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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27일(수)
* 시작 기도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주님...
바울 같은 대사도도 세례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은 세례 받는 자의 숫자를 알리기 위하여 세례 받는 이들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며 그것이 나의 치적으로 여겼던 자입니다.
거기에 십자가는 유대인과 같이 거리끼는 것으로, 이방인과 같이 미련한 것으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입으로는 십자가를 외치지만 아무런 생명도 없는 외침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런 나도 주님께서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아들의 생명으로 건져주셨습니다.
지금 당장 지옥으로 던져 넣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 죄인은 그저 면목없음과 죄스러움으로 주님께 나아갈 뿐입니다.
내가 내세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 바라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세상의 존재물을 향하게 하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 하루만 성령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이 하루가 매일매일 이어지는 것이 나의 소망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겔 23:1-21
제목 :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한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5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6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7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8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그를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10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
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12 그가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13 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14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15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16 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17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18 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나타내며 그가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19 그가 그의 음행을 더하여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고
20 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21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
* 나의 묵상
남과 북 이스라엘이 한 혈통으로 함께 출애굽하여 하나님 안에서 함께 선민이 되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 우상을 섬기고 따르다가 하나님께로 심판을 받게 된다.
남 유다는 이러한 북 이스라엘의 심판을 모두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더 앗수르와 바벨론의 우상을 섬기고 따르게 되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르호보암 시대에 남북으로 갈라지기 이전 한 왕조로 존재하였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다.
게다가 율법을 받기도 전, 심지어 애굽에서 나오기도 전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애굽의 우상들을 음란하게 섬겼다.
(겔 20:7-8)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공식적으로 언약을 맺고 율법을 받은 시점은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린 영적 행음이라고 단정 짓기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언약은 시내산 언약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이 출애굽 하기 이미 500여 년 전에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을 맺으셨다(창 15장).
또한 아브라함과 그들이 모든 후손들에게 남자는 태어난 지 8일이 지나면 누구든지 할례를 받게 하심으로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을 맺기 전에도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
그랬던 언약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여러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영적인 간음을 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처럼 읽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심각한 그들의 간음죄를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북 이스라엘을 오홀라라는 여인의 이름으로, 남 유다를 오홀리바라는 여인의 이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두 자매가 자신들과 언약을 맺어 결혼한 남편을 저버리고 떠나버렸다.
이들이 다른 남자들을 음란하게 사랑하고 행음을 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신랄하게 고발하는 것은 이 또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그 저변에 깔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언니 오홀라가 그 이웃 앗수르를 연모하였다는 것을 사마리아의 음행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앗수르와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음으로써,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의 힘을 빌려서 살아보려고 하는 북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준다.
앗수르 사람들이 다 자색 옷을 입고 고관과 감독이며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앗수르 사람들이 모두 고관과 감독과 같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이 그처럼 존귀한 존재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앗수르의 지위가 그만큼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8절의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였다는 것은 3절의 애굽과 행음하였다는 사실과 시간적으로 다른 사건이다.
3절의 애굽 행음사건은 출애굽 이전 애굽에 있을 때에 그곳에서 우상 숭배를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8절의 애굽 행음사건은 북 이스라엘 왕국 초기에 애굽의 우상을 수입하여 숭배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우상 숭배로 영적 간음을 자행하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손에 넘기시는 심판을 단행하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나라가 바로 북 이스라엘이 그토록 의지하고 사랑했던 그 앗수르를 통해서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면 결국 사랑하는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한다는 사실을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알게 된다.
오늘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사랑할 이는 오직 주님이심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 것이다.
그녀의 동생 오홀리바는 언니보다 더하여 그 행음의 정도가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다.
(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다.
언니 오홀라의 음행 사건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그의 동생 오홀리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았다.
그런 그는 언니의 음행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반면교사로 삼았어야 했다.
그렇게 자신들의 음행에서 벗어나 이제 하나님만을 남편 삼고 살아야 했으나 그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니 그 언니의 행음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행음을 함으로써 남편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더 크게 샀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의지하는 앗수르를 들어서 심판하셨다.
그런데 남 유다 역시 그 앗수르를 의지하고 있다.
아하스 왕 시대에는 북 이스라엘과 아람 군대의 연합군이 공격을 하는 상황에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다.
아하스 왕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수많은 금과 은 등 보물을 앗수르 왕에게 주고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의 군사력을 의지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앗수르에 있는 우상의 제단을 본떠서 그것을 예루살렘 성전에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제단에 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패역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남편을 사랑해야 할 오홀리바가 남편을 저버리고 남의 남자의 품에 안겨 그 사랑을 연모하는 극악한 간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들 남 유다는 앗수르를 의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에 이어 당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바벨론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애굽에서 구원받기 이전에 애굽에서 누리던 세상적인 정욕에 취해 있었다.
이러한 우상 숭배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사모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적한다.
내가 이 본문을 읽어도 화가 나고 참기가 어렵다.
내 속에서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물며 그들을 그토록 사랑하셨던 하나님이시랴?
그들의 행음 사건을 온 세상에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은 그들을 수치와 부끄러움에 드러내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로 세우는데 있다.
멀어지고 끊어졌던 언약의 하나님과 다시금 끈을 잇고 돌아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로 다시 세움을 받는 것이다.
나는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나의 남편되신 주님을 얼마나 아프고 근심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오홀라나 오홀리바와 다름없는 자였다.
정말 나의 남편이신 주님을 섬기는 듯 하였으나 뒤에서는 남편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던 자였다.
나의 정욕과 세상을 향한 탐욕은 하나님을 사랑함보다 훨씬 더 컸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자였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올 수 없다.
의와 불법이 어찌 같이 할 수 있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귈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될 수 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여 온갖 탐욕과 정욕에 물들어 있었다.
이처럼 살아온 나는 사실 주님을 믿는 자가 아니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려고 했으니 말이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했으나 나는 은밀하게 그 지체를 살리려고 부채질 하였다.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 했으니 나는 정말 우상 숭배자였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벌거벗고 행한 모든 음란하고 수치스런 행동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친히 당하셨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가 벌거벗고 행한 모든 음란하고 수치스런 행동을 주님께서 온전히 벌거벗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주님은 그 십자가 앞에서 온갖 모욕과 멸시, 수치와 조롱을 받으시며 세상의 부끄러움이 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감당하셨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와 벌거벗음은 부끄러움이다.
하지만 그 앞에 있는 기쁨은 그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라보신다.
또한 그로 인하여 내가 정결케 됨을 미리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기쁨을 미리 보시고 십자가와 벌거벗은 수치와 모욕, 그리고 조롱을 넉넉히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주님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다.
나의 고통 역시 주님이 지시는 십자가 고통이다.
이제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셨기에 내가 다시 죄의 길로 들어선다면 이것은 인면수심의 몰염치이다.
그것도 생각지 않고 음행과 더러운 짓으로 일관했던 나 자신을 주님께 고발하며 철저히 회개한다.
주님의 보혈로 나를 씻어주신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도무지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주님은 기꺼이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시며 용납하여 주셨다.
이제 나는 주님께 빚진 자이다.
당신의 생명을 값없이 주셨지만, 그 생명을 더럽혔던 나는 죽어 마땅하나 다시 한 번 나를 용납하시고 그 생명을 주셨기에 이제는 주님을 떠나 외도를 할 수 없다.
나는 오직 주님으로만 만족하며 사는 자임을 선포한다.
나의 옛 사람은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나는 거룩한 불구자이다.
눈이 빠지고 팔과 다리가 잘려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볼 때는 우스꽝스러운 불구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것처럼, 이제 나도 주를 위하여 거룩한 장애인으로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주님 앞에서는 큰 자랑거리이다.
절뚝거리며 힘들게 주님께 나아가지만 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난다.
그 빛은 바로 주님의 빛이다.
나에게 비치는 주의 영광은 주님이 창세전부터 보셨던 아버지의 영광이다.
주께서 그토록 영생을 얻은 자들이 보시기를 원했던 그 영광을 오늘 나도 본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것이 영생이요, 영생의 삶이다.
주의 영광을 본 자는 다른 것 즉 땅의 것에 대하여 더 원할 것이 없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 안에서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린다.
주님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음행은 바로 나의 음행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나를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나이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더 내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은 자식이 잘못했을 때 부모님이 자식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종아리를 친히 때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비록 내 종아리는 아프지 않을지라도 내 가슴이 고통 가운데 찢어집니다.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면서까지 나의 기쁨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내가 죄에서 떠나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또한 아버지의 소원이기에 주님은 아버지의 기쁨을 미리 보시면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이제 나의 한 쪽 눈은 빠졌나이다.
나의 팔과 다리는 잘라져, 외팔이 절뚝발이가 되었나이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습니다.
예전처럼 살지 못하지만 아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참으신 것처럼, 이제는 제가 주님을 위하여 내가 지는 십자가를 참을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 수 없사오니 오직 주의 은혜로 감당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소원인 영생이 오늘도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 보는 주님의 영광은 나의 영광이 되어 아버지의 기쁨이 되나이다.
주여, 찬양과 영광을 받으소서.
내가 본 그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리오니 송축을 받으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