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들 중의 하나는 "내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해당한다. 신체적으로는 너무 갑작스레 성장하며 미처 익숙하기도 전에 몸의 변화가 놀랄 만하게 다가온다. 신체의 성장에 비하여 정신은 미처 신체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당황과 불안 그리고 심지어는 좌절과 절망에 휩싸이기 쉬운 시기가 바로 중.고등학교 시절의 사춘기이다. 도대체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고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공부에 대한 불안감, 부모님의 기대와 꾸중, 선생님의 지나친 기돼와 요구, 이성친구에 대한 겉잡을 수 없는 호기심과 애정... 이렇게 허다하게 많은 문제들은 사춘기의 청소년에게 "나는 과연 무엇이며 누구인가?"를 강하게 묻게 하고 여기에 대한 답을 전혀 찾지 못할 때,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까지 시도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에 몰두하려 해도 순간순간 불안해서 편한 자세로 음악을 접하기도 힘들다. 신문광고를 보고 평소 읽고 싶던 소설을 사서 읽으려고 하면 부모님의 "공부는 하지 않고 소설책만 읽으면 장차 무엇이 되겠니?"라는 엄한 꾸지람이 싫어 처음 몇 장 들치다 집어던지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여드름이 한층 더 고민거리를 안겨다 준다. 과일을 많이 먹어본다, 비누를 바꾸어본다, 참다 못해서 약국에 가서 여드름약을 사다 발라 보지만 하루 이틀간만 효과 있는 듯하다가 더 심해지기만 한다. 부모님은 속도 모르고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깨끗해지니 신경 쓸 필요 전혀 없다."라고 만 하지, 죽고만 싶은 심정은 알아주지 않는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 점찍어 놓은 여자 친구 또는 남자 친구에게 수단 방법모두 동원하여 접근하려 해도 왠지 나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다른 아이들하고만 어울린다.
성적이 시원치 않다는 부모님의 꾸지람과 걱정을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아니 나 자신이 요것밖에 되지 못하는가 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시험 때만 되면 거의 날밤을 새어 시험을 치르지만 결과는 마냥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나는 어째서 매사가 불확실하고 게다가 아무것에도 자신감이 없는 것일까?" 괴로운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저토록 엄하게 나를 야단치는 것은 내가 그분들의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고개 든다. 아예 집을 뛰쳐나가면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아도 되고 또 내가 부모님 밑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꼬리 문다. 그렇지만 하루 이틀은 어딘가에서 머문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날을 어디에서 어떻게 떠돌 수 있단 말인가?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다. 다른 학생들은 전혀 고민하지 않고, 아니 고민한다 하더라도 적게 잠깐 고민하고 오직 나만 방황하며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다 비슷하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예쁜 소녀라도 미운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청소년은 한창 자라는 나이이기 때문에 꿈과 환상에 사로 잡히기 쉽다. 따라서 현재 자신의 행동을 정확히 바라보기 힘들며 또는 장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통찰하지 못한다. 청소년들이 방황하면서 "내가 무엇이고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희랍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하였고, 불교에서는 "꿈을 깨어나서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원래 뜻은 촛불을 불어서 끈다는 것이다. 촛불은 삶이며 자아요, 생각에 해당한다. 촛불은 타면서 모든 것들을 생기게 하고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만든다. 촛불을 불어서 끄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다. 모두 엇비슷하다는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때 반에서 늘 꼴찌만 하는 "깝데기"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갈 때 낙제를 했지만 낙제생 구제시험에 붙어서 겨우 진급할 수 있었다. 고3이 되자 "깝데기"는 눈에 불을 켜고 책에 달라붙었다. 3학년말이 되자 "깝데기"는 상위권에 들었고 드디어는 일류대학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이 예만 보더라도 "매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눈을 들어 좀더 먼 곳을 보자. 눈을 감고 좀더 깊은 곳을 통찰해보자.
매일매일을 바쁘게 살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내노라면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도 던지지 못하고 참으로 무가치한 인생을 보내기 쉽다. 적어도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고민할 줄 알 때 정년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싹트기 시작할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은 어떤 낯선 것을 대할 때 우선 불안감에 휩싸인다. 처음 자전거를 배우거나 수영을 배우는 학생들의 경우, 해본 일이 없으니까 아예 애초부터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몇 차례 넘어지면서 자전거를 타거나 또는 허우적거리고 물을 먹으면서 수영해보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곧 자아란 살아가면서 틀이 잡히고 일정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지, 태어나면서부터 불변하는 것으로 정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나는 어느 가문에서 일정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후 나는 물리적, 사회적, 문화^5,23^역사적으로 많은 것을 흡수하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나 자신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모자라고 불완전한 나를 탓하면서 완전한 인간상을 생각하고 자신을 그것에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완전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만일 완전한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들의 생각 안에 이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이상은 우리들에게 힘을 주며 현재의 나를 그곳으로 향하게 하고 또한 그러한 이상에 따라서 나를 끊임없이 커나가게 해준다. 하기야 완전한 나를 실현 가능하다고 보았고, 더 나아가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본 철학자들도 있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다. 의심하는 주체가 있으니까 의심하는 것이고 따라서 의심하는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란서의 근세철학자로 합리론자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다. 데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명석판명한 관념으로서의 자아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래야만 보편, 필연적인 학문과 진리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명제이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얻기 위해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의심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태도는 방법적 회의하고 일컬어진다. 이 세상에는 무조건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즉 의심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고대 희랍의 궤변철학자(소피스트)들은 인간이 대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보니 감각으로 아는 것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궤변철학자들은 회의론에 빠진다. 또한 극단적인 경험론자들도 회의론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감각경험에 의해서 유일하게 대상을 지각한다면 감각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확실하고도 보편적인 지식은 얻을 수 없다. 데카르트의 의심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서 그것은 확실하고 보편적인 지식 내지 관념을 얻지 위한 방법적 의심인 것이다. 그는 우선 감각을 의심한다. 비 개인 날 보는 먼 산과, 흐린 날 우리가 보는 먼 산은 떨어진 거리가 서로 다르게 보인다. 또 방바닥의 딱딱함도 어떤 때는 심하게 딱딱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그다지 딱딱하지 않게 느껴진다. 감각은 확실한 지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다음으로 꿈을 의심한다. 꿈에서 우리는 나비도 되고 곰도 되며 어려운 시험문제를 척척 풀기도 한다. 그러나 깨고 나면 그것은 말 그대로 한낱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어서 수학을 의심한다. 우리는 2+2=4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나쁜 귀신이 있어서 2+2=5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속여서 2+2=4라고 그릇되게 믿도록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수학마저 의심하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있는 사실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여, 의심하고 있으면 의심하는 주체가 확실히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명제가 되었다. 오랫동안 데카르트식의 자아의 확실성이 지지 되어 왔으나 현대에 와서는 프로이트와 같은 정신분석학자에 의해서 자아란, 수시로 현실에 적응하고 또한 변화하는 것이라는 전혀 다른 견해가 대두되었다. 즉 자아란 정신의 덩어리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의식적인 초자아와 원초아 및 자아로 구성된다. 초자아는 외디푸스 콤플렉스 및 양심이며 원초아는 가장 본능적인 충동이고, 자아는 이들을 바탕으로 표면에서 성립하는 의식이다. 말하자면 전통 철학에서 주장하던 자아는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단지 껍질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 밑에 은폐되어 있는 초자아와 원초아가 가장 근본적인 정신이며 그것은 보편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전혀 충동적인 생명의 힘이자 죽음의 힘으로서 항상 꿈틀거린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자아)에 관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나'는 우리들 각자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삶의 여로와 아울러 2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우리들 각자를 인간답게 만드는 주체이다. 자아는 생각하고 느끼며 판단하는 주체이다. 물론 절대적이며 완전한 자아란 현실에는 없고 그것은 단지 이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이상을 향하여 쉬지 않고 자아를 갈고 닦을 때 비로소 인격체로서의 자아를 소유할 수 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그가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