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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이병철, LG그룹 구인회,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은 모두 경남 출신 기업인이다. 이병철은 마산에서 정미소 사업을, 구인회는 진주에서 포목점을, 조홍제는 마산에서 철가공업체를 생애 첫 사업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다. 격정의 시대를 헤쳐나오며 한국 경제계에 별로 우뚝 솟은 이들의 삶 이야기는 현재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기성세대에게는 옛 기억을. 청년들에게는 창업과 도전을. 청소년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다.
본지는 이에 지난 1년간 세 분의 출생에서 그룹 회장까지의 삶과 현장 이야기를 취재한 이래호 박사(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의 기록을 총 50회 연재를 한다. 연재 순서는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2부 ‘순간의 선택이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 3부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로 나눠 게재한다.
의령한우국밥·의령소바·의령망개떡
의령 이름 건 간식 1·식사 2 ‘일식양식’
메밀로 만든 소바는 ‘장수·재물’ 상징
의령 초입 ‘솥바위’엔 부자 기운 가득
세 개의 다리로 당당하게 서있는 형상
탑바위·불양암 전망대선 좋은 기운이
이병철의 고향 의령군 시가지 풍경./의령군/
참 좋은 시대다.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원하는 정보를 대부분 찾을 수 있다. 옛날에는 밤하늘 별을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듯, 지금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아무 걱정없이 전국 곳곳을 손쉽게 찾아간다.
삼성에서는 전화기에도 갤럭시라는 예쁜 이름을 붙였다. 삼성은 세 개의 별에서 출발하여 이제는 수많은 별들이 있는 은하의 세계까지 왔다.
관광지 소개는 감탄사, 형용사, 미사여구를 차용해 설명하여도 그것은 글쓰는 사람이 보는 기준이다. 가장 좋은 여행, 가장 만족스러운 여행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듯 직접 가서 본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최고의 여행이다.
인터넷에도 소개되지 않고 관광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몇 곳을 소개하면서 의령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대동여지도나 옛날 지도를 보면 의령은 영산, 삼가, 함안, 진주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이들 모든 지역과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부 경남의 교통 요충지로 보여진다.
이렇듯 의령은 외진 곳이 아닌데 심리적으로 오지처럼 느껴진다. 곳곳에 산이 많아 시원한 도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빠져나와도 군청까지는 10여분 이상을 가야만 한다. 고속도로에 의령 나들목이라는 이름도 없다.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의령 가는 나들목이 있는데, 이곳은 함안 군북지역이라 이름도 군북 나들목이다. 의도적 차별은 아니지만 의령군은 억울하다. 지하철역 이름에 대학교 이름이 들어가듯, 의령군에서 도로공사에 요청하여 이병철 나들목이란 이름을 하나 더 붙이면 더 많은 사람이 의령을 기억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의령군을 잘 표현한 글이 있다. ‘의령군지’ 내용의 인용이다. “인물과 풍속을 알려면 모두 그 산천을 봐야 한다. 의령의 진산은 자굴산이고 큰 강은 정암강(남강)인데, 산천이 웅장하고 빼어난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의령의 고을 형세는 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뒤로 높은 산을 등지고 있다. 큰 들판과 무성한 수풀은 남쪽 지방에서 경치가 으뜸으로서 다른 고을을 압도할 수 있는 기운이 있다”고 하였다.
남해고속도로 군북 나들목을 빠져나와 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정암교에 이른다. 정암교의 남쪽이 함안땅이고, 다리를 건너면 바로 의령이다. 다리를 지나면 반드시 차를 세우고, 내려서 보아야 하는 바위가 있다. 부자의 기(氣)를 주는 그 전설의 바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국민 단어가 된 ‘솥바위(정암)’이다. 큰 부자는 하늘이 준다면 작은 부자는 노력으로도 이루어진다. 솥바위는 노력하는 자에게 큰 힘을 주는 기(氣)가 있는 바위이다. 솥바위 이야기는 내용이 많아 별도로 이야기할 계획이다.
의령소바
여행엔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의령에 가면 양식 일식을 먹어야 한다. 음식 이름이 아니다. ‘양식이란 두 번의 식사를 해야 하고 일식이란 한 번의 간식을 먹는다’는 뜻이다. 음식 이름 앞에 지역의 행정 이름이 붙어 전국 곳곳에 ‘의령한우국밥’, ‘의령소바’, ‘의령망개떡’의 간판이 붙여져 있다. 인구 3만이 되지 않는 곳에서 전국적 명성의 음식 이름이 3개나 탄생되었으니 무엇에 비교하라. 의령에 가서 이 세 가지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 “의령을 보았노라” 하면 실례다. 국수를 먹는 것은 장수를 뜻하지만 메밀로 만든 의령소바는 장수와 재물의 의미도 있다. 식당에서 제공한 메밀차를 유리컵에 따라 휴대한 스마트폰 후레쉬를 켜고 그 위에 올려놓으면 순도 100의 황금색이 선명하게 보인다. 황금물을 마시니 재물의 풍족함도 뜻하는 것 같다. 의령국밥의 그 맛은 또 어떤가.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시원하다는 역설적 표현을 할 정도다. 전국에 몇 곳 되지 않는 ‘대통령의 국밥집’ 중 한 집이다. 한국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국밥에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면 의령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음식경연도 지역의 좋은 축제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천하에 2명의 임금이 있을 수 없듯 소국밥의 명칭과 맛을 놓고 언젠가는 강 건너 함안 국밥과 일합을 겨루었으면 한다. 함께하면 전국의 국밥 미식가들의 순례지가 될 것 같은 아이디어이다. 작은 군단위 지역의 명칭이 어떻게 음식 앞에 고유명사가 되었을까. 대단하기만 하다.
의령한우국밥
의령망개떡
의령에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외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이 많다.
홍의장군 곽재우,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의 기념관과 고택이 의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
관광객 유치는 타 시·군에 없는 것이 있거나, 인위적이라도 이색적이거나 특이성이 있는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 의령 ‘큰 줄 땡기기’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된 농경문화 유산의 백미이다. 역사가 깊고 가치가 높아 의령대표 농경축제로 응용되면 멋진 이벤트가 될 것 같다.
경상도 부자 기 받기는 의령군 정암(솥바위)에서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솥바위를 보고 부자 기운을 받는 첫 느낌이 있다.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처음 보는 순간 솥바위가 세 개의 다리를 내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면 기개가 장엄한 무관이 되거나 굴뚝형 기업을 운영할 심성이다.
또 하나, 처음 본 솥바위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으로 보이면 문인이나 학자, IT기업이나 벤처기업을 하면 좋을 심성이다.
그러나 솥바위가 서 있는 모습과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이 동시에 보이면 마음이 심란한 상태이니 정암루 올라 자신을 향한 명상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은 처방인 것 같다. 솥바위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탑바위가 있다. 이 탑바위도 기를 주는 곳이니, 의령에 가면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이다. 끝으로 필자가 찾은 곳으로, 불양암 절벽 전망대이다. 탑바위 입구에 안내 표지판이 있다.
여기서 남강의 물줄기와 의령과 함안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끝없는 백사장을 보시라. 석양과 어울릴 때의 풍경은 의령의 천하 2경이다. 천하 1경은 수심 낮은 남강 백사장의 모래들이 올록볼록 용의 비늘처럼 퇴적되어 쌓여있는 풍경이다. 날씨와 남강 물의 양에 따라 쉽게 보여주지 않는 신비감이 있다.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의령여행은 반드시 오전에 의령에 도착하고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오후 일정을 다니다 간식으로 망개떡을 먹는다. 그리고 해가 지면 저녁 식사까지 하고 의령을 떠나야 의령의 좋은 기운을 듬뿍 받아가는 것이다. 귀갓길, 차량 정체가 심하면 차 안에서 망개떡을 먹으면서 푸짐하고 고소한 의령 이야기를 하면 피곤함은 덜 수 있을 것 같다.
<이병철의 한마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 두려움이 많이 생긴다. 실패에 대한 부정적 생각보다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의령에 와서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 고택을 보고 난 후 대부분의 방문객은 귀가를 서두른다. 그 고택만큼이나 의미있는 곳이 가까운 곳에 한 곳 더 있다.
이병철 회장의 어린시절 흔적을 상상하고 싶다면 꼭 이곳에 가보기를 추천한다.
이 길은 5살의 이병철이 10살의 형 이병각과 함께 5년간 다녔던 길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 이병철의 서당 가는 길은 100년이 지났다. 가족과 함께하든, 연인이 함께 걷든, 혹은 혼자서 걷더라도 ‘이병철의 서당 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으로 걷기를 추천한다. 마치 5살 꼬마 이병철이 걸었던 것처럼. 어쩌면 이곳 오솔길은 주변의 풍경 때문에 느리게 가도록 만들어 줄 것 같기도 하다.
이병철이 형과 함께 5년간 공부한 서당 ‘문산정’./이래호/
얼마 전, 이곳을 방문하던 중 갑자기 비가 내리자 함께한 아내는 신발을 벗고 걸으면서 비를 맞고, 비를 밟는 시인이 되었다. ‘비가 오면, 나는 가끔 맨발로 흙을 밟는다. 비가 내리는 문산정 가는 길은 갓 돌지난 아이 볼살처럼 부드럽다. 나는 솜처럼, 구름처럼 걸어 무지개를 찾는다. 아 아름다워라. 비맞은 오솔길 풍경, 아 좋아라, 발바닥을 노크하는 솔나무 잎들’.
좁은 흙길도 있다. 도로는 차량 2대가 교차하기에는 약간 좁다.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주차장도 없다. 필자는 ‘이병철의 서당 가는 길’이 소개된 후 행여 찾는 자가 많아 의령군청에 민원을 넣어 이 오솔길을 더 넓히고 흙길까지 도로포장이 될까 무척이나 두렵다.
‘서당 가는 길’은 유년시절 이병철이 정곡 고택에서 문산정까지 다녔던 길이다. 의령읍내에서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이병철 생가 도착 전 1㎞쯤 좌측을 보면 문산사 가는 표지가 있다. 그렇게 큰 표지도 아니고 도로와 맞닿아 있어도 넓지 않은 시골 산길 입구라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계곡 시작 지점에 아담한 사찰 문산사가 있고 그 곁에 이병철의 할아버지 호 문산을 붙여서 세운 문산정 서당이 있다. 이병철이 한학을 공부한 곳이다.
이병철의 서당 가는 오솔길. 숲터널 끝나는 곳에 탑과 문산정 담장이 보인다./의령군청/
단일 건물로 단층 팔작 형태의 건축구조이다. 산속 입구라 전후좌우의 풍경이 고즈넉하면서도 고요함이 깊다. 작은 계곡의 물길이 문산당 정문 앞을 흐르고 있으며 이 사이를 아담한 돌다리가 연결하고 있다. 흙담으로 세워진 담장 안 아늑한 풍경의 문산정 앞에서 독자 여러분이 어릴 적 이병철이 하늘천, 땅지 천자문 읽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기운을 받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다. 이병철은 회고록에서 “어머니는 아침마다 천자문 책을 옆에 끼고 형과 함께 대문을 나서 서당 가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다”고 가슴 뭉클한 회고를 하였다. 이렇게 소중한 이병철 관련 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령군에서는 왜 이병철 고택 외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조금 아쉽다.
서당 가는 길과 문산정 서당은 의령이 가진 이병철의 몇 안되는 흔적지라 생각한다. 이병철 고택 안내판에 ‘이병철 서당 가는 길 - 문산정 가는 오솔길’을 표기를 해 놓으면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더 나아가 월 1, 2회 정도라도 초등학생들이 스마트폰이나 전자게임에서 벗어나도록 천자문이나 논어를 가르치는 ‘가칭 이병철 서당’을 개설하여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정곡 고택서 문산정까지 좁은 흙길 걸어
다섯살 때부터 5년간 형과 서당 다녀
문산정은 아늑한 흙담 둘러싼 팔작 구조
이곳서 배운 한학·서예 이병철에 영향
회고록 표지 ‘호암자전’ 친필로 쓰기도
친필로 쓴 회고록 호암자전./호암재단/
# 이병철의 한학 공부
이병철은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된 1910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났다. 천석군 규모 큰 농사를 하는 부유한 집안에 2남 2녀의 막내이다.
이병철의 할아버지 이홍석(호는 문산, 1838~1897)은 시문과 성리학에 능통한 유교학자이다. 아버지 이찬우(1874~1957)는 독립협회에도 관여한 개화적이고 선구적인 분이었다. 1914년부터 이병철은 형과 함께 이곳 문산당에 가서 천자문 등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서당은 지방의 사립 초등교육기관의 한 곳이다. 일본의 교육령 실시가 되기 전인 1920년대 까지 초등과정의 배움은 서당에서 한문공부가 일반적이었다. 첫 수업은 천자문의 가르침이 대부분이었다. 이어서 논어나 자치통감 등으로 난이도가 높아진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보통 3개월 정도 필요하는 천자문 학습에 1년 정도 걸렸다. 그러나 진도는 비록 늦었지만 기업경영이나 힘든 과정에 늘 즐겨보는 ‘논어’의 인용은 서당에 다니는 동안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 이병철은 스스로 가장 많은 감동을 받고 필요로 한 책이 ‘논어’라 하였다. 정치인 김종필도 그의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본인 인생의 평생 가름침이 된 고전이 ‘동문선습’과 ‘논어’이다. 특히 논어해설은 성인이 되고 정치인이 된 뒤에 수시로 읽어 본다”고 하였다.
약 5년간 서당공부를 한 이병철의 한학 실력과 즐겨하는 취미 중 하나인 서예도 이때 학습한 것이 중요한 밑받침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병철의 회고록 책표지 ‘호암자전’은 서예가 정하건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연습한 친필 서체이다. 실사구시의 학풍을 추구하고 유교에서 말하는 이용후생을 실천한 조부의 영향으로 이병철도 한학 공부를 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정하건 지도로 휘호 ‘기업제민’ 연습을 하고 있는 이병철./필묵도정/
# 이병철의 형 이병각
5살 차이가 나는 동생 이병철을 데리고 함께 서당에서 공부한 형 이병각은 마산에서 무학양조장도 경영했다. 이병철의 사업은 진주와 관련된 곳이 없는데 이병각은 해방 후 미군정시기 진주 칠암동에 있는 큰 전분공장을 불하받아 대주주로 진주에서 기업경영을 한 기록도 있다. 그 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개 이상은 먹어보았을 쭈쭈바, 돼지바, 빵빠레의 원조인 한국 최초 아이스크림을 대량 생산하는 삼강하드(현 롯데푸드)를 경영했다.
유명 연예인 자녀가 출산한 국내 최초 여성전문병원 제일산부인과를 개원한 제일병원장 이동희 박사가 이병각의 아들이다. 제일모직 공장설립의 주도적 역할을 한 후 공장장으로 퇴임하고 커피 전문회사인 동서식품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세계최초의 1회용 믹스커피를 개발한 함안출신 함안조씨대종친회장 조필제가 사위이다.
이병철 회장 개인 메모지에 적은 친필 글씨./필묵도정/
# 이병철의 서예 스승 정하건
이병철은 송천 정하건 서예가로부터 1978~1985년까지 1주일 1회, 약 7년간 가르침을 받았다. 서예스승 정하건의 자전대담집 ‘필묵도정(도서출판다운샘)’에서 “이병철은 경청, 겸손, 공수레공수거, 인재제일, 성자필쇠 등의 글씨를 많이 적었다. 생신날에도 휴강하지 않고 수업을 받을 정도로 서예에 열정을 가졌었다. 대강이나 대충이 없었고, 주도면밀한 시간관리, 확고한 기업관을 갖고 계신 것을 느꼈다”고 소개했다. 농협에 많이 사용하고 있는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정하건 서예가의 글씨이다. 이병철의 글씨는 한 경매업체에서 3000만원에 낙찰된 적도 있다.
부자 기는 생활 속에서도 받을 수 있다. 이병철 서당 가는 길을 걷고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고, 논어도 꼭 한 번 읽어보자. 한자의 해독이 어려우면 한글판 논어라도 읽어보자.
세상을 보는 새로운 지혜와 만족할 기운도 받을 것이다.
<이병철의 한마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신용은 얻기는 어렵지만 잃기는 아주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