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텐토트의 비너스(Venus Hottentot)’라 불리며 19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 전시됐던 예술품(?)이 있다. 세례명이 사라 바트만이라 불린 나미비아 흑인 원주민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 영국으로 건너간 후 발가벗겨져 여러 도시에서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전시됐다. 특별히 큰 엉덩이와 대음순을 가진 흑인 여성 전시는 엄청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호텐토트는 열등하다는 뜻의 네덜란드어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우수한 원숭이 정도로 생각했다. 이런 차별적 인종주의가 끔찍한 인종 청소 전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나미비아(Namibia)는 아프리카 남단 대서양 연안에 있는 국가다. 나미비아라는 나라 이름은 길게 뻗은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했다. 19세기 초반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는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탐욕의 대상이었다. 많은 독일 사람이 나미비아로 몰려들었다. 독일인들은 1892년에 이르러 나미비아 영토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땅을 합병했다. 땅을 차지한 독일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이 땅을 차지하고 착취를 시작했던 시기가 공교롭게도 3차에 걸친 대가뭄 시기와 겹쳤다. 대기근으로 아시아 전역과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약 3000만∼5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어 갔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기근과 가축 페스트(당시 아프리카 열대지방 가축의 95%가 죽었다)에 맞서 싸워야 했다. 천연두·인플루엔자·모래벼룩·체체파리·메뚜기 등이 극성을 부렸다. 독일인들은 나미비아에 살고 있던 헤레로족을 목초지에서 쫓아냈다. 가축 페스트가 번지면서 그들의 전 재산이자 생명이라 할 수 있는 25만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원주민들은 독일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노예로 팔거나 죽여 버렸다. 헤레로족의 대추장이던 마하레로(Maharero)는 원주민들에게 독일인에게 대항해 싸울 것을 호소했다. 1904년 1월 12일 헤레로 부족은 독일인을 습격했다. 독일 농장들을 습격해 약 100명의 독일 거주민을 죽였다. 독일은 강제 진압을 결정했다. 1904년 6월 독일은 트로타(Lothar von Trotha) 장군이 지휘하는 진압부대를 파견했다. 병력과 무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자 헤레로족은 가족들과 소들을 끌고 물이 있는 산인 워터버그 산으로 퇴각했다. 독일은 서두르지 않았다. 사막기후에 속하는 나미비아는 낮에는 기온이 40도 이상 올라가는 무더위를 보인다.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면서 일교차가 30도 이상 보일 정도로 춥다. “몇만 명이 물과 식량이 부족한 좁은 지역에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저항하는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날씨가 우리에게 승리를 줄 것이다. 좀 더 기다렸다가 일격에 쓸어버리자.” 트로타 장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으면서 몇 달을 기다렸다. 그의 예견은 맞아 들어갔다. 무더위와 추위, 가뭄과 기아에 전의를 상실한 헤레로족은 싸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단 몇 차례의 전투 끝에 헤레로족은 항복했다. 트로타 장군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헤레로족을 사막으로 내쫓았다. 대부분의 헤레로족이 기갈(飢渴)로 죽어 갔다. 8만5000명의 헤레로족 사람 중에서 겨우 1만5000명만 살아남았다. 독일에 의한 민족 살해 정책이 잔인하게 진행됐던 것이다. 1998년 독일 대통령 헤르초크(R. Herzog)가 나미비아에 국빈으로 방문했다. 나미비아 민족운동가들은 헤레로족에 대한 민족 살해를 근거로 보상을 요구했다. 독일 대통령은 한마디로 보상을 거절했다. 역사는 잔인한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힘이 없는 민족은 그저 서러울 뿐이라는 것을.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