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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1월3일 목요일 [(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수도회] 받아들이고 함께하며 애타게 찾는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필리 3,3-8ㄱ
† 복음 루카 15,1-10
◈ 오늘의 묵상
세상이 많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가진 것들도
참으로 많아서 부족한 것이 없을 지경입니다.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것이, 꿈만 꾸면 곧 현실이 되는 그런 세상입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부족한 것도 있지만,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정반대입니다. 갈수록 우리의 삶은 피폐해지고,
인간성도 말살되어 가고, 모든 관계들도 더욱 메말라 갑니다. 세상의
건물들은 높아지고 화려해지지만, 우리의 몸을 의지할 구석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세상처럼 보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세상의 화려한 모든 것을 하찮게 여김으로써, 신앙의
지고한 가치를 얻은 이가 있으니, 바오로 사도입니다. 벤야민 지파라는
혈통과 바리사이라는 지위와 의로움이라는 명분을 모두 다 가진
그였지만, 생의 주인인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이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세상의 셈법으로는 망하기 딱 좋은 모습이지만,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가장 위대한 성인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 은전 한 닢을 찾으려고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샅샅이 뒤지는 부인,
세상의 셈법에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우리 영혼 하나하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가치이고 셈법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16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 15,1-10
희망은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환자가 종교 활동에
참여하면서 희망을 가졌을 때의 생존율이 훨씬 높다고 합니다.
존스홉킨스 병원의 신경심리학자 커트 리히터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구조된 경험이 있는 쥐와 구조된 경험이 전혀 없는 쥐를 기진맥진
할 때까지 헤엄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쥐들이 더 오래 헤엄을
쳤을까요? 바로 구조된 경험이 있는 쥐였습니다. 이 쥐들은 조금만
참으면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헤엄을 쳤던 것입니다.
누군가는 ‘희망은 죽음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말을 했습니다. 꽃이 지고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생명체가 잘 보이지
않는 황량한 상태에 몸을 움츠리게 하는 추위까지 기승을 부립니다.
이런 모습에 절망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꽃이 피고 새잎이 돋아나는 봄이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종 겨울 스포츠를 즐기면서 겨울이 너무 짧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희망은 고통까지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이 희망을 간직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필요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는 희망이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환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지금 이 순간
가치 있고 긍정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비록 슬픔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황량한 겨울에 다시 따뜻하고 아름다운 봄이
온다는 가능성을 일러주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희망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즉, 회개하는
자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큰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은전 하나를
찾고서는 기뻐하는 주인의 모습처럼,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뻐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죄인을 더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희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이, 심지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죄인까지도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여기에 전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진심으로 주님께 회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희망을 받아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나폴레옹).
희망이 담겨 있는 초.
가문의 비밀(전진문,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중에서)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서 이곳에 올려봅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하지 마라(명예욕을 다스리며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인 장치).
2.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소유욕을 다스리고 사회 환원을
힘쓰라는 원리).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사람 존중의 사상이 배어 있음).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남이 어려운 시기에 그것을 이용하여
부를 쌓지 말라는 교훈 이웃과 동고동락의 의미를 가르쳐 줌).
5. 며느리들에겐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현장에서 경제를
주장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근검절약의 정신을 몸에 배게 함).
6.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노블레스 오브리주의
실천을 강조함 권력과 부요함에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따름을
고취시킴).
부자가 되는 이유가 있음을 이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운이
좋아서? 아니면 소위 백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아닙니다. 정말로
성공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혹시 하루하루
겨우 버티는 마음으로 “바쁘다”만을 외치면서 사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래야 훗날 남들의
존경과 사랑과 받는 위치에 섰을 때, “나의 기준은 이러했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천교구 김포성당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받아들이고 함께하며 애타게 찾는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목 루카 15,1-10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10)
받아들이고 함께하며 애타게 찾는 사랑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15,1).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변두리로 밀려나
선택받은 백성 축에 끼지 못한 채 살았던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의 힘에 이끌려 그분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영혼을 치유하여 자유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고 속박해버린
이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여 관계를 맺으시고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시고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생명을
나누어주셨습니다(15,2). 사랑이 아니고서는 영혼의 병인 죄가 치유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15,2) 모습을 보고 투덜거립니다.
자신들만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요 구원의 대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합리적 신념은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가로막아버립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받아들임’과 ‘함께함’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영혼의 병을 앓는 죄인은 받아들여짐으로써 치유됩니다. 자비
(misericordia)는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느님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심장을 건네는 것이지요. 받아들임은 사랑의 건넴입니다.
죄인의 아픈 영혼은 이렇게 받아들임을 통하여 치유됩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죄인은 다시 새로운 창조의 순례를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연약함과 결핍과 아픔을 받아들이시어
사랑의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자비로 서로를
품어야겠습니다.
또한 자비는 삶을 함께하고 식사를 같이하는 ‘함께 함’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유식한 이와 무식한 이,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병자와 건강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와
함께하셨습니다. 함께함은 예수님처럼 찾아 나서서 가까이 다가가
형제자매들의 고통과 갈등, 불안과 혼란의 깊이로 들어가 동감하고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나
(15,4-5),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는
부인처럼(15,8) 애타게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잃고
헤매는 자신을 찾아 나서고,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애타는
사랑으로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5,8)
오늘 우리는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농락당하며 거짓을 일삼고 탐욕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린 정치권력의 수치스런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감성적 분노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로 무장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중심을 잡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나아가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사랑의 책임과 소명을 다시 상기하고,
‘받아들임’과 ‘함께함’, 그리고 애타게 찾아나서는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켜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불의와 거짓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동시에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그 불쌍한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야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빗자루 수사님 - 양승국 스테파노신부님
2016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 15,1-10
빗자루 수사님
수도공동체를 방문할 때 마다 참으로 큰 감동을 선사하는 형제들이
계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이 다들 꺼려하는 일, 해봐야 별로
표시도 안 나는 일,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누군가가 꼭 해야 하는
일들을 묵묵히, 더 나아가서 기쁘게 행하시는 참 겸손의
수도자들이십니다.
행사가 끝날 때 마다 배출되는 엄청난 쓰레기들을 환한 얼굴로
분류하십니다. 사용하고 간 침구들 뒷정리에 하루해가 짧습니다. 틈만
나면 손에 드는 것이 청소도구입니다. 그런 형제들을 뵐 때 마다 별
영양가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주 다짐합니다. ‘빨리 임기만 끝나라. 나도 저렇게 소리
없이, 기쁘게 살아야지!’
교회 역사 안에 겸손과 온유의 대명사로 유명한 수도자 한분이
계십니다. 도미니코회 소속 페루 출신 마르티노 데 포레스 수사
(1579~1639)입니다. 이분의 별명은 ‘빗자루 수사’였습니다. 스페인
백작과 노예출신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난 그는
참으로 우울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피부색이
어머니를 타고났다는 이유로 아들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가문에서
축출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노 수사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혹독한 가난과 멸시와 따돌림 속에 살았지만 늘 환한 얼굴로 하느님의
자비를 이웃들에게 전했습니다. 일찌감치 이용기술을 손에 익힌 그는
원래 평신도로써 도미니코회 재속 3회 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본격적으로 도미니코회에 입회한 후 정식 회원으로 서원을 하게
됩니다.
입회 후 수도자로서 그의 행적이 정말이지 눈부십니다. 수도회 안에서
한없이 지극한 겸손을 평생토록 변함없이 유지합니다. 그가 한평생
수도자로서 한 일은 주로 이발사, 외과의사, 간호사, 의류재봉사,
정원관리사, 청소부 등등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일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기쁘게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수도자로서 가장 인정받기 힘든
부류의 사람들이 동료 수도자들입니다. 그런데 마르티노 수사는 동료
수도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앞 다투어 그를
영적지도자로 모시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마르티노 수사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 당시 도미니코회가 재정난에 허덕이자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았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요즘 수도원 경제 사정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노예이자 수도원의 재산에
불과하니 저를 팔아서 수도원 빚을 갚아주십시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했던
마르티노 수사였기에 불행한 이웃들을 만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밤잠을 설쳐가며 가난한 이웃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동료 수도자들로부터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틈만 나면 냄새나는 행려자들을 수도원으로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재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마르티노 수사의 따뜻한
마음, 수도자로서의 지극한 겸손, 어린이보다 더 순수한 마음을
눈여겨보신 하느님께서는 마르티노 수사님에게 기적과 치유의 은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는 깊은 묵상 중에 자주 탈혼 상태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깊이
하느님과 일치했던지 그가 기도 중이던 경당은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자주 묵상 중에 공중 부양되기도 했습니다. 가방끈이
짧은 그였지만 놀라운 지식과 지혜, 식별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불치병 환자를 낫게 했으며 난폭한 동물들까지 그에게 순종했습니다.
1962년 5월 6일 마르티노 수사가 남긴 행적은 눈여겨보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를 성인품에 올리면서 이런 강론을 하셨습니다.
“마르티노 수사님은 자신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환우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넘치도록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당시 가장 고통 받던 사람들, 노예들, 환우들, 농장 노동자들, 흑인들,
혼혈아들을 목숨까지 바쳐가며 헌신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저에게 내주셨습니다. 저도 그분을 위해
저 자신을 바치겠습니다. 주님! 저를 힘겨운 사람들, 세파에 지친
사람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도구로
써주십시오.”
자비의 해를 마무리하면서 자비의 화신이었던 마르티노 수사님의
유언이 계속 제 귓전을 맴돕니다. “수도자로서 순명도 중요하지만
자비의 실천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비심이 수도자로서
정결의 덕보다 훨씬 능가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천국에서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기회가 아직 보장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뻐해야 할 일입니까? 그런데 그 좋은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 [서울]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 15,1-10
예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본 글입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 내가 여유가 있고, 내가 권력이 있고, 내가
재물이 많았을 때는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
삶에 고난이 다가오고, 가진 권력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재물도
없어지면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고, 푸른 나뭇잎도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을 것입니다. 겨울을
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서운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고, 얼어붙은 땅속에서 양분을 찾아야 하고, 외로움을 견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인의 카톡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살다 보니 돈이 많은 사람보다,
잘난 사람보다, 마음이 편한 사람이 좋더라. 살려 하니 돈이 다가
아니고, 잘난 게 다가 아니고, 많이 배운 것이 다가 아닌, 소박함
그대로가 제일 좋다. 살아오는 동안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그 마음을 소중히 할 줄 알고, 너 때문이 아닌 내 탓으로 마음의 빚을
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는 걸 배웠다.’
세상을 떠난 백남기 어르신은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함께
하였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이웃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남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안타까웠지만 외롭지 않았고,
죽음이 슬펐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위령성월을 지내면서 고인이 되신 백남기 어르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많은 비리와
의혹에 연루된 사람이 있습니다. 명품으로 몸을 치장했고 원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그 곁에는 진실한 우정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았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외로움과 고독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면,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에게
원망과 분노를 가진다면 삶의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말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미사 시간 전에 고백성사를 드립니다. 대부분은
열심하신 교우 분들이 성사를 보십니다. 친구들도 자주 만나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는 뜻밖에도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기억들을 함께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고백성사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자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분들은 성찰할 것들도 많고, 고백성사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
평화를 얻습니다. 가끔씩 오랜만에 성사를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10년, 20년 만에 성사를 보시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
‘월척’이란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사를 보시는 분들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우리들이 하는 칭찬과 격려는 실의와 절망에 빠진
이들을 하느님께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남을
돕고, 칭찬을 한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다
2016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독서: 필리피서 3,3-8ㄱ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다.
1967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아래 새마을
운동을 강조하던 시절 충남 청양 구봉 광산에서 김창선의 이름을 지닌
한 막장 광부가 수직갱도의 붕괴로 120미터 아래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곳에는 전화가 있어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버틸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 열악한 장비로
수많은 사람이 투입되어야 하고 막대한 돈이 들어야하는데 구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전 국민에게
그 가족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남편이자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제쳐놓고 구출작업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2,200여명이 투입되어 16일째 되는 날 마침내 구조에 성공하게
됩니다. 김찬선씨는 떨어지는 물방울을 옷에 묻혀 그 옷을 씹으며
15일을 버텼습니다. 그가 절망에 빠질 때 가족들은 온 국민이 기도하고
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이는 갱도 밑에서 세계에서 가장 최장시간을
버틴 기록이 되었는데 구출 당시 김씨는 건강도 정신도 또렷한
상태였습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잠시나마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를 되새겨볼 수 있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예배가 무엇일까요? 예배는 관계입니다. 예배가 없으면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서로 간에 해 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합니다. 그 의무를 다 할 때 그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상대를 위해 예배를 드려주는 것입니다. 그 의무란 ‘상대가 원하는
무엇’입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해 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고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데는 어떤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사랑이 오고가며 두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놓습니다. 김창선씨가 그 어두운 땅 밑에 갇혀 있을 때 그 아내나
자녀만큼 김창선씨의 마음과 같이 느낀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것이
관계의 깊이인 것입니다. 상대의 마음과 하나로 느낄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을 지닌 사람이 참된 예배자입니다. 이는
지식적으로 ‘나는 가족이니까 사랑해야 돼!’라고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몸이 그렇게 따라주지
않아 가족이 슬픈 결말을 맺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위해 우리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사랑을 우리
가정에 불러들여야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성령이라고도 부르고
은총, 하느님의 선물이라고도 부릅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내리면 그때서야 그 사랑이 마치 피처럼 서로를 관통하며 하나로
묶어줍니다. 그래서 상대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로마 5,5)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참된 할례 받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자”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례는 육체로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마음이 민감해져 상대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바로 하느님의 영 덕분인 것입니다. 이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성령으로 아는 것이
참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마음도 몰라주고 행하는 예배는 더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분께서 즐겨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참된 예배, 참된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일러줍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영이시니, 그 영을 받아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몰라주고 내 마음만 알아달라고 강요하니 참된 예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파하시는 것도 모르고 나만 즐거워하는
것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 같은 삶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해주시는 성령을 받지 않으면 참된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는 하느님의 마음을 알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1코린 2,11)
참된 예배는 참된 관계의 보증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육정과
반대됩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을 행하면 성령의 불이 꺼집니다. 반면
육체를 이기면 성령께서 하느님도 인간도 마음으로 알고 느끼게 해
줍니다. 따라서 세례는 바로 이 성령으로 자신의 마음을 상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예민하게 만드는 할례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육을
이기며 주님 안에서 성령으로 예배하는 이들이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주님을 기쁘게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 15,1-10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라.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루가23,42)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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