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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충주의 고구려유적 | |||||
전통 역사지리학으로 살필 적에 한강은 삼각형의 꼭짓점을 돋보이게 한다. 북한강 쪽의 춘천과 남한강 쪽의 충주, 그리고 두 강물이 합수되는 서울이다. 한강 역사기행은 치밀하게 탐구해 보아야 하는 대장정 기획인데 AD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보이는가. 춘천(우수주)은 영동·영서 산악지역의 전방지휘소를 이룬다.
한강 하류에서 개국한 백제를 견제하는 역할과 함께 고구려를 간접 방어케 하는 지정학이었다. 서기 475년 백제의 왕경 한성이 고구려 군에 함락되어 ‘한산주’가 된다. 이어서 충주와 원주에 고구려 군사도시 국원성, 북원성이 들어선다.
자연환경을 역사환경에 적응시키는 정치군사 지리학의 지혜와 함께 두 환경 사이의 오묘한 조화에 경탄하게 된다. 호반 도시 충주의 역사지리는 특히 파란만장하다. 새 주인 고구려는 내륙지대의 젖가슴 남한강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운다. 압록강의 국내성에 못지않다고 살피어 국원성이란 이름부터 부여하여 강항(江港)의 군사기지를 건설한다.
고구려 병선들이 어떻게 정박하고 있었으며 군사시설들의 배치와 요새 구축이 또한 어떠하였는가. 이러한 기본 설계의 ‘역사지도’를 장만해볼 수 있다면, 그 명칭도 가령 ‘국원나루’ 또는 ‘국원진(國原津)’이라 부르게 할 수도 있다.
충주시는 충주댐 이북의 ‘충주호’와 구분시켜 조정지댐 호수라 부르던 이곳을 지난해부터 ‘탄금대 호수’라 개명하였는데 여기에다가 ‘고구려 국풍대회’를 기획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앙탑 공원의 강변을 진두지휘하는 위치인 데다가 장미산성을 뒤통수 쪽에 건사하는 탑평리 입석마을에서 ‘고구려비’가 1979년 2월 발견되었는데 이 도성의 위치와 관련지어 살필 수 있다. 국보 205호로 지정받은 남한강의 ‘고구려비’는 장수왕대의 유적으로 압록강의 ‘광개토왕비’와 대비되기도 하는 중요한 고구려 문화유산이다.
국원성은 고구려 남방경략의 대본영(大本營)이었다. 국원성주는 ‘총독’처럼 군림하여 신라를 통제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비문 속에는 신라 매금(왕)을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직접 국원성으로 찾아와 예의 갖추어 인사를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순종해오던 신라가 차츰 대항의 자세를 갖춰가고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예속민의 상태에 놓여 있던 이 지역 일대의 신라 백성들을 풀어주려 한다는 내용도 보인다. 울진 봉평 신라비에 나오는 고구려 계통 생민들의 처지와 대조되는데 비교 연구해봄직하다. 고구려중원비 비문 중원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리(可金面) 용전리(龍田里) 입석(立石)마을에 있으며,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4월에 충주의 문화재 애호가(예성동호회)들이 입석(立石)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제보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전면과 좌·우측면에 글자를 새겼음을 확인할 수 있고, 뒷면에서는 판독되는 글자를 발견할 수 없다. 뒷면에도 글자를 새겼는지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려 있다.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마멸되어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현재 5세기 전반 광개토왕대부터 6세기 중·후반 평원왕대(559~590)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최근에 앞면 첫째 줄의 몇 글자(高麗太王祖王令)를 새롭게 판독하여 495년(문자명왕 4)으로 보는 견해와 비문에 보이는 ‘십이월삼일갑인(十二月三日甲寅)’이란 간지와 날짜를 고려하여 449년(장수왕 37)으로 보는 견해가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다. 글자의 마멸이 심하여 비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는 견해, 문자명왕의 중원지역 순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는 견해, 고구려 태자 공(共)이 신라와 싸워 다시 우벌성(于伐城:충주지방)을 되찾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회맹(會盟)한 사실을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이며,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특히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란 표현은 중원고구려비 건립 단계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주어 당시 양국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서 주목을 받았다.
이밖에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인명과 관등은 고구려 정치제도사 연구의 사료로,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부른 표현은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前面> 五月中高麗太王祖王令▨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亏桓 奴主簿貴道[德][ ][類][王][安][ ]▨[去]▨▨到至跪營天(大?, 夭?)太子共[ ] 尙望上共看節賜太霍鄒敎(授?)食[在]東夷寐錦之衣服建立處 用者賜之隨▨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大位諸位上下衣服[束(來)]受敎跪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太使者多亏桓奴主簿貴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疏奴[ ]▨[凶]鬼盖盧共[ ]募人新羅土內衆人跓[動]▨▨ <左側面> ▨▨▨[忠]▨▨[于]伐城不▨[ ]▨村舍▨▨▨[ ][胜]▨[沙]▨▨ ▨▨▨▨▨▨▨▨刺功▨▨射▨▨▨▨▨節人刺▨▨」 ▨▨▨▨▨▨[辛][酉]▨▨▨▨▨▨▨▨▨▨太王國土▨」 ▨▨▨▨▨▨▨▨▨▨▨▨▨黃▨▨▨▨▨▨▨[安]▨▨」 ▨▨▨▨▨▨▨▨▨▨上[右]▨▨辛酉▨▨▨▨東夷寐錦土 ▨▨▨▨▨▨方(万?, 右?)袒[故]▨桓)▨沙▨斯色▨太古鄒加共軍至于」 ▨▨[去]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右側面> ▨▨▨▨▨▨▨▨▨前部[大]兄▨▨▨▨▨▨▨▨▨▨ ▨▨▨▨▨▨▨▨▨▨容▨▨▨▨▨▨▨▨▨▨▨ ▨▨▨▨▨▨▨▨▨ ▨▨▨▨▨▨▨▨▨▨▨▨▨▨▨▨▨▨▨▨▨▨ ▨守[自]▨▨▨▨▨▨▨▨▨▨▨▨▨▨▨」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수정] (전면) 5월 중 고려대왕(高麗大王)의 조왕(祖王)께서 영(令)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려고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주부(主簿) 귀도(貴道) 등이 ...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 ...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建立處 用者賜之 隨者 ... . 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東夷) 매금(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게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東夷) 매금(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귀도(貴道)가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 내의 주민을 모아서 ... 로 움직였다. (좌측면) ... 中 ... 城不 ... 村舍 ... 沙 ... 班功 ... 節人 ... 신유년(辛酉年) ... 十 ... 太王國土 ... 上有 ... 酉 ... 東夷 寐錦의 영토 ...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홍(共)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봉황리 마애불상군의 고구려 미인 찬송
여기에서는 자의적으로 ‘다섯 아기부처에 둘러싸인 고구려 미인 불상’이라고 표현코자 한다. 다섯 아기부처는 수호천사들처럼 ‘미인 불상’을 공중에서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목에는 3도가 없고 넓은 어깨에는 통견의를 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두 발을 맞댄 무릎이 아주 넓고 크게 표현돼 결가부좌의 자세와는 다르다. 기품 있는 고구려인들의 삶, ‘미인 불상’을 찾을 적마다 ‘고전적인 단순성의 아름다움’을 새삼 우러르게 된다.
신라 왕실은 ‘안방’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지만, 서라벌이 국토 중심부에서 비켜나 있음을 성찰한 것이다. 국토인식체계의 대단한 전환인데, 분단시대인들에게 일깨움을 준다.
이 도시는 그럴수록 남한강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중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중원문화’는 이 도시에 살아 흐르고 있지 아니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