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수영(馬秀英)- 대한민국의 영부인들이 본받아야 할 분
1. 한족 왕조 명나라의 개국 황제 홍무제 주원장의 정후이자 명나라 최초의 황후이다.
성은 마(馬)이며, 이름은 수영(秀英)으로서 주로 마황후(馬皇后)라고 불리는데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국모로 불리는 인물이자 남편을 황제로 만들고 보좌한 여자이다.
마황후는 주원장보다 4살 어렸으며, 이름은 마수영이고 1332년 안휘성 숙주(宿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공(馬公)인데, 원래 장수였으나, 집안이 한미했다. 아버지 마공은 특히 곽자흥이랑 친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지병으로 죽자, 이를 안 곽자흥은 마공의 딸인 마수영을 수양딸로 삼았다.
부모를 일찍 잃은 마수영은 전족을 하지 않아 발이 컸다.
그때 당시 보통 사대부 여인들은 전족을 했는데, 마수영은 전족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마수영은 어렸을 때부터 경서를 가까이 해 똑똑했다.
거기에 성품이 인자하기까지 해 곽자흥은 마수영을 상당히 예뻐하며 키웠다고 한다.
1352년 21살이 되었을 때, 마수영의 양부인 곽자흥의 수하였던 주원장과 결혼했다.
주원장과 결혼한 이유는 곽자흥이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서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2. 당시 주원장은 아무것도 없는 고아인데다, 탁발승 출신이었다.
그때 고생을 많이 한데다, 마마까지 앓아서 얼굴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결혼도 정략적인 느낌이 다분했음에도 주원장-마수영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천하를 평정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주원장은 아내의 말을 명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내로 하여금 자기 개인 서찰을 직접 관리하게 하기도 했다.
부부는 금슬이 좋아 자녀를 낳았는데, 5남 2녀를 낳았다.
황후의 양부 곽자흥은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믿어 특히 남편 주원장을 의심했는데, 황후의 기지 덕에 누명을 풀 수 있어 양부 곽자흥의 신임을 받게 하였다.
한 번은 곽자흥의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원장을 음해하여 감옥에 가둬두게 했다. 이 때 마씨는 가슴에 뜨거운 전병을 넣고 감옥에서 고생하는 주원장에게 직접 주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양모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서 양부 곽자흥에게 이야기하자 이를 안 곽자흥은 두 아들에게 매질을 하고, 주원장을 풀어줬다.
황후는 평소에 말린 고기를 충분히 준비하여 남편에게 제공했지만, 자신은 언제나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또한 수시로 병사들의 의복과 신발을 만들어 공급했으며, 주원장이 용만에서 진우량과 결전을 벌일 때에는 궁중의 모든 금은보화와 비단을 털어 군사를 위로했다고 한다.
3. 가. 1368년 남편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응천부, 지금의 남경에 궁을 짓고 대명(大明)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명나라의 초대 황후가 되었다.
마황후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나라에 흉년이 들면 자신은 푸성귀 반찬을 먹으며 하늘에 기도하는 등 백성에 대한 사랑도 많이 줬다.
그뿐만 아니라 성격이 남을 못 믿고 다혈질적인 남편에게 항상 조언을 많이 하였다. 신하들에게 포악한 모습을 가진 홍무제였지만 젊었을 때 같이 고생하던 조강지처 마황후에게 항상 고마워해서 많이 아꼈다고 하고, 그녀의 건의에 대해서는 많이 수용했다.
마씨는 항상 식사를 검소하게 하였으며, 공주들과 후궁들과 같이 자수와 방적을 많이했고, 옷을 직접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직접 나눠주는 그런 일도 많이 했다.
이러한 마황후의 행동에 후궁들은 엄청 감동했다 한다. 또한 자식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 마황후가 가장 잘한 일은 신하들의 숙청에 대한 제어를 한 것이다.
남편 홍무제는 자수성가해서 나라를 건국한 황제였지만 그 속에서도 비판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신하를 숙청하는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 죽었던 신하들이 10만 명 정도였고, 숙청하는 방식이 매우 잔인했다고 한다. 이러한 숙청을 막은 사람이 바로 아내 마황후다.
그나마 마씨가 살아있을 때 이성적으로 숙청을 할 때도 있었다. 억울하게 숙청을 당하게 된 신하가 그녀를 찾아오면 마황후는 신하를 두둔하면서 안정시켰다고 한다.
그녀는 설득을 하면, 주원장도 마음을 바꾸어 신하들을 용서했으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마황후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말리기도 했다. 이런 마황후의 노력으로 많은 충신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가장 유명한 예가 태자 주표의 스승이자 대학자였던 송렴이다. 그도 죽을 뻔했는데 마 황후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호유용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마 황후는 그가 누명을 쓴 것을 알고 주원장에게 간곡히 화를 풀라고 부탁했으나, 웬만하면 마 황후의 말을 듣던 주원장도 이번에는 마 황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마 황후는 태조의 수라상을 직접 들고 왔는데, 뜻밖에도 술과 고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소첩이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송 선생을 위하여 재계(齋戒)하고자 주육(酒肉)을 올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재계란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의식인데, 당신도 술과 고기를 당분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간접적인 경고였다. 그러자 태조는 송렴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젓가락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다음 날 그는 송렴을 사면하고 무주로 유배를 보내 목숨은 살려주었다.
4. 중국에서는 복을 뜻하는 글자인 福을 쓸 때 거꾸로 쓰는 일이 있는데, 이를 '다오푸(倒福)'라고 한다.
倒福(다오푸)는 '福자가 뒤집어졌다'는 뜻인데, 이 글자가 '복이 온다' 는 뜻을 가진 '到福'와 동음이의어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 풍습이 마황후와 연관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어느 백성이 위에 언급한 발 크기로 황후를 조롱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원장은 집 앞에 福 글자를 거꾸로 쓴 자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마 황후는 주원장 몰래 아랫 사람들에게 지시해서 도성 내 모든 집 앞에 거꾸로 쓴 福 글자를 달아놓도록 하였다. 그래서 백성을 잡으러 출동한 황제의 부하들은 어떤 집인지 찾지 못하고 황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이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퍼지면서, 마황후의 어진 성품에 감사하는 마음과 거꾸로 쓴"福"자가 복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어서 이 풍습이 이어져 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일화에서 보듯 마 황후는 매우 어질고 현숙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여장부였다.
평생 주원장의 옆을 지키며 주원장에게 정확하고도 옳은 헌책을 거듭하였고, 주원장은 그런 마 황후의 이야기를 잘 따랐다고 한다.
홍무 14년 (1382년)에 그녀는 지병으로 고생 중이었다.
그녀는 어의가 지은 탕약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만약 탕약을 내려 먹고 죽으면 남편이 아내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를 죽일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5. 죽기 직전에 남편 홍무제에게 "폐하께서는 널리 현자를 구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국가를 처음 세웠을 때의 마음이 끝까지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유언을 남겨 향년 51세 나이로 승하하였다.
마 황후가 죽자 홍무제는 매우 비통해 하였으며, 약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마 황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 후 주원장은 황후를 더는 들이지 않았다. 시호는 효자황후(孝慈皇后) 로 정했으며 능은 효릉(孝陵)으로 장사지냈다. 그녀가 죽은 지 16년 만에 남편 홍무제가 사망하여 효릉에 합장하였다.