하였으며, 그가 자기 딸에게 구원에 필요한 핵심 지식을 전달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선택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그로 인한 희생을 받은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내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냥 성경과 구원에 관한 비유가 이 영화입니다.
머피는 위로부터 새로 나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는 지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새로 나려면 위로 올라간 이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쿠퍼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위로 올려지면 구원을 준비한 이로부터 새로운 은총을 받습니다. 그 은총을 흘려보냄으로써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새로 난 이들의 생각은 너무나 달라서 그 말을 믿지 않으면 따를 수 없고 구원에서 배제됩니다.
영의 바람은 그래서 십자가 위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새로 태어났기에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압니다. 그리스도에게 와서 우리를 그분의 십자가로 이끕니다. 이를 세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태석 신부도 어렵게 의사가 되어 가장 가난한 수단 톤즈로 가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죽음을 통해 그의 제자들이 수십 명 의사와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제2의 이태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으로 새로 난 사람은 이렇듯 누군가를 구원하는 십자가의 새로 태어남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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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2)피, 새로 태어나게 하는 힘>
독일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errer, 1471-1528)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로서 독일이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 이전 독일 화폐에 그려져 있던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기도하는 손’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기도하는 손’에는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깃든 감동적인 사연이 함께 전해져 내려옵니다.
뒤러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지만 워낙 가난하여 자신의 재능을 불태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침울한 소년기를 보낸 뒤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 둘은 더 큰 도시로 나가 정식적으로 그림을 배워볼 결심을 하고 낯선 지방으로 가게 되었지만 도시는 그들에게 먹을 것도 잠을 잘 자리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둘이 가져온 돈도 다 떨어지자 둘은 더 이상 도시에서 버틸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둘 다 공부를 못할 것이니 한 사람이 공부하는 동안 한 사람은 일자리를 구하여 뒷바라지를 하고, 학업이 끝나면 서로 교대하여 공부하자고 제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뒤러의 친구는 삼류식당에 뛰어들어 먼저 취업을 했고 그 친구가 힘들게 번 돈으로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러의 첫 그림이 팔리던 순간 친구의 얼굴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그림은 친구의 피로 탄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들고 친구가 근무하는 식당으로 뛰어갔습니다.
캄캄한 친구의 주방을 들어서려는 순간 뒤러는 문틈으로 친구가 방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뼈마디가 굵어지고 거칠어진 두 손을 함께 모으고 뒤러를 위해 진실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끌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뒤러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기에는 부적절하게 변해버린 친구의 두 모은 손을 기억에 담아 그렇게 ‘기도하는 손’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알브레이트 뒤러는 문학에서의 괴테와 함께 독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그의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뒤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진리입니다. 누군가의 노력 없이 건물이 지어지거나 예술품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새로 무엇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천민이었지만 사무라이가 된 이야기를 여러 번 한 것 같습니다. 이 아이는 훈련을 받다가 그리고 귀족 훈련생들 때문에 몇 번이고 뛰쳐나가고 싶을 때마다 성 기둥 안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그 기둥 속에서 아들에게 끊임없이 힘을 주고 계셨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소년은 그 기둥 안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받고 끝까지 버티어 훌륭한 사무라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죽는 것은 에너지를 배출합니다. 가장 큰 에너지는 누군가를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할 때입니다. 이 사랑을 위한 희생만이 누군가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니코데모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도 무언가 새로 태어나게 하려면 피를 흘려야 하는데 어찌 하늘의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란 예언인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며 흘리신 피로써 새로 태어나 이젠 자신의 가진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리마테아의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누군가 새로 태어나려면 또 다른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새로 나는 것도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태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아이가 기둥 안에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기만 한다면 그분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 태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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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자고 말하니까 사람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사회의 구조를 바꾸자고 말하니까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습니다.” 복지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류는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소유와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부정과 부패 때문입니다. 지금의 인류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두 개의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고 있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달콤한 열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열매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같은 생태계의 파괴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철학, 문학, 예술, 인문학, 종교라는 인류의 유산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학생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갈매기의 꿈’입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먹이를 얻기 위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다른 가치를 찾아서 살아가는 갈매기가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갈매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입니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성찰하는 갈매기입니다. 사랑하는 갈매기와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갈매기와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갈매기의 고통, 자신의 뜻과 다르게 행동하는 갈매기의 고통을 깊이 성찰하는 갈매기입니다. 그런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착’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갈매기입니다. 이 갈매기는 성공, 명예, 권력으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공감, 겸손, 회개, 식별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갈매기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갈매기는 부처님일 수도 있고, 그 갈매기는 소크라테스일 수도 있고, 그 갈매기는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그 갈매기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모든 혁명가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처럼 예수님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자신들의 명성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온 것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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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7-15: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태어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과 함께 머무를 자녀들을 낳으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성사로 태어났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8절)고 하신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9절)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듯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이’라는 말은 그분의 기원이 성령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분은 말씀으로서는 하늘에 계시며 육으로는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 육의 기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께 있다. 그래서 육이 되신 말씀은 비록 육이시지만 결코 말씀이 아닌 적이 없으시다. 그분이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올라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땅에 속한 인간이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될 때, 영적 탄생이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께 결합할 때,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14절) 뱀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집어삼키던 죄를 의미한다. 그 뱀을 들어 올린 표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분을 통하여 그 뱀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게 된 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5절)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원인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신 분이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믿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어찌 멸망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더 확실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향하는 삶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 즉 우리도 우리가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영광을 입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인간완성을 이루어주며, 하느님께 또한 영광을 드리며, 구원에 이르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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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부활 시기 전례는 예수님의 부활에 집중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 봉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 시기에 읽었던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만남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면서 최고 지도층 인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그분께서 정말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 하늘로 올라간 이”이심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코데모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의미는 해당 그리스 말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로부터”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아노쎈’으로, ‘오래전부터’, ‘처음부터’라는 의미도 있으며, ‘처음부터’라는 뜻은 ‘하느님에게서’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곧 ‘위로부터 태어남’은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사순 시기에 읽었던 이 내용을 부활 시기에 다시 읽는 이유는, 부활이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일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태어남’과 ‘다시 태어남’은 다릅니다. ‘태어남’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지만, ‘다시 태어남’은 참된 구원을 선택하는 의지에서 일어납니다. 이 ‘다시 태어남’의 본보기를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여 줍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부활을 증언한 초기 교회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변에 궁핍한 사람이 없게 하고, 이러한 결단으로 모두 큰 은총을 누립니다. 덜 교만할 때 덜 고집스러워지고, 덜 고집스러울 때 덜 두려워하게 되며, 덜 불안해집니다. 이러한 삶에 초대되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 곧 부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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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7ㄱ.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1-15)
1) ‘위로부터 태어나다.’에 대한 설명이 앞의 5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8절의 ‘영에서 태어나다.’도 ‘위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말에 대한 설명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다.”, 또는 “영에서 태어나다.”라는 말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즉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성사를 받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새로 태어나고,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아니고, 성사의 은총에 본인의 노력이 합해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무임승차는 없습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1-4.9ㄴ-10) <‘새롭게 변화되다.’는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사람, 즉 안 믿는 사람들과는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고, 인생의 목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사람입니다. 그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이 곧 ‘좁은 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에서 강조점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에 있습니다. 문과 길이 좁든지 넓든지 간에, 신앙인은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3) 15절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야 한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들어 올려진’ 분,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입니다(14절)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만 있는 생활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원래는 ‘기쁨 가득한 생활’입니다. 그래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든 일도 생기고, 슬픈 일도 만나고, 아플 때도 있습니다.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만날 때,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으로 잘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10,22)
4) ‘높이 들어 올려진’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모세의 구리 뱀’에 연결해서 설명하셨습니다.(14절) ‘모세의 구리 뱀’ 이야기는 민수기 21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모세의 구리 뱀은 ‘높이 들어 올려진’ 모습도 비슷하고, 회개와 구원과 생명의 상징이라는 점도 비슷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리 뱀’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표시로 구리 뱀을 ‘쳐다보기만 해도’ 살아났는데(민수 21,9), 예수님의 십자가는 쳐다보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온 몸으로 살아야 하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사는 동안에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과제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사람은,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십자가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변화가 덜 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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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 니코데모에게 "다시 나야한다!"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올바른 진실을 진실 그대로 우리는 알아듣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의 부족과 경험의 부족입니다. 즉, 지식의 부족과 경험의 부족에서 뿐만 아니라, 진실을 알아보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즉, 보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닫아버리게 됨으로써, 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삶을 살기위하여 "다시 나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진실을 외면하면, "다시 나야 한다,"는 그 의미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고의로 눈을 감고, 마음을 닫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다시 나야 한다." 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나,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러한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나는 그대에게 쉽게 말해주려고 했다. 나는 일상 생활 속에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일들을 사용해서 말했다. 그런데도 그대는 알아들을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평범한 일도 그대가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물며, 더 깊은 일을 어떻게 그대가 깨닫기를 바라겠는가?"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 모두에게 향한 경고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이 사실일지? 혹은 반대로 사실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그 말씀이 사실이란 것에 어떤 보증을 찾아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답은,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할 수 있는 진리, 그분이 하느님을 직접 알고 계시며, 알고 계신 분으로써 그 신비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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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이형호 베드로 신부님]
<사랑의 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도우심을 청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니코데모와 같이 우리는 새로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실천은 주님의 십자가를 동반합니다. 고통 없이 주님의 길을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기에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고 예수님과 같이 실천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사랑의 활력을 얻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의심을 했지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고 주님께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야 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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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계속 들려주는 오늘 복음은 요한 신학의 골격을 이루는 내용을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곧 하늘에서 내려온 이,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특징 가운데 두 번째 특징을 전해 줍니다. 첫 번째 특징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사도 2,42-47 참조)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특징은 기적을 일으켜 병자들을 고쳐 주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사도 5,12-16 참조)입니다.
이 특징들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일반화 과정을 통하여 바람직한 공동체 모습의 표상을 제시해 주는 종합적인 틀입니다.
오늘 이 특징들은, 깊게 체험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형제적 사랑으로 완전한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영적이든 물적이든 재물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모든 것 안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민족이나 국가를 뛰어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서 중심으로 삼아야 할 절대적인 이상입니다. 이러한 형제적 사랑은 예수님 가르침의 근본적인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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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탄광촌을 방문한 어느 젊은 신부가 탄광에 들어갔습니다. 신부는 어둡고 더러운 갱 안의 통로에서 아름답고 하얀 꽃이 자라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광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시커먼 탄광에서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광부는 “검은 탄가루를 꽃에 부어보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그 광부의 말대로 했더니 신기한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글쎄 탄가루가 꽃잎에 닿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꽃잎 표면이 너무 매끄러웠기 때문에 탄가루가 꽃잎에 붙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 매끄러운 꽃잎을 가지고 있는 아름답고 하얀 꽃이 우리 마음과 같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으로 인해서 세상의 모든 악이 들러붙지 않도록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에 붙어 있는 각종 죄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죄들이 왜 이렇게 계속 남아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는 똑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지었던 죄를 반복해서 짓곤 합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먼저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깨끗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죄악의 들러붙었던 것이고, 그래서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자기 마음도 깨끗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길 원한다고 요구하면 너무 큰 욕심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에서 영으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는 니코데모도 알아듣지 못하지요. 세상의 지식만으로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으며, 오로지 성령의 이끄심으로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온전하게 맡기는 사람은 주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올렸을 때 뱀을 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을 믿고 바라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자기 힘으로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고 있으며, 세상의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똑똑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던 니코데모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께 좀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때, 우리의 마음은 깨끗해져서 죄가 더는 들러붙지 않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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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새로 태어나야지요>
요한 3,7ㄱ.8-15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늘 새로 태어나야지요>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선하거나 악하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선하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곧거나 굽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곧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따뜻하거나 차갑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따뜻하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부드럽거나 거칠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부드럽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밝거나 어둡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밝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아름답거나 추하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아름답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사랑스럽거나 얄밉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사랑스럽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너그럽거나 게걸스럽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너그럽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참되거나 헛되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참되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하느님을 따르거나 거슬러
사람이려면
오롯이 하느님을 따라
태어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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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주변의 벚꽃, 조팝나무, 철쭉, 영산홍, 꽃잔디, 민들레꽃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소나무 솔잎 꽃도 너무도 이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핀 꽃이지만 곧 다음을 준비하며 시들해질 것입니다.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누구의 인정에 개의치 않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영양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속이 튼튼하지 못하면 생기가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스스로 성장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밑거름이 부족하고 웃거름만 넘치면 일시적인 효과에 웃자라고 제때에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웃거름은 겉만 다스리지 속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웃거름은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 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 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가장 완벽한 기도는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되는 것입니다.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수자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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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 63,2)
오늘 화답송 시편은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공통적 진솔한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4월2일 부활 축제 팔일 화요일에 선종한 베네딕도회 전 수석아빠스 노트커 볼프 아빠스를 위한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노트커 아빠스님이야말로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회 역사에 전설과 신화가 된 참 걸출한 분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부활 팔일 축제중, 이탈리아에서 성 베네딕토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는 일행과 함께 하던 아빠스님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끼자 급거 귀국,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룻밤을 묵는 동안 자신의 방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문득 아시아에서의 베네딕도회 모임차 순례 여정에 올랐던 트라피스트회 수도승 토마스 머튼이 방콕의 자신의 방에서 1968년 선종하신 사건이 연상되었습니다. 두 분 다 길에서 태어난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돌아가시니 길이신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분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예수님의 제자답게 100% 삶을 연소시킨 성인다운 삶을 살았던 아빠스님이셨습니다. 순간 아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란 말씀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원 게시판에 붙었던 노트커 아빠스님의 생애를 일람했을 때 느낌은 정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삶이셨구나, 매일 하루를 끝낼 때 마다, “다 이루어졌다.”라는 고백이 뒤따랐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노트커 아빠스님은 사부 성 베네딕토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의 순례 여정중 주님의 부활 팔일 축제 시기에 선종하신 것입니다. 그대로 선종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에 돌입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그대로 선종의 죽음과 더불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아빠스님이요, 아니 이미 살아 생전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영생의 삶을 사셨던 아빠스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영적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늘 여기 오늘 지금을 살았던 아빠스님이요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함을 배웁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에 관해 참 많이 말합니다만 가장 모르는 것이 죽음입니다. 마지막 최종 시험에 해당되는 죽음이요 그 시험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대구시 남산동 대구교구청내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진 라틴어 글귀,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짧은 구절도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였다 합니다. 이런 죽음의 자각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를 살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나는 라틴어 경구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살라”는 말입니다.
노트커 아빠스님을 보면 하루하루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1940년에 태어나 2024년 선종시까지 84세까지, 저보다 9세 연상이셨지만 그 삶의 질이나 삶의 밀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1977년부터 2000년까지 23년동안 오틸리엔 수도원은 물론 오틸리엔 연합회를 책임진 최고의 장상이었고, 이어 세계 베네딕도회 수석아빠스로 4차례 16년 동안 연임하셨으니, 무려 39년 동안 최고 장상이 되어 한결같은 열정을 쏟으신 것입니다.
아마 아빠스님처럼 선교 여행을 많이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친화력에 참 자유로운 분이셨고, 머무는 곳 어디나 고향이었으니 그대로 하느님 안에 정주한 베네딕도회의 전형적인 선교 수도승 아빠스였습니다. 아빠스님에 대해 평전이 나온다하면 스토리와 컨텐츠가 참으로 풍성한 대 서사시 같은 한권의 성서같은 평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베드로의 깨달음은 노트커 아빠스님의 깨달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를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세계 곳곳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수도자들을 만나 대화와 친교를 나눈 아빠스님이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처럼 사람을 사랑했던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었고 타고난 선교사였습니다. 토마스 머튼처럼 노트커 아빠스 역시 “보편인(universal man)”이자 “세계적인 수도승(grobal monk)”이었습니다.
수도승들에게 은퇴란 없고 죽을 때까지 영원한 현역으로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삶만이 있을 뿐이요 선종시까지 이의 모범을 보여준 영원한 현역의 아빠스님이셨습니다. 장상직을 내려 놓은 후 고향집같은 오틸리엔 수도원에로 돌아가신 후에도 눈부신 활약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모든 공직을 내려놓은 후 오틸리아 수도원에 귀원 후, 흡사 추도사처럼 생각되는 일부 활동 내용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도원의 미래 계획, 기금 모음, 대중 연설등의 분야에서 수도원에 관여하였으며, 공동체 토론에서 항상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습니다. 또 강연,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출연, 피정, 전례, 각종 행사 등 독일과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인상적이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는 철두철미 자기훈련과 동료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큰 기대감 때문에 때로 건강을 해치면서도 이 프로그램을 관리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영감과 기쁨을 주었기에 그의 거대한 프로그램은 항상 그에게 삶의 영약(靈藥)이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가 받은 30개가 넘은 영예와 상 중에서 바이에른 공로 훈장, 독일 연방공화국 대십자 훈장, 바이에르 주 사회 공로 훈장, 두 개의 명예박사 학위와 그뢰넨 바흐등 여러 명예 시민권등 참으로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고인이 생전에 뿌린 많은 씨앗에 감사드리며, 그의 마지막 위대한 여정이 그가 평생 동안 선포한 그 길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저절로 노트커 아빠스님을 통해 놀라운 업적을 이루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도 그대로 노트커 아빠스님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노트커야!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 주님께 한 마음으로 기도드립시다.
“주님, 노트커 아빠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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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자다운 한마음과 한뜻>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오늘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읽으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너무 아름답게 또 이상적으로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는 것의 의미가 뭣일까도 생각되었습니다. 한통속이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걸까요?
우리는 감으로 압니다. 이 말은 별로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쁜 쪽으로 하나가 될 때 보통 이렇게 한통속이 되었다고 말하지요. 그러니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고 함은 이런 뜻이 아님은 분명한데 신자들이 서로가 자기 뜻을 꺾어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는 뜻이겠습니까?
이런 뜻이 없지 않지만 이런 한마음과 한뜻은 되기도 쉽지 않지만 될 수 있더라도 오늘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이런 것뿐이고 이런 정도라면 신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은 완전한 일치일지라도 신자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한마음과 한뜻은 하느님 뜻과 한마음 한뜻이어야겠지요. 그래서 서로의 뜻에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하느님 뜻에 모두 각자가 맞추다 보니 서로도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어야겠지요.
그리고 재물만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아 공동소유가 되는 것뿐 아니라 자기들 뜻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맞추다 보니 공동의 마음과 뜻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합니까? 우리 공동체에서 자주 하느님 뜻을 빼놓고 한마음 한뜻이 되려고 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에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도 한마음 한뜻이 되는 그런 공동체를 감히 꿈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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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3,7)
<다시 태어남!>
오늘 복음(요한 3,7ㄱ.8-15)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대화하시는 말씀'입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이며,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입니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한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3.5.7)
그러자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3,9)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다시 태어남!'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신 요지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세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곧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끊임없는 '다시 태어남의 여정', 곧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다시 태어남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드러내신 예수님께로 향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 안에서' 나의 영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오늘이, 그리고 지금 여기가 천국(하느님의 나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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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FpbzG2kb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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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3, 9)
새로운 일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에
변화또한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숨어 있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로 드디어
나오게됩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우리자신을 똑바로
보게됩니다.
우리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깨닫게됩니다.
빼앗기지 않을
영적인 삶을 이제
갈망하게됩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다름아닌 십자가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영적인 길은
다름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십자가를 먼저
지고 가신
예수님의 도움이
매순간 절실히 필요한
함께하는 삶입니다.
이 부활시기가 다시금
살아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영적인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처럼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우리의 십자가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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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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