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집의 상량대에 붓글씨로 간략하게 써서 내보이게 하였던 것이나, 써야 할 내용이 많은 궁실,관아,학교,사원 등에서는 상량대의 한정된 면적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별지에 상량문을 적어서 상량대에 홈을 파고 넣어 보장하는 방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염집에서는 장여 배바닥에 먹글씨로 써서 마루에서 올려다볼 수 있게 하지만, 공공건물에서는 대부분 마루도리 배바닥이나 받침장여의 등덜미에 써서 결구(結構)하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는 수가 많다. 붓글씨로 쓴 상량대의 글귀를 묵서명(墨書銘)이라 부르기도 한다. 묵서명의 내용은 집 또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조영(造營)의 사실을 적고 집 지은 뒤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찬문(讚文)을 쓰고, 이어 공역에 관계한 여러 사람의 이름들을 차례로 쓰고, 끝에 글을 쓴 시기를 적는다.
여염집의 상량대에는 집의 좌향과 개기(開基),입주,상량한 날짜와 시각을 한 줄로 내려 쓰고, 그 아래에 두 줄로 기원하는 바의 내용이 담긴 글귀를 적는다. 더러는 집주인의 방명(芳名)을 기록하기도 하는데, 이들 글의 아래위에 ‘龍(용)·龜(귀)’자를 써서 천리에 순응하는 집을 지었음을 하늘에 고한다.
조선말기 문신 이유원(李裕元)은 그의 저술《임하필기(林下筆記) 2권》에서 상량문(上樑文)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상량문(上樑文)이란 공사(工師)가 들보를 올릴 때 하는 말이다. 세속에서 궁실을 지을 때면 반드시 길한 날을 받아서 상량(上樑)을 한다. 이때 친지와 손님들이 요즘은 만두(饅頭)라고 부르는 면(麪)에 싼 음식을 다른 음식물과 함께 올리며 경사를 칭도하고 인하여 장인(匠人)들을 호궤(犒饋.음식을 주어 위로함)한다. 그러면 장인의 우두머리가 면(麪)을 들보에다 던지면서 이 글을 외우며 축원한다. 그 글의 첫머리와 끝 부분은 모두 변려문을 사용하고 중간에는 각각 3구씩으로 된 시 여섯 수를 써서 사방(四方)과 상하(上下)에 배당하니, 이것은 대개 속례(俗禮)인 듯하다. 이제 그 법을 논하여 하나의 문체(文體) 유형으로 구비하였다.
또 안찰하건대, 원(元)나라 진역증(陳繹曾)의 《문전(文筌)》에 실린 보병문(寶甁文)에 “미장이가 용마루[棟脊]를 칠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라고 하였는데, 여러 문집에는 이런 글이 없으므로 정식을 삼을 수가 없다. 삼가 생각건대, 그 글은 대략 상량문과 같고 끝 부분에 시를 열거한 것은 악어(樂語)의 구호(口號)에 비견되는데, 다만 사방과 상하에 배당되는 글이 없을 뿐이다. 옳은지 그른지 알 수가 없으나, 우선 그 말을 여기에다 붙여 두기로 한다. 송인(宋人)이 또 상패문(上牌文)을 두었는데 이것은 대개 편액(扁額)을 올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역시 상량문으로 인하여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다."
명륜당(明倫堂) 상량문(上樑文) - 이정귀/월사집41권
聖人百世師也。旣賀聖廟之一新。學則三代共之。載見學舍之重煥。於斯爲盛。于古有光。眷茲泮宮。寔惟勝境。三山鼎峙。秀出文筆之峯。二水環流。自成泮璧之制。杏壇幽敞。想闕里之遺風。槐市蔥籠。接上林之佳氣。殆天作而地設。應鬼護而神慳。恭惟我朝奎開文治。日昌煕運。謹庠序之敎。勞來輔翼。又從而振德之。重賢士之關。直溫寛栗。皆所以明倫也。逮我聖上。治本儒術。學傳道宗。作之君作之師。是謂人倫之至。敎以詩敎以禮。式闡風化之源。司成館祭酒堂。絃誦之聲洋洋在耳。胄子監上舍選。俊髦之士藹藹登朝。云何兵燹之慘經。幸値文運之光復。廟宇纔備。咸喜瞻依之有歸。黌舍猶墟。其奈講劘之無所。衿袍尙依於墻壁。函丈久設於蓬蒿。必待百年而興。正屬亨嘉之會。不可一日無敎。寧緩修擧之方。惟其人心所同然。若有神物之相者。苟合矣苟完矣。意實在於無華。美輪焉美奐焉。功已成於不日。從此大庇寒士。不翅廣廈千萬間。於焉樂育英才。嗟哉吾黨二三子。作新風采。聳動觀瞻。匠氏告成。兒郞贊偉。
抛梁東。洙泗千秋宗派通。道體流行元一氣。汪洋璧水振文風。
抛梁西。斯文一柱與天齊。高堅氣像重瞻仰。直到眞源路不迷。
抛梁南。明庭松檜儼相參。冠童暇日整春服。風浴歸來見二三。
抛梁北。巍然華扁可矜式。歸而求則有餘師。會見吾心一太極。
抛梁上。奎璧光涵太平象。玉燭吾東看泰來。文猷粲然明天壤。
抛梁下。惟忠惟孝大倫也。明之惟在復其初。看取虛靈不昧者。
伏願上梁之後。眞儒輩出。道學大明。摳衣叩篋而升者。盡是台輔之才。執經倚席而講者。皆負山斗之望。東序西膠。夏絃秋誦。明吾心固有之天。學顏志尹。家程戶朱。續斯文不傳之緖。
(고전번역원 역문)
성인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이미 성묘(聖廟)의 면모가 일신한 것을 경하(慶賀)하고, 학교는 삼대(三代)의 교육 기관이라 학사(學舍)가 중건된 것을 보노니, 지금에도 성대한 일이요 옛날에도 빛나는 일이로다. 이 반궁(泮宮)을 보니 실로 승경(勝境)이라 삼산(三山)이 솥발처럼 솟으매 문필봉(文筆峯)이 우뚝하고 이수(二水)가 휘감아 돌아 절로 반벽(泮璧)의 제도를 이루도다. 행단(杏壇)이 그윽하고 넓으매 궐리(闕里)의 유풍(遺風)을 상상하고 괴시(槐市)가 짙푸른 빛이라 상림(上林)의 가기(佳氣)와 잇닿았으니, 아마도 천지신명이 만들어 놓은 곳이라 응당 귀신이 아끼고 보호하리라.
삼가 생각건대, 아조(我朝)는 문치(文治)를 크게 열어 국운이 날로 융성하였다. 이에 상서(庠序)의 교육에 삼가 주력하여 위로하고 오게 하고 도와주고 이끌어 주고 또 이어서 깨우쳐 주고 은덕을 베풀어 주었으며 현사(賢士)의 관문을 엄중히 하여 정직하고도 온화하며 너그럽고도 엄한 것이 모두 인륜(人倫)을 밝히는 가르침이로다. 우리 성상에 이르러서는, 정치는 유술(儒術)에 근본을 두고 학문은 도의 정종(正宗)을 이어받아서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니 이는 인륜의 지극함이라 하겠고, 시(詩)를 가르치고 예(禮)를 가르치니 이에 풍화(風化)의 근원을 밝혔어라. 사성관(司成館)ㆍ좨주당(祭酒堂)에는 글 읽는 소리가 귀에 가득 울려 퍼지고 주자감(胄子監)ㆍ상사선(上舍選)에서는 영준한 많은 선비들이 조정으로 등용되었네.
그런데 어찌하여 참혹한 병화(兵火)를 겪었단 말인가. 그러나 다행히 문운(文運)이 다시 밝아지는 시대를 만났도다. 묘우(廟宇)가 겨우 갖추어지매 모두 우러러 의지할 곳이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였으나 학궁(學宮)이 아직도 폐허이니 강학(講學)할 곳이 없음을 어이하리오. 선비들은 아직도 담장에 기대어 섰고 강석(講席)을 잡초 속에 차린 지 오래였네. 반드시 백 년을 기다려야 흥성하리오. 바로 중흥의 시운(時運)을 만났도다. 하루도 교육이 없어서는 안 되니, 학교를 중수하는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같은지라 마치 신명(神明)이 도운 듯 공사를 쉽게 마쳤네. 무리하게 규모를 갖추지 않았으니 뜻이 화려하지 않은 데 있었고, 저토록 번듯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짧은 시일에 완공되었네. 이제 한사(寒士)들이 들어가 쉴 곳이 있게 되었으니, 넓은 집 천만 칸보다 낫도다. 여기에서 영재를 교육하리니, 아아, 우리 젊은이들이여. 새로운 자세를 갖추고 정신을 가다듬어 우러러보라. 목수가 공사를 마치니 아랑위(兒郞偉) 노래 우렁차도다.
들보를 동쪽으로 던져 올리니 천추의 수사와 종파가 통하도다 도체의 유행은 원래 한 기운이니 드넓은 벽수에서 문풍을 떨치리라
들보를 서쪽으로 던져 올리니 사문의 한 기둥 하늘 높이 솟았도다 높고 굳은 기상을 거듭 우러러보노니 곧바로 진원에 이르고 길 헤매지 않으리.
들보를 남쪽으로 던져 올리니 밝은 뜰에 솔과 회나무 엄연히 솟았도다 어른 아이 한가한 날 봄옷을 차려입고 바람 쐬고 목욕하고 오는 이 두서넛 보여라.
들보를 북쪽으로 던져 올리니 우뚝 높은 편액의 뜻 본받을 만하여라 돌아가 찾으면 얼마든지 스승 있으리니 내 마음에 하나의 태극을 반드시 보리라.
들보를 위로 던져 올리니 규벽의 광채가 태평의 기상 머금었도다 옥촉이 동방을 비춰 좋은 세상 오리니 찬연한 문헌이 천지 사이 환히 밝히리라.
들보를 아래로 던져 내리니 충과 효는 사람의 큰 윤리로다 밝히려면 처음을 회복해야 하니 허령불매한 나의 본성을 보라.
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후로 진유(眞儒)가 많이 나오고 도학(道學)이 크게 밝아져, 경건한 자세로 강당에 오르는 학생은 모두 재상이 될 재목이고 경전을 잡고 강론하는 스승은 모두 태산북두(泰山北斗)의 명망을 지닌 학자이며, 동서의 강당에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고유한 천성을 밝히며, 안자(顔子)의 학문을 학문으로 삼고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삼으며 가가호호(家家戶戶) 정주(程朱)와 같은 현인이 나와서 끊어진 사문(斯文)의 맥을 잇게 되기를. (끝)
첫댓글 비슬산 대견사 중창(重創) 상량 (20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