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는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을 최초로 주장하는 등 민족 운동이 들불처럼 불타올랐던 곳이다. 사진은 민족 시인 이상화 고택 전경. 최원준 시인 제공
비 내리는 날, 반가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대구에서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있는 막역지우 김현하다.
그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류했으니 거의 40여 년의 지기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 문사로 이름께나 알리며 꽤나 건방을 떨던 하룻강아지들이었다.
무작정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싣고 옛 친구 만나 시공 초월한 추억 여행
쫄깃한 막창의 식감도 즐기고 된장국수 '후식'에 입안이 개운
밤이 이슥해지자 곡주사 찾아 30여 년 만에 주전자 막걸리 대작 편안한 중년이 된 지금 왠지 허전
각종 백일장이나 고교현상문예 공모 등에서 단골로 입상하는 등,
서로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자연스레 어울렸다.
지금은 문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김완준 소설가, 홍경윤 시인과 이원만 포항 풍물패 꼭두쇠가 그들이었다.
그중 특히 서로 애틋하게 여기던 친구가 김현하였다.
당시 몇몇이 대구 대건고등학교 문예반이라, 그들을 만나러 풀 방구리 드나들듯 대구를 오르내렸다.
날씨가 끄물끄물하거나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훌쩍 대구로 올라가곤 했다.
무엇보다 예향 대구의 풍류에 마음을 뺏긴 까닭도 컸다.
대구 염매시장 끄트머리 막걸릿집 '곡주사' 골방에서, 이문열 작가부터 맨 아래 우리 하룻강아지들까지,
닷 되짜리 주전자에 막걸리를 호기롭게 콸콸 부어 돌려가며 마시는가 하면,
대구 문학의 산실인 '심지다방'에서 열띤 문학 토론과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대구백화점 뒷골목 '공주집'에서는, 대구 소주인 금복주와 포도 맛 탄산음료를 칵테일 해 만든
'소텐'을 마시며 못다 한 우정을 나누곤 했다.
심지다방에서는 독서광 장정일 시인과 가스통 바슐라르를 이야기했고, 염매시장 곡주사에서는 대구 선배 문인들에게 시인으로 사는 법을 전해 들었다.
옛 생각이 나니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무작정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싣고 전화를 걸었다.
김현하의 흔쾌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온다.
동대구역에서 만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해 다시 예전의 건방진 하룻강아지로 돌아갔다.
친구와 오랜만에 예전에 휩쓸고 다니던 골목을 걸으며 추억에 빠진다.
동아백화점, 대구백화점, 반월당….
지금은 '대구근대문화골목'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곳 또한,
우리 천둥벌거숭이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거닐었던 곳이다.
한약방과 한의원이 몰린 대구약전골목을 시작으로 '대구근대문화골목'을 설렁설렁 거닐어본다.
'약령시한의학박물관'도 보이고,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기독교 교회인 '제일교회'도 눈에 들어온다.
뽕나무길을 지나,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이 창작열을 불태우던 '상화고택'과
바로 옆에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는 '서상돈 고택'을 만난다.
서상돈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을 최초로 주창한 대구의 대표적 민족운동가다.
올망졸망한 벽화골목을 지나자 '계산성당'이 나타난다.
계산성당은 대구·경북지역 신앙의 요람이자,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이다.
이 외에도 대구 중구에는 총 5코스의 '근대문화골목투어'를 마련해 놓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은 한 번쯤 둘러보아도 괜찮겠다.
이러구러 저녁 무렵이 되자 일행들은 당연히 회포를 풀자고 입을 맞췄다.
지점장 친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구막창'을 '맛보여 주고 싶다'며,
수성연못에 있는 유명 막창집으로 안내한다.
패밀리레스토랑 풍의 대형식당이다.
두터운 생막창이 그릴에서 지글거린다.
된장에 쪽파와 청양초 다진 것을 잔뜩 넣고 뒤적여 소스를 만든다.
막창은 열을 가할수록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고소하다.
씹으면 씹을수록 구수함은 깊어가고 쫄깃한 식감은 혀와 어우러진다.
입가심용 된장 국수.
한 판을 더 먹고 나니 배가 부른데, 미술 큐레이터인 최은희 선생이 된장국수를 권한다.
배가 불러 사양했더니, '입안이 개운해진다'며 채근을 한다.
국수 면발이 생면으로 뽑아서 탱글탱글하다.
해물 베이스의 걸쭉한 된장찌개에 섞어 먹으니 기가 막힌다.
입에 꽉 차는 국수 면발과 개운한 된장찌개가 만나 합일의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밤이 이슥해지자 일행은 염매시장의 곡주사를 찾았다.
들어서는 골목 초입은 아련하게나마 기억이 있는데, 식당 내부는 집을 넓히고 수리를 해서 생소하다.
다 쓰러지던 가게와 좁아터진 실내, 숨어 있던 골방도 없다.
이곳 곡주사는 대구의 민주화 운동이 태동했던 곳,
젊은 지성과 문화예술인이 시대적 울분을 저항으로 이겨내려 몸부림쳤던 곳이다.
그래서 '곡주사(哭呪士)','곡(哭)을 하며 정의롭지 못한 시대를 저주(呪)하던 선비(士)'들이 모여,
밤을 새워 막걸리로 통음을 하던 곳이었다.
원래 '성주식당'이 곡주사로 이름을 바꾼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실로 30여 년 만에 곡주사에서 주전자 막걸리 한 되를 시킨다.
대구 막걸리인 '불로'다. '늙지 않는다'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상처 입은 젊은 청춘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이곳에 중년이 되어 다시 앉으니, 막걸리조차도 '늙지 말라'고 한다.
늙지 말고 언제나 형형하게, 눈 부릅뜨고 살라는 것이다.
막걸리가 한 순배 돈다.
추억의 장소에서 지인과 함께 대작을 하니 참으로 기껍다.
마음 놓고 편히 술 한잔 기울이며 울 수 있던 곳, 곡주사.
그러나 한편으로, 편안한 중년이 된 우리 마음속이 왠지 허전하고 황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배를 받고 은밀하게 곡주사를 드나들던 학생도, 새벽까지 곡주사 앞을 날카롭게 지키고 섰던 형사도,
눈 맑은 청년에게 술과 밥을 외상으로 퍼주던 정옥순 이모도 떠나고 없는 지금,
우리는 애꿎은 막걸리만 그저 들이켜고 들이켜는 것이다.
'1980년대 초 어느 봄쯤에 / 당시 민중문학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리던 / 비평가 채광석이 곡주사에 왔다 // … / 2층 방에서 엉망으로 취해 / … / 태일아, 태일아 엉엉 울다가 그만 /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 그처럼 정신을 잃고 살던 시절 / 술에 취해도 두 눈만은 맑던 청년들에게 / 술과 밥을 외상으로 마구 퍼주던 / 앞치마 두른 안주인은 / 관세음의 화현보살이었던가 // … / 그 전태일의 고향 후배들에게 / 마구 밥과 술을 퍼주던 / 정옥순 이모님은 살아서 여든! / 이마 푸른 사람들 여기저기서 꽃이 핀다.'(김용락 시인의 '곡주사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