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통신 17보> - 중국어 공부는 어디 가고 드라마에만 빠져서
뒤늦은 나이에 시작한 중국어 공부가 어렵기만 하고 뭔가 뜻대로 잘 안 되었다.
한 달간 머리만 싸매고 고민하다가 우연히 눈에 번쩍 띈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길거리 씨디(CD)였다.
평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 학교 주위를 맴돌거나, 주말이 되면 홍구공원 주위에서 산책을 하곤 했는데, 한 달 동안 보이지 않던 리어카 장사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물론 리어카 장사는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 있었건만, 모든 게 서툰 우리 눈에는 한 달이 지나고서야 발견되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어카라기보다는 자전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전거 뒷자리를 개조해서 짐실이를 만들고 그 위에 온갖 물건들을 싣고 다니면서 팔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상하이 온 지 꼬박 한 달이 지난 4월 2일 저녁, 여느 때처럼 홍구공원을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밤만 되면 나타나는 한 무리의 장사꾼들을 만났으니, 그들이 바로 이곳 <밤 문화>를 지배하는 장사꾼들이었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생소하거나 신기하기만 한 이곳에 대해 탐닉하고 있었을 때였다.
헌데 그들 중 자세히 보니 눈에 익은 분이 한 분 있었다.
그 분은 다름 아닌 우리 학교 영빈관 문 앞에서 매일 같이 짐실이 자전거에 전을 펼치고 있던 바로 그 아주머니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 분과는 매일 같이 만나게 되었지만 그간 거래가 없었으므로, 서로 어색한 표정만 지으면서 그냥 지나치곤 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또 만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오늘 밤에 이렇게 또 만나게 된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상하이외대 앞에서 자전거 가게를 통해 씨디를 팔고 있다. 아주머니 가게 사진은 없음.)
“니하오? 우리 상하이외대에서 자주 만났죠?”
“니하오? 한국인이죠? 참으로 인상이 좋습니다.”
서툰 중국어로 인사를 겨우 건넸더니 그 아주머니는 의외로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동안 중국인과는 말이 안 통한다는 핑계로 경계만 하고 있었는데,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 동안 만났던 영빈관 직원이나, 학교 직원, 할인매장 직원, 식당 직원 등에서는 웃는 모습 한 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웃으면서 말을 나누게 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건 뭡니까? 씨디 같은데요.”
짐실이 한 가득 싣고 있는 물건을 보고 질문을 했더니, 영화, 드라마 등 모든 씨디를 다 갖추고 있다며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한국 씨디도 있어요?”
“아주 많습니다. 한 번 보실래요?”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것인데 그 아주머니는 큰 고객 만났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릴 갑자기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짐실이에 빼곡히 꽂혀 있는 씨디 뭉치를 헤집어 보였다.
우리는 어떤 씨디가 있나 싶어서 이리저리 뒤져 보았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영화와 드라마가 엄청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잘 되었다. 우리 안 그래도 심심한데 씨디나 빌려 보자. 어차피 밤에는 불이 어두워 공부도 못 하잖아?”
나는 옆에서 머뭇거리는 벗씨를 설득해서 씨디를 구입해 보기로 했다.
“혹시 이 씨디, 한국말 나와요?”
“한국말 그대로고요, 중국어 자막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 그래요?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나는 당장 벗씨를 재촉했다.
“잘 되었다. 우리 이걸로 중국어 공부하면 되겠다. 당장 사자.”
(중국어 공부는 안 하고 중국어 자막이 나오는 씨디만 잔뜩 봤다. 정품인지 해적판인지...)
그리고는 바로 가격을 물어보았다.
“이 씨디 얼마입니까?”
“한 장에 5원입니다.”
“중국 돈 5원이면 우리 돈 800원 좀 넘잖아? 와, 엄청 싸네? 이런 게 바로 해적판이라는 거구나.”
그길로 바로 <아이리스(IRIS)> 드라마 한 편을 샀다.
총 20부작으로 되어 있는데 씨디 두 장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중국돈 10원을 지불했다.
이 드라마는 2009년 10월 14일부터 매주 수, 목요일 밤에 KBS 2TV에서 방송되었던 대한민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첩보액션 드라마였다.
이 씨디를 빌려오자마자 매일 밤 보기 시작하여 1주일만에 다 보고 말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드라마를 보면 폐인 된다며 보고 싶어 하는 벗씨를 반 협박하다시피 하여 못 보게 하였는데, 여기서는 어찌하여 내가 먼저 보자고 하게 된 것이다.
내용으로는 대한민국과 북한 간의 제2차 한국 전쟁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첩보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게다가 탤런트 이병헌, 김태희, 정준호의 3각 관계가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다 보고 나니 또 빌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드디어 벗씨가 옆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드라마 1주일 보느라 잠도 못 자고 컴퓨터도 못 하고 몸만 다 버렸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나한테 드라마 보지 말라고 그렇게 말리더니 이게 무슨 꼴이고? 이젠 밤새워 보지 말고 그냥 잠이나 자자.”
하지만 내겐 좋은 핑계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어차피, 밤엔 눈이 나빠 아무것도 못하는데, 드라마 보면서 중국어 자막을 통해서 중국어 공부도 하고 시간도 보내고 일석이조 아니가?”
내 똥고집을 벗씨가 어찌 또 말리겠는가?
그 길로 나가서 또 씨디를 샀다.
이번엔 24부작 드라마 <추노>에다가, <백야행>, <그녀는 예뻤다>, 그리고 <시크릿>이라는 영화 세 편까지······.
그리고 밤만 되면 주야장천 또 컴퓨터를 끌어안고 보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중국어 자막이 잘 들어가 있었으므로 중국어 공부한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탐독했다.
(78부작의 천추태후 채시라도 고생 많았지만, 그걸 끝까지 보느라 나도 폐인 다 되었다.)
그러기를 2주만에 또 씨디가 거덜이 났다.
‘어떻게 하지? 벗씨가 또 뭐라고 할 텐데······. 빌리러 가? 말아?’
며칠 망설이고 있는데 벗씨가 제발 몇 십 부작 하는 장편은 보지 말라며, 인터넷상에서 탤런트 배두나가 연기한 단편 영화 <공기인형>과 이란의 실험영화 <참새들의 합창>을 다운 받아 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단 하루만에 다 보고 말았으니 다시 용기를 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끝까지 한 번 가보는 거야.’
그리고는 그 길로 달려 나가서 영화 <기방난동사건>과 드라마 25부작 <황진이>, 그리고 78부작 <천추태후> - 아이구, 내 이것 보다가 거의 초죽음 되었다. 다시는 장편 드라마 안 본다 - 을 사 왔다.
천추태후는 씨디만도 장장 여섯 장이나 되어서 사람뿐만 아니라 컴퓨터까지 폐인 만드는 데는 일도 아니었다.
이 <황진이>와 <천추태후>를 끝까지 보다가 보니 그만 6월말이 되어 버렸고, 벌써 한 학기를 마무리 할 때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한 학기 동안 자막이 나오는 씨디를 통해서 중국어 공부를 한답시고, 드라마와 영화만 보면서 허송세월 다 해 버렸다.
영화와 드라마 10편에 시수로는 총 159시간이었다.
이러니 상하이에 중국어 공부하러 왔다고 부끄러워서 어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일 기말시험 문제에 한국 드라마 주인공 이름이나 안 나올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며칠 전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 보니, 책상 앞에 살며시 앉아서 귀에 리시버를 꽂고는 인터넷에 집중하고 있는 벗씨를 목격했다.
난 모른 척하면서 곁눈질로 내려다봤더니, 몇 달 전에 끝난 16부작 SBS 드라마 <산부인과>를 중국 인터넷을 통해서 보고 있었다.
요 몇 달 동안 나한테 그렇게나 드라마 보지 말라고 닦달하더니······.
분명 내가 뭐라고 하면, 아마 자기도 중국어 자막을 통해서 중국어 공부하고 있다고 변명할 것임에 틀림이 없으렷다.
껄껄껄······.
2010년 6월 27일
상하이에서 멋진욱 서.
첫댓글 한국 드라마 너무 재미있죠. '아이리스" 한회도 빠지지 않고 봤답니다. 주제가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 도 멋있는 노래고요. 중국어로 더빙된 것으로 한번 더 보면 확실히 중국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제가 여기서 본 아이리스, 황진이, 천추태후, 추노 등 어느 것 하나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추노의 영상은 두고두고 다시 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풍경 중 최고로 좋은 곳에서만 촬영을 했더군요. 영구히 보관하며 볼 것입니다. 히히.
재밌다. 아마 돌아오실 떄는 중국사람이겠네요........ '더빙'의 달인.........
드라마 씨디 드릴깝쇼? 중국어 자막 공부 함 해 보실라요? 히히.
아이리스 참 재밌지요. 저도 뒤늦게 봤습니다만 흥미진진 하더만요. 재미난 글 잘 읽고 갑니다.
정상적인 프로그램에서 매주 기다려 가면서 한두 편씩 보는 드라마보다는, 하루이틀에 꽊꽊 몰아서 보니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앞으로 드라마는 이렇게 즐겨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중국에서 10위안(1,700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씨디를 통해서요. 히히.
ㅅ.ㅅ 물가가 싼거 같하요~ ㅎㅎㅎ 그래도 중국어 자막으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것 같은데요~ㅋㅋ 알콩달콩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