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잔인한 칼질이다. 차마 못할 짓이다. 그러다 보니 그저 무해 무덕하게 두루뭉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작심하고 사랑의 매를 들어보기로 한다.
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시골의 밤맞이는 부산스럽다. 특히 여름밤 맞이는 더 부산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올라앉고 땅거미가 마당에 내려앉을 때쯤 되면, 나는 으레 추녀 밑에 세워놓은 멍석을 굴려다 마당에 깔아놓는다. 멍석 두 닢을 잇대어 깔고 빗자루로 휘휘 쓸어놓은 다음 서둘러 잿간 앞에 모깃불을 피운다.
멍석 위에 두레반을 펴고 행주질을 한다. 모깃불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고 연기가 울 안을 휘감고 돌면 내 일은 끝이다. 그 때쯤이면 어머니는 쇠죽 쑤던 가마솥 뚜껑을 열고 막 쪄진 옥수수를 대소쿠리에 담아 멍석 한켠에 갖다놓으신다.
나는 멍석에 벌렁 누워 옥수수를 후후 불며 한 알씩 한 알씩 뜯어먹는다. 추녀 끝으로 보이는 서산마루에 저녁노을이 오색 잔치를 한다. 아름다운 풍경에 한껏 빠진다. 노을이 잔치를 끝내면 하늘의 밤꽃인 별들이 하나씩 하나씩 돋아나겠지. 문득 어둠이 짙어가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새들이 날아간다. 아무렴 새들도 자신들의 집 으로 돌아가야겠지! 아직 어른들이 돌아오시려면 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럴 때, 나의 시선을 붙잡는 말거미의 집짓기가 시작된다. 집짓기라기보다 먹이사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막 새들이 지나간 추녀 끝, 그 추녀 끝에 이어진 아직 어둠에 물들지 않은 희끔한 공간에서 거미가 오늘도 음모의 그물을 펼치고 있다. 부엌 귀퉁이 추녀 끝에 매달려서 잿간 옆 자두나무 가지 쪽으로 안개를 피워낸다. 안개는 이내 엷은 바람결을 타고 자두나무 가지에 엉겨붙는다.
성공이다. 금방 거미는 안개를 머금고 허공을 건너 자두나무에 매달리는가 싶더니 씨줄이 교차하는 꼭지점을 만들고 그 위에 한 뜸씩 한 뜸씩 날줄을 걸어 동심원을 키워나간다. 추녀 끝 너머로 보이는 석양의 오색 노을이 채 떠나기도 전에 말거미는 추녀와 자두나무 사이를 건너지르는 허공에 무서운 음모가 칸칸이 채워진 그물을 펼쳐놓고 자신은 추녀 석가래 밑으로 들어가 승리의 순간을 기다린다.
어둠은 소리 없이 짙어가고 음모는 그 속으로 사라진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다. 매미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망을 흔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부신 거미의 동작은 이내 한 개의 까만 죽음으로 허공에 매달리고 만다. 이어서 잠자리 두 마리도 거기서 최후의 순간을 맞고 매달린다. 언젠가 우리 가족은 바로 그 자리에서 참새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끝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 적도 있었다.
내가 어린 날 본 거미는 언제나 승리만 있었다. 실패는 없다. 어쩌면 거미는 실패가 전제되는 기획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거미는 오직 성공하고 승리하는 설계만 하는 기술자인 것 같았다.
청래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386과 노동자들이 밤을 패며 논쟁을 벌이던 인서점의 뜨거운 말마당에도 그는 끼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386이라고는 하지만 실상 나와는 별 대화가 없었다. 어떤 시위 현장이었을 것으로만 기억될 뿐이지만 나는 키 큰 청래와 어깨를 걸고 구호를 외치며 자욱한 최루가스 속을 헤쳐나간 것 외에는 내가 특별히 그를 기억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늘 싱긋이 웃으며 한두 마디 인사하고 헤어지는 그런 사이였다.
하기야 아주 특별한 대화가 있기는 했다. 그것은 정말 특별했다. 이 대화야말로 내가 청래를 알게 했고, 청래가 나를 알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그의 이상스런 화법에 일방적으로 당해줘야 하는 그런 대화였는데, 이 대화에서 나는 어떻게 손쓸 수도 없이 그냥 폭포 아래에서 떨어지는 물을 뒤집어쓰는 꼴이었다.
청래는 정말 울보였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정말 서러운 울음이 나를 압도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그 울음을 지켜보아주기만 하면 되는 그런 울음이었고 눈물이었고 대화였다.
내가 처음 그의 눈물폭포와 대면한 것은 80년대 말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저씨! 그냥 실컷 울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내 손을 붙잡고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선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냥 울음이 아닌 듯했다. 세상과 맞대면하고 있는 정청래라는 한 인간이 세상을 향하여 부르짖는 어떤 절규인 듯했다.
나와 청래가 이런 대화를 한 것은 꼭 두 번뿐인데 그것이 첫 번째였다. 그는 울고 또 울었다. 누구나 말 못 할 사정과 함께 꼭 울어야만 할 일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내가 본 그의 눈물은 분명 80년대 우리 조국의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군사 독재 정권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버거운 짐을 지고 갈 때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런 눈물이었다.
끝내 나도 그의 손을 잡고 펑펑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쏟으며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미대사관저를 습격하고 국가보안사범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갔다. 세상도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작년 가을쯤으로 생각된다. 느닷없이 찾아온 청래가 내 손을 붙잡자마자 “`아저씨! 저 좀 때려주세요. 정말입니다. 아님 저 아저씨한테 실컷 울고 가겠습니다`” 하더니 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아주 오래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래, 한백이 아빠 실컷 울어봐. 그러면 좀 나아질 수도 있을 거야.`”
그는 거의 두 시간이 넘도록 정말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나는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약간의 술기운이 있기는 했지만 전혀 취중은 아니다. 그러다가 “``가겠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그리고 한 10분 후 택시 안이라면서 전화를 했다. 내가 “`집에 가서 푹 쉬면 좋아질 겁니다`”라고 위로의 말을 하니까 “`아저씨, 저는 이 세상에서 단 두 사람만을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한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한 분은 아저씨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뭐, 사랑과 같은 그저 아무나 주고받는 평범한 것이라면 몰라도 다분히 사회적 가치를 담아서 고급스럽게 꾸며놓은 무슨 그런 ‘`존경`’이라는 물건을 받아 챙길 만한 사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하기야 말수 적은 한백이 아빠가 말했다고는 하나 눈물폭포 끝에 전화줄로 발송한 이 신호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무슨 해석을 한답시고 신경을 쓰는 것부터가 나에게 조금은 욕심이 있는 듯해서 “`알았어요. 들어가세요`” 하고 그냥 얼버무려 넘어가긴 했다.
하여간 그때 이후 나는, 내가 한백이 아빠의 사랑이나 존경을 받는 문제의 진위를 떠나서 어쩐지 이 ‘`정청래`’라는 인물에게 나의 마음이 자꾸 이끌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의 눈물폭포의 세례를 받고 그 감동이라는 에너지에 감염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청래를 아는 사람들은 분명하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열에 둘은 “`아 청래요, 정말 든든한 재목이지요`”라고 한다. 그러나 열에 여덟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요`”라거나 “`정이 좀 없는 게 흠이지요`” “`아 청래요, 너무 냉혹한 사람입니다`” “`하여간 성공하고도 남을 겁니다`”라고들 한다.
더러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이라며 혹평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는 몰라도 “`청래요, 틀림없이 큰일 낼 것입니다`”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후배는 “`청래 선배는 혁명가답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여간 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극명하게 이쪽 저쪽으로 갈리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분명한 것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이미 그는 어떤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정청래라는 인간에 대하여 그가 우리 현실에서 선악을 떠나 분명히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치를 설정해놓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부정적인, 못마땅한 평가라 할지라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에 대한 상당한 기대치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그것에 대한 비교치를 가지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그가 이미 우리의 인식에 ‘`하나의 지도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의 이런 자리매김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 문제일지는 몰라도 이런 예는 지금 청와대는 물론 우리 사회 각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안티386현상과도 같은 것이라고 볼 때, 청래에 대한 이런 비판은 다분히 386 안에 깃든 보수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기왕 그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한다면 그의 내면세계까지 엿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인간 정청래가 두 번의 눈물로 나에게 비쳐진 의미는 그가 아주 전형적인, 아니 아주 극단적인 ‘`외강내유`’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외강내유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외적 강력함을 내부의 부드러움으로 철저하게 포장하고 관리할 줄 아는, 좀처럼 보기 드문 ‘`외강내유`’형의 성격이다. 그는 이런 탁월한 능력으로 언제나 주변을 압도해왔고, 지금 우리 앞에 386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이상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계산해서 삶의 현장에 대응한다. 마치 자기공명장치로 읽어낸 듯 정확한 그의 상황 판단과 처방은 언제나 상황 종료 후에 그를 승자가 되게 한다. 그는 승리를 설계하고 축조하는 기술자와 같다. 상황을 꿰뚫어보고 더도 덜도 아닌 딱 들어맞는 분량으로 적응해서 그 전리품을 주머니에 넣는 승리의 전사다.
그러나 이 무서운 그의 힘이 문제다. 사람들은 그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결과가 예상되는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와 관계 맺기를 기피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것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굳어진 사실이다.
한 가지 더 말해둬야 할 것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나무처럼 가꾸어 나간다는 것이다. 마치 정원사가 자신의 작품을 길러내듯 자신의 삶을 가꿔 나간다. 언어와 행동 하나하나를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 그리고 잎사귀와 꽃, 열매로 조립해 나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정청래의 또 다른 점은 그 승리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승리라는 열매를 들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현실이 맞아주는 예찬과 박수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패자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한다. 이것은 커다란 모순이다.
왜 그랬던가. 승리는 영광스럽지만 그 과정은 비인간적이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세상, 사람이 주인으로 사는 세상은 결코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그는 잘 알기 때문이다. 승리를 기획하고 제작해내는 기술자 정청래는 오히려 승리가 싫었던 것이다. 오히려 패배자가 아름다워 보였고 당당해 보였고 부러웠다. 자신이 밉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가 나의 손을 붙잡고 흘리던 눈물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었다고 보인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했다. 80년대 운동의 계명인 ‘`민족, 민주, 민중`’ 이념의 실천에 주저하지 않았다. 88년 조국 통일 운동과 89년 미대사관저 점거로 두 차례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여 징역살이를 했다. 그 결행을 다짐하기 위하여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혁명의 시기가 지나고 민주전선의 시기로 접어든 90년대 이후, 그는 386의 길과는 상당한 거리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천부적인 승리의 기획 능력과 기술은 이 자본주의 공간에서 더욱더 빛을 발휘했다. 그의 사업은 일취월장 발전하였다. 현재 그가 쌓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공간에서 이룬 성공은 다분히 80년대 386의 이념과는 배치되는 의미로 해석되기 쉽다. 어쩌면 그는 역사의 일꾼으로 헌신했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존심 강한 386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과거와 오늘이 이념적 가치 때문에 충돌하게 되면 그는 오늘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그의 적지 않은 성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의 삶이 부정적으로 보이게 마련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 정청래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의 성공이 결실을 쌓아가면 갈수록 그를 옥죄어오는 87년 6월 항쟁의 이념. 그것이야말로 그가 내 손을 붙잡고 통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멍에가 아니라 영광일지도 모른다. 승리를 위한 그의 탁월한 기획 능력과 기술이 다행스럽게 악마와 벌인 투쟁이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영광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능력이 선과 벌인 투쟁이 된다면 어떻겠는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정청래가 이런 우리의 사랑을 멍에로 인식하느냐 영광으로 인식하느냐는 그의 과제일 뿐이다. 그가 곤충을 포획하는 거미가 되느냐,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머슴이 되느냐의 갈림길은 시시때때로 그를 괴롭히는 눈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이 천부적인 승리의 기술자를 지켜볼 뿐이다. 인서점 아저씨는 이 글을 그의 미래에 사랑의 매로 걸어놓는다.
|
첫댓글 dear father, it is such a beautiful story between you and your friend. i am sorry about this writing as i am a bit concerned whether i could harm the depth, especially in a sense of your sincereity that you kept with your friend, jeong. i consider that what your friend, jeong pursued is not wrong totally because his pursuit lies on reality. i know that we have to pusue what is beyond reality but for this, we need to know reality first. in this term, i can see his intense struggle to bring his ideal goal to reality. in this way, we all are in the same boat and this is why we have to be together
not in a segregated part. but your description about his personality was very interesting to me since we all learnt to be the opposite. yes, your friend is softer inside and stronger outsie, and we learnt to be stronger inside and softer outside. i think no matter what form we are in, it is very positive aspect if we can transform from one to the other. if we are fixed on one thing, then there is no life. we all want to be changed or transformed. as things around me are quite demanding, i decided to write in english. so, i hope you udnerstand. love you~ sincerely, blue happy young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